2007년 10월 17일 수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매일 복음 묵상

2007. 11. 5. 오후 1:36:31

글자

  2007년 10월 17일 수요일 안티오키아의 성 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

 

 이냐시오 주교는 24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나 110년경 로마의 콜로세움에서 순교하였다. 요한 사도의 제자라고도 하는 그는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오랫동안 활동하였다. 안티오키아 교회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을 전하던 선교의 중심 도시로, 로마와 함께 초대 교회의 두 기둥이었다. 이냐시오 주교는 박해가 계속되던 107년경 체포되어 로마로 압송되는 도중 인근 교회에 일곱 통의 편지를 보냈다. 이 편지들은 초기 교회의 조직과 그리스도인 생활에 관한 귀중한 자료이다.

  

☆☆☆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루가 11,44)


Woe to you!
You are like unseen graves over

which people unknowingly walk.”

 

  

 십일조를 바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의롭게 사는 것도 참으로 중요하다. 윗자리를 탐하고 길거리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한다면 그런 행동에 걸맞게 살아야 한다. 그러지 못한다면 불행한 일이다. “불행하여라! 너희가 힘겨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워 놓고, 너희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

 

 이스라엘의 한 역사 학자에 따르면, 예수님 시대의 바리사이들은 약 육천 명이었다고 합니다. 그들이 오늘날의 유다교를 있게 한 장본인들입니다. 바리사이의 어원은 ‘분리하다’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 그들은 자신들을 분리시키고자 애를 썼습니다. 첫째는 율법에서 말하는 부정함에서, 둘째는 율법을 잘 모르는 대중으로부터 분리되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율법을 철저히 지키면 지킬수록 그만큼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문서이건 구전이건, 모든 율법을 글자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하였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율법을 지키지 않는 통치자들과 마찰을 자주 일으키면서 박해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또한 율법 준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일반 대중과 만나는 것까지도 꺼렸습니다. 이러한 까닭으로 그들은 바리사이파에 속한 사람들이라 불렸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열정은 상당히 인정받았습니다.
그들 중에는 율법 연구에 헌신하여 정통한 이들도 나타났는데, 바로 율법 학자들입니다. 바오로 사도 역시 회심 전에는 바리사이파에 속한 율법 교사였습니다. 아무튼 바리사이들은 법에 너무 치중한 나머지 정작 하느님의 사랑에는 소홀함을 드러냈습니다. 사랑을 강조한 율법의 근본정신을 깨닫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그들의 경직성을 예수님께서는 여러 차례 질책하셨습니다. 오늘의 우리는 바리사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이러한 질책을 피해 갈 수 있는지 깊이 묵상해 봅시다.

 

 

 

 

   진실과 겸손     

-이수철 신부-


 여러분은 행복하십니까? 과연 참으로 행복한 이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늘 주님은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하여라’는 말씀을 무려 네 번이나 하십니다.
‘행복하여라’로 시작하는 산상설교의 행복 선언과 극명한 대조를 이룹니다.
행복한 삶이냐 혹은 불행한 삶이냐는 나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복음의 제자들처럼 진실과 겸손의 삶을 살면 행복하고, 바리사이들처럼
허영과 교만의 삶을 살면 불행합니다. 어찌 보면 허영과 교만은 우리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 같기도 합니다. 하여 회당에서 윗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는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들만을 탓할 바가 못 됩니다.
바로 우리의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은 누구보다 율법과 계명에
충실했을지는 몰라도 결코 허영과 교만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똑똑한 것 같지만 실은 어리석은 삶을 살았습니다.
진실과 겸손은 행복의 열쇠입니다.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사람은
허영이 아닌 진실의 삶을, 교만이 아닌 겸손의 삶을 삽니다.
표리부동의 삶이 아닌 안과 겉의 모습이 같은 삶을 사는
진실하고 겸손한 사람이 진정 행복한 사람입니다.

 

 

 배운 대로 살지 못해 죄송해요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예수께서는 바리사이들의 위선과 교만을 질책하시면서 그들의 행실을 조심하라고 경고하신다. 이는 곧 가르치는 사람이 말만 앞세울 뿐 실천에는 소홀하다는 것을 깨우치고자 함이다.
‘스승의 은혜는 하늘 같아서 우러러볼수록 높아만지네. 참되거라 바르거라 가르쳐 주신`….’ 스승의 날이면 수업 시간마다 불렀던 ‘스승의 은혜’다. 참된 인생의 길을 몸소 실천하면서 우리를 가르치고 이끌어 주시는 스승의 은혜에 감사드리는 노래다. 이처럼 가르치는 모든 분들은 삶의 스승이어야 한다. 그러나 요즘 선생님은 많은데 스승은 없다고 한다. 스승의 첫 번째 덕목은, 어떤 가르침에도 스스로 실천하는 것이 앞서야 하는데 불행하게도 삶을 가르치기보다는 지식을 가르치는 경우가 많다. 삶의 덕목을 가르치기는 하지만 실천하지 않는 거짓 스승이 많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참된 스승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뿐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시고 하느님께로 가는 길을 가르치면서 몸소 실천하신 참된 스승이시다.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고 그 뒤를 따라가고자 하는 성직자들도 분명 그 가르침을 몸소 실천하는 참된 스승이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경우가 많아 참으로 부끄럽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라고 말하면서 정작 자신은 나누지 못할 때가 많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말로만 떠들 때가 있기 때문이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이 지금 나에게 하시는 말씀처럼 생각되는 것은 왜일까? 나 역시 언행불일치의 삶을 살 때가 많다. 그러나 아버지가 ‘바담풍’ 하더라도 자식은 ‘바람풍’ 하기를 바라는 것처럼, 사제가 설사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누군가는 실천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이 희망이 간절한 기도가 되는 이유는 내 삶이 부족한 탓이리라.

 


 

 순교는 매일의 연습이다.

-한 건 신부-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은 안티오키아의 성이냐시오 주교 순교자 기념일입니다.
우선 오늘 축일을 맞으시는 분들에게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이냐시오 성인의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게 없습니다. 아마도 시리아 출신인 듯하며, 성요한의 제자이고 개종자입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며 그는 베드로 사도에 의하여 안티오키아의 주교로 임명되고 축성되어 40년 동안 교회를 다스렸다고 합니다.

107년에 트라야누스 황제가 안티오키아를 방문하여 그곳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배교와 죽음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강요했습니다. 그때 이냐시오는 그리스도를 부정하는 것을 거부하여 결국 로마로 압송되어 맹수에게 던져지는 사형을 선고 받았습니다.

안티오키아로부터 로마까지의 긴 여행 중에 그가 쓴 일곱 개의 편지는 매우 유명합니다. 그는 맨 마지막에 쓴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낸 편지에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나의 간청입니다. 불필요한 호의를 나에게 베풀지 마십시오. 나를 맹수의 먹이가 되게 버려 주십시오. 나는 그것을 통해서 하느님께 갈 수 있는 것입니다. 나는 하느님의 밀알입니다. 나는 맹수의 이에 갈려서 그리스도의 깨끗한 빵이 될 것입니다. 이 맹수라는 도구를 통해서 내가 하느님께 봉헌된 희생 제물이 될 수 있도록 그리스도께 기도하십시오"라고 하소연 하면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를 보여줍니다. 마침내 콜로세움에서 용감하게 사자들을 맞이하면서 순교했습니다.

여러분! 순교, 죽음이란 단어는 발음은 쉽지만, 그 의미는 쉽게 우리에게 다가서지 않습니다. 어차피 죽을 목숨이라 쉽게 말은 하지만, 자신이나 가족에게 이런 일이 닥치면 한동안 그 가족은 야단입니다.

우화 한 가지를 소개하면, 어느 교구의 사제단이 전체 모인 자리에서 교구장 주교님께서, "지금 하늘 나라에서 주님께서 당신 사업을 사제 한 사람을 보내달라고 전갈이 왔습니다. 지금 지원하시면 확실하게 천당에 가서 주님 곁에서 활동할 수 있습니다. 지원하십시오"라고 요청했습니다. 신부님들을 처음에는 누가 하는가하고 얼굴을 두리번거리다가, 지원자가 나오지 않자, 서로들 고개를 푹 숙이며 빨리 나오기를 기다리는 모습이었습니다. 결국 한 사람의 지원자도 없었다고 합니다.

아마 저 자신 우화 속의 한 사람이라도 지원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교는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아무런 준비없이 한순간에 이루어지는 지는 것도 아닙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저주를 내리는 율법학자들과 같이 형식화되고 제도화된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결코 할 수 없습니다.

순교는 매일의 연습이고 단련입니다. 매일 매일 자신의 십자가를 지는 사람만이 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집이나 직장, 사회에서 신앙인이기 때문에, 아니 예수님을 믿기 때문에 절제할 줄 알고, 피해를 받을 줄도 알고, 심지어는 고통까지 참아내는 훈련이 필요합니다. 나아가서는 어느 순간이라도 남을 배려할 줄 알고, 남에게 무엇인가를 줄 줄 알고, 남을 사랑하고자 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이런 훈련과 자세가 매일의 일상 생활에서 이루어질 때, 그 사람은 바로 순교를 시작한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본다면 순교는 결코 멀리 있으며, 우리와 관계없는 것이 아닙니다. 매일 매일 사소한 일에서부터 신앙인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며, 주님의 뜻을 실천할 때, 결국에는 이냐시오 성인처럼 고백하면서 순교의 완성도 할 수 있습니다.

실제 이 땅에서 순교한 약 만여 명의 우리 신앙 선조인 순교자들도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말씀을 들으며,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자했습니다. 죽음의 위험이 도사리는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증거하고자 했던 그들의 노력이 오늘의 우리를 만들어냈던 것입니다. 신유박해 200주년의 막바지를 보내면서 다시한번 우리 신앙 성조들과 이냐시오 성인의 순교자적 삶을 우리 삶으로 변화시켜 봅시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신앙인
-
경규봉 신부-

유대인들은 하느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알고 있으면서도 율법에 따라 살지 않았다. 그들은 하느님의 율법을 받았으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거역하며 살았기 때문에 더 큰 죄를 지은 것이다. 그들은 이방인과 똑같은 잘못을 범하면서도 뻔뻔스럽게 이방인의 잘못을 신랄하게 비난하고 있으니, 이는 곧 자신을 단죄하는 것이며, 이들에게는 하느님께서 심판을 내리실 것이다.

사람의 판단은 한계가 있고 상대적이지만 하느님의 판단은 절대적이므로 심판하심이 당연하다. 이러한 하느님의 판단(심판)은 종말에 궁극적으로 이루어지는데, 아무도 이 심판에서 제외되거나 특권을 부여받지 못한다.

하느님께서는 자비로우시기에 우상숭배와 부도덕함, 그리고 남을 판단하는 교만의 죄를 지은 사람들을 보시고도 그들이 회개하시기를 기다리신다. 그러나 유대인들을 포함한 죄인들은 자신들의 죄를 하느님께서 심판하지 않는 것으로 여겨 하느님의 자비와 관용과 인내하심을 업신여기고 무시했다. 하느님의 은혜와 사랑을 소홀히 여겼다.

그들은 하느님의 인자하심과 반대로 완고하여 회개하지 않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인자하심을 거부한다. 이처럼 완고함과 회개하지 않는 마음으로 인하여 그들은 자기가 받을 벌을 더하고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마지막 심판 날에 이들에게 그 행실대로 갚아주실 것이다. 단순히 겉으로 드러난 행위만이 아니라 그의 마음속에 숨은 생각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선을 행하면서 하느님의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구하는 사람에게는 영원한 생명을 주실 것이고, 세상 것에 대한 이익만을 구하여 진리를 따르지 않고 불의를 행하는 사람에게는 진노와 벌을 내리실 것이다. 악을 행하는 사람은 그 행한 대로 하느님의 심판을 받아 환란과 고통을 당할 것이다.

그러나 선한 일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광과 명예와 평화를 누릴 것이다. 하느님의 약속에 따른 축복과 징벌이 먼저 유대인들에게 주어졌듯이 심판도 유대인들이 먼저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편애하심이 없으시기에 모든 인간을 차별 없이 심판하실 것이다.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의 법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들은 자신들의 죄에 대해서는 하느님께서 자비로우시니 용서하실 것이라고 말하며 하느님의 심판을 두려워하지 않고 악을 행한다. 그러면서도 다른 이들의 잘못에 대해서는 함부로 판단하고 비난함으로써 더 큰 죄를 짓는다.

그러나 하느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편애하심이 없으신 분이시다.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먼저 알고 당신의 법을 먼저 받은 사람들부터 먼저 심판하실 것이다. 그들의 행위뿐만 아니라 숨은 생각과 믿음까지도 심판하실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을 아는 사람들은 믿음으로 주님과 결함하여 꾸준히 선을 행하면서 하느님 나라의 영광과 명예와 불멸의 것을 추구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남을 판단하지 마라. 그러면 너희도 판단 받지 않을 것이다. 남을 판단하는 대로 너희도 하느님의 심판을 받을 것이고 남을 저울질하는 대로 너희도 저울질을 당할 것이다.”(마태 7,1-2)라고 말씀하셨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도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며, 그러므로 먼저 자신의 눈 속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셨다(마태 7,3-5).

사실 성서에 나오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나 주변 사람들의 죄가 내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 있다. 그들의 죄는 나의 죄이다.

그러므로 이웃의 잘못을 판단하고 비난하기보다 그들의 죄를 통해서 자신의 죄를 보는 신앙인이 되자. 그들을 위해 기도함으로써 자신을 위해 기도하고, 그들을 불쌍히 여겨 감싸고 보살핌으로써 자신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신앙인이 되자. 그럼으로써 자신의 부족함과 죄를 인정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간구하는 신앙인이 되자.............◆


 

 나는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이경식 (강남성모병원 종양내과 및 호스피스 병동 교수)-


 예수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에게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며 (…) 무덤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이 얼마나 강하고 엄격한 꾸지람인가! 그 말씀을 듣고 투덜거리는 율법교사에게도 화를 입을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어째서 예수님은 이리도 가혹한 말씀을 하시는가? 십일조를 내면서 열심히 사는 그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고?  

교회 활동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인품이 변화되어 누구든지 그분을 만나면 예수님이나 성모님을 만나듯 할 때가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을 때도 있다. 그 차이점은 무엇일까? 특히 매일 미사에 참례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사람들한테서 경직되고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위암으로 죽어가던 형제분이 생각난다. 그분은 신앙생활을 열심히 했고 자선활동도 많이 한 분이었다. 그분은 죽음을 앞두고 눈물을 흘리면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선생님, 저는 주님의 축복으로 돈도 많이 벌고 교회도 열심히 다녔습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두고 하느님을 대면하면서 깨달은 것은 제가 행한 많은 자선활동이 진정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단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물론 그분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보았으며 그후 죽음을 잘 준비하여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갔다.

나는 병원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으며 항상 높은 자리에 앉곤 한다. 또한 부끄러운 말이지만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워놓고 나는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을 때도 있다. 그것은 곧 사회적 지위가 나를 형식적으로, 외형적으로 만드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외형의 삶이 나를 교만하게 만들어 바리사이파 사람같이 될 수 있음을 알고 있다. 이 얼마나 조심하며 경계해야 할 일인가! 그러므로 나는 내가 진정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그 사랑으로 변화되어 진심으로 이웃을 사랑하는지 스스로 물어보곤 한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바리사이파와 율법교사 같은 요소를 빨리 뽑아내지 않으면 나는 무덤과 같이 되기 때문이다. 

 

 

 참 자유인의 길
-최영균 신부-


많은 심리학자들이 말하듯이 인간의 욕구 중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은 욕구는 인간 삶의 커다란 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러나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인정받으려는 마음은 한 인간을 부자유스럽게 만들고 심지어 진정 내면에서 원하는 것을 억압하기도 합니다. 사랑받고 인정받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소외시켜야 합니다.
바로 이런 자기소외의 전형이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입니다. 증자가 죽기 전에 자기 제자들을 불러 놓고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얘들아, 내가 누워 있는 이불을 치우고 내 손과 발을 보아라! 유가(儒家)의 수장으로서 그 많은 규율과 성인의 가르침을 따라 사느라 내 손과 발이 꽁꽁묶여 있구나. 이제는 자유로울 수 있겠구나.”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은 인격적이고 학문적으로 높은 경지에 오른 사람이라 할지라도 예외가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오늘 복음에 나오는 율법학자 역시 이런 마음을 운명적으로 지닌 인간의 마음을 대변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진리를 따르기 위해서는 이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로워져야 합니다.
우리의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랬던 것처럼 말입니다. 그분 역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받고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은 인정도 받고 존경도 받고 때론 사랑도 받았지만 진리를 따르기 위해 그렇게 강한 인간적 본능을 포기하셨습니다. 그래서 그분 스스로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게 된 것입니다.
진리를 따른다는 것은 어마어마한 자기 두려움과 욕망과의 싸움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스승이 당신처럼 하라고 우리에게 그 자유의 길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을 향한 예수님의 질책의 목소리를 듣게 됩니다.
-대구대교구 이영재 (바오로) 신부-


율법은 지키면서도 그 근본정신은 따르지 않는 마음 때문에,
명예와 권력은 추구하면서도 사람들은 존중하지 않는 마음 때문에,
겉보기에는 아무렇지도 않지만 속으로는 악하다는 질책을 받습니다.

결국에는 마음이 문제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느님의 법과 계명을 지키고 선을 행하는데에도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사람은 마음이 있으면 그 일을 행합니다. 그 뿐 아니라, 마음이 있을 때에야
그 일을 제대로 행 할 수 있게 됩니다.

법을 지키면서도 자기가 드러나고 대접 받기만을 바라고,
선한 일을 하면서도 선한 마음이 없다면 우리도 예수님으로부터
똑같은 질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주일을 지키고, 봉사를 하고, 선을 행하는 일들도 내가 하느님을 만나고자하는 마음과
하느님과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행할 때 비로소 가치 있는 일이 되어집니다.

바로 그 때에 우리 안에 하느님을 찾는 마음과 선한 마음이 쌓여져 갈 것이고,
가만히 차오르는 평화와 행복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들의 마음과 우리들의 선행이 일치하는 바로 그 자리에서 성령의 열매가 자라 날 것이고
모든 일들이 하느님 안에서 좋은 결과로 작용 해 갈 것입니다..

진정한 마음으로 하느님을 찾고, 선한 마음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노력하는
하루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화禍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화를 입을 것이다. 너희는 드러나지 않는 무덤과 같다. 사람들은 무덤인 줄도 모르고 그 위를 밟고 지나다닌다.

-강영구신부-

복(福)과 반대되는 것이 화(禍)입니다.
복(福)도 화(禍)도 하늘이 내립니다.
복(福) 담을 그릇에는 복(福)이 담기고, 화(禍) 담을 그릇에는 화(禍)가 담깁니다.
‘성유심문(誠諭心文)’은 제가 좋아하는 글입니다.
한 대목을 옮깁니다.
福生於淸儉 德生於卑退 道生於安靜 命生於和暢
憂生於多慾 禍生於多貪 過生於輕慢 罪生於不仁
복(福) 담을 그릇과 화(禍) 담길 그릇이 뚜렷이 대비됩니다.
맑고 검소한 그릇에 복이 담기고, 스스로를 낮추어 한 발 물러서면 덕을 쌓습니다.
부글거리거나 출렁거리지 않는 고요하고 안정된 눈에 가야할 길이 보이고
화목하고 따뜻한 곳에 생명이 자랍니다.
욕심이 지나치면 근심걱정이 끊이지 않고, 탐욕스러운 사람이 화를 당합니다.
경솔하고 거만하면 잘못을 저지르고, 옹졸하고 어질지 못하면 죄를 짓게 됩니다.

보잘 것 없는 질그릇일지라도(2고린4,7) 청검(淸儉)하면 복(福)을 받아 담습니다.
화려하고 값비싼 그릇일지라도 탐욕(貪慾)이 가득하고
경만(輕慢)하고 옹졸하면 화(禍)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늘 하늘이 거울처럼 내려다보고 있음(上臨之以天鑑)을 생각하면서
겉꾸미기보다 수신(修身), 세심(洗心)하기를 게을리 않으려고 다짐합니다.

복 받는 하루 되기를 기도합니다.(一明)

마산교구


 

바리사이...?

예수께서는 어제복음에서 어느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식사 초대를 받고 가셔서 식사를 하셨습니다. 우리는 어제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이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되어 갔다는 바로 그 사실, 예수님의 친구 가운데 저녁 식사에 초대하고 또 그 초대에 응할만한 바리사이파 사람이 있었다는 사실, 그 사실의 기록에 대해 오늘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한바 있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이란 책이 있고 거기에서 예수님의 적대자 중 제일 큰 적은 바로 바리사이파 사람으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식사에 초대하고 또 예수님이 응하신 것으로 보아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모두 예수님을 반대했거나 예수님이 그들을 도매금으로 위선자라고 규탄하지도 않았으리라는 증거가 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예수님이 처음부터 서로 적의나 미움을 가진 불구대천의 원수로 볼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어쩌면 오늘복음의 "너희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화를 입을 것이다...."라는 불행선언의 발단은 어제복음의 식사 때 손씻는 문제로 시비가 걸린 연유인 것 만은 아닙니다. 성서 문맥상으로는 불행선언, 즉 바리사이에 대한 저주는 식사때 정결사건 다음에 배치되었기 때문에 그렇게 해석하는 사람도 있으나, 좀 더 깊이 묵상해보면 예수님의 공생활 시작에서 부터 바리사이들과의 적대적 관계로 시작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묵상은 연중 28주간 내내 등장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 학자들에 대해 구체적으로 설명해 드리고자 합니다.(묵상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1. 바리사이
바리사이라는 말의 뜻은 '분리하다. 분리된 단체를 만들다'란 동사 '파라쉬(parasch)'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정치적인 정당과 종교적인 성향 모두를 지칭하곤 했었다.

① 역사
B.C.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죽은 후, 그의 제국을 그의 장교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그 장군들 중 하나는 현재 터어키의 앙카라인 안티오키아르 수도로 시리아에 왕국을 세웠다. 후손인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는 그리스로부터 영감을 받아 만듬 법을 유대인들에게 강요하려 하였다. 그때 유대법을 철저히 지켰던 신앙심 깊은 사람들은 마타티아 마카베오와 그의 지지자들이 일으킨 폭동에 참여하였다.

유대인 폭동은 성공적이었다. 그래서 신앙심 깊은 이 사람들은 평신도 율법학자들과 함께 종교적이고 정치적인 중심지에서, 율법과 종교 의식을 철저하게 준수하려는 의도로 재회하여 하나의 그룹을 이루게 되었다. 이것이 바리사이들의 기원이다. 이들은 B.C. 63년 이후 로마의 점령으로 약화되긴 했지만, 그들은 의회의 구성원으로서 법정에서나 종교에서 실질적인 영향력을 계속 행사했었다.

② 사회적인 위치
바리사이가 되려면, 한 달에서 일 년 사이의 예비 기간을 거친 뒤, 정결례, 단식, 십일조와 그 밖의 다른 종교적인 관습들에 관한 이 단체의 규칙을 지킬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족했다(루가 18,11-12 참조).바리사이들의 이상은 이스라엘을 죄인들과 격리시켜 '사제들과 같은' 거룩한 백성으로 만드는 것이었다(출애 19,6). 그들의 엄격한 계명(마르 7,3-4)들은 그들을, 죄인들이나 법을 엄격하게 지키지 않는 이들과의 모든 접촉을 피하도록 만들었다. 예수는 이러한 장애물들을 제거시킴으로써 그들에게 충격을 주었다(마르 2.,15-17).

2. 율법학자

'율법학자(scribe)'란 말은 '쓰다'라는 의미를 가진 라틴어 'scrivere'에서 유래한다. 율법학자들은 법학자들, 율법학자들, 성서 전문가들로 구성된 지적 귀족 계급을 형성하였다. 율법학자들은 처음에는 율법과 성서를 설명하고 해석할 의무를 가진 사제들이었다. 바빌론 유배 이후 성직자는 정치적인 권력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예수 시대에 율법학자들 속에는 평신도들과 소수의 사제들과 약간 명의 레위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은 율법을 주로 가르쳤는데, 그들의 법률적 능력이 판단을 내리는 데 적법자로 내세울 수 있게 되자 바리사이들은 율법학자로서 산헤드린(의회)에 들어갔다.

그들은 스스로를, 예언자들을 대신하는 자들이고 현인들을 승계하는 자들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은 종교의 전문가들이었다. 많은 율법학자들이 자신들에게 주어지는 존경의 표시에 맛을 들였고(루가 20,46), 선생님이 아니라 '랍비'라고 불릴 것을 고집하였다(루가 23,7-10).

3. 이들에 대한 예수님의 단죄

루가 복음 11,39-51에 의하면 예수님은 이들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단죄하셨는데, 먼저 바리사이파들에 대해서는 이런 점들을 지적하셨다. 즉 그들은 겉은 경건하고 깨끗한 척 하지만 실상 속에는 착취와 사악함이 가득차 있다는 것이다(39). 그리고 그들은 십분의 일을 바치는 일은 중요하다고 가르치면서 정의를 행하는 일과 하느님을 사랑하는 일은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는 것이다(42). 그리고 그들은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장터에서는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는 것이다(43).

그리고 율법학자들에 대해서는 온갖 규정이나 규칙과 같은 견디기 어려운 짐을 남에게 지킬 것을 강요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그 짐에 손가락 하나 대지 않는 위선적인 행동과(46), 그들이 죽였던 예언자들에 대한 피에 대한 책임과(48-50), 법률적 해석의 권한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추어 유리하게 적용시키고 백성들에게는 불이익을 주는 행위(51)들에 대해 단죄하셨다.

여러분, 오늘날 우리 주위에도 이런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참으로 회개하여 이 사회의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하지 않으시렵니까?.........◆

[두올묵상팀]
 

 

 

 

 

새벽을 열며

 

 어제 아침은 괜히 기분이 조금 안 좋았습니다. 뭐 특별히 기분 나쁜 일이 생긴 것은 아니고요, 이것저것 생각하다보니 그냥 우울한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특히 본당 일들을 생각하면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과 함께 힘에 부친다는 느낌이 들었어요. 성전 부지 마련도 해야 하고, 다음 달에는 사목회도 새롭게 구성해야 하고, 음악피정을 좀 더 짜임새 있게 구성해야 하고, 본당의 여러 행사들도 신경 써야 합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서 부탁하는 강의 준비도 해야 하고, 각종 원고도 작성해야 합니다.

어디론가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드네요. 엄마들이 어느 날 문득 모든 것을 팽개쳐두고서 어딘가 가고 싶다고 하던데, 아마 저도 그런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이렇게 걱정만 계속 생각하는 제 모습을 그냥 두어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곧바로 성체조배실에 가서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서 얼마 전에 읽었던 마더 데레사 수녀님의 책 내용이 생각났습니다.

“여러분은 사회활동가가 되려고 성직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은 거룩한 삶, 복종하는 삶,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가운데 예수님을 증거하는데 최선을 다한다면, 예수님을 만나고 그래서 항상 웃을 수 있습니다.”

중요한 한 가지를 잊고 있었던 것이지요. 제가 이렇게 사제로서 살아가는 이유는 사회활동가도, 멋진 본당신부도 또 유명한 신부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 가운데 주님을 증거하기 위해서 사제가 되었고, 이 길을 계속해서 걸어가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세상일에 대한 많은 관심과 걱정으로 잊어서는 안 될 저의 소명을 잊었던 것입니다.

저에게만 이러한 소명이 주어진 것이 아니지요. 이 글을 읽고 있는 여러분 역시 세상 가운데 주님을 증거하라는 소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여러분은 과연 어떠했는지요? 혹시 저처럼 주님을 증거하는 일보다 세상의 일을 생각하고 걱정하는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바리사이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꾸짖습니다. 사실 그들처럼 열심히 사는 사람도 없었습니다. 613개나 되는 율법의 세세한 조항을 하나도 빠짐없이 철저히 지키는 그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깊은 존경과 사랑을 보여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두고서 위선자라고 말씀하시면서 불행하다고 하십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비록 열심해 보이기는 하지만, 세상 가운데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증거하는데에만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예수님께 칭찬받고 싶으세요? 아니면 꾸중을 받고 싶으세요? 너무나 당연한 것이지요? 아마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께 칭찬받고 싶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의 선택은 분명합니다. 세상일을 걱정하면서 나를 증거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세상 안에서 주님을 증거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 걱정을 잠시 덮어두세요.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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