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9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매일 복음 묵상

2007. 11. 5. 오후 1:39:43

글자
2007년 10월 19일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가 12,1-7)

  

 There is nothing concealed
that will not be revealed,
nor secret that will not be known.
 

I shall show you whom to fear.
Be afraid of the one who after killing
has the power to cast into Gehenna;
yes, I tell you, be afraid of that one.


  

 두려움은 믿음의 생활을 방해한다. 맡기지 못하기에 두려움이 생기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한낱 미물에 불과한 참새까지 기억하시고 사람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그러한 분께 맡기지 못할 이유가 없다. 진정 두려워할 것은 주님에게서 멀어지는 생활이다

 

☆☆☆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오늘 복음의 말씀입니다. 당시 두 닢이 어느 정도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무척 싼값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렇게 보잘것없는 것까지도 주님께서는 기억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세어 두실 정도로 섬세하신 분이시라고 복음이 전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주님이시지만 우리는 그분께 자주 불평합니다. 어찌하여 기도를 들어주시지 않고, 어찌하여 시련 속에 버려두시는지 원망하는 것이 우리 모습입니다. 하지만 이 모두가 유혹입니다. 한낱 미물인 참새까지도 잊지 않으시는데 그보다 훨씬 귀한 인간에게 어찌 관심을 갖지 않으시겠습니까?
웬만큼 신앙생활을 한 사람들 가운데에서도 자기중심적 믿음의 길을 걷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린이의 신앙을 탈피하지 못한 탓입니다. 어린이는 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어서 받지 못하면 무척 섭섭해합니다. 그러기에 주는 것에는 서툴기 마련이고, 주는 기쁨에도 익숙해져 있지 않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받으려고만 할 뿐 베풀 줄 모르면 늘 어린이의 신앙생활로 남습니다. 우리 각자의 신앙생활은 어린이의 신앙생활에 머무르고 있지 않은지 조용히 돌아봅시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수철 신부-


 인간 내면에 깊이 깔려 있는 원초적 정서는 ‘두려움이자 불안’입니다.
이 어둠과도 같은 두려움과 불안이 우리를 자유롭지 못하게 합니다.
자유로운 성장의 장애 요소인 이 두려움과 불안을 해결할 길은 없을까요?
사랑이 마음의 두려움과 불안을 몰아냅니다. 태양이 떠오르면서 밤의 어둠이
사라지듯 하느님의 사랑이 두려움과 불안이라는 어둠을 몰아냅니다.
하느님과 깊은 사랑의 관계만이 유일한 해결책입니다.
내 자신과 하느님의 관계의 깊이는 어느 정도인지요?
말씀 공부와 기도, 사랑을 실천하는 이런 수행 자체가
하느님 사랑에 대한 표현이자 하느님과의 사랑의 관계를 깊게 합니다.
영성생활에서 지름길이나 요령은 없습니다.
꾸준히, 평생, 규칙적으로 기도하고 말씀의 실천에 주력할 때
내적으로 성장하며, 내면의 두려움과 불안은 자연스레 사라집니다.

 

 

 내 머리카락 숫자는 몇 개?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말씀하신다. 처음에 이 말씀을 접할 때 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서 내 머리카락 숫자까지도 다 세어두셨다면 내가 남몰래 지은 죄와 허물을 다 알고 계시고 거기에 따라 심판하시겠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두려움을 느낀다. 하지만 이 말씀을 곰곰이 묵상해 보면 하느님께서 나를 얼마나 잘 알고 계시며, 그만큼 나를 잘 아시기 때문에 나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비로이 받아주신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비난하고 판단하며 소외시킬 때 대부분 상대방에 대해서 어설프게 알거나 잘 모르고 그러는 것이다. 반대로 그 사람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면 그 사람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늘 공격적인 태도로 거칠게 말하는 형제가 있었다. 나는 그가 싫어 피해 다녔다. 우연히 그 형제와 함께 피정을 갔다가 대화를 나누던 중 그의 불행했던 어린 시절에 대해 듣게 되었다. 그가 어릴 때 어머니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그의 아버지는 많은 아이들을 건사할 수 없었다. 결국 형제들은 친척집과 고아원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고아원에 맡겨진 그는 다른 아이들한테 많은 시달림을 당했다.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거세어질 수밖에 없었노라고, 지금도 그러한 성격이 남아 있기에 고치고 싶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는 고백을 들었다. 이런 정황도 모르고 형제를 미워한 것이 너무나 미안했다. 이후로 그 형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그를 싫어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그 형제를 이해해 달라고 오히려 변호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도 우리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를 판단하지 않으시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신다. 나의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어놓은 분이시니 나를 얼마나 잘 알고 계시고 이해하실까?

 


 

 나는 나의 신앙생활에서 빨리 위선을 찾아내야 한다.

 -이경식 (강남성모병원 종양내과 및 호스피스 병동 교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을 조심하라고 하면서 누룩에 비유하여 말씀하신다. 적은 누룩이 온 빵을 부풀게 하듯이 적은 위선이 온 인격을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위선이란 가장 위험한 것이다! 나는 나의 신앙생활에서 빨리 위선을 찾아내야 한다.

위선은 진실한 내 모습을 숨기고 선한 것처럼 가장하려는 거짓에서 시작된다. 그건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내 생명을 주관하시는 분,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시고 내 모든 비밀을 알고 계시는 분이시다. 인간은 세속과 육신, 마귀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다. 그러니 하느님 앞에 무엇을 숨기고 또 골방에서 몰래 속삭이겠는가? 차라리 그분께 나의 모든 잘못을 솔직히 고백하고 용서와 자비를 청하는 것이 옳은 자세일 것이다. 실제로 그분은 아버지이시기에 우리를 끝없이 용서하시며 모든 좋은 것을 아낌없이 주신다.

내가 돌보는 호스피스 환자들은 죽음 앞에서 진실해진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지은 모든 죄를 뉘우치면서 용서를 청할 때 주님은 용서해 주시고 그들에게 진실과 정의라는 기름을 발라주신다.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자 마지막 은총을 내려주신다. 우리도 자녀에게 가장 좋은 것을 주는데 하물며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가장 좋은 성령을 아낌없이 주시지 않겠는가?

나는 말기환자들을 돌보면서 내 양심과 성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진심으로 대하고자 노력한다. 내 안에는 나도 인식하지 못하는 위선이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매일 성체 앞에 나아가 자신을 되돌아보며 위선의 뿌리를 뽑으려고 노력한다.

 

 
진리의 영
-최영균 신부-

고대 그리스에서 진리에 해당하는 단어는 ‘알레테이아’(aletheia)입니다.
알레테이아는 어원적으로 ‘숨어 있지 않음’(a-letheia)을 의미합니다.
사람이나 사물의 위선과 거짓에 속지 않고 숨겨진 진실을 밝게 드러내주는 소명이 알레테이아라는 글자 속에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을 청할 때 ‘진리의 성령’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우리 내면은 이 진리의 영을 청하는 것에 대해 주저합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 한 가운데서 진리를 말하고 행동하는 데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이라는 것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말하고 행동함으로써 왕따 당할 것에 대한 두려움, 때로는 자신의 인간적인 약점을 고백하는 것에 대한 부끄러움…. 그래서 우리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자꾸 감추려고 합니다. 진리를 드러내는 것의 두려움을 우리는 에제키엘의 소명 이야기에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니 너 사람아, 그런 자들을 무서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떨지 말아라. 그들은 너를 반대하고 배척할 것이다. 그리고 너를 가시방석에 앉힐 것이다”(에제 2,6).
신앙은 우리의 용기와 믿음을 필요로 합니다. 예수님처럼 이 모든 인간적인 두려움과 부끄러움에서 자유로울 때 우리는 진리를 드러낼 수 있습니다.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안락하고 싶은 이 모든 마음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때 우리 안에 녹아 있는 진리의 영이 환히 드러날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진실과 진리가 드러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하느님께서 하십니다.


 

 
-대구대교구 이영재 (바오로) 신부-


 바리사이를 경계하시며 예수님께서는 우리들이 세상 속에서 드러나 보이는
단순한 한 인간이 아니라 하느님의 착한 아들과 딸이 되라고 하십니다.

사람에게 드러나 보이는 것도 중요하겠지만 진정 두려워해야하는 분이 하느님임을 역설하십니다.

세상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두려움.

그 두려움으로 인해 우리는 많은 것들을 행하기도하고 행하지 않기도 합니다.

하지만 진리를 외면하게 만드는 그 작은 두려움을 이겨내려면
하느님께 대한 더 큰 두려움이 있을 때 가능 해질 수 있을 것입니다.

마치 이냐시오 영신 수련의 과정에서 묵상을 할 때에 나 보다 힘센 자가
나와 싸우기 위해 대면했을 때 그 보다 더 힘센 하느님께 의지해서
영적인 진보를 얻어간다는 도식처럼 말입니다.

하지만 그 보다 더 좋은 것은 두려움을 넘어서서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기쁨을 위해 진리를 찾을 때가 아니겠습니까?

참새 다섯 마리가 단 돈 두 푼에 팔린다는 말은 한 마리는 그냥 공짜로 준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렇게 공짜로 주어지는 참새까지도 잊지 않고 계신 하느님이라면
하물며 우리에게는 어떠하시겠습니까?

바로 이런 하느님께 대한 믿음 때문에 오늘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이야기하고 계신 것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잊지 않으시는 하느님께 대한 믿음으로 두려움을 넘어서서
진리를 찾는 기쁨을 맛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대교구 김웅태 신부-

 

 "너희가 두려워 해야 할 분을 알려 주겠다. 그분은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진 하느님이다. 이분 이야말로 참으로 두려워 해야할 분이다"(루까 12:5).

오늘 복음[루까 12:1-7]에서 주님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위선에 대해 경고 하시면서, 진적으로 두려워 해야 할 분이 누구이며, 어떤 분인가를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당시에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유대교의 한파로 율법에 대해 열심히 공부했고, 그 실천을 철저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지나친 율법 준수는 율법의 근본 정신인 하느님의 사랑, 이웃의 사랑 등을 잊어 버리게 했습니다. 그렇다고 율법 준수를 완전히 무시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율법의 완성을 위해 왔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태 5:17). 철저한 율법 준수를 전부인양 생각하거나 그것으로 표현되는 겉치레 신앙을 배격 하셨습니다.

이런 상황속에 그리스도의 사명은, 그분의 가르침은 참으로 두려워 해야할 분, 하느님을 알려주며, 그분께 대한 그릇된 생각과 삶을 고치어 주십니다.

이런 사명은 세레성사로 그분과 한 몸이된 우리 크리스찬들의 사명이며, 우리의 생각과 삶속에서 증거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얼마나 그분을 알고, 올바로 받아들입니까? 우리는 여러 가지 구실 때문에 진정으로 두려워 해야할 하느님을 외면하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신앙 생활안에 바리사이파 사람의 모습이 재현 되지는 않습니까? 그분을 안다고 하지만,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그분을 증거하는 삶이 되고 있습니까? 그분은 우리 모든 것을 주관하시는 하느님 이십니다. 죽음 이상의 것까지 또한 우리의 머리카락을 세어두실 정도까지 우리와 함께 해 주시는 분입니다. 그분 앞에 우리 각자는 모두 고귀한 존재들 입니다. 주님을 두려워 함은 지혜의 시초이니 하는 말씀처럼 (집회 2:14) 주님이신 하느님을 나의 생각과 삶의 가장 중요한 자리에 모셔야 할 것이며, 주님이신 하느님을 나의 모든 것의 튼튼한 터전으로 삼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나의 신앙의 올바른 시작이며, 그 기초가 될 것입니다. 또한 신앙의 연륜을 쌓아 가면서 계속 새롭게 해야할 것입니다.

 

 

 두려움, 생각, 생명의 주인, 보호막, 하느님   

  -이성우-

 

 세상에 살면서 우리는 참으로 많은 것들을 두려워합니다. 나에게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들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그것들에게 꼼짝 못하고 매여서 살기도 합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보면, 두려움을 느끼는 대상의 대부분은 나의 생각에서 나옴을 볼 수 있습니다. 나의 생각이 나를 두려움에 머물게 합니다.
생각 속 그 대상들이 비록 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으로 인해 내가 죽음으로까지는 가지 않습니다. 나의 생명을 좌지우지하시는 분은 하느님 한 분뿐이십니다. 나의 생명은 하느님으로부터 왔기에, 하느님만이 나의 생명의 주인이시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신뢰하며 경외할 때, 우리는 세상 모든 것들에 대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 나는 세상 그 무엇보다도 귀한 존재이고, 하느님은 나의 머리카락 수까지도 세고 계실 정도로 나에게 깊은 관심과 사랑을 지니고 계신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늘 나의 보호막이시고 피난처이십니다. 하느님 이외의 다른 것에 두려움을 느끼는 한, 우리는 그 두려움의 노예가 되어 우리 자신의 삶을 충분히 살지 못하게 됩니다.
그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지금 말씀하고 계십니다. “누구를 두려워해야 하는지 너희에게 알려주겠다. 생명의 권한을 지니고 계시는 하느님 한 분만을 두려워하여라.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가 두려워하는 모든 것들의 주인은 바로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연중 제28주간 금요일

- 김인환 신부 -

 

찬미 예수님!
 제가 사는 양산은 지금 한창 성당 신축공사가 마무리 단계에 있습니다. 지난 여름 신앙학교를 준비하면서 아이들이 성당에 자주 왔었는데 마침 그 때가 포크 레인부터 해서 적지 않은 장비들이 성당에 와서 작업을 하던 시기였습니다. 만일 아이들과 포크 레인이 누가 누가 머리가 더 쎈가 하고 서로 부딪힌다면 피나는 쪽은 당연히 아이들입니다. 그래서 모래 쌓아놓은 곳, 곳곳에 사고의 위험이 있는 곳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만해라’라고 이야기를 합니다. 평소 제가 하나도 무섭지 않았는지 뛰어노는 아이들의 행동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버럭합니다. 목소리의 톤이 높아져서야 이제 자기들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먹었나 봅니다. 그제서야 쭈삣 쭈삣 위험한 곳에서의 놀이를 멈추는 아이들. 그러면서 저는 속으로 ‘꼭 이렇게 큰소리를 내야만 말을 드는 것일까?’라는 회의 섞인 생각을 합니다.


 분명히 그것은 아이들에게 심리적 공포를 조장해서 따낸 결과입니다. 따라서 참사랑도 참교육도 될 수 없습니다. 물론 철없는 아이들이라 제가 화를 낸 것도 별 생각 없이 잊어버릴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렇게 하고 나서 또 후회하는 저의 마음과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도 아이들이 알아먹을 수 있을까라는 생각 끝에 그들이 느낀 두려움이라는 것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는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공포 또는 무서움이라는 단어와 흔히 연관시킵니다. 그래서 저는 중학교 때 성령칠은 중에 있는 두려움이라는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우습지만 그 당시 성령강림 대축일에 은사 뽑기를 하다가 속으로 ‘신부님이 성령은 하느님이라고 했는데 하느님이 공포심을 은사라고 내려주시다니’라는 생각을 했었던 때가 있습니다. 지금도 성령강림 대축일이 되면 이것이 머릿속에 떠올라 속으로 웃곤 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그 두려움이 사랑의 두려움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 속에서 예수님께서 일러주시는 하느님께 가지는 두려움이라는 것도 제가 아이들에게 화를 내서 조장한 두려움과는 차원이 다른 것입니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두 사람이 있습니다. 그 둘은 바라만 보아도 너무나 좋은 사이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즐겁게 해서 점수를 딸 수 있을까 고민합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상대방이 알면 상처받을 일을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그 사람이 몰랐으면 하지만 막상 그 사람을 만나도 속으로 너무나 미안해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행동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하기 싫은 그 마음, 사랑하는 사람이 알면 싫어할 그것에 빠지는 것을 두려워 하는 것이 사랑의 두려움이 아닐까요?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인간적인 감정으로 무서워하고 두려워하는 대상 곧 나를 해할 수 있는 자에 대해 가지는 두려움에 가치를 두지 마라는 말씀입니다.
 그보다는 원초적인 사랑의 관계에 있는 하느님과의 사랑을 더 키워하기 위해 그것을 깨뜨릴 수 있는 것을 두려워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사랑의 두려움을 가진 사람은 하느님께서 하지 마라는 행동을 스스로 멀리할 것입니다. 보다 남을 배려하려 할 것이고, 보다 참아 받는 사람이 될 것이며, 이웃에게 웃음을 주는 사람이 될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나의 머리카락의 개수까지 다 세어 두셨다고 복음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의 세세한 부분까지도 알고 싶어 하고 또 함께 하고 싶어 하는 것이 바로 깊은 사랑에 빠진 사이가 아닙니까? 하느님은 그렇게 나를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나도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할 것입니다. 하느님이 나와의 사랑이 더 크게 영글어 지시길 바라는 것처럼 나도 하느님과 나의 사랑이 깨어질세라 더 아끼고 키워나갈 것입니다.
 오늘 하루 매일 같이 주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받기만 하는 내가 아니라 하느님께 무언가 하나를 선물하는 하루가 되시길 바랍니다.


 

  


 

 바리사이의 누룩

-이회진신부-

예수님이 바리사이의 누룩을 조심하라는 것은 그들의 위선을 배우지 말라는 말입니다.

흔히 바리사이 사람이라고 하면, 모든 일에 있어 세심하게 율법을 살펴

경건치 못한 것과는 일체의 접촉을 하지 않으려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또한 양심적으로 율법의 모든 계명을 지키는 금욕주의자들이었다.


바리사이들은 율법을 위하여 사는 사람들일 뿐만 아니라,

율법이 곧 그들의 학업이요, 신앙이며

그들이 말하고 행동하고 생활하는 것 전체의 규범이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은 신앙에 충실하고 열심인 사람들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바리사이들의 신앙하는 모습 자체를 위선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바리사이들의 신앙을 살아가는 모습이 신앙인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율법을 지키는 직업을 살아가는 직업인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바리사이들, 혹은 신앙을 직업처럼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느님을 살아간다는 것은 매일, 같은 과정을 세심하게 반복하는 일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것을 반복해야 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나가는 일을 수행함으로써

자신이 신앙을 살아가는 사람임을 드러내는 표지가 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자신들이 바리사이 사람이 되기 위해

그렇게 철저히 율법을 지켜나가는 것입니다.

바리사이로 살기 위해 율법을 지키는 것이지

하느님의 신앙과 그분의 사랑을 찾아 떠나는 사람으로서는 2% 부족하다는 것이죠.


신앙을 산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신앙인이란 자신의 삶의 근거를 하느님에게 둔 사람입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고 자신의 삶에서 그분을 절박하게 찾는 사람입니다.

그 안에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갈등이 있고, 불꽃이 있고, 선택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이 라오디게이아 교회에 대해 

“너희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차라리 너희가 차든지, 아니면 뜨겁던지 한다면 얼마나 좋겠느냐?”(묵시 3,15)

고 말씀하시며 신앙을 살아가는 데 있어 “내적 열망”이 얼마나 중요한 가를 밝힙니다.


“갈등하는 인간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갈등한다는 것은 내면에서 두 가지 이상의 가치가 싸운다는 것이고,

신앙인이 갈등 안에 살아간다는 것은 하느님의 것을 선택하기 위해

내적 투쟁을 시작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또한 그의 내면에는 하느님을 향해 자신을 태울 불꽃이

언제든 준비 되어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직업인과 신앙인의 가장 큰 차이는 “내적 열망”입니다.

신앙인으로 살아가면서 하느님을 향한 내적 열망이 없다면 그는 바리사이,

곧 신앙을 직업처럼 살아가는 것이고,

성당에 나오고 기도하는 것이 마치 직장에 출근하는 것과 같은 뿐입니다.

그가 비록 열심이라고 해도 그것은 예수님의 눈에 “위선”일 뿐입니다.


신앙인은 직장인이 아닙니다.

주일날 출근부에 도장 찍듯이 성당을 다닌다면

남에게 보이기 위해 신앙하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을 것입니다.


차던지 뜨겁던지…?

주님은 선택하라고 하십니다.


“주님, 저는 당신이 필요합니다.”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사람들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름대로 많은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는 부분들이 다 있게 마련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녀 교육에 많은 관심과 노력을 쏟아 붓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자녀 교육이 이루어지면 관심은 또 자연스럽게 건강과 재산, 사회적 명예 등으로 옮겨가지요. 사람들은 이것들을 이루기 위해 갖은 애를 다 쓰다가 어느 순간 그것을 잃게 되면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인생의 방향을 놓쳐버립니다. 심지어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생기게 되지요.

특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그 어떤 시대보다도 자살의 비율이 높다고 합니다. 통계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2004년 자살 사망률은 인구 십만 명당 24.2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1위라고 합니다.(조선일보 10.2) 자살의 원인으로는 모든 힘을 쏟았던 돈과 명예, 건강을 어느 순간 잃은 데서 오는 상실감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것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는 순간의 판단이 안타까운 결과를 불러온 것이지요.

이것은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정작 우리가 무서워하고 두려워할 부분은 재물이나 명예, 건강이 아니라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무서운 사람은 죽음 앞에서 자유로운 사람이지요.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은 죽음을 앞두고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입니다.

사목자인 저는 자주 죽음을 접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의 죽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죽음이 판이하게 다른 것을 현장에서 생생하게 체험하게 되지요. 믿지 않는 사람은 죽지 않겠다고 끝까지 발버둥을 칩니다. 마지막 준비를 돕기 위해 제가 가면 옷자락을 붙들고 있는 힘을 다해 간절히 부탁을 합니다.

?’신부님, 저 좀 더 살게 해 주십시오. 죽고 싶지 않습니다. 더 살 수만 있다면 무슨 일이든 다 하겠습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은 이렇게 안타까운 모습으로 세상을 마무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에 비해 믿는 사람의 죽음은 거룩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믿는 사람은 사목자인 저가 도착하면 지나온 삶을 반성하고 뉘우치며 겸손한 모습으로 하느님의 자비를 청합니다. 고해성사를 통하여 세상과의 마지막 매듭을 풀 수 있었던 그들은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성체를 모시고 영원한 생명을 희망하며 하느님이 계신 곳을 향합니다. 죽음 앞에서도 자유롭고 평화로운 그 모습이 거룩해 보이기까지 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고 희망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은총이라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정직할 것을 가르치시며 바리사이들의 위선을 다시 한 번 지적하십니다.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 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12,4-5)

그렇습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느님입니다. 일찍이 집회서 저자는 ??지혜?‘를 이렇게 정의하였습니다.

?’지혜의 시작은 주님을 경외함이며 지혜는 믿는 이들과 함께 모태에서 창조되었다.?“(집회1,14)

육신을 죽인 뒤에 지옥에 떨어뜨릴 권한까지 가지신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머리카락까지도 낱낱이 세어두실 만큼 우리를 사랑하시고 지켜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인지, 믿지 않은 사람인지는 죽음 앞에서 여실히 드러납니다. 하느님을 믿고 영생을 희망한다면 나이가 들수록 준비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자식조차 믿지 못하고 돈만을 의지하여 움켜쥐고 놓지 않지요. 그러나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하느님께 가야 할 시간이 가까울수록 그에 걸맞은 삶을 살아갑니다. 우리는 최후심판을 기억해야 합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안타깝게도 신자들 중에도 하느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믿지 않는 사람들 못지않게 돈과 건강,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 요즈음 우리의 현실입니다. 하느님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세상의 것에 집착하여 그것을 소유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다가 여의치 않게 되면 실의와 좌절에 빠져 삶의 방향을 잃어버리는 사람들을 교회 안에서조차 보게 되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참된 자유는 하느님 안에서 비롯됩니다. 육신을 죽이는 사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느님을 믿으면 죽음 앞에서도 자유롭게 되지요.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 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루카12,4-5)

우리의 관심은 믿지 않는 자들과는 달라야겠습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식과 재물과 건강만을 의지하지요. 그러나 그것은 시간이 흐르면 모두 사라지고 마는 것들입니다. 모든 것이 사라지고 떠난 후에 홀로 죽음을 맞이하려니 얼마나 두렵겠습니까? 하지만 하느님을 믿는 사람은 언제나 변치 않고 나에게 영생을 주실 분은 오직 주님뿐임을 알고 흔들림 없이 평화롭고 자유로운 삶을 영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분은 우리의 구원을 좌우하실 하느님뿐이며, 나이가 들수록 욕심을 버리고 하느님을 의지하며 살아야 한다는 오늘 복음 말씀을 기억하여야 하겠습니다.


 

  시인이 되십시오.

 

+감추어진 것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비밀은 알려지게 마련이다. 너희가 어두운 곳에서 말한 것은 모두 밝은 데서 들릴 것이며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것은 지붕 위에서 선포될 것이다.

-강영구신부-

명심보감(明心寶鑑) 천명편(天命篇)에 이런 글귀가 있습니다.
玄帝垂訓曰 人間私語 天聽若雷, 暗室欺心 神目如電
‘현제가 훈계하여 말하기를, 사람이 사사롭게 한 말도 하늘은 우레처럼 듣고
어두운 곳에서 마음을 속여도 하느님은 환히 밝게 보신다.’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사람들의 눈이 아닙니다.
하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하늘 아래 비밀은 없습니다.
사람을 속일 수는 있지만 아무도 하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시인 윤동주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한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 오늘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윤동주의 서시(序詩)

하늘을 두려워하며 우러러 보는 사람은 시인(詩人)이 됩니다.
시인은 하늘 향해 한 점 부끄럼 없기에 잎새를 흔드는 작은 바람에도 가슴을 앓습니다.
해와 달보다 별을 노래할 수 있는 아름다운 마음으로 작은 생명까지도 소중하게 여깁니다.
시인은 별을 스치는 바람소리도 들을 수 있습니다.
당신도 시인이 되십시오.(一明)

마산교구

 

 


사람을 사랑하시는 하느님

-박상대신부-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책망과 불행선언의 대단원이 막을 내렸다. 그런데 예수님으로부터 크게 꾸지람을 들은 그들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물론 책망이나 질타를 듣고 기분 좋을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지만, 충고에 감사하는 자세도 미덕(美德)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바리사이와 율사들은 예수께 앙심을 품고 질문공세를 펴 대답에서 트집을 잡으려는 등 반격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11,53-54)


  예수께서 모욕적인 언사를 통하여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기세를 꺾었다는 소식이 삽시간에 주위로 퍼져 나간 모양이다. 오늘 복음의 시작부분이 언급하듯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서로 짓밟힐 지경이 되었다니 말이다. 예수께서는 인산인해(人山人海)를 이룬 군중을 둘러보시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첫 번째 가르침은 우선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관련된 것으로서, 그들의 누룩과 위선을 조심하고 경계하라는 것이다.(1절) 여기서 우리가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다. 그것은 예수께서 비록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망하고 그들에게 불행과 화를 예고하셨지만, 조심해야 할 것은 그 사람들 자체가 아니라 그 사람들의 누룩과 위선이라고 말씀하신 점이다. 역시 예수께서는 사람보다는 사람의 죄를 미워하신다. 누룩이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서 원래 술을 만들 때 사용하는 발효제이다. 누룩은 미소한 양이라도 전체에 큰 효과를 내는 역할을 한다. 바로 이 점을 바리사이들의 고질적인 형식주의에 빗대어 ‘누룩을 조심하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런 누룩에 한번 젖어들면 전체를 주체하기 힘들어지기 마련이다.


  두 번째 가르침은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이 지금은 감춰진 듯 제한된 장소와 시간의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지만, 머지않아 온 세상에 선포될 것이라는 점이다.(2-3절) 오늘 우리가 성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다면, 이것이 바로 그 증거가 될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의 진리는 세상 모든 사람들을 향한 것이며, 또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선포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과정이 저절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복음의 진리는 있으나 이를 선포할 사람도 있어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제자들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가를 서서히 깨닫는다.


  세 번째는 제자들이 진정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누구인지에 관한 가르침이다.(4-7절) 그 존재는 당연히 하느님이시다. 하느님께서는 영(靈)과 육(肉)의 모든 세계를 지배하시고 이를 권능으로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분은 제자들을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하게 여기시고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두실 정도로 사랑하신다. 따라서 제자들은 자신들을 박해하는 자는 물론 세상의 어떤 것에서 두려움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렇다고 제자들이 하느님 외에 다른 무엇을 겁 없이 여기거나 업신여기라는 말은 아니다. 하느님께서 세상과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당신 외아들을 보내주신 일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새벽을 열며

 

 요즘 우리 성당에는 초등부와 중고등부 학생들을 위한 특별 이벤트가 있습니다. 즉, 열심히 나오는 학생들에게는 포상을 나오지 않는 학생들은 다시 나올 수 있도록 하자는 의미로 올 겨울에 스키캠프를 준비하고 있지요. 그래서 미사나 교리에 빠짐없이 나오면 무료로 스키캠프를 갈 수가 있으며, 1~3번 정도 빠진 학생들은 60%의 지원을, 그리고 그 외는 10%만 지원하기로 한 스키캠프입니다. 물론 피치 못할 사정으로 빠졌을 경우 결석을 채울 수 있는 방법이 있지요. 즉, 평일 미사나 성시간의 참석을 통해서 주일미사와 교리 결석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학생들이 많이 나오기를 바라면서 열심히 홍보를 하고 있는데 잘 될지는 모르겠네요.

아무튼 저는 이 스키캠프에 신경 쓰면서 스키에 대해서 인터넷을 뒤져보게 되었습니다. 사실 저는 이제까지 한 번도 스키를 타 본적이 없거든요. 그런데 한 가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글쎄 스키를 처음 배울 때 넘어지는 것부터 배운다고 합니다. 저는 앞으로 나아가는 것을 먼저 배우는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잘 넘어지는 법부터 가르쳐야 넘어져도 다치지 않는다고 하네요.

생각해보니 스키만 아닌 것 같습니다. 유도도 처음 배울 때에는 그렇지요. 넘어지는 것, 즉 낙법부터 배웁니다. 태권도 역시 남을 공격하는 것부터 배우는 것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것부터 배웁니다. 어쩌면 모든 운동이 그렇습니다. 공격이 화려하고 멋져 보이지만, 자기를 지키는 수비가 없으면 그 화려한 공격이 아무런 소용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면 주님 역시 우리가 남을 누르고 그 위에 올라서는 이기는 삶이 아니라, 자기를 지키는 삶 그래서 누구보다도 이 세상에서 우리들이 행복해지기를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때로는 고통과 시련을 주셔서 우리들을 단련시키시지요. 우리를 얼마나 잘 아시는 주님임을 오늘 복음을 통해서도 분명히 말씀해주십니다.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합니다.

“신부님, 세상일을 두려워하지 않고 주님께 맡긴다는 것이 옳다는 것은 압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것이 얼마나 힘든지 아세요?”

그래서 기도가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의 손길을 느끼고 그 안에서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바로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자매님이 어제 주님 곁으로 가셨습니다. 이분께서는 췌장암으로 생의 마지막을 아주 힘들게 보내셨는데, 처음에는 자신에게 이러한 병이 온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자기 동생에게 어느 날 이런 말씀을 하시더래요. 이제야 주님의 뜻을 알겠다고, 남편과 자녀들이 냉담 중인데 도저히 성당으로 다시 돌아올 것 같지 않아서 자기를 그 도구로 쓰는 것 같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자매님이 병환 중에 있을 때, 가족 모두가 저에게 고해성사를 보고 자녀들은 관면혼배를 통해 혼인장애도 풀었습니다.

우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시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이십니다. 따라서 이 분에 대한 섣부른 판단은 이제 그만하고 모든 것을 맡기는 굳은 믿음이 필요하지 않을까요?




주님을 원망하지 마세요.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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