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을 열며
어제는 기분이 상당히 좋았습니다. 왜냐하면 옷 한 벌을 샀거든요. 그렇다면 제가 옷을 잘 입는 멋쟁이 신부일까요? 물론 아니지요. 저는 누가 봐줄 것도 아니기에 굳이 신경까지 쓰면서 옷을 입는 행동은 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신부들에게 정장은 끌러지(clergy) 셔츠 하나면 되기 때문에 옷에 별로 관심이 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제가 왜 옷을 샀을까요? 바로 일반 외출복이 아니라, 자전거 옷이거든요. 그것도 동네에서 구입한 것이 아니라, 서울 동대문까지 가서 이 옷을 사왔답니다. 자전거 옷의 가격이 싸다는 이유로 서울까지 가기는 했지만, 그러한 열성까지 보이는 제 모습을 보면서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전거에 미쳤구나.’
하긴 얼마 전에는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자전거를 차에 싣다가 그만 차와 자전거가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그 순간 저는 먼저 자전거가 괜찮나 살피게 되더군요. 분명히 자전거보다 차가 훨씬 비싼데 말이지요. 또한 자전거에는 아무런 ‘흠’ 하나 없고 오히려 차에 굵고 기다란 긁힘 자국이 생겼는데도, ‘자전거만 아무런 상처 없으면 괜찮아.’라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게 됩니다.
평소에는 옷에 전혀 관심이 없으면서도 자전거 옷은 서울까지 가서 구입하는 이유, 또한 고가의 자동차보다도 훨씬 값이 싼 자전거에 더 신경을 쓰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자전거를 아끼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전거는 물론 자전거와 관련된 것들을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지요.
아마 사람들마다 스스로 귀하게 여기는 것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고가이든 고가가 아니든 상관없이 스스로에게 귀한 것은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소중하게 여길 것입니다. 그런데 문득 오늘 복음을 묵상하면서 예수님께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에 대해서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 모두가 사랑한다는 예수님이지요. 그러한 예수님께서 우리들을 위해서 직접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인데 얼마나 정성을 다해서 바치고 있었을까요? 또한 얼마나 귀하게 여겼을까요? 중요한 기도이기에 매 미사 때마다 바치고 있는데도, 그 순간에 기도하는 나의 정성은 과연 몇 점이나 매길 수가 있을까요? 성의 없고 타성에 젖어 습관적으로 바치는 기도의 모습은 아니었을까요?
그만큼 입으로만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고, 실제로는 이 세상 것들을 더욱 더 사랑했음에 깊은 반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주님을 더욱 더 귀하고 소중하게 여길 것임을 감히 다짐하여 봅니다.
주님의 기도를 정성을 다해서 바칩시다.
빠다킹신부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양승국신부-
<특권 중의 특권, 주님의 기도>
초세기 교회 때 ‘주님의 기도’는 교회가 간직한 보물 가운데 가장 중요한 보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무나 바칠 수 없었지요. 정식으로 교회 공동체에 가입한 사람들에게만 바칠 수 있도록 허락되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예수님께서 직접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신 기도였기에 이 기도를 바칠 수 있다는 것은 당시 큰 특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신자들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 큰 경외심과 ‘삼가 하는 마음’ 감사의 정과 더불어 바쳤습니다.
이러한 흔적은 오늘날 미사 경문에도 잘 나타나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를 바치기 전에 사제는 신자들에게 이렇게 권유합니다.
“하느님의 자녀 되어, 구세주의 분부대로 삼가 아뢰오니”
‘삼가 아뢰오니’, 통상적인 표현은 아닙니다만, 이 표현의 뜻은 ‘조심스런 마음으로’, ‘경건한 몸가짐으로’란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아무런 생각 없이, 건성으로, 습관적으로 주님의 기도를 바쳤던 지난날을 반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앞으로는 너무나 황송한 마음으로, 너무나 감사한 마음으로, 너무나 행복한 마음으로, 충만한 기쁨과 더불어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가르쳐주신 주님의 기도는 비록 소박하고 간결하지만 예수님께서 설파하신 복음을 가장 명백하고 포괄적으로 집약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기도는 한 마디로 말해서 ‘복음의 요약’입니다.
아빌라의 데레사 성녀는 ‘완덕의 길’에서 주님의 기도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 어떤 책보다도 훌륭한 주님의 기도를 정성스런 마음으로 겸손한 자세로 묵상한다면 다른 책이 아쉽지 않을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아버지’란 호칭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아빠’, ‘아버지’란 호칭에 담긴 분위기는 어린아이가 사랑과 신뢰에 가득 찬 눈길로 아버지를 바라보며 부르는 친밀한 분위기입니다. 세 살배기 어린아이가 하루 온종일 기다리던 아빠가 돌아오자마자 다이빙하듯이 아빠 품에 안겨 부르는 호칭이 ‘아빠’, ‘아버지’입니다.
주님의 기도에 사용된 ‘아빠’, ‘아버지’란 표현은 당시 아무나 사용할 수 없는 표현이었습니다. 예수님만이 가능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주님의 기도를 가르쳐주심으로서, 당신과 하느님 아버지 사이에만 이루어졌던 친자(親子)관계를 제자들뿐만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까지 확대시켜주십니다. 우리에게도 이제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도록 길을 활짝 열어주신 것입니다.
이 얼마나 은혜롭고 감사한 일인지요.
바오로 사도의 가르침에 따르면, 어떤 사람이 하느님을 향해 ‘아빠’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참으로 하느님의 자녀이며,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이 하느님의 성령을 모시고 있는 징표라고 하였습니다.(로마 8장 15절, 갈라 4장 6절 참조)
‘주님의 기도’, 이제부터라도 좀 잘 바쳐봐야겠습니다.
사랑하는 아빠에게 세 살배기 어린이가 부르듯이 신뢰심과 친밀함을 담아 주님의 이름을 불러야겠습니다.
오늘 비록 우리가 보잘 것 없고 부족하지만 주님의 기도를 바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빛나는 예수님의 얼굴로 변화되기를 희망하며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해 메시아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 메시아의 시대는 용서하고 용서받는 시대이며, 충만한 하느님의 구원이 지금 우리 눈앞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시대이기에, 그러한 용서와 용서를 통한 구원이 지금 이 자리에서 이루어지를 하느님께 간청하면서 주님의 기도를 바쳐야겠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이수철 신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종교는 아마 그리스도교뿐일 것입니다.
세례를 받아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은총인지요!
아버지라 부르면서 아버지의 자녀로서 우리 신원도 분명해지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인간답게’ 산다는 것은 말은 그럴싸하지만 애매모호합니다.
인간의 정의가 다양하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 제멋대로 살면서 인간답게 산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자녀답게’라면 아주 분명해지면서
구체성을 띱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바로 우리의 존엄과 품위의 기반입니다.
아버지의 체면을 봐서라도 함부로 막 살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답게,
아버지를 닮은 삶을 살기 위해 우리는 말씀을 공부해야 하고, 아버지와 끊임없는 대화를
해야 합니다. 또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도록, 아버지의 나라가
오도록 부단히 노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처럼 우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될 때,
비로소 아버지의 자녀가 됩니다. 우리의 자비로운 행동을 통해 드러나는 것이
아버지의 이름이요, 지금 여기서 실현되는 아버지의 나라입니다.

일용할 양식
-김경숙 수녀(마리아구호소)-
마리아구호소에는 스물네 시간 따뜻한 밥과 국이 준비되어 있다. 새 가족이 입소할 때마다 가장 먼저 식사를 했는지부터 묻는다. 이삼 일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하고 굶었다는 이들을 대할 때마다 나는 미안한 마음을 금치 못한다. 며칠을 굶은 이들한테는 먼저 물을 먹이고 죽을 드렸다가 후에 밥을 드린다. 그리고 밤 두 시든 세 시든 새로 입소한 가족이 배가 고프다면 언제라도 밥을 차려드린다. 영양실조로 빼빼 마른 그들은 입소 후 한 끼에 두 그릇씩 먹는데 몇 개월만 지나면 어느 정도 건강을 회복한다. 제때 양껏 식사를 해본 적이 없는 이들이기에 처음 입소했을 때 밥부터 챙겨준 것이 고마웠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느님께서는 마리아수녀회에 딸린 이만 명이 넘는 식구들을 한 끼도 굶긴 적이 없으시다. 나는 식사를 할 때마다 하느님께 감사드린다. 어제는 아저씨들이 직접 농사지은 상추와 호박잎으로 푸짐한 밥상을 마련해 주셨고, 오늘은 된장국과 현미밥을 마련해 주셨다.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난다. 하루는 이웃집 준호 어머니가 참기름 냄새가 솔솔 나는 산나물과 김이 무럭무럭 나는 햅쌀밥을 새하얀 바가지에 가득 담아 오셨다. 그 쌀은 절토골이라는 깊은 산속 손바닥만한 다랑이에서 손으로 훑어서 수확한 것이었다. 쫀득쫀득한 햅쌀밥이 얼마나 맛있는지 어머니가 왔다 갔다 하시는 동안 단숨에 한 그릇을 비웠고 어머니 밥만 남겨두었다. 그런데 마침 한 노숙자가 동냥을 청하러 왔다. 어머니는 당신의 밥을 전부 그에게 주셨다. 나는 “그것은 어머니 밥인데`….” 했지만 어머니는 “이 밥은 오늘 저 사람의 양식으로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신 거야.”라고 하셨다.
하느님께서는 육신이 일용할 양식뿐 아니라 영적 양식도 주신다. 매일 말씀과 성체로 우리 영혼의 양식이 되어주시고 우리를 영원히 살게 하시는 하느님, 당신 이름은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불평과 원망에 가득한 요나를 달래시는 하느님
-경규봉 신부-
요나는 니느웨가 멸망하기를 바랐지만, 하느님께서 니느웨를 멸망시키지 않고 용서해주시자 몹시 화가 났다. 이스라엘의 적대국인 니느웨 백성에게까지 사랑과 자비를 베푸시는 하느님께 화가 난 것이다.
그는 “하느님께서 애처롭고 불쌍한 것을 그냥 보아 넘기지 못하시고 좀처럼 화를 내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없으시어, 악을 보고 벌하려 하시다가도 금방 뉘우치시는 분”이신 줄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하느님의 말씀에 따르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물고기 뱃속에서 구원받는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였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요나는 이러한 은총이 이방인에게는 해당되지 않으며, 해당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도 니느웨가 구원되자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 자신은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로서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섬겼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항상 시달림을 받고, 이스라엘을 괴롭히는 적대국은 용서를 받는다고 생각하니, 자신이 체험한 하느님과 이 세상의 질서는 너무나도 괴리가 심하다. 그러니 견딜 수 없다고 불평하며 목숨을 거두어 달라고 청한다.
이러한 요나의 불만을 들으신 하느님께서 요나를 타이르신다. 그러자 요나는 하느님께서 심판을 거두시지 않고 유보하셨으며 다시 심판을 내리실 지도 모른다고 나름대로 생각했다. 그리하여 그는 니느웨 성 밖으로 나가 초막을 짓고 니느웨가 어떻게 되는지를 지켜봤다. 니느웨 사람들의 회개가 단지 피상적이고 일시적인 것이라고 생각하고, 하느님께서 마음을 바꾸셔서 니느웨를 심판하실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요나로 하여금 니느웨를 심판에 처하지 않고 용서해주신 당신의 뜻을 알아듣도록 하시고자 요나의 머리 위로 아주까리가 자라도록 하시어 그늘을 드리워주셨다. 그리고 이내 아주까리 이파리가 벌레에 먹혀 말라 죽도록 하셨다. 아주까리 잎의 시원한 그늘 밑에 있다가 뜨거운 바람과 태양이 내려쬐자 더욱 짜증이 난 요나는 죽고만 싶어서 불평한다.
하느님께서는 요나가 자기 입장에서 니느웨의 구원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반대로 아주까리가 말라죽자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모순이라는 점을 깨닫도록 하신 것이다. 그가 하찮은 아주까리 나무 하나가 죽는 것에 대해서 그토록 화를 내는데, 어린이만 해도 12만이나 되고 많은 가축이 있는 니느웨를 어찌 아끼시지 않겠는가 하고 말씀하시며 그를 달래신다.
요나는 하느님의 종이며 예언자임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이 온 우주의 하느님이심을 생각하지 않고 이스라엘만의 하느님이시기를 원했다. 그는 하느님의 뜻과 계획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자신의 생각과 원대로 되지 않는다고 하느님을 원망했다. 누구보다도 하느님과 가깝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예언자까지도 자신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원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인간이란 그러한 존재이다. 그처럼 자신에 얽매이고 자신을 버리기 어려운 존재이다. 하느님을 믿고 하느님께 온전히 순종한다고 하면서도 상황이 바뀌면 자기를 내세우고 고집을 부리며 하느님을 원망하고 불평하는 존재가 곧 인간이다.
하느님께서는 그러한 인간을 잘 아신다. 인간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를 잘 알고 계신다. “사람은 어려서부터 악한 마음을 품게 마련”(창세 8,21)이라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고 계신다.
그리고 그러한 인간이 언젠가 자신을 버리고 온전히 당신의 뜻에 따르기까지 참고 기다리신다. 요나를 달래시듯이 그러한 인간을 달래시면서 참고 견디어주신다. 마치 부모가 어린아이의 이기심과 잘못에 가득한 행동을 보면서도 참고 기다려주듯이 그렇게 참고 기다려주신다.
그러므로 오늘 그처럼 우리를 기다려주시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마음을 알자. 요나를 달래듯이 우리를 달래시는 하느님의 마음을 아는 하루가 되자...................◆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 내용
-박성태 신부-
가을 풍경들이 더욱 아름답게 변해가는 요즘입니다. 아름다운 이 계절에 여러분들은 무엇을 하고 싶습니까? 가을 여행도 좋겠고 가을걷이로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 봉사활동가는 것도 좋겠습니다. '가을'하면 습관적으로 '가을은 독서의 계절'이란 말이 저절로 입에서 나올 정도로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또 '책 속에 길이 있다'든지 '책 속에 진리가 있다'라는 말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말하는데, 저도 여러분을 같은 마음으로 간절하게 경건한 마음으로 기도해 보십시오. 그러면 올바른 인생길이 열릴 것입니다.
기도할 줄 알고 하느님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은 하느님께 자신의 모든 것을 말씀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진지하게 헤아려보고 하느님의 뜻을 깊이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는 하느님의 목소리를 가슴깊이 새겨들을 줄 아는 사람이며, 가족이나 이웃과 함께 다정히 손잡고 하느님 나라 건설에 앞장서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많아질수록 세상은 참으로 아름답게 변화할 것입니다.
'같이 기도합시다' 라고 하면 어떤 사람들은 부정적인 반응을 먼저 나타냅니다. 그 이유가 첫째 기도는 나약한 인간들이나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나는 기도 할 줄도 모르거니와 관심도 없으니 기도를 잘하는 당신이나 하시오' 라는 생각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 반응을 보이는 사람들이 있더라도 걱정 마십시오. 혹 그런 반응을 보이는 이가 다름아닌 자기 자신이라도 걱정하지 마십시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참으로 아름다운 기도를 남겨 주셨는데 그것은 누구나 어디서나 바칠 수 있는 훌륭한 기도입니다. 그 기도를 오늘 복음에서 다시 찾아 기도해 보겠습니다.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럼 기도 내용을 함께 묵상해 봅시다. 먼저,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도록 하신 것은 바로 모든 인간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밝혀주신 것입니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를 아버지와 자녀의 사이로 관계를 맺어주셨는데 이 관계에서는 무엇보다도 생명이 흐르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관심은 항상 모든 자녀들의 행복에 있으며 언제나 따뜻한 정으로 다가오십니다.
아버지에 대한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를 수 있도록 허락하시고 관계를 맺게 하시니 하느님은 멀리계시는 분, 나와는 관계없는 분, 나의 기도와 관계없는 분이 아니라 늘 내 곁에 계시고 내 마음에 계시는 하느님으로 다가옵니다.
그러기에 이제 우리 인간(자녀)편에서는 설령 잘못을 저질렀다 하더라도 어둠 속에서 움츠리고만 있지 말고 희망을 가지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갈 수 있고, 부를 수 있고, 나아갈 수 있는 분이 바로 하느님이라는 가르침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떠한 처지, 어떠한 경우에도 하느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하느님 아버지께 나아가며 그분의 뜻을 찾아 살아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기도 끝부분은 용서와 악의 유혹에 관한 기도입니다. 하느님을 진정한 아버지로 모시고 사는 사람은 다른 이웃과도 평화롭게 지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내가 마음에 들어하지 않는 바로 그 사람, 용서하기 힘든 그 사람도 내가 용서 못해서 그렇지 그 역시 하느님의 사랑 받는 자녀라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서 사랑하고 아끼시는 사람을 내가 감히 뭐길래 용서하지 못하고 미워하고 얼굴을 붉히며 살아야합니까? 그런 의미에서 볼 때 유혹이란 내 스스로가 하느님의 자녀됨을 거부하고 하느님께서 싫어하시는 것, 원하지 않는 것에 매력을 느끼고 탐닉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아름다운 기도에 우리들 마음을 함께 담아봅시다. 이 아름다운 계절에 두 손 모으고 기도하는 모습 참 어울리지 않겠습니까?.................◆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이정희 (한국 파트너십 연구소) -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우리는 그동안 파트너십 여정 프로그램을 하면서 파트너십이 삶의 현장에서 실천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을 많이 만났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섬기는 지도력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그 과정은 나눔을 할 수 있는 작은 그룹으로 구성되었고 그 과정은 그룹원들에게 과제를 주는데 그중 하나가 ‘당신이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기쁨에 겨웠을 때와 다른 누군가가 나의 현존으로 기쁨에 겨웠을 때’를 매일 그려보고 그룹원들을 위해 기도하는 것이었다. 그룹원들은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도 있었지만 새로 만난 사람들도 있다.
다른 사람의 현존으로 기뻤을 때를 그려보는 데 한 자매가 떠올랐다. 최근 일 때문에 자주 만나는 그 자매는 평소에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렇게 편안하게 대하지 못했던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 자매가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을 채워주고 있고, 그가 있어 좋다는 느낌이 들어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조용히 그의 모습 떠올리자 내가 그에게서 불편해하던 단점보다는 그 자매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보이기 시작했다. 순수함과 열정, 아버지의 사랑을 살고 싶어하는 마음 등등 내가 평소 그에게서 잘 발견하지 못했던 그대로의 아름다움이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하느님이 그를 있게 하셨고, 지금 모습대로 사랑하신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불편했던 것은 그의 단점이라고 생각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자매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은 나에 대한 그분의 사랑도 느끼게 했다. 몸에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룹원을 위해 기도했다. 새로 만나 잘 모르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기 시작하자 가까운 사람처럼 친근하게 느껴졌다. 아버지가 그와 함께 계시다는 것이 느껴지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를 이끌어 주시고 도와주시어 아버지 뜻이 그에게 이루어지기를 청했고, 그가 잘되기를, 그의 앞날을 축복해 주시기를 기도했다. 이번 기도 체험은 나에게 우리 존재 자체에 대한 감사와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게 해주었다.
오늘 제자들이 예수께 ‘저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하자 예수께서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고 가르쳐 주신다. 과제를 하면서 내가 기도방법을 모른다고 생각한 건 기도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분은 늘 기다리고 계신데…. 그분이 가르쳐 주신 대로 하는 것, 그것이 기도방법이 아니겠는가.

아버지의 이름으로
-최영균 신부 -
이름을 부름으로써 한 사람의 정체가 확인됩니다. 때론 그 이름이 한 사람의
본질을 결정할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흔히들 이름 석 자를 세상에 남겨야 한다고
말하기도 하고 명예를 걸고 어떤 일에 임해야 한다고 합니다. 이름은 또한
한 사람의 꿈과 염원이 담겨져 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저의 이름은 ‘영(榮)균(均)’
입니다. 영화로움을 세상 끝날 때까지 고르게 누리며 살라고 아버지께서
지어주셨지요. 그래서 이름과 관련된 농도 많이 나오기도 합니다. 저의 어릴 적
별명은 ‘젊은 세균’이었습니다. 제 이름을 동음의 다른 한자 의미로 풀어서
불렀던 것이지요. 젊은 세균이라고 친구들이 부를 때면 불끈 화를 내기도 하고
다투기도 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내 이름 속에는 영화로움을
세상 끝날 때까지 고르게 누리라는 아버지의 염원이 살아 숨 쉬어야 하는데,
친구들이 그 뜻을 모르고 놀려대며 불렀으니까요. 세상을 살아가면서
나는 사물의 이름을 왜곡되게 부르고 그 이름에 담긴 의미를 잘못 이해하고
살지 않았는지 생각해봅니다. 특히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세계에 관해서
말입니다. 하느님 아버지의 이름에 담긴 뜻은 바로 성스러움입니다.
그리고 인간의 근원적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모상’입니다. 다른 세상 조물의
이름은 바로 ‘하느님의 작품’입니다. 고로 이 모든 세상 것들의 이름 속에는
성스러움의 꿈과 염원이 깃들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 사랑이 극진한 아빠, 절대자 신
- 이성우-
우리가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어떤 관계를 맺기를 바라시는지 예수님의 간절한 소망이 들어 있는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버지, 아빠라 부르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하느님이 내 삶에서 아버지의 역할을 하실 때, 예수님이 우리에게 바라시는 삶의 모습이 이루어집니다. 나에게 하느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하느님이 나의 아버지이십니까? 나를 존재하게 하는 근원이 되고 나의 울타리이며 나의 안식처입니까? 하느님이 내 삶에서 아빠가 될 수 있을 때, 우리는 이 지상에서 하느님의 자녀가 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이 나의 삶에 아버지가 되지 못하고 신(神)으로만 존재할 때, 우리는 내 삶과 신앙이 분리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내 삶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신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하느님이 아버지가 될 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탁하고 아버지의 뜻이 내 삶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할 수 있게 됩니다. 나와 동떨어진 다른 세계에 있는 신이 어떻게 나를 변화시키겠습니까? 그런 신이 어떻게 나의 일상 삶과 관련이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우리가 하느님을 아빠로 받아들이고 일상의 삶 안에서 하느님과 하나가 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바로 그 모습을 예수님이 먼저 보여주시고 살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빠라 부르시며 아버지의 뜻이 예수님의 삶 안에서 이루어지도록 노력하며 살아가셨습니다. 그럴 때 이 지상의 삶에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 됩니다. 우리가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 것인지 아니면 신앙과 삶이 분리된 이름만 신앙인의 삶으로 살 것인지는 우리 자신의 선택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