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10월 15일 월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매일 복음 묵상

2007. 10. 15. 오전 8:54:08

글자

 2007년 10월 15일 월요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1515년 스페인의 아빌라에서 태어났다. 가르멜 수도회에 들어간 그녀는 완덕의 길에 정진하는 가운데 주님의 계시를 받는 은총을 누렸으며, 수도회 개혁을 추진하였다. 데레사 수녀는 가르멜 수도원과 수도 생활에 관한 많은 저서를 남기고 1582년에 세상을 떠났다. 1622년 그레고리오 15세 교황은 그녀를 성인의 반열에 들게 하였으며, 1970년에는 바오로 6세 교황이 여성에게는 처음으로 ‘교회 학자’로 선포하였다

 

☆☆☆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루가 11,29-30)

 

 “This generation is an evil generation;
it seeks a sign, but no sign will be given it,
except the sign of Jonah.
Just as Jonah became a sign to the Ninevites,
so will the Son of Man be to this generation.

 

  

 예수님께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은 누구일까? 기적을 보고 싶어 하는 이들이다. 그들에게는 믿음이 없다. 단지 호기심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요나의 기적을 말씀하신다. 요나 예언서를 읽고 마음의 준비를 갖추라는 말씀이다. 믿음이 없는 곳에는 기적도 일어날 수 없다는 가르침이다

 

☆☆☆

 

 예수님께서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들에게 요나의 표징밖에는 보여 줄 것이 없다고 하십니다. 요나가 사흘 동안 물고기 배 속에 있다가 살아난 사건입니다. 그와 같이 당신도 죽음을 딛고 부활할 것이라는 암시이며, 사람들은 결국 그 사건을 접하게 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런데도 마음을 바꾸지 않는다면 남방 여왕이 되살아나 단죄할 것이라 하십니다. 그녀는 열왕기 상권 10장에 나오는 스바의 여왕으로, 솔로몬의 명성을 확인하고 조언을 듣고자 예루살렘을 방문하였던 여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찌하여 그 여인을 언급하고 있을까요?
여왕이 먼 나라에서 예루살렘을 찾아온 목적은 지혜를 얻으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수님의 지혜보다는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여왕은 솔로몬을 만나려고 돈과 시간을 투자한 반면에, 사람들은 그저 당연한 듯이 기적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믿음도 없이 빈손으로 예수님을 압박하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여왕이 그들을 단죄할 것이라 하셨던 것입니다.
기적이 있는 곳에는 사람들이 몰리기 마련입니다. 누구나 기적의 장소에 가고 싶어 합니다. 비단 호기심만이 아니라, 그곳에서 더욱 뜨겁게 기도하며영적 목마름을 적셔 줄 시원한 체험을 갈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찌 잊고 있을까요? 미사를 통하여 기적이 매일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 앞으로 나아가면 나아갈수록 갈증을 해소해 줄 은총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삶의 궤도     

- 이수철 신부-


 제가 즐겨 쓰는 단어 중에 ‘삶의 궤도’라는 말이 있습니다. 평범한 일상에서
회개는 삶의 궤도에 충실함으로 드러납니다. 내 본래의 삶의 궤도에서 벗어나
방황하게 되면 죄를 짓게 되고 이때 내 삶의 궤도에 들어오도록 하는 게
회개입니다. 요나의 설교를 듣고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 이는 이제 그들이
본래 제 삶의 궤도, 즉 하느님께로 돌아왔다는 이야기입니다.
제 삶의 궤도에 충실한 이들은 지금 여기에서 충실히 살기 때문에
외적 표징들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회개로 깨끗해진 마음에는
하늘 나라의 표징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내 삶의 궤도에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삶의 궤도는 구체적으로 질서 있고 균형 잡힌 일과로 표현됩니다.
내 삶의 궤도에, 내 삶의 질서에 충실하다보면 떠났던 마음도 곧 돌아옵니다.
하여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살게 됩니다.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기적을 요구하는 사람들을 향해 요나의 기적을 말씀하신다. 기적은 어떤 특별한 사람만 일으킬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든지 열려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함이다. 기적이란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것으로 드러남을 의미한다. 사실 나의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하느님의 현존 안에서 그분의 도우심으로 가능하게 되는 것이 기적이다.
그 옛날 요나에게 니네베의 회개를 선포하라는 소명이 주어졌을 때, 요나는 그럴 만한 능력이 자기에게 없음을 알고 도망을 쳤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요나를 니네베까지 인도하시고 그를 통해 니네베를 구원하셨다. 이때 요나는 단지 하느님 구원계획에서 하나의 도구로 쓰일 뿐, 그가 이 모든 일을 해낸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하느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니네베를 돌아다니며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했을 따름이다. 니네베 사람들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은 하느님의 일이었고, 여기서 주체는 하느님이시다. 수많은 예언자와 성인이 행한 기적도 하느님이 주체가 되어 이루신 것이다.
한때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사제생활을 해나갈 수 없다고 생각하며 사제의 길을 포기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사제직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능력과 은총을 그때그때 허락할 테니 사명을 받아들여라.” 그렇다. 주님께서 모든 일을 하신다. 그분께서 일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어 드리면 되는 것이다. 나를 온전히 그분께 내어 드리면 그분은 나를 통해 나의 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을 가능하게 만드신다. 이것이 바로 기적이 아닌가! 나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한 일들이 하느님께서 함께하시면 가능해진다는 기적을 우리는 늘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있다.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강우현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하고 탄식하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인간의 마음 한 구석에는 악을 향한 강한 충동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인간은 선한 일을 하고자 할 때, 악의 유혹을 가장 많이 느끼기도 합니다. 선과 악의 이중적인 성격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인간은 이처럼 자신 안에서 일어나는 선과 악의 대립 가운데 선택의 기로에 서서 삶의 현장 속에서 결단을 내리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과 악이 공존하는 삶의 현장에서 선을 추구하며 삶을 이끌어가기보다 은연중에 악을 추구하며 살아가려는 경향이 많습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선을 추구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참된 길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선한 일을 하면 왠지 손해 보는 듯한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인간은 악을 손쉽게 행동으로 옮기고 그 길을 통하여 유익을 구하려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하느님께서 심어주신 선한 양심을 스스로 마비시켜 갑니다.

이런 현실 앞에서 있는 우리는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선포로 하느님 앞에서 회개한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우리의 마음을 되돌이켜 보았으면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대가 왜 이렇게 악할까!” 탄식하시며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며 인간을 위하여 당신 삶 전부를 내놓으실 계획을 내비치십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의 구원의지에 의하여 하느님께로 초대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지난 삶에 대한 뉘우침과 하느님 앞에서 회개하는 마음으로 새롭게 태어 날 때입니다. 우리의 회개는 스스로의 선한 의지로 가능하기보다는 우리를 선으로 부르시는 거룩한 예수님의 십자가 때문에 가능한 선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선포하시는 복음은 우리가 세상의 삶에 지치고 자신을 더욱 완고하게 만들어가는 시간 속에서 자신의 지난 삶의 흔적을 하느님 앞에서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대에 기꺼이 응답하며 그분의 십자가를 똑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분의 십자가는 언뜻 보기에는 인간이 당한 모욕과 수치이지만, 믿음을 가진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구원의 십자가입니다. 한낱 보잘 것 없는 나무토막이 예수님이 달리심으로 인하여 우리의 구원의 표징이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십자가는 매일의 삶에서 다가오는 선과 악의 대립에서 항상 우리의 마음을 선으로 기울게 하는 끊임없는 결단의 표징이며 영광스러운 구원의 도구입니다. 우리는 구원의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생활이 펼쳐지도록 하느님의 도우심을 빌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구원의 십자가를 외면하는 순간, 인간의 능력만을 믿고 세상의 것에 의지하며, 결국에는 “심판날이 오면 니느웨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일어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는 예수님의 말씀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매순간 깨어 기다리는 마음으로 하느님을 향하여 설 수 있도록 우리의 태도를 바꾸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 나라를 향한 발걸음을 시작하여야 합니다.

여러분!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들여 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이 모두의 마음에 깊이 새겨지고 진정으로 하느님께로 돌아서는 결단의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아 거룩한 백성이 된 신앙인

-경규봉 신부-

사도 바울로는 로마인들에게 편지를 쓴다.
사도 바울로는 누구보다도 하느님의 은총으로 깊이 체험했다. 자신이 사도가 된 것도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사도로서 복음을 전하게 된 까닭도 하느님의 은총임을 늘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언제나 자신을 내세우거나 자신의 뜻대로 하지 않았으며, 교만하지 않았다. 그는 예수님께 절대 복종한다는 뜻에서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부른다. 그는 사도로서 복음을 선포하는 사명을 받았는데, 복음이란 하느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어 구원하시기로 하신 약속이다.

이 구원의 약속은 이미 구약의 예언자들을 통하여 당신 백성에게 하신 것인데, 곧 하느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이다. 즉 그가 전하는 복음의 핵심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인성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지만, 신성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아들로 확인되셨다. 바울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은총으로 사도직을 받았으며, 이는 모든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그들로 하여금 하느님을 믿고 복종하도록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함이다. 바울로는 로마의 교우들도 다른 교우들과 더불어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임을 주지시키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은총과 평화를 전한다.

하느님께서는 그 어떤 피조물보다도 인간을 사랑하신다. 하느님께서는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인간을 당신의 모습대로 만드셨고, 당신의 입김을 불어넣어 생명을 갖도록 하셨다. 다른 피조물과는 달리 그만큼 심혈을 기울여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인간은 하느님을 닮아 창조되었기 때문에 인간의 본성 안에는 하느님을 향하는 마음이 있으며, 본성적으로 하느님을 그리워한다. 그렇지만 인간이 지닌 허약함과 탐욕으로 인하여 인간은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졌고, 죄를 짓게 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죄를 지을 것까지도 미리 다 알고 계셨다.

때문에 천지창조 때부터 인간의 죄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시기 위하여 구세주를 보내실 계획을 가지고 계셨다. 그리고 때가 이르자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로 하여금 인간이 되게 하셨다. 그리스도께서 인간이 되신 것은 인간이 그만큼 소중하고 하느님께서 그만큼 인간을 사랑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시도록 하심으로써 인간의 죄를 기워 갚도록 하셨다.

그리하여 인간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모든 죄를 용서받고 구원되게 되었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 그리스도인들도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할 것임을 미리 보여주셨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받아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되었고, 하느님의 거룩한 백성이 되어 그리스도처럼 부활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무엇보다도 먼저 자신이 하느님으로부터 커다란 사랑을 받는 존재임을 늘 기억해야 한다. 온 우주의 하느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갚진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창조주 하느님께서 나를 인정하시고 받아주시니 부족한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느님의 사랑을 능가할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따라서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존재가치를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 느껴야 한다. 더욱이 “하느님께서는 값을 치르고 우리의 몸을 사셨다.”(1고린 6,20)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의 죽음이란 값을 치르고 우리의 몸을 사신 것이다. 하느님께서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까닭이다.

나아가 하느님의 사랑을 받고 있으므로 비록 우리가 물질적으로 부족하고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보잘것없을지라도, 언제나 기쁨과 감사의 삶을 살며, 떠떳하고 힘차게 살아야 하겠다. 오늘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백성답게 거룩한 삶을 사는 신앙인이 되자..............◆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기적은 어떤 것인가?

-이정희 (한국 파트너십 연구소)-

 

 오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요나의 기적은 어떤 것인가? 요나는 야훼께서 “니느웨에 가서 그들의 죄악이 하늘에 사무쳤다고 외치라”고 하시자 배를 타고 도망을 간다. 그리고 바람과 태풍이 몰아치고 배가 난파될 지경이 되자 뱃사공은 죽는다고 난리를 치는데 요나는 배 밑창으로 내려가 깊이 잠이 든다. 그러나 태풍의 원인이 요나에게 있음을 알게 되고, 바다에 던져져 물고기 뱃속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고 죽을 지경이 되자 하느님께 구해주실 것을 호소, 육지로 나온다. 이제 야훼의 두번째 말씀이 요나에게 내린다. “니느웨로 가서 내가 일러준 바를 그들에게 선포하여라.” 그리하여 요나가 야훼의 말씀을 전하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께 돌아서고 야훼는 그들에게 내리려 했던 재앙을 거두신다. 요나가 그렇게 피하고 원하지도 않았지만 니느웨를 구원하는 하느님의 도구가 된 것이다.

요나가 야훼를 피해 도망가는 모습에서 회피적인 태도를 엿볼 수 있다. 회피적인 사람은 무슨 일이든 주어지기 전에는 하지 않으려고 한다. 끝까지 버티다 어쩔 수 없을 때 한다. 누군가가 나서서 먼저 해주는 것을 좋아하고 앞에서보다는 뒤에서 있기를 좋아한다. ‘일은 내버려두면 저절로 해결된다’고 자신을 합리화하면서 간단한 문제를 위기 상황으로 치닫도록 만든다. 바닷속에 던져진 요나처럼.

나는 파트너십 여정 프로그램으로 삶의 태도 진단을 했을 때 회피적인 태도가 높게 나타나 매우 놀랐다. 그러나 나 자신을 돌아봤을 때 일상을 회피하며 움직이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괴로웠지만 구체적으로 보면서 왜 일할 때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그런 어려움이 있었는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나의 일상의 태도를 인식하기가 쉽지 않다. 오히려 다른 사람 탓으로 돌리기가 쉽다.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태도가 나에게 주어진 사명을 가로막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생각해 볼 일이다. 그리고 요나처럼 그분의 손이 다른 이들의 구원에 내가 장애가 되지 않도록 이끌어 주시기를 청한다.

 

 

 표징, 예수님의 존재, 예수님의 말씀     

-이성우-

 

 요나는 니네베 사람들에게 살아 있는 하느님의 말씀이었습니다. 요나의 입을 통해 사람들은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고, 그로 인해 회개하고 단식하여 하느님께로 돌아섰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분의 공생활을 통해 주로 하신 일도 바로 말씀선포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라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계시였고 하느님을 우리에게 드러내보이는 표징이었습니다. 이보다 더 분명하고 강한 표징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시대 사람들이 바랐고 우리들이 바라는 기적과 표징들이 우리의 영혼 구원에 도움이 됩니까? 우리는 지금 하느님께 어떠한 표징을 요청하고 있습니까? 그것들이 우리에게 정말 필요한 표징입니까? 예수님이 보여주신 표징은 사람들에게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 알리고, 지금 살고 있는 곳에서 하느님께로 방향을 돌리라(회개하라)고 우리에게 촉구하는 내용이었습니다.
하느님이 얼마나 사랑과 자비와 인내가 지극한 아버지이신지, 예수님은 그분의 전 생애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군중들이 원하는 표징은 그들의 말초신경만 자극할 뿐 진정 구원으로 이끌기에는 부족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어떤 표징을 보여주기를 원하셨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당신의 전 존재를 걸고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인간을 뿌리째 바꾸고도 남을 구원으로 이끄는 복음입니다. 하느님은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삶이 어떤 삶인지 예수님은 일생을 통해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하나씩 곱씹으며 하느님이 우리에게 마련해주시는 구원의 삶에 동참해봅시다.

 

 

 

 하느님과 인간 사이

-김정대 신부(예수회·인천 `삶이 보이는 창` 운영)-

  

 신앙한다는 것은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을 닮아 그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다. 신앙을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루려는 사람들은 어리석거나 아직 성숙한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다. 사실 이런 사람들은 하느님께 열심히 기도한다. 그러나 그 기도의 내용은 많은 경우 자신의 필요를 하느님께 말씀드리는 것이다. 인간 언어의 한계상 어쩔 수 없이 청원기도밖에 할 수 없지만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하느님을 자신에게 복종시키는 것은 잘못되었다는 말이다. 만일 그 기도가 이루지지 않는다면 이런 사람들은 쉽게 신앙생활을 포기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가 어떻게 우리의 필요를 충족시키며 살 수 있는지를 가르치러 오신 분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은 생존의 지혜를 가르치지 않았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 세상이 하느님과 어떤 관계인지, 그리고 하느님이 어떤 분이시고 우리와 어떤 관계인지를 알려주신 분이다. 또 우리의 나약함과 인간 조건을 어떻게 대면하고 끌어안아야 하는지를 역설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십자가에 못박은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하느님께 기도했다. 이를 통해서 인간이 할 수 없는 하느님다움을 우리에게 보여주었다. 결국 우리는 예수를 하느님이라고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하느님만이 가장 인간적임을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인간 조건을 그냥 있는 그대로 보고 끌어안을 수밖에 없다. 그럴 때 비로소 우리 안에 하느님다움이 드러날 것이다. 이로써 인간관계가 편안해지고 폭력이 없어진다. 이런 변화가 바로 기적이고 표징이 아닐까?

 

 

 “심판 때에 니네베 사람들이 이 세대와 함께 다시 살아나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다.”

-양승국신부-


<축복의 꽃길>


그 유명한 렘브란트의 작품 ‘탕자의 귀향’을 경당에다 걸어놓고 ‘회개’란 주제로 묵상을 하고 있습니다.


탕자를 끌어안고 계신 아버지의 눈을 바라봅니다. 그 눈은 거의 감겨있습니다. 어떤 작품 해설가에 따르면 시각장애인의 눈이라고도 합니다.


눈을 감고 계신 하느님!


눈을 뜨면 즉시 감지되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웃들의 허물입니다. 그들이 내게 저지른 잘못입니다. 그들이 끼고 사는 악습과 죄입니다.


반면에 눈을 감으면 어떻습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그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눈으로 바라보기보다 마음으로 바라봅니다. 상대방의 안쓰러움이, 측은지심이, 허전한 뒷모습이, 어쩔 수 없었던 상황이 떠오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그 숱한 우리들의 죄악과 끝도 없는 방황, 셀 수도 없는 배신을 유심히 관찰하시며, 헤아리시며, 우리를 향한 증오심을 차곡차곡 쌓아두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그 모든 부정적 측면들 앞에서 눈을 감고 계신 하느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군중들을 향해 극단적인 예까지 들어가며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회개는 아무래도 우리의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출발해야 할 것입니다. 지난 날 우리가 지니고 있었던 하느님 아버지에 대한 그릇된 시각, 편협된 신앙생활, 자기중심적인 삶의 방식을 돌아보는데서 시작하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하느님은 진노와 징벌의 하느님, 지극히 계산적인 감시자로서의 하느님이 아니라 온통 자비와 연민, 용서와 희망으로 똘똘 뭉쳐진 사랑의 하느님임을 자각하는 것이 회개일 것입니다.


언젠가 우리가 그분의 실체를 파악하게 될 때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를 하느님, 언젠가 우리가 우리를 향한 그분의 사랑이 어떤 것인가 알게 될 때 깜짝 놀랄 정도로 사랑이 크신 하느님임을 인식하는 일, 그래서 결국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을 조금이나마 돌려드리기 위해 그분을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회개일 것입니다.


‘나는 형편없다’, ‘나는 죄가 많다’, ‘나는 허물투성이다’, ‘나는 구제불능이다’는 지나친 자책감에서 벗어나는 일이 회개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이 있다, 내 허물도 크지만 하느님의 자비는 더욱 크다,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죄를 훨씬 능가한다,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분께서는 아직도 나를 극진히 챙기신다, 그분 앞에 나는 가장 소중한 존재라고 외치는 일이 회개일 것입니다.


내가 걸어온 지난 날, 내가 생각할 때 ‘꼬이고 꼬인’ 길, ‘운도 재수도 지지리도 없는’ 길이 결국 하느님 가호 안에 걸어온 은총의 꽃길이었음을 깨닫는 일이 회개일 것입니다.


지루하고 보잘 것 없다고 생각했던 내 지난날들, 별 것 아닌 것처럼 여겨졌던 내 일생이 사실은 금실과 은실로 곱게 짜여 졌던 축복의 나날이었음을 깨닫는 일이 회개일 것입니다.

 

 


 

 솔로몬의 지혜를 들으려고 땅 끝에서 왔다

 -이회진신부-


 

피정 담당은 아니지만 우연치 않게 몇 개월 동안 피정의 집에 있게 되면서

색다른 경험을 몇 가지 하게 되었답니다.


그 중 하나는 간혹 개신교 목사님들이 “조용하게 기도하고 싶은 데”

피정의 집 시설을 이용할 수 있느냐는 전화를 받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사정과 피정의 집 사정이 서로 맞지 않아 아직 승낙하지는 않았지만

마른 장작에 불붙듯이 열광적인, 그래서 한편으로는 부산하다는 느낌마저 주는 그곳에서

이제는 조용하게 쉬며 기도하고 싶은 움직임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피정의 집에서는 개신교의 여러 제안들을 선별에서

해마다 한두 건씩 시설을 이용할 수 있도록 하고 있었는데,

올해는 모(某) 개신교 신학교에서 영성 수업의 일환으로 시행하는

2박 3일간의 기도 모임을 위해

하반기에 매달 1-2회 정도 피정의 집을 제공하여 주고 있습니다.


이미 오래전부터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시대는 “영성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개인화되고 물질화 되는 문화적 풍토 속에서 체험되는 영적 메마름과

관계의 단절감은 영적으로뿐만 아니라 정신적, 육체적으로도 사람들에게

불안과 초조함 그리고 삶에 대한 두려움을 초래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을 그래서 이러한 불안감과 두려움을 없애줄 무엇인가를 찾아내려 합니다.


많은 이들이 채워지지 않는 자신들의 영적 요구를 찾아

선(禪)을 비롯한 기공, 명상, 요가 등을 배우려 하고 있습니다.

건강을 지키기 위해서라는 이유로 혹은 삶의 질을 향상 시킨다는 이유로

이러한 경향들이 나타나지만 그 근본 원인은 “내적 충만”을 위한 것이라 생각한다.


이러한 내적 결핍 또는 영적 갈망을 순간적인 기쁨을 주는 곳에서 찾는 이들도 있습니다.

즉, 어떤 사람들은 성공에 목숨을 걸기도 하고, 어떤 이들은 다이어트에,

어떤 이들은 인터넷 혹은 인터넷 게임에, 도박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불안감과 두려움을 없애주기 보다는 오히려

더 큰 상실감과 좌절감으로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만들기 쉽상입니다.


예수님 시대에도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이

하느님에 대하여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많은 이들이 그때나 지금이나 하느님께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니네베 사람들처럼 회개하여 하느님께 돌아서는 것인데도,

더 근본적으로는 남방의 여왕이 솔로몬에게 지혜를 청하러 왔듯이

하느님 가까이 다가가 영혼의 안식을 얻는 것인데도

사람들은 부산스럽게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있습니다.


개신교 목사님들과 신학생들마저 조용히 기도할 수 있는 곳을 찾아 나서는데,

우리는 무엇을 찾아 나서는지 생각해 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으려면 지금 가장 필요한 것이

그리고 자신의 영신생활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이 “기도”라고 대답하는데,

과연 그 대답만큼 자기 자신이 하느님 안에 머물러 있는지 되물어 봐야 할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의 밤과 낮 모두 당신 안에 있습니다. 당신으로부터 모든 것 시작하게 도와주소서. 아멘.”


 

 기적의 표가 되리라.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줄 것이 없다. 니느웨 사람들에게 요나의 사건이 기적이 된 것처럼 이 세대 사람들에게 사람의 아들도 기적의 표가 될 것이다.

-강영구신부-

하느님의 사랑이 감지(感知)할 수 있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것을 기적(奇蹟)이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기적(奇蹟)을 구하지 않습니다.
복음사가 요한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 안에 있는 사람은 하느님 안에 있으며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 안에 계십니다.”(1요한4,16)
사랑하는 사람은 하느님의 사람입니다.
하느님의 사람에게 기적(奇蹟) 아닌 것이 없습니다.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나 해 뜨는 광경을 볼 수 있었던 것이 기적입니다.
뜰 앞의 나무들이 겨울 채비를 하느라 화려하게 옷을 갈아입는 것이 기적입니다.
찬 서리를 맞으며 국화꽃이 향기롭게 피어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해가 뜨고 지고, 밤하늘에 보석 같은 별이 반짝이고
계절이 바뀌고 바람이 불고 비가 오는 것이 기적입니다.
한 남자와 한 여자가 서로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정을 꾸리는 것이 기적입니다.
새 생명이 태어나고 한 남자가 아버지가 되고 한 여자가 어머니가 되는 것이 기적입니다.
이승에서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한 노인이 하늘나라로 떠나는 것이 기적입니다.
어제까지 원수처럼 미워하던 사람들이 예수님 때문에 서로 용서하고 화해하는 것이 기적입니다.
온 천지가 하느님의 사랑인 기적으로 가득하고,
우리는 기적을 숨 쉬고 기적을 먹고 기적처럼 살아갑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는 하느님의 큰 사랑이 현신(現身)한 기적 중의 기적입니다.

당신도 기적입니다.(一明)

마산교구


 

 “이 세대가 왜 이렇게도 악할까?”

-양승국신부-


<깨달음>


회개는 거창하고 대단한 그 무엇이기보다 아마 이런 것이겠지요.


지나온 나날, 지나온 발자국, 지나온 내 인생의 모든 순간이 꽃봉오리였음을 자각하는 일,

언젠가부터 다가왔던 그 시련의 높은 파도가 은총의 시작이었음을 깨닫는 일,

기나긴 병고의 나날이 영적으로 더욱 강건해지라는 하느님의 메시지였음을 알아차리는 일,

그 견디기 힘들었던 깊고 아린 상처가 사실은 내 인생의 축복이었음을 헤아리는 일...


이런 고백을 하는 사람 역시 진정한 회개가 무엇인지 깨달은 사람일 것입니다.


“그때 내가 했던 그 사랑이 사랑이라도 믿었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사랑이라기보다 집착이요, 자기만족이었습니다. 사랑이란 미명하에 저지른 과오였습니다.”


“왜 그때 내가 그렇게 밖에 생각하지 못했을까요? 그의 말 못할 사연을, 그렇게 밖에 될 수 없었던 어쩔 수 없는 상황을 이해해주지 못했을까요?”


회개는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절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리라 믿습니다.


회개는 진지한 자기 쇄신, 보다 영적인 삶, 보다 나은 인생을 추구하는 사람들에게 미풍처럼 다가오는 은총입니다.


회개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성찰하고 관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 나와 이웃의 관계, 나와 세상과의 관계를 자기중심적으로 바라보지 않고 객관적이며 보편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노력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사랑의 선물입니다.


회개는 일생에 단 한번, 큰 마음먹고, 크게 한번 이뤄내는 대단한 그 무엇이 아니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또한 회개는 사형수나 징역15년쯤 살다나온 사람, 대형 사고를 저지른 사람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회개는 누구에게나 필요합니다. 특히 하느님 안에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려는 사람에게 더욱 필요합니다.


매일의 삶, 그 한가운데서, 지루한 일상의 여정과 더불어 지속적으로 이루어지는 고단한, 그러나 행복한 투쟁입니다.


‘지금은 아직 아니다. 언젠가 기회가 되면,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그때 큰 마음먹고 크게 한번 회개해야지’ 하는 사람들, 죽기 직전까지 회개 못합니다.


회개도 해본 사람이 잘 합니다. 평소에 지속적인 회개의 삶을 사는 사람들이 회개도 잘 합니다.


평생에 걸친 지속적인 자기 쇄신과 정화작업의 의지가 있는 사람에게 회개는 너무나 쉽습니다.


매일 아침이면 또 다시 어제와 결별하고, 매일 저녁이면 오늘 하루와 결별하고, 그렇게 매 순간 순간을 매듭짓고, 지난 시간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삶, 그것이 바로 참된 회개의 삶입니다.

 

 


 

조건부의 믿음은 강요된 믿음

-박상대신부-


  오늘 복음은 군중이 계속 모여들자 예수께서 이 세대를 악한 세대로 규정하시고,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하지만 요나의 기적밖에는 따로 보여 줄 것이 없다.’는 말씀으로 시작된다.(29절) 이 세대가 기적을 구한다는 근거는 좀더 앞서간 구절에 있다. 예수께서는 당신이 행하신 벙어리 구마기적을 두고 군중 가운데 몇 사람이 ‘하늘에서 오는 기적을 보여 달라.’(11,16)고 요구한 사실을 지나간 시점에서 다시금 논제로 삼으신 것이다. 즉, 기적을 보여 달라는 사람들의 요구가 갑자기 끼어 든 한 여인의 마리아에 대한 행복찬사(11,27-28) 때문에 무시되는가했더니, 예수께서 잊지 않으시고 다시 거론(擧論)하셨다는 말이다.


  사람들이 하늘에서 오는 표징을 요구하는 이유는 예수의 말씀과 행동에 대한 믿음의 조건으로 이해된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단호하다. 우리가 잘 알고 있다시피 예수께서는 모든 조건부의 표징이나 기적은 거절하신다. 오히려 조건부의 표징요구를 믿음으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불신(不信)의 태도로 간주하시면서 이들에 대한 단죄와 심판을 예고하신다는 것이다. 딱 잘라 말하자면, “기적을 보고 믿겠다.”는 주장은 “기적 없이는 믿지 않겠다.”는 불신의 태도로 간주된다는 것이다. 사실 믿음에 조건이 따를 수 없다. 그것은 믿음이 자유의지의 결과로 나타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만약 믿음을 위한 조건으로 기적이 주어지고, 그 기적을 보고 난 뒤에 믿음을 가진다면 이 믿음은 자유의지에 의한 믿음이 아니라 밝혀진 사실에 대한 수긍과 인정이다. 이는 진정한 믿음이 될 수 없을뿐더러 강요된 믿음으로서 주관성을 상실한 객관적 차원의 사실 확인에 불과하다.


  예수께서 따로 보여주시려는 것은 기적이라기보다는 이미 있었던 과거의 두 가지 사실이다. 하나는 세바의 여왕이 솔로몬의 지혜를 듣기 위해 예루살렘을 찾아 온 사실(1열왕 10,1-13; 2역대 9,1-12)이고, 다른 하나는 죄악에 빠진 니느웨의 사람들이 요나의 설교를 듣고 왕을 비롯한 전 시민과 동물에 이르기까지 회개하고 단식함으로써 하느님께서 내리고자 하셨던 재앙을 거두신 일(요나 2,1-11; 3,1-10)이다. 여기서 세바의 여왕과 니느웨 사람들은 이방인들로서 좀처럼 믿으려 하지 않는 야훼의 백성인 이스라엘에 대조를 이룬다. 예수께서는 지혜를 찾으며, 말씀을 듣고 회개하는 이방인들이 오히려 심판 날에 이스라엘의 불신하는 이 세대를 단죄할 것이라고 하신다. 그런데 복음의 요지는 예수님 자신이 솔로몬과 요나보다 더 큰 사람이며, 예수님의 지혜와 가르침이 더 위대하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물론 요나가 하느님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치다가 물고기 뱃속에서 3일간을 지내다 뭍으로 다시 나온 기적(요나 2,1.11)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암시하는 기적이 될 것이지만, 군중은 아무도 이를 예상하지 못한다. 중요한 것은 나중에 가서나 심판 날이 아니라 바로 ‘지금’과 ‘여기’이다. 따라서 솔로몬과 요나보다 훨씬 더 위대하신 분으로 군중 앞에 계시는 예수께 대한 선택은 ‘지금’, 그리고 ‘여기’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예수를 선택하지 않는 행동자체가 곧 불신이요, 심판이다. 그리고 조건부의 믿음은 결국 강요된 믿음일 뿐이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루가 11,29-32)

-유 광수 신부 - 

 

군중이 점점 더 모여들자 예수님께서 말씀하기 시작하셨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생활하셨던 시대를 가리켜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하셨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보시고 어떻게 말씀하실까? 그 때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이 세대가 악한 세대이다."라고 현재 동사를 사용한 것을 보면 2천년 전의 세대를 가리키는 것만이 아니라 바로 오늘 우리가 사는 세대를 가리키는 것이다.

과연 우리가 사는 이 세대가 왜 악한 세대인가?  무엇을 보고 악한 세대라고 말할 수 있는가? 대구 지하철 참사 사건이 있었지만 연일 서울 지하철의 안전 소홀로 적지 않은 사건들이 매일 일어나고 있고, 부정 부패가 극에 달하고, 이라크 전쟁이 곧 일어날 것 같은 위험한 세대이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말하시는 것일까? 물론 이런 것만 본다면 분명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일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악한 세대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좋지 않은 사건들을 보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보도되지 않아서 그렇지 우리 사회가 꼭 좋지 않은 일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좋은 일도 얼마든지 일어나고 있다. 오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좋은 일을 하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런 것을 생각한다면 " 이 세대는 악한 세대이다."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그럼, 예수님이 말씀하신 악한 세대란 무엇을 가리키는 것일까? 무슨 뜻인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말씀하신 내용을 보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는 어떤 사건이나 부정 부패 등에 언급하신 것이 아니라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 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된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이 세대 사람들에게 그러할 것이다."라고 요나 예언자와 당신에 관한 것이다.
즉 "이 세대가 표징을 요구하지만 요나 예언자의 표징밖에는 어떠한 표징도 받지 못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의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와서 말씀하시는 데도 전혀 그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고 표징만 요구하기 때문에 악한 세대라고 하신 것이다.

 

그럼,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것은 무엇인가?
"'요나가 니느웨에 들어 가 하룻동안 돌아 다니며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는 잿더미가 된다.'고 외쳤다. 이 말에 니느웨 사람들은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모두 굵은 베옷을 입고 단식을 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니느웨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하였다. 그리고 대신들의 뜻을 모아 니느웨 시민들에게 아래와 같이 선포하였다. 사람이나 짐승, 소떼나 양떼 할 것 없이 무엇이든지 맛을 보아서는 안 된다. 먹지도 마시지도 말라. 사람뿐 아니라 짐승에게까지 굵은 베옷을 입혀라. 그리고 하느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부르짖어라. 권력을 잡았다고 해서 남을 못살게 굴던 나쁜 행실은 모두 버려라. 하느님께서 노여움을 푸시고 우리를 멸하려던 뜻을 돌이키실지 아느냐? 이렇게 사람들이 못된 행실을 버리고 돌아 서는 것을 보시고 하느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에게 내리시려던 재앙을 거두시었다."(요나 3, 4-10)라는 것이 요나의 말을 듣고 니느웨 사람들이 보여준 태도이다. 즉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표징이 되었던 사건은 니느웨 사람들이 요나의 말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하였다는 것이다. 즉 요나의 말을 하느님의 말씀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이 단순히 요나의 말만 듣고 하느님을 믿고 단식을 선포한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그것도 높은 사람 낮은 사람 할 것 없이 그리고 임금도 용상에서 일어나  어의를 굵은 베옷으로 갈아입고 잿더미 위에 앉아 단식한다는 것이 오늘 우리 세대에 가능한 일인가?
 
우리가 사는 이 세대에는 요나보다 더 크신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직접 "때가 차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고 하느님의 복음을 선포하셨지만 과연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을 믿고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

이 세대가 악하다는 것은 어떤 부정을 저지르고, 전쟁을 일으키고, 사람을 죽이고 거짓말을  하는 것 때문에 악하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예수님이 복음을 선포하셨는데도 그 말씀을 믿지 않는 것이다. 회개하고 복음을 받아들이고 생활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이미 선포된 복음은 믿지 않고 어떤 특별한 표징(기적)만을 요구하는 것이 악한 것이다.
니느웨 사람들은 요나의 설교만을 듣고도 회개하였는데 이 세대 사람들은 요나보다 더 큰 분이신 하느님이 직접 복음을 선포하시는데도 회개하고 복음을 믿지 않는 것이 악한 세 개인 것이다.

 

오늘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단순히 사순절이기 때문에 교회에서 지정된 날에 단식을 하고 금육을 지키는 것만이 아니라 좀 더 구체적으로 복음의 삶을 생활하는 것이다. 즉 복음과 달리 생활하였던 생활에서 다시 복음적인 생활로 돌아오는 것이다. 어떤 기적이나 바라는 것이 아니라 이미 선포된 복음을 믿고 그 복음을 생활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매일 복음을 읽고 묵상해야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새벽을 열며

 

 어제 저는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그리고 다짐을 했지요. 이제 좀 더 열심히 그리고 좀 더 착하게 살겠다고……. 또한 무엇보다도 주님처럼 내 자신을 낮추는 삶을 살겠다는 결심을 새롭게 했습니다. 성사를 본 뒤에 너무나 기분이 좋았습니다.

그런데 11시 교중미사 때였습니다. 저희는 교중미사 때에는 창미사로 봉헌하는데,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를 부르는 부분에서 그만 실수를 하고 말았습니다. 음을 못 맞춰서 이 부분만 세 번씩이나 반복했답니다. 첫 번째는 첫 음이 잘못되어서 “다시 하겠습니다.”라고 말한 뒤에 다시 했습니다. 그런데 두 번째에는 글쎄 한 달에 한 번 하는 국악미사 때의 ‘그리스도를 통하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말했지요. “다시 하겠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에는 제가 안쓰러웠는지 사제가 하는 부분인데도 불구하고 교우들이 함께 해주시더군요. 저는 얼굴이 화끈거렸습니다.

아무튼 실수 연발로 이 부분이 무사히(?) 지나갔습니다. 그러면서 화가 나는 것입니다. 첫 음을 못 맞춘 저에게 화가 나는 것은 물론, 첫 음을 잘못 쳐준 반주자에 대해서 화가 납니다. 더 나아가서 제가 할 부분을 제가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부르는 교우들에 대해서도 화가 납니다.

바로 그 순간, 새벽에 고해성사를 보면서 ‘내 자신을 낮추겠다.’며 다짐했던 것이 떠올려졌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뭐 화를 낼 일인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스스로 망신을 당했다고 생각하지만, 주님 앞에서 잘 난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누구나 다 실수를 하는 것이고, 누구나 다 주님 앞에서는 부족할 뿐인데요.

화를 내고 있는 것은 교만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새벽에 분명히 고해성사를 보면서 낮추는 삶을 살겠다고 했으면서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금세 잊어버리고 다른 이로부터 인정받는 높은 자리를 탐내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제 자신의 성찰을 통해 실수한 것이 오히려 감사하더군요. 그래서 공지사항 시간에 신자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좋으셨지요? 제가 오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부분을 틀려서, 미사도 보고 또 쇼도 봤잖아요. 얼마나 감사할 일이에요?”

이렇게 편하게 웃으면서 말할 수 있었던 것. 이것 역시 또 하나의 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그러한 기적은 내 삶 안에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주님의 뜻이 아니라, 내 뜻만을 세상에 드러내려는 교만함으로 인해 그 기적 체험을 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요나 예언자의 말을 듣고서 모두 회개한 니네베 사람들에 비해서, 요나보다 더 큰 분이 이 자리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회개하지 못하는 이스라엘 사람을 꾸짖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회개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눈에 보이는 표징만을 요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즉, 그들은 자기 뜻에 따라서 움직이는 마술사 예수님만을 원했던 것이지요. 그래서 그들은 주님과 함께 있다는 사실이 가장 큰 기적임을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기적은 별 것이 아닙니다. 바로 일상의 삶에서 느끼는 주님 체험. 그보다 더 큰 기적은 하나도 없음을 기억하면서, 그 기적을 체험하는 오늘이 되길 바랍니다.




일상의 삶에서 주님을 체험하는 기적 같은 오늘을 만드세요.

 빠다킹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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