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카 복음사가는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서 태어났다. 이교도 집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그는 바오로 사도의 선교 여행의 동반자로서 주님의 복음과 그 복음의 선포 상황을 기록으로 남겼으니, 바로 루카 복음과 사도행전이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신 병자들의 상세한 부분까지 묘사한 그를 의사 출신으로 보는 전승도 있다. 또한 67년경 바오로 사도가 순교한 뒤, 루카는 그리스와 소아시아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80세의 고령으로 삶을 마감하였다고 전해진다
☆☆☆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이 댁에 평화를 빕니다!’
하고 인사하여라.(루가 10,5)
Into whatever house you enter,
first say,
‘Peace to this household.’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시며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에게 주어진 사명은 복음을 전하고 평화를 알리는 일이었다
☆☆☆
오늘 복음에서 들은 대로,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명의 제자들을 지명하시어, 몸소 가시려는 지역으로 당신에 앞서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십니다. 미리 준비되어 있으면 주님께서 편히 오실 수 있습니다. 곧 성령께서 당신의 능력을 쉽게 드러내실 수 있습니다.
스승보다 앞서 파견되는 제자들은 각오를 단단히 해야 했습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않고 떠나야 했기 때문입니다. 스승께서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셨을까요? 사람은 부족하면 할수록 더욱 애절해집니다. 선교사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야 하느님께 더욱 의지하고 그분의 은총에 기대게 됩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는 이러한 가르침이 숨어 있습니다.
그런데 물질의 부족을 느낀다고 모두가 하느님께 의지하는 것은 아닙니다. 없다고 짜증을 내거나 가진 자를 원망한다면 선교하는 사람의 자세라 할 수 없습니다. 진정한 가난은 자유로움에 있습니다. 곧 재물에 얽매이지 않는 마음에 있습니다. 스승께서 원하신 것은 이런 마음입니다.

하느님의 전사(戰士)
-이수철 신부-
“내 남편은 전우(戰友)입니다.” 예전 어느 자매님이 한 말씀입니다.
남편은 힘든 세상 삶의 전쟁에서 생사고락을 함께하는 전우라는 것입니다.
총칼은 들지 않았다 해도 치열한 생존경쟁이 난무하는 전쟁터 같은 삶에서
부부간의 일치가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이야기겠지요.
수도생활의 전통적 주제 중 하나가 ‘영적 전투’입니다. 누가 가라지이고
누가 밀인지, 누가 이리고 누가 양인지 분별하기 힘들지만 우리의 삶은 선과 악이
공존하는, 끊임없이 긴장과 경계를 요하는 영적 전투가 벌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복음의 제자들처럼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이리 떼 같은 세상에 파견된
양들과 같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평화로 무장한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소유에 집착하는 세속적 삶에 거슬러 무소유의 정신과 깨어 있는 삶으로
주님의 복음과 평화를 전하는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우리는 성 프란치스코의 ‘평화의 기도’에서처럼 선으로 악을, 사랑으로 미움을,
희망으로 절망을, 믿음으로 불신을 이겨내야 하는 하느님의 전사들입니다.
하여 가정이든 수도원이든 형제애와 전우애로 충만하고,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주님을 잘 따른다면 삶의 전쟁터에서 영적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을 것입니다.

저도 보내주세요!
-안성철 신부(성바오로수도회)-
오늘 복음에서 예수께서는 당신에 앞서 일흔두 제자를 파견하신다. 이들을 파견하시면서 우리에게 사도란 어떤 사람인지를 잘 가르쳐 주신다. 사도란 예수님한테서 하느님 나라, 곧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부르심을 받고 세상으로 파견된 사람을 말한다.
사도들이 갖추어야 할 조건이 세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화장품을 파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화장품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그래야만 그 화장품을 사람들에게 잘 소개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사도들도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들에게 전하기 위해서는 그분에 대해 누구보다도 잘 알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잘 알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성경, 특히 복음서를 열심히 읽는 것이다.
사도가 갖추어야 할 두 번째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를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것이다. 아무리 그분에 대한 지식이 많다 하더라도 그분을 사랑하지 않고서는 사람들에게 그분을 선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화장품을 파는 사람의 경우 아무리 화장품에 대해서 잘 안다 하더라도 그 화장품에 대한 확신이나 사랑이 없다면 누구에게도 권하지 않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성체조배를 자주 하는 것이다. 그분을 조용한 가운데 자주 만나다 보면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되고 그분을 사랑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사도가 갖추어야 할 조건은 예수 그리스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기를 원하고 자기 자신은 그저 도구로 쓰일 뿐, 사람들 앞에 나서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이 나보다 그리스도께 인도되는 것을 기쁨으로 생각하는 것, 곧 겸손의 덕을 갖추어야 한다.
이상 세 가지 조건을 갖춘다면 나는 훌륭한 사도로서 파견될 수 있고 그 상급은 하느님 나라에서 백 배, 천 배로 받게 될 것이다.

영혼과 육신의 치료자 루카
-경규봉 신부-
루카(총명하다, 빛나다는 뜻)는 안티오키아 지방 출신의 의사(골로 4,11)로서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저술하였다. 루카는 사도 바울로의 제 2차 전교여행 때 그를 수행하였으며(51년경), 57년까지 필리피 지방에 머물면서 그곳의 공동체를 지도하였고, 바울로가 제 3차 전교여행을 할 때에 바울로를 수행하였다.
그는 바울로가 수감 중이던 61-63년까지 로마에서 지내며 바울로의 뒷바라지를 했고, 바울로가 재차 투옥되었을 때에도 바울로와 함께 있었다. 바울로가 순교한 후에 그리스로 건너가 아카이아 지방에서 전교했다. 그 후 소아시아 지방에 가서 주님을 위해 갖은 고초를 다 겪었고 84세의 고령에 아카이아 지방에서 귀천하였다고 한다. 그의 유해는 콘스탄티노플로 옮겨졌으며, 교회는 그를 성인 반열에 올리고, 의사들의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있다.
이방인이었던 루카는 이방의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썼다.
루카복음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파스카 사건 곧 수난과 부활이 이루어지는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심을 강조하며, 사도행전은 이 사건에 대한 설교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감을 이야기한다(사도 1,8).
루카복음서는 전체적으로 주님이신 예수님의 신비가 점진적으로 계시되는 모습, 그리고 장차 그분의 메시지를 선포하게 될 제자들이 그 계시에 완만하게 접근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 루카는 무엇보다도 독자들이 예수님의 신비에 다가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그는 가난한 이들과 죄인들과 이방인들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함께, 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만민의 구원자로 보여 준다. 또 그분을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를 요구하시고, 동시에 그들을 받아들이시며 은혜를 베푸시는 생명의 주님으로 드러낸다.
특히 성령의 활동을 강조하여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잉태하셨고(루카 1,35), 성령의 권능을 지니고 행동하신다(3,22; 4,1). 그리고 제자들은 예수님으로부터 받은 사명을 성령의 은혜를 입어 수행한다(24,49). 루카는 죄인들과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지극한 사랑과 자비를 강조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죄 많은 사람들,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 및 이방인들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바치셨으며, 온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신다는 점을 강조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어느 집에 들어가든지 먼저 그 댁에 평화를 빌어주고(루카 10,5),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음을 전하라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에 따라 의사였던 루카는 그리스도를 만난 후 그리스도를 온전히 본받기 위하여 평생을 독신으로 지내면서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화의 복음을 전파하고, 병자들을 고쳐주는데 일생을 바쳤다. 그는 영혼과 육신의 진정한 의사이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불쌍한 이들의 영혼과 육신을 치유해주고자 했다. 그는 언제나 겸손하게 살면서 모든 것이 주님의 은혜라고 믿는 겸손한 신앙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므로 오늘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맞이하여 우리도 루카처럼 자신이 받은 달란트를 충분히 활용하여 이웃에게 평화와 기쁨의 복음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자.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그들에게 주님의 사랑을 전하는 신앙인이 되자..............◆

그리스도교인의 기본 정체성
-김인환 신부-
찬미 예수님!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는 바울로같이 이교도 출신의 개종자였습니다.
개종한 후 바오로와 함께 주님의 뒤를 강인하고 듬직한 성품으로 따라갔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성 루카를 소의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일 겁니다.
여러 성인들의 축일 특히 복음사가의 축일이 되면 그리스도교인의 기본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합니다. 특히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에 묵상하게 되는 오늘 복음 내용은 더욱 그런 정신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이 말씀에 따라 어떤 한 인물을 상상해 봅시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한 인물은 돈도 가지지 않고, 짐도 꾸리지 않으며, 신발조차 신지를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람들에게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가야할 바를 향해 꿋꿋이 나아갑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는 마치 숭고한 정신을 지닌 구도자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집을 나서서 바깥에서 잠을 자고 올 경우가 생기게 되면 나가서 생활하게 될 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떠납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인 경우에는 가지고 가서 꺼내보지도 않고 그냥 싸가지고 갔던 그대로 가지고 온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실제로 이것 저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 열심히 짐을 꾸리지만 막상 필요한 것은 그것보다는 좀더 간소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내용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께 직접 파견을 받아 먼 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작게는 칫솔부터 시작해서 만일에 대비해서 돈도 어느 정도 챙길 것이고, 갈아입을 옷가지들도 다 준비해서 떠날 겁니다. 그런데 가장 잊지 말고 챙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전할 주님의 기쁜 소식이 그것입니다.
다른 많은 것은 급하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해결할 수가 있지만 말씀을 전하러 떠나는 내가 정작 그 말씀에 대해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몸짓에 불과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복음에 관한 자신의 정체성이 없어져 버리면 그는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성경구절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있어서 어느 무엇보다 복음을 가장 우선시 하되 그 정신을 흐리게 하는 어떤 것도 배제 해라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던지 거기에는 선택과 결정이라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아침밥을 먹을 것인지, 굶을 것인지, 버스를 탈 것인지 지하철을 탈 것인지 등 이런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보다 중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택과 결정들이 우리의 하루 생활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길게 생각해 보면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렸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흐른 뒤의 그 모습이 다르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신심단체 활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저 사람 미운데 성당 그만 나올 것인지, 신부님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다른 성당으로 한번 옮길 생각인지 같은 생각들이 종종 우리들의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의 확실한 기준이 되는 것은 오늘 복음이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생각하면 자주 볼 수 있는 미사 한번쯤 빠질까 생각도 들 것이고, 같은 단원과 회합하는 것 보다 그 이후에 있을 재밌는 자리에 대해 관심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와 신발 같은 그런 관심사들은 내가 무엇을 하러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자기 반성을 통해 극복해야 합니다.
신앙은 여가 생활이 아님을 다 아시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초대받은 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에게 어떤 생활을 요구합니까? 오늘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는 오늘 신앙의 초대는 바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로 내어 던지는 행위임을 알게 합니다. 신앙인은 그 신앙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소의 그림으로 표현되는 우직하고 듬직한 루카 사도가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놓여진 결정의 순간에 선택했던 것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나를 돌아봅시다. 주님보다 나를 선택했던 그 순간들, 배려하는 삶보다 이기적인 욕심을 선택했던 때를 반성합시다.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는 것은 첫째는 주님의 이끄심이고, 둘째는 내가 주님의 이끄심을 수용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떠나라, 전하라!
-이재명 신부-
“떠나라!”... 이 말은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이 세상에로 파견하실 때 말씀하신 첫 번째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당신의 제자들을 파견하실 때의 심정은 ‘양을 이리 떼 가운데 보내는 아슬아슬하고 안타까운 심정’이셨습니다. 왜냐하면 그분의 제자가 된다는 것 자체가 세상을 떠나 어디 다른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 한 복판으로 들어가는 것을 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한 발 앞서 이미 세상 속에 오셨고 그 세상 속에 계셨기에 예수님께서 “나를 따르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말씀 안에는 “세상 속으로 들어오라”는 뜻이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위해 기도드릴 때 “아버지, 제가 원하는 것은 그들을 이 세상에서 데려가시는 것이 아니라 악마에게서 지켜달라는 것입니다”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셨듯이 이제 예수님도 제자들을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런데 어둠인 세상이 빛으로 오신 예수님을 거부했듯이 제자들이 찾아가야 할 세상 역시 그들을 잡아먹으려고 노리는 이리떼와 같았습니다.
원수들이 우글거리는 곳에 양처럼 착한 제자들을 보내시면서 예수님은 당신이 주실 수 있는 최대의 장비를 주고 싶으셨을 것입니다. 군인이 강한 것은 그 손에 총이 있기 때문입니다. 부하를 전장에 내보내는 사령관의 심정이야 가능한 한 최신예 무기로 무장시켜 주고 싶은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과연 예수님도 제자들을 그냥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놀라웁게도 예수님은 완전히 무장 해제시키시고 맨손으로 보내십니다. 맨손으로 보내시면서도 이 세상에서는 그 보다 더 좋을 수가 없는 무기 즉 하느님의 갑옷을 입혀서 이 세상에 보내십니다. 그 옛날 다윗이 사울이 준 무거운 도구를 벗어 버리고 하느님만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면서 거인 골리앗과 대항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오늘 우리가 축일을 지내고 있는 루가 복음사가도 주님의 떠나라는 명령을 받고 바오로 사도와 함께 여러 곳으로 전도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고백한 바와 같이, 몸에 아무것도 지니지 않은 채 오직 하느님만으로 무장한 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하느님 나라를 전파하였습니다.
같이 동행했던 바오로 사도가 로마에서 순교를 당한 후, 루가는 하느님의 말씀을 글로 남겼고, 그리고 홀로 그리스와 소아시아로 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다가 84세를 일기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도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그 옛날 제자들과 똑같이 이 세상으로 나아갈 것을 명 받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 속으로 파견하신 목적은 오늘 복음에서 들려주는 것처럼 다름 아닌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것과 병자들을 고쳐주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사람들은 제일 먼저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세상 끝까지 나아가서 전하였고, 병자들을 돌보고 약한 이들을 위로해 주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을 사는 우리들도 예수님의 제자답게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 말씀으로 무장한 채 우리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고, 우리 주변에 있는 소외된 이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떠나라’고 명령하신 뜻을 다시 한번 곰곰이 생각해 보면서 복음 말씀을 다시 한번 묵상해 봅니다.
“떠나라! 다닐 때 돈주머니도 식량자루도 신도 지니지 말 것이며 누구와 인사하느라고 가던 길을 멈추지도 마라. 어떤 동네에 들어가든지 너희를 환영하거든 주는 음식을 먹고 그 동네 병자들을 고쳐주며 하느님 나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다고 전하여라.” 아멘...........◆

- 김인환 신부-
오늘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입니다. 루카는 바울로같이 이교도 출신의 개종자였습니다. 개종한 후 바오로와 함께 주님의 뒤를 강인하고 듬직한 성품으로 따라갔던 인물입니다. 그래서 성 루카를 소의 모양으로 표현하는 것일 겁니다.
여러 성인들의 축일 특히 복음사가의 축일이 되면 그리스도교인의 기본 정체성에 대해서 생각해 보곤 합니다. 특히 루카 복음사가의 축일에 묵상하게 되는 오늘 복음 내용은 더욱 그런 정신을 생각하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돈주머니도 여행 보따리도 신발도 지니지 말고, 길에서 아무에게도 인사하지 마라.’
이 말씀에 따라 어떤 한 인물을 상상해 봅시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한 인물은 돈도 가지지 않고, 짐도 꾸리지 않으며, 신발조차 신지를 않았습니다. 거기다 사람들에게 아는 체도 하지 않고 묵묵히 고개를 숙이고 자신이 가야할 바를 향해 꿋꿋이 나아갑니다.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저는 마치 숭고한 정신을 지닌 구도자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우리는 집을 나서서 바깥에서 잠을 자고 올 경우가 생기게 되면 나가서 생활하게 될 각 상황에 따라 여러 가지 준비를 해서 떠납니다. 그런데 저 개인적인 경우에는 가지고 가서 꺼내보지도 않고 그냥 싸가지고 갔던 그대로 가지고 온 경우도 종종 발생합니다. 실제로 이것 저것이 필요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서 열심히 짐을 꾸리지만 막상 필요한 것은 그것보다는 좀더 간소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주님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복음내용에 나오는 것처럼 주님께 직접 파견을 받아 먼 길을 떠나야 한다고 생각해 봅시다. 아마 작게는 칫솔부터 시작해서 만일에 대비해서 돈도 어느 정도 챙길 것이고, 갈아입을 옷가지들도 다 준비해서 떠날 겁니다. 그런데 가장 잊지 말고 챙겨야 할 것이 있습니다. 내가 전할 주님의 기쁜 소식이 그것입니다.
다른 많은 것은 급하면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서라도 해결할 수가 있지만 말씀을 전하러 떠나는 내가 정작 그 말씀에 대해 어떤 생각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몸짓에 불과하게 됩니다.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람은 가장 중요한 복음에 관한 자신의 정체성이 없어져 버리면 그는 복음을 전하러 가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앞서 언급한 성경구절은 복음을 전하러 가는데 있어서 어느 무엇보다 복음을 가장 우선시 하되 그 정신을 흐리게 하는 어떤 것도 배제해라는 뜻으로 생각해 볼 수 있겠습니다.
어떤 행동을 하던지 거기에는 선택과 결정이라는 판단이 필요합니다. 아침밥을 먹을 것인지, 굶을 것인지, 버스를 탈 것인지 지하철을 탈 것인지 등 이런 시시콜콜한 것에서부터 보다 중요한 것에 이르기까지 많은 선택과 결정들이 우리의 하루 생활을 장식하고 있습니다. 길게 생각해 보면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렸느냐에 따라서 시간이 흐른 뒤의 그 모습이 다르게 만들어질 것입니다.
우리들의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미사를 갈 것인지, 말 것인지, 신심단체 활동을 할 것인지, 말 것인지, 저 사람 미운데 성당 그만 나올 것인지, 신부님이 별로 마음에 안 드는데 다른 성당으로 한번 옮길 생각인지 같은 생각들이 종종 우리들의 마음속에 찾아옵니다.
그러나 그 모든 선택의 확실한 기준이 되는 것은 오늘 복음이 가르쳐 주는 바와 같이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인간적인 마음으로 생각하면 자주 볼 수 있는 미사 한번쯤 빠질까 생각도 들 것이고, 같은 단원과 회합하는 것 보다 그 이후에 있을 재밌는 자리에 대해 관심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돈주머니, 여행 보따리와 신발 같은 그런 관심사들은 내가 무엇을 하러 이 자리에 있는가라는 자기 반성을 통해 극복해야 합니다.
신앙은 여가 생활이 아님을 다 아시고 계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초대받은 이 그리스도교 신앙은 우리에게 어떤 생활을 요구합니까? 오늘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지내는 오늘 신앙의 초대는 바로 자기 자신을 하느님께로 내어 던지는 행위임을 알게 합니다. 신앙인은 그 신앙을 위해 투신하는 사람들입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소의 그림으로 표현되는 우직하고 듬직한 루카 사도가 자신이 걸어가는 길에 놓여진 결정의 순간에 선택했던 것들을 한번 상상해 보십시오.
나를 돌아봅시다. 주님보다 나를 선택했던 그 순간들, 배려하는 삶보다 이기적인 욕심을 선택했던 때를 반성합시다.
이 모든 것을 이기게 해 주는 것은 첫째는 주님의 이끄심이고, 둘째는 내가 주님의 이끄심을 수용할 수 있는 신앙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입니다.

-전주교구 한기호 신부-
1세기 후반 어느 그리스도인이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집필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이름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필자가 누구인지 알 수 없는 실정입니다. 다만 2세기 말 리옹의 이레네오 주교의 저서 ‘반 이단론’과 180년경 로마에서 작성된 ‘무라토리 경전’목록에 ‘루카 복음서의 저자가 사도 바오로와 함께 전도여행을 한 의사 루카(콜로사이 4,14)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런 초대교회의 전승에 따라 오랜 세월 동안 루가 복음서와 사도행전의 저자는 ‘루카’라고 여깁니다.
루카 사도는 의사였습니다. 그래서 특별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다가오시어 치유자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잘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바오로 사도를 따라 다니면서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그 들은 바를 바탕으로 복음서를 기록했던 것입니다. 오늘은 그렇게 예수님의 말씀과 행적을 기록한 복음사가 루카 사도를 기억하는 축일입니다.
낙엽이 떨어지기 시작하는 계절입니다. 요즘은 가뭄 현상으로 인해 단풍도 예년같이 곱지 않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기도 합니다. 그래도 나무가 내는 단풍이 그저 사람들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생존을 위함이듯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음 선포는 보이기 위한, 내세우기 위한, 보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것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매일의 삶 속에서 주님의 사람으로 파견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복음 선포자에게 필요한 것은 ‘주께서 언제나 너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고, 그분께 매달리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의 논리와 이치에 따라 계산적으로 살 것이 아니라 주님께 대한 전적인 신뢰, ‘하느님께서 나와 함께 하신다’는 그 믿음으로 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늘 떠남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늘 파견되는 사도들입니다. 우리에게 맡겨질 영혼들을 위하여 준비합시다. 세상의 그들은 우리에게 식량자루나 신발이나 두개의 지팡이를 요구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고자 합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바오로 사도처럼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삽니다.’라고 고백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자비와 희망을 노래한 루카 복음사가
-서울대교구 이기양 신부-
루카는 예루살렘에서 멀리 떨어진 안티오키아 지방에 살았던 이방인 의사였습니다. 오늘 독서에 언급되어 있는 것처럼 루카는 바오로 사도의 전도 여행에 함께 하였고, 바오로 사도가 로마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유일하게 함께 한 인물이지요. 80년 경 루카는 본인이 듣고 체험했던 예수님에 관한 내용을 성령의 인도를 받아 글로 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루카 복음서와 사도행전을 완성함으로써 이 세상에 그리스도를 전달하였을 뿐 아니라 갓 태어난 교회의 역사를 기록으로 전하여 주었지요.
루카 복음은 공관복음서들 가운데 가장 길고 짜임새 또한 탄탄합니다. 루카 복음서뿐만 아니라 사도행전의 저자이기도 한 루카는 이 두 권의 책을 자신의 독특한 역사관과 신학 사상에 의거하여 치밀한 구도 아래 엮었습니다. 루카의 구세사는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는데 이스라엘 시대와 예수 시대, 교회 시대가 그것입니다. 이 구분대로 루카 복음 1,2장은 이스라엘 시대와 예수 시대를, 루카 복음 24장 52~53절과 사도행전 1장은 예수 시대와 교회 시대를 이어주는 역할을 합니다. 루카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 시대를 소개하였고, 사도행전을 통해서는 교회 시대를 소개하였습니다.
예루살렘에 도착하신 예수님께서 제일 먼저 하신 일은 성전정화였습니다. 유다인들의 눈에는 감히 성전의 권위에 도전한 것으로 보여진 이 사건이 도화선이 되어 예수님께서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고 결국 십자가형을 받기에 이르십니다. 그런데 갈릴래아에서 시작하여 온 유다를 걸쳐 예루살렘에 이른 예수님의 길은 십자가 처형, 곧 죽음으로 끝나지 않지요. 돌아가신 지 사흘만에 예수님께서는 부활하셨고, 부활하신 예수님의 승천으로 그 대단원의 막이 내립니다.
반면 사도행전에서 다루어진 교회의 길은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로 끝이 나고, 시간상으로 보면 성령강림에서 시작하여 예수님의 재림으로 끝이 납니다. 물론 사도행전에 따르면 로마에서 복음이 끝나지만 정작 루카의 마음 속에 교회의 길이 끝나는 시기는 예수님 재림시기입니다. 이러한 신학사상을 바탕으로 루카는 구원의 보편주의, 즉 하느님께 나아가는 구원의 길은 모든 이에게 열려 있음을 가르칩니다.
㰡’나는 이제 참으로 깨달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어떤 민족에서건 당신을 경외하며 의로운 일을 하는 사람은 다 받아 주십니다.㰡“(사도10,34-35)
하느님의 공평성을 확신한 말씀이지요. 이러한 신학적인 주장을 바탕으로 루카만의 고유한 신학사상이 펼쳐진 것입니다.
루카 복음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이 15장에 나오는 㰡되찾은 아들의 비유㰡‘입니다.
㰡’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㰡어서 가장 좋은 옷을 가져다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발을 신겨 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아라. 먹고 즐기자. 나의 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았다.㰡‘ 그리하여 그들은 즐거운 잔치를 벌이기 시작하였다.㰡“(루카15,22-24)
돌아온 아들을 진심으로 기뻐하며 따뜻하게 맞아들이는 아버지와도 같이 자비로우신 분이 우리의 하느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또 7장에는 죄 많은 여인이 옥합을 깨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어드리는 장면이 나옵니다. 19장에는 예수님과 세리 자캐오와의 만남이, 23장에는 십자가상에서 당신을 못 박는 사람들을 용서해주시기를 청하는 예수님을 만날 수가 있지요.
㰡’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㰡“(루카6,36)
이렇게 루카 복음은 㰡자비의 복음㰡‘으로, 하느님을 어떠한 경우에도 우리를 용서해주시고 받아주시는 자비로운 분으로 고백하고 있습니다.
두 번째, 루카 복음의 특징은 소외된 사람, 가난한 사람에 대한 배려가 그 어떤 복음보다도 많이 보인다는 것입니다. 10장의 㰡착한 사마리아 사람㰡‘ 비유에서 루카 사도는 가난하고 어려움에 처한 사람이 내 이웃임을 분명히 하고 있으며, 잔치에 손님을 청할 때는 가난한 사람, 불구자, 절름발이, 소경 등 소외된 사람들을 초대할 것(14장)을 가르칩니다.
또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은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9장)고 가르쳤으며, 제자들에게는 부모와 처자, 심지어는 자기 자신까지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고 따를 것(14장)을 역설했습니다. 그 길만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지요.
루카 복음서에 이어 쓴 사도행전은 잘 알다시피 㰡성령의 복음서㰡‘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모든 것을 접고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살아갈 때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성령께서 우리를 채워주신다는 것을 살아 움직이는 교회의 활동으로 보여주고 있지요. 또 기쁨의 복음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자비와 성령과 기쁨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루카 복음사가가 온몸으로 모든 것을 바쳐서 예수님을 고백했듯이 우리 또한 그의 고백이 담긴 성경을 읽고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고, 어렵고 힘 든 일들을 많이 만나는 것은 우리가 지나치게 나 자신만을 믿고 이 세상을 포기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본래 의사였던 루카 사도는 병자들에게 특별한 관심을 두고 그들을 대하신 예수님의 자비와 기적을 많이 수록하였고 그 기록은 우리에게 성경로써 귀한 메시지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루카 사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가르침대로 너무 나 자신에만 집착하지 말고 이웃과 만나는 사람들에게 자비로울 수 있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하고, 무엇보다도 우리의 주님을 이웃에게 전하는 복음 선포의 하루 하루를 위해 매진하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병자, 자기소외, 편협한 하느님 이미지, 하느님의 아픔
-이성우-
예수님이 가장 관심을 보인 이들은 바로 병든 이들이었습니다. 몸과 마음이 병들어 스스로 죄인이라 여겼던 이들이었습니다. 다른 이들도 죄인 취급하며 멀리했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도 스스로를 죄인이라 여겼기에 하느님 앞에 나설 수 없었고, 스스로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을 소외시켰던 이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모습을 가장 아파하십니다. 스스로 죄인으로 여기고 하느님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모습에 예수님과 하느님은 심장이 찢어지고 분통이 터지십니다.
우리를 하느님께 가지 못하게 하는 생각들은 무엇입니까? 우리 스스로 죄인이라 생각하여 하느님 앞에 나서지 못하게 하는 것들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 너는 죄인이니 오지 말고 의인만 오라고 하시겠습니까? 하느님을 그토록 속이 좁은 분이라고, 편협한 분이라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사고에 하느님은 속이 터지실 것입니다. 하느님 앞에 나오지 못할 죄인이 이 세상에 단 한 사람이라도 있겠습니까? 우리는 하느님을 참 좁은 분이라고 여기고 살아갑니다. 하느님은 우주를 만드신 무한히 넓은 분이십니다. 우리가 죄라고 여기는 사고와 장벽과 가치관들도 하느님은 품어 안으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이 가장 가슴 아파하시는 것은 우리들의 죄가 아니라 그 죄라고 여기는 것들 때문에 하느님 앞에 오지 못하는 우리들의 모습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들의 죄를 당신의 사랑으로 바꾸어주실 수 있는 넓은 품을 지니신 분이십니다. 우리들이 죄를 껴안고 하느님과 단절된 채 병들어 있거나 아니면 하느님께 그 죄를 갖고 가서 하느님 품에 안기거나그 선택은 우리들의 몫입니다.

신뢰하는 마음으로
-김정대 신부(예수회·인천 `삶이 보이는 창` 운영)-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부드럽다. 하느님은 늘 부드럽게 우리를 도구삼아 당신의 일을 하신다. 아무것도 지니지 말고 길을 떠나라는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용감함으로 무장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롯이 하느님을 신뢰하는 마음으로 길을 떠나라는 말이다. 이 신뢰하는 마음에는 용감함도 포함될 듯하다. 그렇다고 강함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러 가지 부족한 가운데 하느님의 일을 하게 된다. 완전한 상태란 어디에도 없다. 이런 부족한 상태에서 하느님의 일을 하다 보면 왠지 불안함과 두려움이 생긴다. 하느님께 대한 신뢰를 단지 용감함으로만 이해한다면 우리는 우리 안의 불안함과 두려움을 무시할지도 모른다. 이런 경우 용감함은 만용이 된다. 거기서 폭력이 발생한다. 무엇보다도 불안하고 두려워하는 자신에게 폭력을 가하게 된다.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사람은 타인한테도 폭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폭력을 행사하면서까지 당신의 일을 하도록 초대하지 않으신다.
하느님을 신뢰하는 사람은 단지 용감함만을 하느님께 바쳐드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부족함과 불안, 심지어 두려움조차도 하느님께 바쳐드린다. 신비롭게도 하느님은 이런 우리의 약함을 통해서 당신의 일을 하신다. 하느님은 우리가 강할 때는 우리에게 오지 못할 만큼 약한 분이시다. 그러나 우리가 상처 입고 약해졌을 때 비로소 그 약함 안에 자리잡고 당신이 원하시는 곳으로 이끄신다. 하느님은 약한 우리를 도구로 삼아 일하신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양승국신부-
<유연성, 부드러움, 낙관주의>
한 친절한 택시기사님의 체험담이 머릿속에 남아있습니다.
요즘 계속되는 플레이오프전 야구중계방송에 신경을 쓰다 보니 ‘전민동’으로 가자는 한 손님의 말씀을 거의 반대편인 ‘정림동’으로 착각하고 출발을 하셨답니다. 거의 도착하고 나서야 ‘이게 아니란 것’을 확인했던 기사님은 자신의 실수를 솔직하게 인정하고는 정중하게 사과를 드렸답니다. 그리고 늦었지만 친절하게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렸답니다.
기사님 쪽에서 크게 굽히고 들어가니 잔뜩 화가 났던 손님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거듭 ‘죄송하다’며 고개를 숙이고 미소를 짓는 그분의 얼굴을 바라보고 차마 화를 낼 수가 없었답니다. 기사님의 그 선한 얼굴과 몸에 밴 친절 때문에 비록 도착시간이 두 배로 걸렸으며 빙 돌아와서 미터기 요금도 많이 나왔지만 큰 마음먹고 요금을 내시더랍니다.
그러나 기사님 역시 “순전히 제 잘못으로 인해 벌어진 일이니까 절대로 요금을 받을 수 없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오.”하고 빨리 차를 돌려 나오셨답니다.
그 일이 있고 나자마자 즉시 두 가지 좋은 일이 동시에 생기더랍니다. 조금 달리다보니 당신이 응원하는 야구팀이 극적인 승리를 챙겼는가 하면, 조금 더 달리다보니 마음씨 좋은 장거리 손님이 승차하셔서 손해 본 요금의 몇 배나 벌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 한번 비우니 거기서 천국이 시작된다’는 말씀은 불변의 진리라고 저는 확신합니다. 이쪽에서 크게 한번 물러서면 상대편 역시 크게 물러서는 것은 공식입니다. 이쪽에서 확실하게 한번 양보하면 저쪽의 양보도 당연한 일입니다.
오늘 루가 복음사가 축일을 맞아 선포되는 루가복음에서는 복음 선포자의 자세에 대해서 잘 가르치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 참으로 힘겹고도 어려운 과제입니다. 복음 선포를 위해 나서는 신자들에게 즉시 와 닿는 것이 무엇입니까? 환영과 박수, 대대적인 결실이 절대 아닐 것입니다. 반대로 냉랭함입니다. 적개심입니다. 모멸감입니다. 문전박대입니다. 쓰라린 실패입니다.
어떤 시대, 복음 선포는 죽기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복음 선포가 목숨을 건 일생일대의 투쟁이었는가 하면, 때로 놀림감이 되는 지름길이기도 했습니다. 철저한 따돌림이나 집중적인 돌팔매를 자원하는 험난한 길이기도 했습니다.
복음 선포자들 앞에 전개될 이런 난감한 상황을 미리 잘 예견하셨던 예수님이셨기에, 관대한 마음, 한 걸음 물러설 줄 아는 유연성, 한없는 부드러움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거듭되는 실패에도 절대로 실망하거나 물러서지 않는 낙관적 삶의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분명히 예견되는 열악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을 파견하시는 예수님께서는 얼마나 걱정이 크셨던지 이런 표현까지 쓰십니다.
“가거라. 나는 이제 양들을 이리 떼 가운데로 보내는 것처럼 너희를 보낸다.”
복음 선포에 앞서 평화의 인사를 던지는 제자들에게 소금을 뿌리는 이교인들, 제자들 머리 위에 퍼부어질 갖은 욕설과 비난을 미리 예상하셨던 예수님께서는 그 어떤 상황 앞에서도 놀라지 말 것을 당부하십니다.
그 어떤 난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자신에게 다가오는 모든 상황을 복음 선포의 기회로 삼으셨던 루가 복음사가의 축일에 복음 선포와 관련된 우리들의 마음자세를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복음의 축복을 나누려고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더 없는 보람으로 여겼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갖은 박해와 반대에 부딪히면서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단 한 번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도 두려워하지도 않았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기쁜 소식을 듣는 사람들은 많지만 그것을 전하는 사람들이 적음을 항상 가슴아파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세상은 사제들로 가득 찼었지만 주님의 밀밭에서 일하는 일꾼들은 턱없이 부족했음을 안타까워했던 루가 복음사가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의 일생을 끝없이 묵상했으며 세밀하게 적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자신의 생활로 복음을 실천했습니다.
둘씩 보내며
-이회진신부-
초세기 그리스도교 신앙이 급속도로 세상에 퍼져 나간 것은
바오로 사도를 위시한 많은 선교사들의 불같은 선교 열정과
예수님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처음에 홀로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말씀
그리고 죽음과 부활의 기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세상으로 나아갔습니다.
그런데 차츰 이런 순회 선교사들의 모습 안에서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리스도교 선교사들의 열정과 사랑을 이용하여 자신의 편의를 추구하는 이들도 있었고,
열정과 사랑은 있었지만 하느님의 지혜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하는 이도 있었고,
공적 가르침이 아닌 개인의 견해를 전달하여 교회에 분란을 일으키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둘씩 짝지어 파견한다는 말은 이러한 초세기의 개별적인 순회 선교사들의 활동이
이제 지역 교회 안에서 선교사를 공적으로 파견으로 현상을 반영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이 쓸 것들의 여분을 가지지 않지만
자신들이 수고에 대한 정당한 대우를 받습니다.
이 집 저 집 돌아다니며 자신의 편리함을 추구하지 않고
한 집에 머물며 하느님이 주시는 평화를 전달합니다.
한 집에 머문다는 것은 교회에 공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공적으로 일을 한다는 의미이죠.
그들은 “둘씩 짝지어” 파견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파견된 곳은 “주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곳”이었습니다.
이를 신학적 영성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해도 우리의 신앙이 결코 혼자 걷는 길이 아니며,
목적이 없는 것도 아님은 너무나 분명합니다.
우리는 함께 걸어야 하고,
우리가 걸어가는 그곳은 주님께서 가시려고 하는 곳입니다.
그곳에 가져가야 할 것은 자신을 편안하게 할 어떤 물건이나 도구들이 아닌,
하느님의 마음과 하느님에 대한 자신의 열정일 뿐입니다.
그러나 이 여행은 혼자가 아닌 “함께하는 여정”이어야 합니다.
교회와 함께 걸어야 하는 길이고,
교회의 사목자와 교회의 선교사들과 함께 걸어야 하는 길이며,
우리 삶을 둘러싸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걸어야 할 길입니다.
사회에서 일할 때뿐만 아니라 교회 안에서 일할 때조차도
많은 경우 우리는 사람들 때문에 고민하고 교회를 떠나는 일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함께 고민하고 함께 어려움을 극복해 나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우리를 주님께서 가시려는 곳으로 “함께” 파견하시며,
“함께” 그곳에서 교회의 이름으로 우리가 그곳에서 당신을 만나길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고백하고 산다는 것은 편안함의 시작이 아니라
“함께” 무엇이나 그분과 같이 하고,
“함께” 주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이들과 주님의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둘이 같이…
“주님, 손이 하나가 아닌 것에 감사합니다. 한 손으로 잡아끌지 않고, 두 손으로 품어 안고 가겠습니다. 아멘.”


새벽을 열며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어떻게 할까요? 아마도 매일 차를 닦고 광내며 이것저것 손을 볼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시간을 소비하면서도 전혀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겠지요. 그렇다면 정원 가꾸는 것을 사랑하는 사람은 어떨까요? 이 분 역시 마찬가지이지요. 꽃을 다듬고 거름을 주고, 어떻게 하면 더 잘 키울까를 연구하면서 그의 시간 대부분을 여기에 소비하더라도 여기에 투자하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깝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자신의 주업이 이것일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지만, 주업이 아니더라도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쏟는 시간에 대해서는 아깝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습니다. 사실 저도 그렇거든요. 차는 시간이 없다고 하면서 세차하지 않으면서, 자전거는 시간만 나면 깨끗이 세차를 합니다. 차에서 이상한 소리가 나면 ‘그래도 지금은 굴러가니까 나중에 시간나면 가지.’라면서 한참 뒤에야 정비소를 찾아가면서도, 자전거에서는 조금만 소리가 나도 얼른 자전거 삽을 찾아가서 A/S를 받습니다.
왜 그럴까요? 좋아하고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점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사랑하는 곳에 시간과 마음이 있다.”
본당에 있으면서 많은 형제자매님들을 만납니다. 그들 중에는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들이 있는 반면에 일주일에 한번 미사 참석하는 것조차도 힘들어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우리 본당의 교적 상 신자가 5,300명인데 이에 비해 미사 참석하시는 숫자는 1,300~1,400명 정도밖에 되지 않는 것을 보면 쉽게 알 수가 있지요.
열심히 봉사하시는 분들과 그렇지 못한 분들의 차이는 과연 무엇일까요? 시간이 있고 없고? 아닙니다. 사랑하는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입니다. 주님을 그만큼 사랑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열심히 봉사를 하면서 생활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은 성 루카 복음사가 축일을 기념하고 있습니다. 그는 루카복음과 사도행전을 직접 쓰면서 예수님의 기쁜 소식을 세상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지요. 그렇다면 그가 시간과 능력이 남아서 이러한 일을 했을까요? 아닙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여기에 온 힘을 다했던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시간이 없다고, 시간이 아깝다는 불평과 불만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앞서도 말씀드렸듯이 많은 분들이, 시간이 없다는 이유로 성당에 나오지를 않으며 성당 나오는 것 자체를 시간 낭비하는 것으로 생각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가 “이제 성당 나오셔야지요?”라고 말씀드리면 이렇게 이야기 하세요. “나중에 늙어서 할 일 없어지면 나가겠습니다. 지금은 열심히 돈 벌어야지요.”
주님께서 “수확할 것은 많은데 일꾼은 적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교회의 지도자가 적다는 것보다도, 주님을 사랑하는 사람이 적다는 말씀이 아닐까 싶습니다.
지금 나는 과연 주님께서 인정하는 일꾼인지를 반성해 보세요. 그리고 주님을 사랑해서 주님의 일에 시간과 마음을 함께 하고 있었는지도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졌으면 합니다.
주님을 위해 나의 시간과 마음을 봉헌합시다.
빠다킹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