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Peter Gallagher 신부님]

2007. 4. 23. 오전 9:5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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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글은 예수회 Peter Gallagher 신부님의 루가 복음 11:5-13까지의 강론을 번역한 것입니다.
 
1747년 5월 7일, 마침내 프리시아의 프레데릭 대제는 요한 세바스찬 바흐를 만나게 됩니다. 이 만남은 – ‘충돌’ 이라 하는 게 더 맞는 말이겠지만 – 긴장이 가득한 만남이었습니다. 왕은 젊고 힘이 있고 이성적인, ‘전사(戰士)’ 라고 하는 게 더 어울릴 만한 사람이었던 반면, 바흐는 다소 의존적이며 신심이 깊고 영적인, 늙은 예술가였습니다. 프레데릭은 종교를 경멸했고 전례를 위한 작품에 어울릴 전통적 음악 기법과 초월적 체험을 북돋는 데 사용되었던 대위법을 우습게 여겼습니다. 이 마음씨 좋은 듯 보이는 왕에게 음악은 바로 ‘이’ 세상을 위한 것이었으며, 다른 어떤 세계에 이르는 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왕족에게 바흐는 끔직한 적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라고 적어 넣는 사람이었으니까요. 반면 바흐에게 왕의 태도는 사유와 감정을 불필요하게 억압하는 것으로 보였을 따름입니다.
 
때문에 프레데릭 대제는 이 늙은 작곡가에게 망신을 주고 싶었습니다. 왕은 라이프치히에서 포츠담까지의 긴 마차 여행에 곤죽이 되어 있던 바흐를 쉴 틈도 주지 않고 왕궁으로 불러 들였습니다. 계산 빠른 이 왕은 한 천재를 곤궁에 빠뜨릴 비책을 마련해 두었던 것입니다. 그날 저녁, 이성의 궁전에서, 그는 바흐에게 자신이 작곡한 길고도 복잡한 선율을 바탕으로 3부 푸가를 즉흥적으로 작곡하도록 시켰습니다. 노인은 모든 궁정 앞에서 이것을 해야 했으며, 그 가운데에는 바흐의 뛰어남에 매력을 느끼고 있던 다른 저명한 작곡과와 뛰어난 연주가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프레데릭의 궁록을 먹고 있던 이 재판관 가운데에는 바흐의 아들 칼 필립 엠마누엘 바흐도 있었습니다.
 
약 200년 전 아놀드 쇤베르크가 지적했듯이, 왕이 주었던 선율은 대위법에 최대한 들어 맞지 않도록 악의를 가지고 작곡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바흐는 일어서 왕의 명을 받아 들였습니다. 그는 바로 그 자리에서 하나의 역작을 만들어 낸 것입니다. 왕과 청중들은 모두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 있었겠습니까? 하지만 프레데릭은 이 고리타분한 노 작곡가를 반드시 무찌르고 싶었습니다. 그는 갑작스레 명을 바꾸어, 주제 선율은 6성을 위한 푸가가 되어야 한다며 새로운 요구사항을 더했습니다. 이것은 불가능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바흐는 거절했습니다. 왕궁에 있던 사람들은 그러면 그렇지 하면서 미소를 지었습니다. 왕은 승리했으며, 그의 적은 초라하게 물러나 마차에 올랐습니다. 하지만 바흐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라이프치히에 돌아와 그는 약간의 시간을 더 들여, 프레데릭이 낸 수수께끼를 풀 방도를 찾아 나섰습니다. 그리고는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이것이 모든 대위법 작품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음악의 헌정 (BWV 1079)’ 라고 알려진 작품입니다.
 
아첨하는 듯 보이겠지만, 바흐는 하나의 캐논에 ‘음표가 올라갈 때마다 왕의 영광 또한 올라 가리라’ 라고 덧붙였습니다. 물론, 음표는 계속 떨어집니다. 다른 곳에서는, 프러시아의 왕을 찬양하고 싶다고 적어 놓으면서도, 음악 자체에는 너무나 단조로운 음조를 사용하여 아첨보다는 오히려 왕을 꾸짖는 소리가 더욱 크고 명확하게 들리게 했습니다. 왕에게 바치는 이 ‘미소한’ 헌정에 사용되는 선율은 계몽주의 왕정을 조롱하는 것이었지 공경하는 것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최근의 몇몇 작가들이 그랬듯, 이 왕과 예술과의 싸움을 신앙과 이성의 싸움, 혹은 전통적이고 신심이 깊은 지적 열망과 교만하고 근대적인 이성주의의 야심 사이의 싸움으로 보자면, 승리자는 분명 신앙 이었습니다. 바흐의 음악은 진정으로 하느님께 바쳐진 반면, 저 이성적 통치자는 고리타분하고 늙은 천재에게서 ‘빚좋은 개살구’를 선물로 받았던 것입니다. 우아한 듯 보이면서도 은근히 속을 긁어 놓는 이 선물이, 말할 나위 없이 뛰어난 예술 작품이었긴 하지만 말입니다.
 
‘음악의 헌정’은 참으로 유쾌한 작품입니다. 아마도 신앙의 상징은 자주 이성의 상징보다 더 사랑스럽고 사랑할 만한 것인가 봅니다. 사실 이성은 상징이 결여된 것처럼 보입니다. 기껏해야 아주 차가운 상징을 가지고 있다고 할까요? 물론 이성이 지닌 초겨울의 싸늘함이 종종 우리를 매료시키기도 합니다. 그 결과 우리는 신앙이 지닌 바로크 양식과 같은 화려한 장식에 흥미를 잃게 되기도 하지요. 그리고 하느님께 스스로를 봉헌하면서 찾게 되는 깊은 충만함이 지긋지긋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달리 보는 길도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가 오늘 들은 복음 말씀과 잘 맞는 길이 하나 있다면,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끈질김에 관한 것 입니다. 두드리면 열릴 것이고, 청하면 주어질 것이고, 구하면 찾게 될 것이라는. 왜냐하면 하느님과의 가장 불편하고 가장 지루하며 가장 피곤한 관계에서도 우리 인간은 늘 무언가를 받고자 희망하고 또 그런 희망은 참으로 정당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진보를 하고, 더 이성적인 사람이 되고 싶고, 더 나아지고, 더 많이 알고, 진정으로 바람직하고 가치로운 것을 더 많이 갖고 싶어하고, 또 이해하고 싶어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런 것들에 많은 것을 금방 주실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로 우리가 요구하면 별 답이 없으십니다. 때문에 일종의 명령이 하느님에게 가해집니다. 우리를 더 이성적으로 만들어 주시오, 하느님! 우리를 더 지혜롭게 만들어 주시오, 하느님! 우리가 알 수 있도록 도와주시오. 우리의 불완전함을 치유해 주시오. 하지만 실망스럽게도, 우리의 ‘명령’에 하느님께서는 뒤로 물러 서시는 것 같습니다. 또는 처음에만 좀 대단한 무언가를 보여주시다가는 정말 우리가 원하는 것을 들어주는 것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으시던가 아니면 그렇게 할 능력이 없어 보이십니다. 그저 선과 악을 구별하게 하는 나무 열매를 우리 주위에 두고, 그것에 손은 못 대게 하는 것이 하느님이 우리를 다루는 변함없는 방식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이런 굼뜬 모습에 화가 나서, 혹은 지쳐서, 우리는 방황하고 결론을 내리곤 합니다. 신앙과 이성은 언제나 서로에게 망신을 주고 싶어하는 속 좁은 관계를 지속할 뿐이라고.
 
하지만 그 사이에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마차에 오르시어 서둘러 라이프치히로 돌아가셨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는 다시 노트를 꺼내어, 다시 우리를 기쁘게 해 주시려고 열심히 연구하고 계신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언젠가 그분은 우리가 그분에게 드렸던 그 주제들을 조화롭게 다시 짜 맞추어, 우리를 놀라게 하고 기쁘게 할 ‘헌정품’을 준비하고 계실지도 모릅니다. 혹은, 아마도 더 가능성 있는 이야기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헌정한 그 작품이 너무나 당혹스러워서, 우리가 계속해서 더 도전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프레데릭 대제가 그랬듯이, 이제는 정작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잊은 채, 플룻이 아니라 칼로 하는 전투를 행하고 있는 건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계속 청한다면, 우리가 끈질기게 매달린다면, 우리는 우리가 참으로 원하게 되는 것을 얻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놀림감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 무한히 가치로운 것, 무한히 즐겁고, 무한히 영감을 주는 것으로 이끌려 갈 것입니다. 우리의 진보는 마치 게걸음 같으나, 그것은 진정한 진보입니다. 물론 걸림돌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무언가 봉헌할 것을 가지고 나왔던 바로 그 영감의 원천으로 고통스럽게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봉헌이란 쉽지 않은 것입니다. 하지만 대위법에서처럼, 우리는 이전에 되풀이 해왔던 것을 다시 행하고 있음을 깨닫게 될 것 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갑자기 익숙해 질것입니다. 그리고 그 익숙한 방식은 신앙과 이성을 통해서, 그리고 기쁨을 통해서 끊임없이 새로와 질 것입니다. 우리는 기꺼이 봉헌합니다. 그리고 기꺼이 봉헌할 때에 넘치게 되돌려 받습니다.
 
- Peter Gallagher, SJ (윤 이냐시오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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