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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 제3주일 2007년 4월 22일
요한 21, 1-19. 사도 5, 27-32. 40-41
오늘 복음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던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이 발현하신 이야기입니다. 초기 교회는 이런 발현의 이야기로써 부활하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흩어졌던 제자들은 그분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체험하면서 예루살렘으로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이 죽음 앞에 흩어져 도망가던 모습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오늘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이 전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서슬이 퍼런 성전 경비대장과 수석 사제들 앞에서도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고 당당히 증언합니다. 그 증언과 더불어 교회는 발족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말미암은 절망을 딛고 교회는 출범하였습니다. 제자들은 돌아가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고 말하면서 유대 교권 당국으로부터 박해당하고 대부분이 그 믿음으로 말미암아 목숨을 잃었습니다. 오늘 들은 사도행전은 유대교 당국으로부터 사도들이 심문 당하고 비난받는 것은 유대교 당국의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복음을 선포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사도행전은 오늘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끝맺습니다. ‘사도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면서 의회를 물러나왔다.’ 십자가에 돌아가신 예수님이 살아 계시다는 부활 체험이 그들에게 없었다면, 제자들이 그런 역경에서 복음을 선포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 복음의 고기잡이 이야기가 말하고자 하는 바가 있습니다. 제자들은 밤새 고기를 잡지 못하였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분의 말씀을 따랐더니 그들은 많은 고기를 잡았습니다. 제자들 중 여러 사람이 갈릴래아 호숫가의 어부 출신입니다. 그들에게 고기를 잡는다는 표현은 일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시작된 제자들의 일, 곧 복음 선포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는 말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멀리 떨어진 곳에서 제자들을 지켜보고 말씀하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당신의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일하는 제자들을 멀리서 지켜보고 말씀하신다는 믿음을 반영한 이야기입니다.
이어서 호숫가에서 예수님은 제자들과 회식하십니다. 예수님이 주관하시는 회식입니다. 제자들을 회식에 초대하고 빵과 생선을 집어 주는 이는 부활하신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과 함께 하시던 식사에 대한 회상이 가미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평소에 제자들과 함께 식사하셨습니다. 그 식탁에서 듣는 예수님의 말씀들은 대단한 해방감을 주었습니다. 율사와 제관들이 실세로 행세하는 유대교 세상에서 사람들은 율법과 성전 제사 의례에 얽매여 살았습니다. 율사와 제관들은 걸핏하면 죄인이라 말하고, 죄인은 하느님이 가차 없이 벌하신다고 가르쳤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님의 말씀들은 ‘새 하늘과 새 땅’을 체험하게 하는 놀라운 기쁜 소식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느님은 선하고, 사람들을 단죄하지 않고 살리시는, 자비로운 분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셨다는 말은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 제자들이 예수님과 함께 식탁에 앉아 들었던 그분의 말씀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온 것이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는 말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신앙인은 복음서들 안에 있는 예수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체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식사 후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질문하십니다. ‘이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나를 사랑하느냐?’ 베드로가 ‘예, 주님!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십니다.’라고 고백하자 예수님은 ‘내 어린 양들을 돌보라.’라고 말씀하십니다. 같은 질문과 대답이 세 번 반복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체포되어 대제관과 총독의 관저로 끌려 다니실 때, 예수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일이 있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그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이 복음서는 수난 당하시는 예수님을 세 번 모른다고 말한 베드로로 하여금 부활하신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세 번 반복해서 고백하게 합니다. 그 고백을 한 후에야 비로소 베드로는 사도로 다시 파견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네가 젊었을 때에는 스스로 허리띠를 매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다. 그러나 늙어서는 네가 두 팔을 벌리면 다른 이들이 너에게 허리띠를 매어 주고서, 네가 원하지 않는 곳으로 데려갈 것이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하신 마지막 말씀은 ‘나를 따라라.’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기록되기 오래전, 기원후 65년 경 베드로는 이미 로마에서 십자가형으로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제1독서인 사도행전이 말하였듯이 ‘사도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 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하였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었습니다.
복음 선포는 인간이 혈기와 욕심으로 하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인은 해방과 용서를 필요로 하는 곳에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체험한 해방과 용서의 기쁨을 안고 갑니다. 예수님을 따라 십자가를 지고 해방과 용서의 기쁨을 사람들에게 알리는 것이 제자들의 복음 선포였습니다. 제자들에게 죽음은 스승이신 예수님을 따라 해방과 용서를 사람들에게 알리는 선한 일을 실천한 인생이 겪는 결말이었습니다. 제자들은 그 죽음을 넘어서 예수님을 만난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스승이신 예수님이 그들과 함께 살아 계실 때 하신 일을 역사 안에 실천하여 예수님이 사람들의 삶 안에 부활하여 살아 계시게 하였습니다.
하느님은 우리의 좁은 마음, 걸핏하면 미움에 빠지고,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섬김을 받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인간이 가진 우월감은 주변의 사람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 우월감은 재물이나 신분 때문에 생길 수도 있고, 자기는 훌륭한 신자라는 믿음에서 올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우월감에서 우리를 해방시키십니다. “종과 같이 섬기는 사람이 되라.” 혹은 “저희는 쓸모없는 종입니다. 해야 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이런 복음서의 말씀들이 우월감에서 우리를 해방시킵니다.
하느님은 인간을 차별하지 않으십니다. 교회 안에 발생한 신분들은 인간차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 다양한 역할이 있음을 말하는 것뿐입니다. 신앙인 모두 예수님을 따를 뿐입니다. 중요한 것은 오늘 복음의 제자들과 같이 예수님의 말씀 따라 노력하여 성과를 올리는 것입니다.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해방과 용서의 기쁨이 우리 안에 또 우리 주변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용서하고 살리십니다. 그 해방과 용서를 자기 스스로 실천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사람이 부활을 믿는 신앙인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
[강론] 부활 제3주일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2007. 4. 21. 오후 11:4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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