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어나시오
-전주교구 안철문 신부-
나는 사람들에게 내 본명(本名)을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이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한다. 내가 나운동 본당에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주일학교 어린이 하나가 편지를 주었는데, 거기에 “저는요, 신부님 세례명이 ‘일어나시오’인지 알았어요.” 라고 씌어 있었다. 이 꼬마아이에게는 ‘이냐시오’라는 귀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 성인의 이름이 “일어나시오”라는 말로 들렸던 모양이다.
그러나 “일어나시오”라는 이 한마디는 그저 아이가 보내준 편지에 적어놓은 잘못 표기된 이름이 아니라, 나의 모습을 새롭게 보게 하는 그분의 말씀이었다. 이 아이를 통하여 들려주신 당신을 향하여 항상 새롭게 일어나라는 그분의 사랑의 소리였다.
그렇다. 말씀을 향해 일어난다는 것은 짧은 내 삶의 과거를 붙들고 그 안에 안주하는 모습은 아니다. 또한 하루하루 나와의 타협을 통해 현재의 삶에 그저 만족하는 모습도 아니다. 설령 그 모습들이 내 능력의 한계이고, 지금 나의 처지로서는 합당한 입장이라 하여도 그것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리고 “일어나라”는 말씀에 귀 기울이고 깊이 고뇌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죽은 자들의 삶에서 말씀을 통해 영원한 삶을 희망하는 자의 삶에로 우뚝 설 수 있는 길이 아닐까?
아브라함이 떠나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도(창세12,1-4), 자캐오가 예수님 말씀을 듣고 나무에서 내려올 때도(루카19,1-10), 무덤에 묻힌 지 나흘이나 지난 라자로에게 큰소리로 “라자로야, 이리 나와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말씀을 듣던 사람들의 모습에서도(요한11,38-44),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었던 베드로에게서도(요한21,6) 주님의 말씀대로 일어나기 위한 자신과의 처절한 싸움과 고뇌의 모습이 보인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제자들을 만난다. 그리고 베드로에게 “나를 따라라”라고 말씀하신다. 또한 이 말씀은 오늘 나에게 주어진 말씀이기도하다. 그분을 따르기 위해서 어서 일어나자. 지금까지 입고 있던 나의 옷을 훌훌 벗어던지고, 생명이 충만한 부활의 옷을, 양들을 돌보라고 하시는 부르심의 옷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입고 일어나야겠다.
“일어나시오” 참 좋은 이름이다. 이 이름은 지금의 나에게도, 앞으로의 나에게도 꼭 맞는 이름인 것 같다. 아니 이름에 맞추어 그렇게 살기를 부활시기를 지내는 이때 다시 한 번 다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