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3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 4. 23. 오전 9:16:52

글자
오늘 제1 독서(사도 5,27ㄴ-32.40ㄴ-41)는
사도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을 베풀자 감옥에 가두었지만
주님의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풀려난 그들을
다시 데려다가 최고 의회에서 심문하는 내용에 대한 베드로 사도의 반박입니다.

사실 심문자는 “그 이름”이라는 표현을 하지만
예수님의 이름을 직접 부르지는 않습니다.
이미 대사제들과 사두가이파는 베드로 사도에게
“예수님의 이름으로는
절대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지시하였고”(사도 4,18),
“그들은 백성 때문에
그들을 처벌할 방도를 찾지 못하고 거듭 위협만 하고 풀어주었습니다.”(사도 4,21)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을 더 이상 떠올리기조차 싫었음을 드러내면서 심문을 합니다.
“그 사람의 피에 대한 책임”(5,28)이란
자기들이 예수님을 죽이지 않았다고 변명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다윗이 말했고(2사무 1,16)
에제키엘 예언자도 미리 말했습니다(33,4-6).

그러나 이어지는 베드로 사도의 대답은 단호합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5,29)는 말은
이미 최고 의회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여러분의 말을 듣는 것이 하느님 앞에 옳은 일인지
여러분 스스로 판단하십시오.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4,19-20)라고 했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일곱 아들 가운데 하나가
돼지고기를 먹으라고 강요받았을 때 했던 말(2마카 7,2)과 일치합니다.
다시 말해서 베드로 사도는 순교를 각오하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이어서
하느님께서 한량없이 성령을 주셨기(요한 3,34) 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인으로서 단호하게 말을 합니다.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나무에 매달아 죽인 예수님”이라고 하면서
율법학자들이 잘 알고 있을 신명기(21,22-23)의 표현을 강조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성령강림으로 말미암아 단지 그리스도를 증거할 수 있음을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은 물론 사도들이 성령으로 가득 채워졌음을 강조합니다.

베드로 사도의 증언을 듣고 최고 의회 의원들은 격분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유다 의회의 권위자이며 율법의 최고 스승인 가말리엘은
더 이상 어떻게 하지 못하고 단지 사도들을 매질하고,
이미 말했듯이(사도 4,18; 5,28),
더 이상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치지 말라고 합니다.
감옥에 넣어도,
매질을 해도 그칠 줄 모르는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에 대한 증언의 강도를 표현하기 위해서
루카복음사가는
베드로를 비롯해서 사도들이
모욕을 당할 수 있는 자격을 인정받았다고 기뻐했다고 합니다.

오늘 제2 독서(묵시 5,11-14)는
다니엘 예언서(7장)를 따라서
수난을 받으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어린양으로 부르면서
하느님께 찬미와 영광을 드리는 초기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잘 말해줍니다.
박해하는 이들 앞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있는 그대로 부르면서 찬미를 드릴 수 없기 때문에
어린양이라는 이름으로 바꿔서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요한 21,1-14)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세 번째 나타나셔서 살아계셨을 때
기적을 베푸셨던 방법(요한 6,9-14)으로 당신이 누구신가를 드러내시는 내용입니다.
오늘 복음은
도입부(21,2-3)와
예수님의 주도권(21,1.4-6),
그리고 증인들의 깨달음(21,7-13)으로 나뉩니다.

도입부:
주간 첫날 유다인들이 무서워서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을 때
부활하신 분의 발현이 있은(요한 20,19-23) 뒤에
제자들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옛 고향 갈릴래아로 돌아왔습니다.
마태오(28,7.16)와 마르코 복음(16,7),
그리고 초기 교회의 문헌에 의하면(베드로 복음, 58-60)
제자들이 이미 갈릴래아로 갔고,
오늘 복음에서도
베드로와 함께 일곱 명의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함께 모인 것으로 나타납니다.
일곱 명의 제자들은 전체 교회를 상징적으로 말해줍니다.
물고기를 잡으러 가자는 베드로의 건의에 모두 동조하는 모습에서
베드로의 역할을 간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나 밤새도록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주도권: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셨다는 동사를 두 번에 걸쳐서 반복합니다(1절).
그리고 마지막에는 세 번째 나타나신 것이라고 합니다(14절).
그렇다면 앞의 두 번의 발현(요한 20,19-29)을 말하기 위한 것임을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나타나신 장소는
다른 곳이 아니라 빵과 물고기를 많게 하는 기적을 베푸셨던 곳인
티베리아스 호숫가(요한 6,1-14)와 일치합니다.

아주 이른 새벽인 듯합니다.
증인들은 발현하신 예수님께서
물가에서 자기들을 기다리고 계셨던 것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아무도 몰라보았다고 합니다.
하느님의 일은 낮 동안에 해야 하기 때문에(요한 9,4-5),
아직 낮처럼 밝지 않아서 예수님을 몰라본 것으로 표현됩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이 누구인가를 선뜻 드러내시지 않고,
루카 복음에서처럼(24,41)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느냐?”(“무얼 좀 잡았느냐?”로 번역되었음)고 물으십니다.
예수님을 증언할 제자들에게
사랑을 얼마나 가지고 있느냐고 물으시는 듯합니다(요한 14,21; 15,13).

아무것도 없다는 대답에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거룩함의 상징)에 던지라고 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아무것도 잡지 못한 것을 아시고 계셨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루카 복음(5,4-5)에서처럼 낮은 곳에서 그물질을 했던가봅니다.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보았던 빵의 기적만큼 고기가 대단히 많이 잡혔습니다.
여기에서 두 가지를 말해줍니다.
첫째는
예수님께서 당신을 알아보게 해주시기 전에는 아무도 예수님을 몰라본다는 것이며,
둘째는
사람을 낚는 일에 있어서 예수님과 함께 하지 않고서는
제자들은 아무런 수확을 올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증인들의 깨달음:
아직도 베드로 사도는 예수님을 몰라보고 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각별히 사랑하셨던 제자,
빈 무덤을 보고 부활하셨다고 믿었던(요한 20,8) 제자가
“주님이십니다.” 하고 가르쳐줍니다.
요한복음에는 제자들의 입에서 “주님”이라는 말이 여기에서 처음으로 나타납니다.
주님이시라는 말에 놀라서 소리치는 것(루카 5,8-10) 대신에
베드로 사도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고 합니다.
세 번씩이나 예수님을 모른다고 했던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아보고는 얼마나 놀랬는가를 여실히 드러내는 설명입니다.
그리고는 이상하게도 베드로 사도에 대하여 아무런 언급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긴 침묵이 흘렀을 것이라는 사실을 쉽게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한 것은
물고기가 가득 찬 그물을 여럿이 끌어올린 뒤에 뭍에 내려서 보니
예수님 앞에는 이미 “숯불이 있었고 그 위에 물고기도 빵도 있었다.”(9절)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방금 잡은 물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으로 이해되고
서서히 베드로 사도를 사도단의 으뜸으로 드러냅니다.
왜 하필이면 백쉰세 마리가 잡혔다고 했을까?
교부들은 갈릴래아에 있는 모든 물고기 종류의 숫자라고 합니다.
그렇게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흩어져 있는 모든 민족들을 하나로 모으시기 위하여(요한 11,52),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당신께로 끌어들이시기 위하여(요한 12,32)
죽으셨듯이 베드로 사도가 감당해야 할 일을 암시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치 큰일을 마친 이들에게 당신께서 직접 준비하신 식사를 권하듯이
제자들을 모두 불러 모으십니다.
함께 한 시간이 한참 되었기 때문에
제자들이 이제는 그분이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것은 모두 다 알았으므로
그분이 누구냐고 묻지 않습니다(12절).
그리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다가가셔서 빵과 물고기를 주셨다고 합니다.
제자들의 움직임 가운데
가만히 계신 분은 예수님이시지만
이 모든 일의 주인공임을 간접적으로 말해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성체성사를 집전하는 사도들이지만
실제로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은 예수님이심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이 체험했던 것처럼
성체 안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 살아계심을 체험한 사도들의 증언입니다.

오늘 제1 독서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을 선포하는 말씀의 전례라면
오늘 복음은 성찬의 전례를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도 역시 오늘 제2 독서인 묵시록의 저자처럼
예수님을 하느님의 어린양으로 부르면서
어린양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없애주시는 분이시고,
우리에게 생명의 빵을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서 봉헌하는 예수님의 희생제사.
즉 미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먹을 것이 있느냐?”라고 물으셨듯이
이 자리에서도 역시 우리에게 얼마나 “사랑을 실천했느냐?”고 물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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