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이 세상에 왔지만 사람들은 빛보다 어둠을 더 사랑하였다.
-황순찬(송파정신보건센타)-
◆‘하느님 외아들을 믿지 않는 자/어둠을 더 사랑한 자/악한 일을 일삼는 자/ 자기 죄상을 은폐한 자/빛을 미워하고 멀리한 자’라는 구절이 마치 김지하의 ‘오적(五賊)’처럼 눈에 박힌다.
나는 가끔 예수님이 하느님의 얼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한다. 온갖 커뮤니케이션 수단을 동원하여 인간과 소통을 해봤지만 별 진전이 없자 당신의 얼굴인 예수를 보낸 것이 아닐까? 우리도 전화 통화를 하다가 상대방이 말귀를 못 알아들으면 “거기 어디야? 내가 그리로 갈게. 우리 (얼굴)보면서 이야기하자”고 한다. 그런데 하느님이 택한 수단이 효과가 썩 좋지는 않았던 것 같다. 기존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만이 하느님의 얼굴, 예수님을 희망으로 생각하였으니 말이다. 주류사회의 대부분은 예기치 않은 예수님의 출현에 대해 ‘이거 어디서 굴러먹은 말 뼈다귀야?’라고 반응한다. 그래서 요한복음 저자가 오늘은 좀 화가 났다. 하느님은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면서까지 소통을 원하시는데 사람들은 이해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격적 만남을 절대사절하고 있으니 격한 표현이 나올 만도 하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신의 밑바닥 신원으로는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정말 몰랐을까? 사람들 눈에 예수님은 무자격자였고, 일신의 거처도 없는 떠돌이였으며, 고린내 풀풀 나는 지지리 궁상 그 자체였다. 그런 예수를 사람들이 거부한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다. 그렇다면 자연스러운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당대의 사람들이 잘못된 것일까, 아니면 하느님이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너무 몰라도 모르는 것이 아닐까? 물론 그 옛날부터 성경과 교부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사람들의 몰이해 속에 십자가의 최후를 마치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하느님의 방식이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그렇게 복잡한 하느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는 이렇게 기도하고 싶다. ‘하느님, 제발 사람들에게 통할 수 있는 모습으로 오십시오. 행여 그게 당신 뜻이 아니라면 우리가 당신을 알아볼 수 있는 눈을 갖게 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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