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다해 주님 수난 성금요일 2007. 4. 6. 토평동.
이사 52, 13-53, 12. 히브 4, 14-16; 5, 7-9. 요한 18, 1-19, 42.
“나다”(요한 18, 5)
“나는 아니다”(요한 18, 17)
예수님의 답과 베드로의 답에 대해 눈이 갑니다. 사람들이 묻는 질문은 사실입니다. 나자렛 예수냐? 예수의 제자냐? 그러나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예수께서는 “나다”라고 자신 있게 답하는 반면, 베드로는 두려움에 찬 모습으로 “나는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내 안에 이 두 모습이 함께 공존합니다. 예수를 믿는 나는 그 믿음으로 살아가지만, 때론 믿음의 자신을 부정합니다. 세상의 가치 앞에, 내 욕심 앞에, 세상의 권력 앞에, - 두려워서, 귀찮아서, 편해서, 좋은 게 좋은 거라서, 여러 가지 핑계 속에 아니라고 부인하며 살아갑니다.
나의 주님은 나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시려고 “나다”라고 강하게 내 앞에 서 주시는데, 나는 머뭇거리며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합니다. 내게 도움이 될 때엔 “주님”이지만, 시련 앞에서는 그리고 게으름 앞에서는 모른다고 잡아뗍니다.
저는 십자가상의 주님께서 유언을 하시는 그 순간에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를 엮어주신 것을 묵상합니다.(스타우퍼는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은 유언을 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말한다. 지금 예수께서는 그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긴박한 순간, 그 유언의 중심에 어머니 마리아와 제자가 서 있는 것은 중요합니다.
예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제자에게 “네 어머니이시다”(요한 19, 27)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어머니는 육적인 어머니 즉 육적 보살핌의 관계가 아니라 영적인 관계입니다. 말씀을 듣고 행하는 이가 당신의 형제요 자매라는 것처럼, 당신의 말씀 안에, 당신의 삶 안에 관계를 맺어주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서두에서 이미 예수님의 첫 기적 사건이 어머니 마리아의 말, 즉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는 것에서 시작된 것처럼, 제자들은 어머니의 그 믿음에서 태어나야 합니다. 당신은 죽지만, 그분을 믿는 이들은 그 믿음에서 다시 새 생명을 얻어야 하는 것입니다.
당신 죽음의 의미는 그것입니다. 어머니와 아들 딸이라는 그 호칭에 묶여있게 되면 자칫 예수님의 그 메시지를 혼동할 수 있습니다. 새로 태어남의 장소, 즉 신앙의 삶의 요람이 바로 마리아의 삶인 “그가 시키는 대로 하여라”(요한 2, 5)에서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이죠.
그가 시키는 대로 하려면, 그를 믿어야 합니다. 도무지 믿지 않고서는 그 고백을 할 수 없습니다. 그를 믿는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를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모른다”고 부인할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십자가의 목마름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내 삶에서 너무도 그분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모습이 잦기 때문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을 압니다. 잘 모르면서도 당신을 압니다. 당신의 그 크신 사랑을 온전히 알지 못하지만, 그래도 나를 사랑하셔서 나를 위해 당신을 내어주셨다는 것을 믿습니다. 내 생에 끝까지 당신과 함께 가길 원합니다. 내 삶이 외롭지 않게 곁에 계시는 주님, 저 역시 당신을 외롭지 않게 당신을 증언하며 살게 하소서.”
..............
유일한 죄수
브라질 산호세의 캄포라스라는 도시 근처에 이상한 시설이 있다. 이십 년 전 브라질 정부는 교도소의 운영을 두 명의 그리스도인에게 맡겼다. 그 건물은 휴마이타라고 개명되었고 기독교 정신에 바탕을 두고 운영되었다. 오직 두 명의 전임 직원을 제외하면 모든 업무가 수감자들에 의해 이루어졌다. 척 콜슨은 그 교도소를 방문한 후에 다음과 같은 보고서를 제출하였다. 「내가 휴마이타를 방문했을 때 모든 수감자들이 웃고 있는 것을 보았다. 어느 곳을 둘러보든지 사람들은 평온해 보였다. 안내자는 나를 예전 죄수들을 고문하던 작은 독방으로 인도하였다. 지금은 단지 한 사람만 갇혀있다고 말했다. "정말로 가서 보고 싶으세요?" "물론이지요." 그는 천천히 육중한 문을 열었다. 나는 그 독방에 있는 죄수를 보았다. 휴마이타의 식구들이 아름답게 조각해 놓은 십자가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방의 유일한 죄수인 예수님은 조용히 십자가에 달려 계셨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위해 남은 형기를 채우고 계십니다." 안내자가 조용히 말했다. ...............「은혜를 만끽하는 비결」, 맥스 루카도
예수께서는 그렇게 계십니다. 사랑하는 나의 예수님.... ..............................
다음은 굿뉴스에 실린 글을 퍼서 올립니다.
오늘 요한이라는 어느 신부가 쓴 요셉이라는 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나눕니다.
요셉은 요한 신부가 신학생으로써 논산훈련소에 훈련병으로 있을 때 만나게 된 친구이다. 훈련소를 거의 마칠 무렵에 요한 신학생은 다리에 생긴 상처로 의무대 병실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실을 맡은 상병하나가 밥을 가져다주었는데 손가락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어 ‘신자구나’ 생각했지만 훈련병 처지라 먼저 말도 못 걸었는데 자기가 성호를 긋고 식사기도를 하는 것을 보고 그가 먼저 인사를 하면서 서로 알게 되어 그 후 그들은 훈련병과 고참의 관계보다는 신학생과 교우사병의 관계로 이어져서 서로 우정을 나누게 되었다.
몇 년 후 친구요셉은 동갑내기 마리아와 결혼을 했고 이듬해에 자기는 사제로 서품되었다. 서품 받은 첫 해에 요셉과 마리아는 여름 청년 캠프를 하던 요한 신부에게 휴가를 와서 결혼을 앞둔 청년들을 위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하룻밤을 함께 보냈고 그리고 불과 며칠 후에 요한 신부는 충격적인 전화를 받았다.
요셉의 가게에 당시 서울을 누비고 다니던 삼인조 강도가 들어 요셉이 그들과의 격투 끝에 심하게 다쳐서 죽음 직전에 있다는 소식이었다. 요한 신부가 친구 요셉을 찾아가 보니 그는 거의 절명 상태였고 분노한 탓인지 격투를 했던 오른손은 주먹을 쥔 채로 계속 흔들고 있었다.
요셉의 부모님과 그의 아내 마리아는 오히려 비통해하는 요한신부를 위로해 주면서 ‘우리가 할일은 다 했으니 기도해 주세요.’ 라고 부탁했다. 요한 신부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그에게 병자성사를 주었다.
그리고 돌아와 본당의 젊은이들과 함께 요셉을 위해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육 개월 후 언어 장애와 오른손의 불편함을 빼고는 비교적 건강한 모습의 요셉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다시 육 개월 쯤 뒤에 저녁뉴스에서 바로 요셉의 가게를 털었던, 요셉을 거의 절명 상태로 만들었던 범인 중의 한 사람이 검거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그 순간 요셉이 다쳐 누워 있을 때보다 더 큰 걱정이 되었다. 범인에 대한 분노와 억울함이 요셉을 다시 아프게나 하지 않을까 라는 염려 때문에 전화를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튿날 요셉이 전화를 해 주었다.
여전히 뇌손상 때문에 서투른 말로 ‘범인…….을 만나고 왔어……. 그런데……. 이상해. 보는 순간 그 이전의 ……. 마음, 모두 사라지고……. 용서합니다.……. 고 말했어.…….’라고 했다.
요한 신부는 괜찮은지 물었고 그는 진정으로 괜찮다는 얘기를 반복했다. 사제인 자기도 정말 하기 힘든 말을 그는 뇌를 다쳐 답답하고 힘겨워 하는 모습으로 ‘용서합니다.’ 고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얼마 후 요한신부는 요셉의 편지를 받았다. 요셉의 아내가 받아쓴 편지였다. 거기 요셉이 범인에게 받은 편지 복사본이 동봉되어 있었다.
“무슨 말을 어떻게 해야 할지. 엄청난 해를 주었는데도 오히려 내게 위로와 용서를 주시다니요. 면회까지 와주시고…….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하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무능력하지만 하느님께 당신의 가정과 건강 행복을 위해 기도합니다. 좀더 일찍 하느님을 알았더라면……. 나로 인해 얼마나 어려우신가요?”
요셉은 요한신부 자기가 납득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를 위해 자주 면회를 가 주었고 자기를 부끄럽게 할 요량인 것처럼 그의 세례 소식을 전해 주었다. 요셉 그가 바로 범인의 대부가 되었고 대자도 대부의 본명을 따서 요셉으로 세례명을 정하였다.
대통령이 ‘범죄와의 전쟁’을 선포했을 때 요셉은 다시 ‘그’를 위해 탄원서를 각계에 내었다. ‘그’는 추기경님으로부터 견진성사도 받았다. 요한신부는 오히려 고통을 당한 이들보다 더 분개했던 자기의 경솔함을 부끄러워 할 뿐이라고 고백했다. |
다해 주님 수난 성금요일/나다 - 조성호 신부님
2007. 4. 9. 오후 2:06:04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