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섬김이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부산교구 서공석 신부-
예수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대축일 아침입니다.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하느님 안에 또 우리 안에 살아 계시다고 제자들이 믿기 시작한 사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에 제자들은 절망하여 각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여 살아 계시다는 체험이 그들에게 일어나지 않았으면, 그들은 다시 모여들지 않았을 것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선포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는 영원히 사라졌을 것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이른 아침, 아직도 어두울 때에’ 마리아 막달레나가 무덤에 갔다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서는 어둠과 빛이라는 대조적 단어를 잘 사용합니다. 예수님 안에 구원을 보지 못하는 상태를 어둠이라고 표현하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고 그분을 받아들이는 삶을 빛이라고 표현합니다. 요한복음서 12장은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합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어둠 속에 머물지 않게 하려고 나는 빛으로서 세상에 왔습니다.”(46). 구원을 모르는 세상에 예수님이 구원으로 오셨다는 말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아직도 어두울 때’ 무덤에 갔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아직 모르는 상태에서 무덤에 갔다는 말입니다.
이 여인은 무덤의 돌이 이미 치워진 것을 보고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직감합니다. 그는 자기가 발견한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고,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무덤을 향한 달음질에는 예수님이 사랑하시던 제자가 더 빠릅니다. 그는 베드로보다 먼저 도착하였지만, 베드로를 기다려 주는 여유를 보입니다. 베드로가 무덤에 들어가고, 뒤따라 들어간 그 제자는 보고 즉시 믿었습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부활을 말하기 위해 예수님이 아끼시던 마리아 막달레나를 등장시켰습니다. 그가 예수님이 무덤 안에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 사실을 제자들에게 알렸다고 복음이 말하는 것은 부활 신앙이 한 여인의 상상에서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와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다른 제자’가 확인한 사실이라는 것입니다. 시몬 베드로는 제자들을 대표하는 인물이고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는 예수님을 가장 잘 아는 인물입니다. 제자들의 공식적인 확인을 거쳐서 나타난 부활 신앙이라는 말입니다. 예수님이 사랑하신 제자가 무덤에 달려가는 데에도 더 빠르고, 믿는 데에도 베드로보다 더 빠른 것은 신앙에는 신분이나 지위가 아니라 사랑이 앞선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서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우리의 확인 대상이 되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까지라는 것입니다. 죽음의 자리인 무덤은 비어 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신앙은 그분의 죽음에서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그분이 살아 계실 때, 그분과 접촉하고 그분의 사랑을 깨닫고 그분을 따른 사람들 안에서 발생한 신앙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을 깨달은 사람이 그분이 보여주신 사랑을 실천하면서 예수님은 부활하여 우리와 함께 살아계신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서는 14장에서 예수님의 입을 빌려 말하였습니다. “나는 그대들을 고아처럼 버려두지 않을 것이며, 그대들에게로 돌아옵니다. 이제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하겠지만 그대들은 나를 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 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입니다.”(12-13). 세상은 그분을 십자가에 죽여 없애버렸다고 믿었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제자들 안에 살아 계신다는 초기 교회의 믿음을 반영하는 요한복음서의 말씀입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지상의 삶으로 다시 돌아오셨다는 것을 말하지 않습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없애면서 시편이 말하는 대로 그분을 “죽음의 그늘진 골짜기”(23,4)로 보낸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분을 당신 안에 살려 놓으셨습니다. 오늘 우리가 제1독서로 들은 사도행전은 베드로 사도의 연설이었습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나무에 매달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사흘 만에 일으키시어 사람들에게 나타나게 하셨습니다.’ 여기서 사흘이라는 말은 유대인들 사이에는 72시간이 아니고, 결정적인 날을 의미합니다. 하느님이 하신 결정적인 일이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베드로는 또 말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예수님에게 성령과 힘을 부어 주시고 그분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래서 그분은 두루 다니시며 좋은 일을 해 주시고 악마에게 짓눌린 이들을 모두 고쳐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숨결로 모험을 감행하신 분이었습니다. 권위주의로 경직된 유대교 사회에서 예수님은 그 조직의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셨습니다. 율법과 성전을 절대적이라고 믿는 그 시대 유대교 사회였습니다. 예수님에게는 하느님이 절대적이었습니다. 하느님은 고치고, 살리는 선한 일을 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숨결 혹은 그분의 생명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그분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도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부르며 그분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활은 예수님이 실천하신 하느님 아버지의 일을 우리도 실천하여 예수님의 삶이 우리 안에 나타나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하느님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당신의 일을 실천하며 살 것을 원하십니다. 하느님이 주신 자유로운 생명입니다. 율법과 권위에 짓눌려 살라는 생명이 아닙니다. 우리는 돈과 권력에 짓눌리고, 욕심과 허례허식에 짓눌려 삽니다. 예수님이 하느님으로부터 성령과 능력을 받아 악마에게 짓눌린 사람들을 모두 고쳐 주셨다고 오늘 독서에서 베드로는 말했습니다. 사람을 짓누르는 것에서 사람들을 해방하셨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그 죽음에서 믿음이 발생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의 삶을 아끼고 사랑하고 실천하는 것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앞에서 인용한 요한복음서는 예수님의 입을 빌려 세상은 당신을 보지 못하지만 제자들은 당신을 본다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살아 있고 그대들도 살 것이기 때문”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부활은 예수님 안에 있었던 아버지의 생명이 우리 안에도 살아서 일하신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삶을 섬김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그분은 아버지의 이름으로 사람들 위에 군림하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아버지의 생명을 사셨습니다. 그것은 섬김이었습니다. 신앙은 내세를 위한 보험도 아니고, 현세를 위한 우월감도 아닙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은 그분의 섬김이 우리의 삶 안에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