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제1독서(사도 10,34ㄱ.37ㄴ-43)는
사도신경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며,
아주 일찍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심판자로 이해하는 신앙 고백문이 형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깊은 신심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던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는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들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면서(신명 10,17),
마치 유다인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을 요약하듯이,
간략하게 예수님의 업적을 나열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나타나셨음을
확실한 증인으로서 말해줍니다.
오늘 제2독서(콜로 3,1-4)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된 우리의 삶을 말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세례성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2코린 13,5)
그분과 함께 하는 우리들의 삶도 숨겨져 있으나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의 삶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요한 20,1-9)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초기교회에서 베드로 사도의 입장을 잘 말해줍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로부터 두 번째 날, 즉 안식일 다음날이며,
주간 첫날(요한 20,1; 마르 16,1)이었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마르 16,2; 루카 24,1) 않고
사랑에서 비롯되는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아직도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드리려고 향유를 샀고(마르 16,1-2),
그래서 새벽같이 무덤을 방문했다고 하는데
요한복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아무런 사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있음을 발견하고도
무덤에 들어가 보지 않고, 즉시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라는 소리도 없었고,
제자들에게 들려줄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했지만
빈 무덤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제자들에게 순수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누군가 주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전합니다.
초기교회가
정말 중요한 사건은 항상 교회의 장상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어야 함을 잘 깨닫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빈 무덤 이야기를 들었던 열한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와
항상 중요한 순간에 즐겨 부각되는 다른 제자(요한: 13,23; 21,20)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밖에서도 무덤이 환히 다 보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에서 기다렸는지
아무런 표현이 없지만
먼저 무덤에 달려간 다른 제자 역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아마포가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대로
누가 훔쳐갔다면 그렇게 곱게 개놓고 갈 수가 없다고 했듯이(PG 59,465)
이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진 일 같습니다.
아마포에 대한 언급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한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베드로의 반응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단지 다른 제자(요한)는 “보고, 믿었다.”라고 합니다.
시체를 보지도 못했고,
부활하신 분을 보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빈 무덤과 아마포를 보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믿었다고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사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에게는 무덤으로 달려갈 수도 없고,
아마포를 볼 수도 없으며,
막달라 여자와 같이 빈 무덤에 대한 증언을 전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이 전해준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루카 24,27)을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그냥 “듣고 믿으라.”는 말이
매우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초기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빈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아마포를 발견한 즉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이끄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내용의 요약이며 전부입니다(필립 3,10-14 참조).
죽었다가 다시 살아옴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죽음 한복판에도 생명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부활 체험은 스승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체험한 것은
그분의 죽음을 체험한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부활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안내합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주장을 포기할 때 길이신 그리스도께서(요한 14,6)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즉 부활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모순이 아닙니다.
죽지 않으려는 욕심,
살기 위해 죽음을 거부하는 욕심은 매 순간 죽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시체를 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어서 흙이 된 생명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소름끼치는 일일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이란
완전한 죽음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 이상임을 암시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의미를 생물학적 차원에 묶어놓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면서
인간의 사고 능력과 온갖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를 증명하려 한다면
부활의 진리에 접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리 자체를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들도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송장처럼 사는 우리 인생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생명 없는 시체처럼 살지 말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랑 때문에 열정적으로 살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아직도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빈 무덤의 사건을 전해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간직했던
예수님께 대한 열정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마르 12,27; 사도 2,28).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것입니다(2코린 5,17; 콜로 3,1).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새 계명(요한 13,34)에 맞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로마 6,4; 12,1-8; 2코린 5,17).
또한
부활의 기쁨을 이웃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한 베드로 사도를 비롯하여
초기 교회의 사도들이 했던 일이며,
미사가 끝날 때마다 우리에게 되새겨주시는 주님의 사명입니다.
사도신경의 기초가 되는 부분이며,
아주 일찍부터
부활하신 예수님을 심판자로 이해하는 신앙 고백문이 형성되었음을 말해줍니다.
깊은 신심으로 하느님을 경외하던 로마 백인대장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하는 베드로 사도는
하느님께서는 어떤 사람들도 차별하지 않으시고
모두 받아주시는 분이시라고 하면서(신명 10,17),
마치 유다인들이 이집트 탈출 사건을 요약하듯이,
간략하게 예수님의 업적을 나열합니다.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셨던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뒤에
여러 사람들에게 여러 차례에 걸쳐서 나타나셨음을
확실한 증인으로서 말해줍니다.
오늘 제2독서(콜로 3,1-4)는
부활하신 그리스도와 일치된 우리의 삶을 말하면서
바오로 사도의 세례성사에 대한 가르침입니다.
비록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그리스도인으로서 변화된 자신의 모습을 잊지 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오른쪽에 계신다는 것은
바로 우리의 삶 속에 계신다는 것입니다.
비록 지금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보이지 않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 안에 계시며(2코린 13,5)
그분과 함께 하는 우리들의 삶도 숨겨져 있으나
그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우리의 삶이 다 드러나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오늘 복음(요한 20,1-9)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과
초기교회에서 베드로 사도의 입장을 잘 말해줍니다.
“주간 첫날 이른 아침”이라고 한 것은 새로운 창조를 의미하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주님의 날이라고 부르게 될 것입니다.
마리아 막달레나가 빈 무덤을 발견한 것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날로부터 두 번째 날, 즉 안식일 다음날이며,
주간 첫날(요한 20,1; 마르 16,1)이었습니다.
빈 무덤을 발견한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지(마르 16,2; 루카 24,1) 않고
사랑에서 비롯되는 열정을 표현하기 위해 “아직도 어두운 밤”이라고 표현합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시체에 발라드리려고 향유를 샀고(마르 16,1-2),
그래서 새벽같이 무덤을 방문했다고 하는데
요한복음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사실이라서 아무런 사유를 밝히지 않습니다.
마리아 막달레나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이미 치워져있음을 발견하고도
무덤에 들어가 보지 않고, 즉시 제자들에게로 달려갔습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찾고 있지만
그분께서는 되살아나셨다.”(마르 16,6)라는 소리도 없었고,
제자들에게 들려줄 아무런 소식도 얻지 못했지만
빈 무덤의 사실을 알리기 위해 제자들에게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빈 무덤을 발견한 마리아 막달레나는
다른 제자들에게 순수한 인간적인 생각으로 누군가 주님의 시체를 가져갔다고 전합니다.
초기교회가
정말 중요한 사건은 항상 교회의 장상에 의해
공식적으로 선포되어야 함을 잘 깨닫고 있었음을 말해줍니다.
마리아 막달레나에게서
빈 무덤 이야기를 들었던 열한 제자들의 대표인 베드로와
항상 중요한 순간에 즐겨 부각되는 다른 제자(요한: 13,23; 21,20)가
함께 무덤으로 달려갔다고 합니다.
밖에서도 무덤이 환히 다 보였기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정말 베드로에 대한 존경심에서 기다렸는지
아무런 표현이 없지만
먼저 무덤에 달려간 다른 제자 역시 무덤 안으로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시몬 베드로가 무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아마포가 “따로 한곳에 개켜져 있었다.”고 합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모 성인의 말대로
누가 훔쳐갔다면 그렇게 곱게 개놓고 갈 수가 없다고 했듯이(PG 59,465)
이는 상당히 조심스럽게 이루어진 일 같습니다.
아마포에 대한 언급은 두 가지를 상징합니다.
하나는 예수님의 죽음이 확실한 사실이며, 다른 하나는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사가는
베드로의 반응에 아무런 관심이 없고
단지 다른 제자(요한)는 “보고, 믿었다.”라고 합니다.
시체를 보지도 못했고,
부활하신 분을 보지도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빈 무덤과 아마포를 보고
예수님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살아나셨음을 믿었다고 합니다.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요한 20,29)는 말씀을 강조하는
요한복음사가에게는 아주 중요한 표현입니다.
우리에게는 무덤으로 달려갈 수도 없고,
아마포를 볼 수도 없으며,
막달라 여자와 같이 빈 무덤에 대한 증언을 전해줄 사람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목격한 제자들이 전해준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루카 24,27)을
단지 믿음으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 말씀을 그냥 “듣고 믿으라.”는 말이
매우 소극적이고,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지라도
초기교회가 여러 가지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빈 무덤과 예수님의 시체를 쌌던 아마포를 발견한 즉시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그분의 말씀에 대한 믿음과 성령의 이끄심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믿음의 내용의 요약이며 전부입니다(필립 3,10-14 참조).
죽었다가 다시 살아옴에 대한 단순한 믿음이 아니라,
죽음 한복판에도 생명의 하느님이 계시다는 믿음입니다.
그러기에
제자들의 부활 체험은 스승의 죽음을 받아들임으로써 일어났습니다.
제자들이 스승의 부활을 체험한 것은
그분의 죽음을 체험한 것과 별개의 것이 아닙니다.
부활은 죽지 않고서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부활은 죽는 순간부터 시작됩니다.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사람들을 죽음으로 안내합니다.
내가 죽을 때,
내 주장을 포기할 때 길이신 그리스도께서(요한 14,6)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
즉 부활의 길로 걸어갈 수 있습니다.
이는 참으로 역설적이지만 모순이 아닙니다.
죽지 않으려는 욕심,
살기 위해 죽음을 거부하는 욕심은 매 순간 죽는 것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이제 새로운 세상이 시작되었습니다.
하느님은 시체를 살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죽어서 흙이 된 생명은 다시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시체가 다시 살아난다는 것은 기쁨이 아니라 오히려 소름끼치는 일일 것입니다.
육신의 부활이란
완전한 죽음 속에서 하느님으로부터 새로운 삶의 의미를 부여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활은 인간이 생물학적 존재 이상임을 암시합니다.
그러기에 부활의 의미를 생물학적 차원에 묶어놓고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을
생물학적으로 이해하면서
인간의 사고 능력과 온갖 지식을 총동원하여 이를 증명하려 한다면
부활의 진리에 접근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진리 자체를 그르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사가들도 빈 무덤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느님은 송장처럼 사는 우리 인생을 다시 살리시는 분이십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들에게 생명 없는 시체처럼 살지 말고,
끊임없이 움직이는 사랑 때문에 열정적으로 살라고 촉구합니다.
오늘 복음은
아직도 어두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빈 무덤의 사건을 전해준 막달라 여자 마리아가 간직했던
예수님께 대한 열정을 본받으라고 합니다.
하느님은 죽은 이들이 아니라 살아 있는 이들의 하느님,
곧 생명의 하느님이십니다(마르 12,27; 사도 2,28).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우리들은
세례 때에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기 때문에
그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바뀐 것입니다(2코린 5,17; 콜로 3,1).
그러므로
예수님의 부활을 믿고, 고백하는 사람은
새 계명(요한 13,34)에 맞게, 새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로마 6,4; 12,1-8; 2코린 5,17).
또한
부활의 기쁨을 이웃과 나눌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코르넬리우스의 집에서 설교한 베드로 사도를 비롯하여
초기 교회의 사도들이 했던 일이며,
미사가 끝날 때마다 우리에게 되새겨주시는 주님의 사명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