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17 /[강론] 사순 4주일 -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2007. 3. 18. 오전 8:05:26

글자
오늘 제1 독서(여호 5,9ㄱㄴ.10-12)는
이집트에서 도망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 가운데 한 세대가 죽은 다음,
광야에서 태어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할례를 받게 함으로써
다른 민족과의 차별성을 드러내는 내용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선택된 백성이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이집트에서의 노예생활의 수치를 치워버렸다고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예리코에서 처음으로 맞는 듯한 파스카 축제를 지내면서
이제 본격적으로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오늘 제2 독서(2코린 5,17-21)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하게 되었고,
또 우리 이웃과 화해하게 되었음을 강조하면서 우리를 화해의 사절이라고 합니다.
특히
계약을 어긴 우리 인간을 대신하여 죄를 모르시는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죄인으로 여겨져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가 하느님 안에서 의롭게 되었음을 강조합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죄인인 우리가 의롭다고 여겨졌음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사랑과 자비에 의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받아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루카 15,1-3.11ㄴ-32)은
매우 인간적인 비유이면서 동시에 엄청난 신앙적 의미를 간직하고 있습니다.
자비하신 아버지,
투덜대는 인색한 형,
그리고
철없는 작은 아들,
이 세 주인공들을 우리 주변에서 가끔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우리의 마음속에도 살아있을 것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여정에서
스승의 모습을 보여주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세리와 죄인들이 가까이 모여들었고,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은
죄인들을 받아들이고 함께 음식을 나누시는 예수님께
마치 오늘 복음의 큰 아들처럼 투덜거렸다고 합니다.

두 아들 가운데 작은 아들(그리스도를 믿게 된 사람: 사도 5,6; 1베드 5,5 참조)이
자기 삶의 몫을 요구했지만 사실 그럴 권리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12절과 30절의 비교).
그러나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철없는 요구에 어쩔 수 없이 가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

사실 유다인들의 풍습대로라면
살아있는 동안 재산을 아들과 아내와 형제에게 넘겨주지 않았고
죽을 때에 유산을 나누어주었습니다(집회 33,2-24 참조).
그리고
비록 맏아들이 미움 받는 아내의 자식이라 할지라도
재산에서 두 몫을 주어야 했었습니다(신명 21,15-17).

작은 아들이 아버지께 자기 몫을 청했고 아버지 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잘못이란 방종한 생활을 하면서 자기 재산을 탕진했다는 것입니다.
아버지 곁을 떠나
혼자만의 세계를 건설해보겠다는 독립생활의 유혹에 넘어가
재산을 다 탕진한 것입니다.
방종한 생활과 재산의 탕진은 하느님의 영광을 빼앗긴다는 뜻입니다.
결국
굶주림(하느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선행도 없음)으로 표현되는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릴 수밖에 없음을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뼈에 사무치도록 겪었던 일이었습니다.
그 고장 주민(다른 신을 섬기는 이들)과 어우러지기 위해서 매달렸으나
가장 처참한 일을 하게 되었으면서도 배를 채울 수가 없었습니다.
마치 판관기의 구조에서
가장 처참하게 고통을 겪을 때에서야 비로소 하느님께 호소했던 것처럼
작은 아들도 이때에 아버지께로 돌아갈 생각을 합니다.

아버지의 집에는 풍요로움이 넘치나
아버지를 떠난 곳에서는 배고픔과 삭막함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아들의 처지가 아니라
품꾼들의 처지를 생각했다는 것은
모두 하느님 아버지의 부르심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마태 5,9 참조)
이미 자신은 아들로서의 권리를 주장할 수 없는 처지에 있음을
깊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아들로서의 품위를 잃어버렸다는 것은
하느님과 맺은 사랑의 계약에 대한 파기와 은총의 상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아버지께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깊이 깨달았습니다.
작은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갔습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만 한다면,
한 번의 수치심과 굴욕감을 이겨내기만 한다면
아버지는 잔치를 베풀고 따뜻이 맞아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합니다.

돌아온 작은 아들을 알아보신
아버지의 가엾은 마음이 표시되는 눈물겨운 장면에 이어
즉시 작은 아들은 처절하게 통곡을 하면서 잘못을 뉘우치고 있습니다.
한편
아버지는 작은 아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었다는 표시가
전혀 드러나지 않습니다(15,22-23).
아버지는 작은 아들의 아들로서의 자격에
아무런 탓을 묻지도 않으시고 돌아왔음에 그저 고마울 뿐입니다.
그래서
마치 옷장 속에 작은 아들을 위해 마련해둔 옷이 있었던 것처럼
꺼내 입히라는 것이었습니다.
또한
반지를 끼워주었다는 것은
마치 파라오가 요셉에게 했던 것처럼(창세 41,42)
아들의 권리를 인정해주는 것이며,
맨발의 손님에게 신발을 신겨주었다는 것은
마음대로 땅을 밟을 수 있는 가족으로
인정해준다는 것입니다(시편 60,10; 신명 11,24-25; 여호 1,3; 14,9 참조).
이런 자격의 수여는 잔치(세례와 성체성사)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아버지는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도로 찾은” 아들이라고
두 번씩이나 반복하고 있습니다(15,24.32).
반(反) 구원 상태에서 구원의 상태로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것입니다.

시끄러운 잔치는
큰 아들(유다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신경을 자극했습니다.
큰 아들은 하인을 불러 잔치의 이유를 묻습니다.
살진 송아지까지 잡았다는 하인의 말은 큰 아들을 화나게 했습니다.
큰 아들은 형제에게 성을 내지 말아야 하고(마태 5,22),
“사람의 분노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실현하지 못한다.”(야고 1,20)는 사실을
잊어버렸던 것입니다.

큰 아들은 자기가 이제껏 쌓아놓은 공로를 자랑하면서 투정을 부립니다.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29절)
그러나
이것은 바로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하던 습관이었습니다.
큰 아들은 애정보다는 늘 의무감으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유지해왔던 것입니다.

결국
큰 아들은 돌아온 작은 아들을 동생이라 부르지 않고
“창녀들과 어울려 아버지의 가산을 들어먹은 저 아들”(30절)이라고 하면서
마치 남을 지칭하듯이 부르고 맙니다.
방탕한 생활로 탕진했다는 동생이 돌아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
억울한 생각이 앞섰고,
“나는 왜 늘 저 아들의 뒤치다꺼리만 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엄습했습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너는 내 아들이고,
늘 나와 함께 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고 하시면서
큰 아들을 매우 감동적인 언어로 설득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같이 즐기고 기뻐해야 할 이유를 다시 한 번 확인시켜주십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의 비유는
큰 아들이 잔치가 벌어지는 집 안으로 들어갔는지 아닌지 결론을 내리지 않고,
마치 지난주일 복음처럼, 독자의 현명한 판단에 맡깁니다.

하느님과의 결별,
형제들과의 결별,
이웃과의 결별을 청산하기를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기를 원하시고,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와서 함께 화목하게 살기를 바라시는 분이십니다.
용서받기를 갈망하는 작은 아들보다 더욱 큰 갈망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이 당신께 돌아오기를 기다리십니다.
십자가의 제물로 내놓으시면서까지
우리를 하느님 아버지와 화해시키시는 예수님이
바로 이런 의미에서 우리의 구원자이십니다.
이제 예수님의 몫을 해내야 하는 우리는 화해의 사절입니다.

하느님의 인도하심으로 가나안에 정착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백성의 표지로 할례를 하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리고
작은 아들은 일어나 아버지께로 가야 한다는 의지와 행동으로 말미암아
자신도 살게 되었고,
아버지도 기쁘게 해드렸기 때문에 잔치를 벌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우리는 하느님과 화해를 하게 되었으므로
잔치를 준비하는 우리는 사순절을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오늘 복음의 비유를 보다 더 잘 이해할 수 있으려면
예레미야 예언자의 말씀을 들어봅시다:
“에프라임이 탄식하는 소리를 내가 분명히 들었다.
‘길들지 않은 송아지 같은 저에게
주님께서 순종을 가르치시어 제가 순종을 배웠습니다.
저를 돌아가게 해 주소서.
제가 돌아가겠습니다.
당신은 주 저의 하느님이십니다.
저는 돌아오고 나서야 뉘우쳤고 깨닫고 나서야 제 가슴을 쳤습니다.
젊어서 부끄러운 일을 저지른 탓으로 치욕과 수모를 겪게 되었습니다.’
에프라임은 나에게 귀한 자식이요 귀여운 자식이 아니던가!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마다 더욱 그가 생각난다.
그러니
내 마음이 그를 가엾이 여기고 그를 몹시도 가여워하지 않을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다.”(예레 31,1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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