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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해 사순 제 1 주간 월요일 2007. 2. 26. 토평동
레위 19, 1-2.11-18. 마태 25, 31-46.
목자. 가축들을 기르는 목자가 염소를 도살할 때가 돼서 가축들의 무리에서 도살할 염소를 가려냅니다. 성서적인 의미에서 늘 그렇듯 오른편은 행운의 편이고, 왼 편은 그렇지 않습니다. 목자는 도살할 염소를 왼편에 세웁니다. 그때를 상상해보십시오. 내가 가게 될 쪽은 어느 쪽일까? 왼편인가? 오른편인가? 예수께서는 가축들 중에서 목자가 도살할 염소를 가려내는 장면을 우리가 받게 될 최후의 심판에 적용시키십니다. 이런 숨 막히는 순간에서 과연 나는 어느 편에 서게 될까?
그 답은 나의 행위입니다. 최후의 심판은 훗날 이루어질 사건이지만, 그것은 현재의 삶과도 연관이 되어 있어서 지금 내가 만나는 사람들에게 어떤 행동을 했느냐 하는 것이 나의 심판의 상황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도살된 염소, 그 자신은 모르나 목자는 어느 염소를 잡을지 알고 있다. 그것처럼 심판자이신 예수께서는 나를 알고 계신다. 나의 행위를 알고 계시고 그분을 대할 때에는 이미 당신의 심판을 정하셨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예수님의 주된 관심의 대상인 가난한 사람들, 보잘것없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하는가가 중요합니다. 내가 만나는 대상들과의 관계에서 늘 주님을 만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하지만, 특히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이 세상에서 작은이라고 여기는 이들’에게 나는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그것이 심판의 권한을 가지신 예수님의 심판 기준이라고 하십니다.
어떤 이들은 이 말씀을 근거로 무신론 신학을 이끌어냅니다. 그들은 “꼭 하느님을 알아야 하는 것은 아니고 선업을 행하는 것으로 족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마태오복음사가가 전해주는 예수님과는 다른 것입니다. 선한 일을 하는 사람, 착한 사람들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라면, 지극히 높으신 분께서 굳이 사람이 되시어 수난하시고 죽음을 당하실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이전에도 그리고 예수님 이후에도 착한 사람들은 늘 있었고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 때문에, 예수를 대하듯,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이 세상에서 작은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대하는 사람은 구원을 받습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분명한 사실은 지금의 삶이 심판자 앞에 선 나의 심판을 좌우한다는 것입니다. 과연 나는 심판의 때에 예수의 우리를 벗어나 죽음을 당할 염소가 될 것인가? 아니면 그때에도 목자이신 주님의 보살핌을 받는 양이 될 것인가? 지금의 삶이 중요합니다. 오늘 만나는 이들을 대하는 나의 자세가 중요하며, 그중에서도 행한 것을 그대로 갚아줄 사람들이 아니라, 갚을 길이 없는 ‘굶주린 사람, 목마른 사람, 헐벗은 사람, 이 세상에서 작은이라고 여기는 이들’을 대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
다해 사순 제 1 주간 월요일/최후의 심판 - 조성호 신부님
2007. 2. 27. 오전 11:4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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