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의 심판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기준 - 노영찬 신부님

2007. 2. 27. 오전 11:44:09

글자

복  음 : 마태 25, 31-46
 
  평화 방송 애청자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오늘 성서의 말씀을 들으면서 지난 2월 어느 시사 주간지에서 본 예사롭지 않았던 특집 내용이 생각납니다. 특집의 제목은 이랬습니다. '젊은 그대여 유서를 쓰자'. 젊은이들에게 유서를 쓰자고 권유하는 글귀입니다. 밝고 경쾌한 분위기보다는 무겁고 암울한 분위기가 느껴지지 않습니까? 유언이나 유서란 사람이 죽음을 염두에 두고 자신이 이 세상을 떠난 이후에도 여전히 삶을 계속해 나갈 사람들에게 마지막으로 자신의 생각과 의지를 명백히 밝히는 의사 전달 방식입니다.

 

그런데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 가운데서 자신이 이 세상을 향한 마지막 발언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글로써 남겨라, 그것도 아직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그런 유언장을 작성해보라고 권유하는 이 특집의 제목만 보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읽어가다 보면 유서를 쓰자는 구호가 요즘 인터넷에서 나타나는 엽기적인 자살 방조 사이트와는 전혀 다른 발상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단번에 알게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 자살을 찬양하고 방조하며, 유도하는 죽음과 관련된 현상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서 혐오하고 거부하며, 삶은 전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결론으로 치닫습니다. 이에 반해서 이 특집 기사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알차고 의미와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하는 모색을 하는 중에 역설적으로 삶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이야기인 유서 작성에 초점을 맞추어 삶은 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삶을 부정하는 죽음을 통해서 오히려 삶을 깊이 긍정하려는 자세입니다.


  실제로 언젠가는 누구에게나 다가올 죽음을 준비한다는 것은 죽음 이후에는 불가능합니다. 우리 각자에게 오늘도, '오늘'이라는 이름으로 주어지는 시간 안에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느끼는 "지금 그리고 여기서"만 우리는 죽음을 준비하는 행동을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므로 죽음의 준비는 살아 있을 때만 가능한 것입니다. 어느 대학의 교수는 학기초 수업 첫 시간에 학생들에게 다음과 같은 내용의 유산 기증 서약서를 찬찬히 살펴보고 쓰는 연습을 시킨다고 합니다.‘본인은 빈곤한 사람들을 도우며, 빈곤의 구조를 개혁하고, 타파하기 위하여 본인의 재산 중 1%를 빈곤퇴치를 위한 기금으로 기증합니다'.
  유서를 통해 전하는 말은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남기는 특별한 흔적입니다. 우리는 이런 흔적 속에 자신이 소중하다고 믿고 추구하고 지향했던 어떤 가치를 내비칩니다. 그러기에 우리 각자의 삶을 총 결산할 때 나타나는 그 어떤 가치가 이 유서 속에 담겨질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말씀은 우리 각자의 삶이 모두 마감한 후에 이루어지는 최후의 심판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오면서 추구했던 가치가 과연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며 삶의 기회를 허락하셨던 하느님이 원하셨던 가치와 어떻게 부합하는가가 이 말씀 속에 잘 드러납니다.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오른편에 섰던 사람들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아 하느님 나라의 상속자라는 포상을 받고, 반대편에 섰던 사람들은 영원한 벌을 받게 됩니다. 이렇게 한편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구원으로, 다른 한편은 영원한 벌을 받는 멸망으로 나눠 최후의 심판을 내리는 기준은 하느님이 원하셨던 가치와 인간이 추구하는 가치 사이의 차이를 밝혀 줍니다. 구원에 이르는 사람들도, 멸망에 빠지는 사람들도 모두 이승의 삶을 살면서 자신들의 행동이 종말의 심판 앞에서 어떤 의미를 주는지를 별로 의식하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나그네 된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관심을 표현했고, 멸망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변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그저 한낱 의미없는 풍경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깊이 관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여 나가는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한 사람의 눈에는 사회의 어둡고 구석진 곳에 이름 없이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가장 낮은 곳을 먼저 배려하는 이런 마음이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느님을 이미 만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 돌아갈 몫이 구원인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이처럼 하느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저울의 추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오늘밤 우리가 유서를 쓴다면 과연 이런 가치를 담은 유서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지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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