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복 음 : 마태 25, 31-46
그런데 한 인간이 이 세상을 살아오면서 내뱉었던 수많은 말들 가운데서 자신이 이 세상을 향한 마지막 발언이라고 생각하는 바를 글로써 남겨라, 그것도 아직 앞길이 창창한 젊은이들에게 그런 유언장을 작성해보라고 권유하는 이 특집의 제목만 보면 자칫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읽어가다 보면 유서를 쓰자는 구호가 요즘 인터넷에서 나타나는 엽기적인 자살 방조 사이트와는 전혀 다른 발상에서 출발하는 것임을 단번에 알게 됩니다. 인터넷을 통해 자살을 찬양하고 방조하며, 유도하는 죽음과 관련된 현상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근본적으로 삶에 대해서 혐오하고 거부하며, 삶은 전혀 살만한 가치가 없다는 결론으로 치닫습니다. 이에 반해서 이 특집 기사는 어떻게 하면 좀 더 알차고 의미와 가치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하는 모색을 하는 중에 역설적으로 삶의 끝자락에서 나오는 이야기인 유서 작성에 초점을 맞추어 삶은 살만한 가치가 충분히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려 하고 있습니다. 삶을 부정하는 죽음을 통해서 오히려 삶을 깊이 긍정하려는 자세입니다.
하지만 두 부류의 사람들에게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구원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은 굶주리고, 목마르고, 헐벗고, 감옥에 갇히고, 나그네 된 사람들에 대해 따뜻한 관심을 표현했고, 멸망의 심판을 받은 사람들은 그런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변에 있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일상의 삶을 살면서 만나는 사람들을 그저 한낱 의미없는 풍경으로 여기지 않고 자신과 깊이 관련 있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관심을 기울여 나가는 열려 있는 태도를 취한 사람의 눈에는 사회의 어둡고 구석진 곳에 이름 없이 지내는 사람들의 모습이 들어옵니다. 가장 낮은 곳을 먼저 배려하는 이런 마음이 바로 하느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추구하는 마음이고 그런 마음을 가진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의 모습으로 당신의 사랑을 보여주신 하느님을 이미 만난 사람입니다. 따라서 그 사람에게 돌아갈 몫이 구원인 것은 당연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나는 하느님을 믿는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이처럼 하느님이 원하시는 가치를 자신의 삶을 이끌어가는 저울의 추로 삼는다는 것입니다. 평화방송 애청자 여러분! 오늘밤 우리가 유서를 쓴다면 과연 이런 가치를 담은 유서를 자연스럽게 쓸 수 있을지 성찰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는 하느님의 기준 - 노영찬 신부님
2007. 2. 27. 오전 11:44:09
글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