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훌륭한 사목자요 교육자, 설교자였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이기양 신부님

2007. 1. 24. 오후 3:52: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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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 24일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 
                훌륭한 사목자요 교육자, 설교자였던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 학자

 

   “난세에 영웅이 난다.”는 말이 있듯이 16세기 경 루터, 쯔빙글리, 칼빈 등이 종교 분열을 일으켜 독일,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 구라파 각지를 혼란의 도가니로 빠뜨릴 당시 하느님께서는 성교회를 보호할 세 명의 성인을 보내주십니다. 독일의 성 베드로 가니시오, 이탈리아의 성 가롤로 보로메오, 그리고 프랑스의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이 바로 그 성인들입니다.

   오늘은 그 중에서도 성 프란치스꼬 드 살 주교 학자 기념일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성인이 낯선 분으로 느껴지는 분이 계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이 분이 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주교님이라면 많은 분들이 의아해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돈 보스코 성인께서는 살레시오의 프란치스코 성인을 공경하였고 주보 성인으로 모셨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을 ‘살레시안’이라고 불렀으며 수도회 인장에 살레시오 성인 모습을 새겨 넣기도 하였습니다. 돈 보스코는 살레시오 성인의 구원을 위한 열정적인 진리 추구와 가톨릭 교회를 수호하려는 충성심에 감복하였으며, 살레시오 성인의 인내와 친절, 온유함에 매력을 느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꼬 드 살 성인은 1567년 8월 21일 프랑스 사비아 지방의 살레시오성에서 후작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습니다. 성장한 프란치스코는 파리의 아네시와 클레르몽 예수회 대학에서 공부하였고, 파도바 대학에서는 법률과 신학을 전공하여 24세의 약관의 나이에 법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하였습니다.
고향인 사보아에 금의환향하기 전에 먼저 로마를 방문하고 세상에서 출세해 영화를 누리는 것보다 사제가 되어 희생의 생활을 하려고 결심합니다. 파도바에서 법학을 전공하면서 예수회원들을 만난 것을 계기로 신학을 공부하게 되고 영성생활에 깊은 관심을 갖게 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모르고 벌써부터 자랑스러운 아들을 사보아의 변호사로 개업시킬 예정으로 기뻐했던 신앙심이 깊었던 성인의 아버지가 아들의 희망을 듣고 즉시 승낙을 하니 프란치스코는 마침내 수도 생활을 위해 화려한 세속의 일과 전망을 모두 포기하고 1593년에 사제 수품을 받게 됩니다.
   그 후 아네시 주교는 그의 수완을 인정하여 특히 중대하고 어려운 사명을 그에게 맡기지요. 그것은 사보아의 남부에서 세력을 부리고 있던 칼빈파 이단에 떨어진 사람들을 다시 교회로 개종시키는 일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예측하고 있었지만 그 사업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교회의 이단자들에게 쫓겨 깊은 산으로 피신할 때도 있었고, 초막에서 밤을 보내야 하는 일도 많았으며, 때로는 생명을 빼앗길 뻔한 위험한 순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인은 영웅적인 인내와 온유함, 겸손으로 최후의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 결과 사업을 시작한 지 8년 후 비로소 크리스마스 밤 미사를 이단의 중심지에서 봉헌하고 8백 명의 개종자에게 성체를 영해 줄 수가 있었지요. 그 후부터 칼빈파의 지반은 점차 붕괴되고 연거푸 개종자들이 증가하여 1597년에는 프란치스코 성인의 노력으로 개종한 사람들이 무려 7만을 헤아리게 되었습니다. 성인은 아네시 주교의 추천으로 1599년에는 주교로 임명되었는데 그 때 이미 당대 최고의 반종교개혁적 지도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프란치스코 성인은 이러한 높은 지위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항상 겸손한 자세로 자기가 맡은 영혼을 돌보는데 각별한 열의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이와 같은 그의 놀라운 사도적 활동이 세상에 널리 퍼지지 않을 수 없었지요. 오래지 않아 그의 이름은 프랑스 국왕의 귀에까지 들어가게 되었고 국왕은 파리나 리용의 대도시에 아직 남아 있는 칼빈파 이단을 전멸하기 위해 프란치스코를 초빙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 도시에서 강론과 기타 모든 방법으로 많은 성과를 올리게 되었습니다. 덕이 높고 학식이 많은 성인에게 영적 지도를 청하는 이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여서 그들에게 일일이 대답해 주기에는 여간 힘드는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유명한 저작 『필로테아』라는 신심생활의 입문서도 그의 지도를 바라는 사람들의 간청으로 저술한 것입니다.
   성인의 개인적 지도로 훌륭하게 된 이 중에는 한 수녀원을 창설한 샹탈의 백작 부인 성녀 프란치스카가 있습니다. 성인은 1604년 사순절의 강론 때에 처음 프란치스카를 만나 그녀가 하느님께 간선된 부인이란 것을 알았는데 그 후 그의 지도 하에 프란치스카는 수도회의 창립을 결심하고 1610년 6월 6일 두 동료와 같이 하느님의 전선을 찬미하여 유화, 소박, 자비의 정신을 세상 사람에게 알려주는 새 수도회 ‘성모방문수도회’(여자 살레시오회)를 세웠습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20년 간 주교직에 있으면서 모든 이에게 성덕의 감화를 주었습니다. 특히 성인은 제네바에 있는 600여 개 교회 신자들에게 신앙심을 북돋아 주었으며 교리를 모르는 사람들을 성심껏 지도하여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계속해서 성무와 영혼의 지도에 전력한 성 프란치스코 드 살은 과로하게 되어 55세인 1622년 12월 28일, 리용의 병석에 눕게 되어 모인 사람들의 기도 속에 조용히 세상을 떠났습니다. 성인은 그 후 1655년에 시성이 되었고 1877년에는 교회 박사로 선언되었으며, 1923년에는 가톨릭 언론의 수호 성인으로 공경 받게 되었습니다. ‘신심 생활 입문’(1606), ‘신애론’(1616) 등이 그가 남긴 유명한 저서입니다.
  
     성 프란치스코 드 살 주교님은 훌륭한 사목자와 교육자, 설교자였습니다. 특히 그분의 온유한 덕은 돈 보스코 성인이 본받을 정도로 정평이 나 있습니다. 본래 다혈질의 급한 성격을 끊임없는 수련으로 교정했을 뿐만 아니라 무수한 박해와 모함에도 온유한 마음으로 모두를 받아들여 하느님 안에 살도록 이끄신 분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신자들을 사랑했기에 성격까지도 뛰어 넘는 수련을 했던 성인의 온화한 마음을 닮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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