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교구 조욱현 신부 -
오늘은 성가정 축일이다. 교회가 이 축일을 제정하여 거행하는 것은 그 ‘성가정’이 이루어진 순간부터 주님의 공생활이 시작될 때까지, 그리고 십자가 위에 돌아가시고 부활하시기까지 겪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우리도 알고 그 성가정을 본받도록 하려는 것이다. 가정은 교회를 위해서나 사회를 위해서나 매우 중요한 곳이다. 우리는 서로 간에 항상 사랑의 막을 쳐야 한다. 가정 안에서 사랑하는 것을 배우지 못한다면, 다른 어느 곳에서도 사랑하기를 배우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가정교회가 사랑과 하느님께 대한 인식과 또한 생명과 인간 품위에 대한 존경심을 가르치는 학교입니다”(1979.1.28. 멕시코 푸에블라에서)라고 하셨으며 그 때문에 가정사목에 중점을 두라는 말씀을 하셨다.
제1독서: 집회 3,3-7.14-17: 주님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어버이를 공경한다
두 남녀가 사랑으로 만나서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낳고 키우는 것이 외적으로는 단순하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 같으나, 한편으로는 어려움, 긴장감, 몰이해, 고통 등도 느끼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신의 처지를 아파하면서도 다시 시작하는 삶을 반복하는 것이 우리 인생인 것 같다. 여기서 성서는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식, 형제와 자매의 가족관계가 사랑이라는 기본법에 근거하고 있음을 알려준다.
1독서에서는 “부모를 공경하라”(출애 20,12)는 계명을 말하고 있다. “아비를 공경하는 것은 자기 죄를 벗는 것이며 어미를 공경하는 것은 보화를 쌓아올리는 것이다.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자기 자식들에게서 기쁨을 얻고 그가 기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들어주시리라. 아비를 공경하는 사람은 오래 살 것이며 주님께 순종하는 사람은 어미를 평안케 한다”(3-6절).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는 것은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과 같다. 하느님께서 가정을 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는 부모에게 자녀들에 대한 사랑을, 자녀들에게는 부모에 대한 사랑을 주셨기 때문에, 이 사랑의 교류의 법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거부하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자기 아비를 저버리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이요, 어미를 노엽게 하는 것은 주님의 저주를 부르는 것이다”(16절).
부모와 자녀는 누구도 변경하거나 파괴할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하느님의 초월적인 구원계획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모에 대한 의무를 채우지 못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것’과 같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은 우리의 ‘죄’를 속죄하는 희생을 하느님께 봉헌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렇게 성서는 가정을 더 풍요로운 역량을 갖추도록 초대하고 있다.
복음: 루카 2,41-52: 부모는 성전에서 예수를 찾아냈다
오늘 복음에서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것은 “왜 나를 찾으셨습니까? 나는 내 아버지의 집에 있어야 할 줄을 모르셨습니까?”(49절)이다. 이 말씀은 예수님의 정체와 사명을 드러내는 말씀이기 때문이다. 즉 아버지와의 관계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것이고, 당신의 삶 전체를 통해 아버지의 뜻을 이루며 아버지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참조: 루가 24,26.46-47).
예수님의 성가정은 해마다 과월절이 되면 명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갔다. 그것은 히브리인들의 종교적 관습에 따른 것이지만, 어린 예수님을 위해서도 더욱 그러하였다. 성전에서는 교사들이 회당에서 성서를 봉독할 수 있는 자격과 아울러 신앙으로 성인(成人)으로 인정받아야 했던 어린이들에게 율법을 가르쳤다. 이렇게 그 가정은 종교의 행위에 개방된 가정이었다. 이러한 종교적 행위가 필요 없는 듯 여겨질 수 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면서 하느님과의 관계나 기도, 그리고 주님의 말씀을 읽고 묵상하는 등의 종교행위가 우리 가정이 티 없는 공동체로 성장할 수 있도록 향기를 부여해 준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을지 모르는 우리를 일깨워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님을 성전에서 잃어버렸다는 것은 나자렛 가정에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 분위기는 마리아가 걱정하며 사흘 만에 성전에서 예수를 발견하였을 때, “얘야, 왜 우리를 이렇게 애태우느냐? 너를 찾느라고 아버지와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른다”(48절)라고 하신 말씀 속에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깊은 의미가 있다. 우리가 보는 가정은 모두가 아무런 번민, 즉 몰이해, 갈등, 오류, 실패, 질병, 또는 죽음 등으로 인한 문제가 없을 만큼 이상적인 가정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이루고 있는 가정은 모두 이럴 수 있다. 여기서 신앙으로 ‘하느님께 대한 신뢰’만이 그 고통을 덜어줄 수 있고 가족들을 더 가깝게 일치시켜 주고 밝은 희망을 줄 수 있다. 괴로움과 고통이 생활을 멈출 수는 없다. 하느님을 통해 보이는 괴로움과 고통은 생활을 보다 역동적이고 풍요롭게 해 준다. “예수는 부모를 따라 나자렛으로 돌아와 부모에게 순종하며 살았다. 그 어머니는 이 모든 일을 마음속에 간직하였다. 예수는 몸과 지혜가 날로 자라면서 하느님과 사람의 총애를 더욱 많이 받게 되었다”(51-52절)이라고 복음을 맺고 있는 것을 우리는 일 수 있다.
오늘 복음에는 우리의 사고를 요하는 대목이 있다. “부모는 아들이 한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지 못하였다”(50절)고 한다. 아들의 태도와 말속에는 어떤 신비가 들어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비일 것이다. 이 신비는 그의 부모들도 우리도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우리도 이것을 알아야 한다. 성장과정에 있는 인간존재 안에는 ‘신비’가 들어있다. 그래서 부모들은 자녀들 위에 군림하지 말고 하느님 안에서 자녀들의 문제를 이해하고 그들이 그 문제를 해결해갈 수 있어야 한다. 흔히 자녀들의 길은 부모들이 원하거나 생각하는 길과는 다르다. 그러므로 그들이 하느님께 대한 충만한 믿음으로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도록 존중하고 용기를 주어야 한다.
제2독서: 골로 3,12-21: 주님과 함께 사는 가정생활
2독서에서도 가정의 원천이 오로지 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하느님의 사랑의 대상이라는 것을 알면 서로 사랑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렇게 해서 사랑의 공동체가 되고, 그 안에서 각자는 형제자매로서 받아들여지고 또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랑의 법이 ‘그리스도 안에 새로워진 존재’로서의 그리스도인들의 기본적 규범이라면, 이 법은 이미 자연적 유대관계를 전제로 하는 가정에서도 유효한 것은 당연하다. 즉 가정에서 보다 비옥한 경작지를 얻게 된다. 이러한 사랑의 내용에 비추어 가정적 의무의 어떤 것을 강조하고 있다.
“아내 된 사람들은 자기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해야 할 본분입니다. 남편 된 사람들은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아내를 모질게 대해서는 안 됩니다. 자녀 된 사람들은 무슨 일에나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이것이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입니다. 어버이들은 자녀들을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그들의 의기를 꺾어서는 안 됩니다”(18-21절). 자신의 고유한 역할 때문에 남에게 부담을 주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사랑의 분위기 속에서만 가능하다. 가정이 사랑으로 하나가 되어 살아가는 것이 바로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일”(20절)이라고 바오로 사도는 말하고 있다. 그래서 이러한 그리스도교 사상은 오늘날 퇴폐하고 파탄에 이를 지경에 놓이게 되는 이 자연적 가정에도 새로운 힘과 의미를 부여해 줄 수 있다. 이를 위해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볼 때 나자렛 가정은 자녀들에 대해서 부모가 갖추어야 할 자세를 잘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우리들은 “가정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계획”임을 깨닫고,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성가정을 이루어 나가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제 우리 모두 2천년 전 예수, 마리아, 요셉의 성가정을 묵상하면서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 가정’이 되도록 주님의 은총을 구하면서 이 미사를 봉헌하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