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21일 오늘의 성인

2006. 11. 29. 오후 5: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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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성인 8월 21일 ♬ *




1.비오(Pius)

비오는 '경건한'이란 뜻이다.
구두 수선 및 우체부의 10남매 중 둘째인 쥬세뻬 멜치오르 사르또는 이탈리아 트레비스 교외 리에제에서 태어났고, 1850년에 파두아 신학교에 들어갔다. 1858년에 사제가 된 그는 향후 17년 동안 본당 사목자 생활을 하다가, 1884년에 만투아의 주교가 되었다. 그후 그는 베니스의 추기경과 총주교가 되었으나, 베니스 정부와의 문제로 인하여 18개월 간 부인하지 못하였다. 그는 레오 13세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일도서 개정을 명하였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하였다. 그의 재임기간은 "모던니즘"과의 투쟁이 많았고, 1910년에는 프랑스 사회 운동인 "실롱"을 단죄했다. 그는 1954년에 비오 12세에 의하여 시성되었는데, 이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다

특히 성가와 성무 일과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어린이들의 첫 영성체, 매일 영성체와 끊임없는 성서 공부를 권고하였고 사제들의 목자적 임무 수행을 적극 지원하였으며, 그들의 학문 수준을 향상 시켰습니다.

인간적 재능과 조직 능력이 풍부하게 첨부된 그의 깊은 종교적 정신은 교회의 전반적 삶의 양상과 선교사업에 집중되었습니다. 모든 타협을 거부함으로써 여러 나라의 정부들과 약간의 충돌을 빚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1914년 8월21일 그의 정신과 신앙을 흠모하던 많은 시민들의 애도 속에 제 1차 세계 대전의 발발을 슬퍼하면서 눈을 감았습니다. 1903년 레오 13세의 서거로 사르토 추기경도 교황 선거를 하기 위해 로마로 상경하게 되었다. 그는 선거 후 곧 돌아갈 줄 알고 왕복차표를 마련했다. 그러나 돌아갈 차표는 필요치 않게 되었다. 그 이유는 압도적 다수표로 새로운 교황에 당선되었기 때문이다.' 교황으로서의 이름은 그 전대의 교황 비오의 이름을 따서 그는 비오 10세가 되었다.

비오 10세는 전임 교황과는 전혀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교황좌에 오른 후 발표한 첫 번째 칙서 “E Supremi Apostolatus"(10월 4일)는 추기경단에 한 훈시와 더불어 비오 10세의 사목방향을 제시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하느님으로부터의 이탈과 배교가 어느 시대보다도 심하게 일어나는 시대임을 강조한 교황은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 회복시켜 그리스도가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게 하자고 호소했다. 그는 교회법 개정을 착수했고, 불가타 성서 개역 위원회를 만들었으며, 시편과 성무 일도서 개정을 명했다. 특히 그는 성체를 자주 영하도록 권장했다. 그의 재임 기간은 “모던니즘”과의 투쟁이 많았고, 1910년에는 프랑스사회 운동인 “실롱”을 단죄했다.

그의 만년인 1914년 8월 2일에 돌연 세계대전이 발발했다. 그는 평화의 회복을 위해 전력했으나 결국 허사였다. 그리고 그로부터 3주일이 지난 1924년 8월 20일을 일기로 그는 영원히 세상을 하직했다. 교황이 서거하자 전세계는 겸손하고 열심한 교황의 죽음을 애도했다. 추기경단의 요청으로 엄격한 시복 시성 조사를 한 후 그분으로부터 3대의 후계자인 비오 12세에 의해 1951년 6월 3일 베드로 대성전에서 시복되었고, 1954년 5월 29일에는 역시 같은 장소에서 시성되었는데, 이는 1712년 비오 5세가 시성된 후 처음으로 시성된 교황이다.

2.베르나르도(Bernardus)

시에나 출신인 성 베르나르도는 요한이란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지방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후 사회에 진출하였다.

매우 신심이 깊었던 그는 갑작스럽게 "개심"하여 모든 것을 뿌리친 뒤 은둔소로 피신하였다. 그는 두 사람의 다른 시에나 사람과 함께 살았는데, 암브로시오 피꼴로미니와 빠뜨리시오 빠뜨리찌였다. 이들 셋은 시에나의 황무지, 몬떼아미아따의 숲속에서 지냈다.
이리하여 그들은 아레쪼의 주교로부터 베네딕또 회칙을 받고 회수자가 되었다. 요한 똘로메이는 이때 베르나르도로 개명하고, 그들의 은둔소명을 따라 "몬떼 올리비에또의 성모회"라는 수도회 창설을 이룩하였다. (1319년). 그는 끌레르보의 성 베르나르도와 함께 시에나의 수호성인이다. 올리베따노회는 베네딕또회와는 독립된 수도회이다.


3.그라시아(Gratia)

1180년경 동정 순교 성 베르나르도, 성녀 그라시아, 성녀 마리아(알지라의) 순교자. 성 베르나르도는, 바렌사(Valenza)의 사라센 왕국의 칼렛(Carlet)의 에미르(족장)이었던 알만조(Almanzor) 아버지에게서 태어났으며, 성인은 형과 두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이 두 여동생이 바로 성녀 그라시아와 성녀 마리아이다. 성 베르나르도는 바렌사 궁정에서 형과 함께 궁정 교육을 받았다. 어느날 성인은 일군의 노예해방을 협정하기 위해 카타로냐(Catalogna)에 파견되었다. 임무수행을 마치고 돌아오는 도중에 성인은 그만 길을 잃어버렸다. 하루밤을 꼬박 숲속에서 지내게 되었는데, 어느 수도원에서 들려오는 천사들이 노래하는듯한 합창을 듣게 되었다. 이 수도원에서 수도원장의 친절한 환대를 받았다. 흰색 수도복을 입은 수도승들의 덕행과 겸손에 대해 큰 감명을 받게 되었다. 그후 성인은 세례를 받기 위해 교리교육을 받고, 수도원으로 입회하게 되었다.

수도원에서 그는 수도원 재산관리를 맡았는데, 이때 그는 가난한 이들에게 동냥을 많이 하여 더러는 수도원의 비난을 받기도 하였다. 이때 그의 가족들은 회교도 신자들이었는데, 이들 가족들을 가톨릭 신자로 회개 시켰다. 두 여동생의 본래의 이름은 조라이드(Zoraide), 자이다(Zaida)이었는데, 세례를 받으면서 그라시아(Grazia)와 마리아(Maria)로 개명하였다. 이후 성 베르나르도와 두 여동생은, 가톨릭을 박해하는 에미르(족장)의 눈을 피해 도망을 갔지만 붙잡혀서 순교를 당하였다. 이들은 알지라(Alzira)에 묻혔다.

후에 이들을 기념하여 아라고나(Aragona)의 왕이었던 야고보 1세가 성당을 건립하였다.
아라고나의 수도승들은 7월 23일에 축일로 기념하였으나, 1871년부터 베르나르도 성인은 5월 19일로 옮겨서 지내게 되었다. 또 다른 전승에 의하면 이 세 성인들을 6월 1일에 기념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이들이 순교한 날이 8월 21일이므로 이 날을 기념하기도 한다


4. 보노소(Bonosus)

363 순교자 배교자 율리안 황제는 콘스탄티노 대제가 군대의 상징으로 두라고 명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성명 (첫 글자만 짜맞춘 글자)을 뜯어 내고, 이방인의 신들을 조각한 상징물을 달라고 명하였을 때, 안티오키아의 열렬한 신자이던 보노소와 막시미아노는 이를 거부하였다.

황제의 사촌인 율리안 백작이 이를 보고 괘심히 여겨 그들에게 로마신의 공경을 강요하며 고문하였다. 이때 보노소는 "사람의 손으로 만든 이따위 신들에게 예배드릴 순 없다."고 용감히 맞섰기 때문에, 같은 태도를 취하였던 동료 장교 막시미아노와 함께 참수형을 받아 순교하였다


5.아브라함(abraham)

아브라함은 '백성들의 아버지'란 뜻이다.

아브라함은 그의 출생지인 스몰렌스크에서 수도자가 되었으며, 성서 연구와 설교에 전념하였다.

그는 엄격하고 군이다운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수많은 평신도들이 그를 추종하였는데, 그 이유는 병든 자와 어려운 사람들에 대한 그의 따뜻한 애정 때문이었다. 그러나 성직자들 사이에는 적이 많았고, 그를 미워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았다. 스몰렌스크의 주교는 그를 시험하고자 5년 동안이나 그를 암울하게 지내게 하였다.
그런 다음에 주교는 다시 그를 시험한 후 조그마한 수도원의 원장으로 임명 하자 여기서 아브라함 평화스럽게 여생을 지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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