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4일 오늘의 성인

2006. 11. 29. 오후 5:10: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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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성인 8월 14일 ♬ *




1.막시밀리안 콜베(Maximilian Kolbe)

막시밀리아노 마리아 콜베 성인은 1894년 1월 7일 폴란드의 즈둔스카볼라에서 아버지 율리오 콜베와 어머니 마리아 다브로프스카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렸을 적 콜베의 이름은 ’라이문도’였는데 열심한 부모에게서 엄격한 신앙교육을 받았고 훌륭한 성모신심을 몸에 익혔다. 1907년에 콜베 성인은 14세의 나이에 라부프 소신학교에 들어갔고 꼰벤뚜알 프란치스코회에 입회하게 되었다.
1912년에는 로마로 유학을 가게 되었고 학업 중인 1917년 로마에서 동료 수사 6명과 함께성모기사회를 창설하게 된다. 1918년 사제서품을 받고 다음 해에는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그 해 9월에 폴란드로 귀국하여 교수생활을 하다가 10월에는 본격적인’성모 기사회’활동을 시작하게 된다.
1922년 1월에 콜베 성인은 잡지 ’원죄없으신 성모기사’를 창간하게 되는데 성모기사회의 운동은 이제 잡지 ’성모기사’를 통해 추진해 나가게 된다.
콜베 성인은 1년 뒤인 1931년 5월 히코산 홍고시의 외곽에 땅을 얻어 ’원죄없으신 성모마을’을 설립한다. 그의 선교열정은 일본에서만 머물지 않고 1932년 6월에는 새로운 성모마을을 세우기 위해 인도로까지 떠나게 된다. 그 뒤 일본으로 돌아 와 잡지를 더욱 발전시키며 선교활동에 전념했다. 이렇듯 선교에 대한 콜베 성인의 열정은 한계를 모른 채 전진하며세계 곳곳에 성모마을을 세우고 복음화 활동을 벌였다.
1936년 콜베 성인은 폴란드의 성모 마을 원장에 선출되어 폴란드로 돌아오게 된다. 당시 유럽은 나치의 위협속에 있었고 폴란드 역시 1939년 9월 독일군대의 침입을 받게 된다. 1941년 2월 17일 콜베 성인은 나치 비밀 경찰에게 체포되어 파비악 형무소에 갇히게 되는데 체포이유는 그가 100만부에 이르는 잡지 발행자로서 폴란드 국민에게 커다란 영향과 권위를 지녔기 때문이었다.
이곳에서 콜베 성인은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혹독한 고문으로 고통받고 있던 많은 이들에게 고해성사를 주고 그들과 함께 기도하며 위로해 주었다. 그 해 5월 28일 그는 ’죽음의 수용소’라고 불리던 ’오센침’(아우슈비츠)으로 이송된다. 수용소에서 콜베 성인은 사제이기에 더욱더 혹독한 강제노동에 시달려야 했다.
콜베 성인은 힘든 상황에서도 결코 평온함을 잃지 않고 자신이 더 어려우면서도 주위에 절망하고 있는 수감자들을 오히려 위로하고 고해성사를 주었으며 처벌의 위험을 무릅쓰고 틈틈이 설교와 면담을 해줌으로 수감자들의 마음을 진정시키고 평화를 심어 주는데 전력했다. 그러다 때론 발각되어 심한 구타로 실신까지 했지만 그분의 이런 활동은 좌절할 줄 몰랐다.
막시밀리아노 신부가 아우슈비츠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충격을 주고 놀라움을 준 사건이 터졌다. 한 죄수가 탈출을 한 것이다. 수용소 규칙에 따르면 한 죄수가 도망쳤을 경우 그 사람이 속한 감방의 10명은 끔찍한 지하감방에서 기아로 죽게 되어있었다.
소장은 죄수들을 광장에서 열을 지어 세워 놓고 아사감방으로 갈 희생자 10명을 골라내었다. 소장에게 지명받고 아사감방으로 떠나게 된 사람들은 울거나 동료들에게 작별을 고하기도 했다. 그런데 그 중 한 사람 프란치스코 가조브니체크라는 사람이 자신의 가족들을 보고싶다고 소리치며 울부짖었다.
이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한 죄수가 열에서 나와 그 사람 대신 자신을 바치겠다고 한 것이다. 그는 바로 콜베 신부였으며 이렇게 해서 콜베 신부는 그 죄수를 대신하여 다른 9명의 죄수와 함께 아사감방에 가게 되었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콜베 신부는 인간이 세운 가장 사악한 곳을 사랑 가득한 마음으로 정복하였다.
그는 다른 9명의 수감자들을 격려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해 주고 위로해 주었다.그분의 행동에 간수들까지 그를 존경하였다. 죄수들은 굶주림으로 하나 둘 잇따라 죽어갔고 마침내 콜베 신부님을 포함한 4명만 남게 되었는데 콜베 신부님은 그들과 함께 결국 독약 주사를 죽게 된다.
이렇게 콜베성인은 독약주사를 맞고 47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는데 그 날은 1941년 8월 14일이었고 성모승천 대축일 전날이었다.


2.아타나시아(Athanasia)

860년 은수자 콘스탄티노블 에지나 출신인 성녀 아타나시아는 어느 장교와 결혼하였으나,
단지 16일만에 남편이 아랍인과의 전투에서 죽음으로써 과부가 되었다. 그러던 어느날, 지상의 모든 영화는 잠시 지나는 것임을 보여주는 꿈을 꾼 뒤, 재혼하라는 부모의 권유를 뿌리치려고 노력하였으나 결론은 두번째 남편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런데 그의 남편은 매우 열심하고 신심이 있었으므로, 아내의 신앙생활을 적극 이해하고 협력하였던 것이다.
이때문에 그녀는 자유롭게 기부금도 내고 병자를 찾아볼 수 있었으며 인근의 부인들을 모아서 성서 공부를 할 수 있었다. 그 얼마 후, 이들 부부는 각각 수도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헤어졌다. 성녀 아타나시아는 마지아라 부르는 어느 성자의 지도를 받았는데, 너무나 고행을 많이 행하여 제대로 걸을 수조차 없었다고 한다.
영적인 지혜가 충만했던 아타나시아는 그후 콘스탄티노블로 불려가서 황녀 테오도라의 고문 역할도 한 적이 있다. 이때 그녀는 7년을 궁중에서 살았으나, 자신의 은둔소를 짓고 그 속에서만 고해과 기도로 지낸 것으로 너무나 유명하다. 그녀는 병때문에 자신의 원래 움악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운명하였다


3.성 마르첼로, 주교, 순교자(389년 순교)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제국의 크리스챤화를 시도하고, 380년에 그의 모든 신하들이 로마와 알렉산드리아의 주교들에게 신앙을 고백토록 하는 칙서를 발표하였다.
또 8년 후에는 관리들을 각 지방으로 파견하여 이방인 신전들을 파괘케 하니, 한편으로는 원성도 많았다. 황제의 관리가 시라아의 아파메아에 도착하여 그곳의 제우스 신전을 파괴했는데, 이곳의 주교는 마르첼로였다. 관리들은 주교의 도움을 받아 이 신전을 파괴하였는데, 마르첼로는 또 다른 신전을 파괴하려고 조사하던 길에 이방인들에 의하여 돌에 맞아 순교하였다


4.에우세비오(eusebius)

에우세비오는 '경건한, 신심 깊은'이란 뜻이다.
4세기 후반부에 로마에서 살았던 에우세비오의 생애는 별로 알려진게 없다.
그는 아리아파 황제이던 콘스탄시우스를 반박했던 사제였고, 교황 펠릭스 2세를 공적으로 지지하였으며, 교회의 공식 집회가 금지된 후부터는 자기 집에서 미사를 집전했던 용감한 사제였던 것이다.
이 때문에 그는 자기 집에서 체포되어, 7개월 후에 운명하였다. 그는 아피안로에 있는 갈리스또 묘지에 안장되었는데, 묘비명은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하느님의 사람인 에우세비오


5.안토니오 프라말디(antony primaldi)

1480년, 모하메드 2세 치하의 터키는 남부 이탈리아의 오트란또를 점령하고, 수많은 주민들을 학살하였다. 이들 중에는 안토니오 프리말디를 중심으로 8백명의 크리스챤들이 순교하였다.
그는 이때 노인으로 예술가였고, 그 도시에서는 저명인사였다. 그는 포로로 잡힌 사람들의 대표자로서 터키 당국자와 평화 협상을 시도하였으나, 그들은 크리스챤 신앙을 포기하고 모하메드 신앙을 고백하기를 요구하였다. 이때문에 회담은 결렬되었고, 그는 돌아와서 주민들에게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 도시와 우리 자신을 위해 싸워야 합니다.
또 우리는 우리 영혼과 그리스도 예수를 위해서 싸워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위해 죽으면 살 것입니다." 이리하여 안토니오는 오트란토의 첫번째 순교자가 되었던 것이다. 이러 대학살이 벌어졌는데, 이것이 저 유명한 "순교자들의 계곡"이라고 부르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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