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7일 가톨릭 성인들  ♤성 가예타노 Gajetanus 08.07 증거자 창설자 티엔 1547년
성가에타노 사제(1480-1547)
축일;8월 7일
우리들과 마찬가지로 가예타노도 평범한 삶을 살았으며
처음에는법률가로서, 후에는 사제로서 로마 교황청에서 일했다.
그는 36세에 서품을 받고 곧 로마에 있는 하느님 사랑의 오라토리오회에 입회했다.
이것은 그의 인생의 커다란 전환이었다.
이 단체는 동정과 자비를 위해 헌신하는 회였다.
그는 42세 때 베네치아에 불치병 환자를 위한 병원을 세웠다.
비첸차에서는 가장 하류층의 남자들만으로 구성된 평판이 나쁜수도회에 들어갔다.
그 때문에 그는 친구들로부터 가문을 손상시킨 사람이라는 노골적인 비난을 받았다.
그는 여러 마을을 다니며 환자와 가난한 이를 찾아 내어 도와 주었다.
그 시대의 가장 큰 요구는
'책임자와 구성원들'이 병들어 있는교회를 개혁하는 것이었다.
가에타노와 3명의 동료들은,
개혁의최선책은 사제의 정신과 열정을 소생시키는 것이라고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함께 테아티노회로 알려진 수도회를 세웠다.
(그들중의 한 사람은 후에 교황 바오로4세가 됨) 최초의 장상인
그들의 주교가 주교좌를 두고 있던
테아테(치에티)에서 테아티노회라는 이름이 나왔다.
그들은,
칼 5세가 1527년 로마를 약탈하는 와중에 로마에 있던
그들의 집이 파괴되자 베네치아로 피신했다.
테아티노회는 프로테스탄트 개혁이 있기 전에 일어난
가톨릭 개혁 운동 중 가장 뛰어난 운동이었다.
그는 나폴리에 몬테 디 피에티(자선기금)를 설립했다.
이는 많은 자선 단체 가운데 하나로써 저당물을 담보로
돈을 빌려 주는 비영리적 신용 기관 중의 하나이다.
이 기관의목적은 가난한 사람을 돕고 고리 대금업자들에게서
그들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가에타노의 작은 기관은 마침내 정치적인 큰 변화와 더불어
나풀리 은행이 되었다.
설명 ; 많은 가톨릭 신자들은,
만일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1962년 첫 회기중에 바로 중지되었다면
교회 성장에 큰 일격이 가해졌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가에타노도 트렌트 공의회에 대해똑같은 느낌을 가졌다.
그러나 가에타노가 말했듯이 하느님은 베네치아에서처럼
나폴리에도 똑같이 계시며,
트렌트 공의회나 제2차 바티칸 공의회(혹은 제3차 공의회)가 있든 없든
언제 어디서나 계시다.
우리 스스로가 처한 환경이 어떻든 간에 하느님의 전능에 자신을 열어 보이면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
하느님은 우리와는 다른 성공의 기준을 가지고 계신다.
이야기 ; 가에타노가 자기 수도회를 위한 집을 짓기 위해
나폴리에 파견되었을 때,
어떤 백작이 그에게 토지 소유권을 받아들이게 하려고 설득하였다.
그러나 그는 거절했다.
백작이 "나폴리 사람들은 베네치아 사람만큼 풍족하지 않기 때문에
돈이 필요할것이다."하자 가에타노는
"그 말이 맞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께서는 두 도시에 똑같이 계십니다."라고 대답했다.
♤성 까씨아노 cassian 08.07 순교자 디바루아 1638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방돔에서 태어났고,
21살 되던 해에 르 망의 까프친회에 들어갔으며,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뽀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회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630년에 까프친회는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 종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이들 중에 낭뜨의 까씨아노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까씨아노는 즉시 아카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가 이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로 갔다가,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0세는 이 두분이 17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성 도나도 Donatus 08.07 주교 아레쏘 362년
도나도는 투스카니의 아레쏘의 두 번째 주교이다.
로마 순교록에는 그가 율리안 황제 때 아레쏘에서 죽은 순교자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의 정확한 내력은 알려지지 않았다.
♤성 도메씨오 페르샤인
DOMETIUS 08.07 순교자 362년
♤성 도미시오 Domitius 08.07 순교 4세기경
♤성 빅트리치오 Victricius 08.07 주교 로마 407년경
로마 군인으로서 골 지방에 주둔해 있던 성 빅트리치오는
자기 친구인 뚜르의 성 마르띠노처럼,
군인생활은 복음에 비길 수 없다 하여 크리스챤이 됨으로써 거의 목숨을 잃을뻔 하였다.
그루 그가 385년경에 루앙의 주교로 착좌할 때까지의 과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어쨌든 그는 넓은 지역을 정열적으로 뛰어다니는 선교사 주교로 활약하였다.
그는 395년경에 브리텐의 주교들로부터 무슨 일을 꼭 해결해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유명하였고 또 영향력이 있었다.
그의 또다른 친구는 놀라의 성 바울리노이다.
그가 기록했던 "성인들의 찬가"를 비롯하여
인노첸시오 1세 교황이 그에게 보낸 규율적인 문서가 남아 있다.
♤성 식스토 2세 SixtusⅡ 08.07 교황 순교 로마 258년
식스토는 '여섯 번째'란 뜻이다.
성 식스토는 257년에 교황 성 스테파노를 계승하였다.
이때 황제 발레리안은 크리스챤을 박해하는 첫번째 칙령을 내렸다.
군사들이 크리스챤을 습격했을 때, 식스토는 무덤 속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로마의 무덤들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삐아에 있는 성 갈리스토 묘지에 안장되었다.
식스토와 함께 체포된 사람은 부제 성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뇨 그리고 스테파노이다.
그리고 펠리치시모와 아가비도는 교황 식스토와 함께 같은 날에 순교하였으므로,
로마 순교록에는 같은 날을 축일로 정하고 공경한다.
그들은 프랙텍스타투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성 아가비도 agapitus 08.07 순교자 로마 258
성 식스또는 257년에 교황 성 스테파노를 계승하였다.
이때 황제 발레리안은 크리스챤을 박해하는 첫번째 칙령을 내렸다.
군사들이 크리스챤을 습격했을 때,
식스또는 무덤 속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로마의 무덤들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기 떄문이다.
그는 아비아에 있는 성 갈리스또 묘지에 안장되었다.
식스또와 함께 체포된 사람은 부제 성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뇨 그리고 스테파노이다.
그리고 펠리치시모와 아가비도는 교황 식스또와 함께 같은 날에
순교하였으므로,
로마 순교록에는 같은 날을 축일로 정하고 공경한다.
그들은 프랙테스타투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성 아가탄젤로 agathangelo 08.07 순교자 시리아 1638
아가탄젤로는 1598년에 방돔에서 태어났고,
21살 되던 해에 르 망의 까프친회에 들어갔으며,
1625년에 사제로 서품되면서부터 시리아로 갈 때까지
고향에서 유명한 설교자로 명성을 떨쳤다.
또 알레뽀에서는 프랑스와 이탈리아 상인들을 상대로 사목활동을 하였으며,
그 동안에 아라비아어를 공부하여 대화나 강론에서
자유자재로 구사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었다.
그는 모슬렘 사회의 문맹을 퇴치하고, 터키인들에게 그리스도교회를 전하는 등,
당시의 교회가 위험하다고 금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던 것이다.
1630년에 까프친회는 카이로에 선교지를 확보하고 활동을 개시하였는데,
아가탄젤로는 1633년에 그곳의 책임자로 동분서주하였다.
이때 마르세이유에서 3명의 선교사들이 합류하였는데,
이들 중에 낭뜨의 까씨아노 신부가 가장 출중하였다.
까씨아노는 즉시 아카탄젤로 신부의 오른팔이 되어 활동을 하였는데,
그가 특히 노력한 것은 로마 성좌와 곱트 교회간의 재일치를 도모하는 일이었다.
이들 두 선교사가 이 힘든 일을 계속하다가,
에티오피아 선교를 위하여 디바루아로 갔다가,
그곳의 왕인 바실리데스 앞으로 끌려갔다가, 결국은 순교하고 말았다.
교황 비오 10세는 이 두 분이 17세기에서 가장 위대한 선교사였다고 선포하였다.
♤성 알베르토 albert 08.07 은수자 트라파니 1307년
알베르토는 '고귀하고 빛남'이란 뜻이다.
시실리의 알베르도로도 알려진 성 알베르또는 이 섬의 트라파니 태생이다.
그들의 부모는 아들이 없었으므로 만일 아들을 낳게되면,
몬떼 가르멜의 성모님께 봉헌하겠다고 약속한 뒤에 그를 낳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어릴때부터 가르멜 회원이 되어 사제로 서품된 뒤에는 메시나로 가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규칙 외에도 자발적인 고행을 많이 하였고,
매일 밤에는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고서 시편 전무를 바치는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만년에 그는 메시나와 가까운 곳에서 은수생활을 하였으며,
300년 후에 성녀 마리아 막달레나 빠찌가 가르멜을 떠나려는 유혹으로 고생할 때,
천상에 계시는 성 알베르또에게 기도하여 유혹을 이겼다는 이야기는
그의 성덕이 탁월했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예가 된다.
♤성녀 클라우디아 Claudia 08.07 수절 1세기경
클라우디아 성녀
축일: 5월 19일(혹은 8월 7일)
성바오로 서간 디모테오 후서 4,21에 나오는 인물이다.
아마도 귀족집안의 귀부인이었을 것이다.
성바오로 사도가로마에서 유배생활을 했을 때
성바오로 사도의 뒷바라지를해주엇던 것 같다.
확실치는 않지만 리노 교황의 어머니라는 추정도 있다.
그리고 본시오 빌라도의 아내인 클라우디아 프로클라라는 인물이라고도 한다.
혹은 2디모 4,21에 나오는 부덴스의 아내
(참고:부덴스는 성베드로에 의해 회개한 로마 참정관이었다)라고도한다.
부덴스의 아내인 클라우디아는 110년경에 순교하여 죽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이 성녀를 특별히 공경한 흔적을 찾아볼 수가 없다.
♤성 펠리치시모 felicissimus 08.07 순교자 로마 258
성 식스또는 257년에 교황 성 스테파노를 계승하였다.
이때 황제 발레리안은 크리스챤을 박해하는 첫번재 칙령을 내렸다.
군사들이 크리스챤을 습격했을 때, 식스또는 무덤 속에 있었다.
그 당시에는 로마의 무덤들이 신자들의 집회 장소로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아삐아에 있는 성 갈리스또 묘지에 안장되었다.
식스또와 함께 체포된 사람은 부제 성 야누아리오,
빈첸시오, 마뇨 그리고 스테파노이다.
그리고 펠리치시모와 아가비도는 교황 식스또와 함께 같은 날에 순교하였으므로,
로마 순교록에는 같은 날을 축일로 정하고 공경한다.
그들은 프랙텍타투스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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