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17일 오늘의 성인김김정희2006. 11. 29. 오후 5:18:23글자A−A+ * ♬ 오늘의 성인 8월 17일 ♬ * 1.히야친토(Hyacinth) 히야친토는 1185(1183)년에 태어났으며 저 유명한 서 폴란드의 귀족 오도로본스가의 출신으로 초등 교육을 크라코우와 프라하에서 받고, 그 후 이탈리아에 유학해 신학과 교회법을 연구한 후 박사 학위를 획득하고 그 후 크라코우에 돌아와 카돌베크 주교의 비서로서 활약했다. 칼돌베크 주교가 서거하자 그 훙미 주교로서 히야친토의 백부인 콘스키가 임명되었다. 그가 임명되자, 1218년 교황께 경의를 표시하기 위해 로마로 향했는데, 히아친토와 체슬라오라는 두 조카도 동반했다. 그때 로마에는 스페인의 성 도미니코가 신설 수도회의 인가를 얻기 위해 와 있을 때였다. 콘스키 주교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매우 감동해 폴란드에도 그들의 수사를 파견해 줄 것을 청했다. 그때 동반한 히야친토와 체슬라오도 이에 깊이 감명되어 즉시 입회해 성 도미니코에게 잠시 동안 수련을 받은 후 성녀 사비나 성당에서 착복식을 올렸다. 이로서 성 도미니코회의 폴란드에서의 큰 활로는 열린 것이다. 곧 귀국한 히야친토는 수도 크라코우에 도미니코회의 수도원을 세워 이를 하느님이신 성삼위께 봉헌하고, 그곳을 근거지로 여러 곳을 순회하며 설교를 했던 바, 곳곳에서 큰 성과를 거두게되었다. 그는 각지에서 대환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의 열렬한 기도와 고행의 생활은 기적을 행하게까지 되었으므로 사람들의 그에게 대한 신뢰는 지극해서 제각기 앞을 다투어 모여와 그의 설교를 들었던 것이다. 히야친토가 프러시아 지방에서 전교를 하기 위해 친구와 더불어 단치히시에 가려고 반달룸 강변에 도착한 때였다. 때마침 장마로 인해 잔뜩 불은 강물은 무섭게 구비지며 흐르고 다리도 배도 없는 지라 더욱 막연한 일이었다. 그때 히야친토는 잠시 땅에 무릎을 꿇어 하느님께 도움을 청하며 기도를 하고 일어나 강물 위에 십자를 긋고 나서 동료들과 같이 수도복에 붙은 망토를 깔고 그 위에 서서 건너게 되었는데 마치 배를 탄 것처럼 조금도 빠지지 않고 잘 건넜다는 것이다. 이 사실은 그의 시성 조사록에 기록되어 있는 유명한 기적이다. 그는 중요한 도시마다 수도원을 세우고 일대 사도적 활약을 개시했다. 그러던 중 달단족의 내습으로 인해 많은 수도원이 파괴되었으나 그는 이런 불의의 재화에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즉시 복구에 착수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열의로 인해 어떤 때는 철야 기도를 했으며, 침대는 땅바닥이요 베개는 돌로써 고신극기의 생활을 하면서 그의 사도직을 완수 하기 30년간, 그의 육신은 더 이상 지탱할 수 없어 1257년 8월에는 중병에 걸려 쓰러지게 되었고, 그가 항상 사랑하던 성모 마리아의 대축일인 성모 승천 대축일에 병자 성사를 받고 세상에서 닦은 그 공로의 보수를 받기 위해 천국을 향해 길을 떠났다. 그의 나이 70세였다. 그는 폴란드의 사도로 공경받는다. 2.성 에우세비오, Eusebius 에우세비오는 '경건한, 신심 깊은'이란 뜻이다.희랍인으로서 의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309년 4월 18일에 교황 성 마르첼로를 계승하여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선임자로부터 배교자 처리 문제에 관한 논쟁을 물려 받았다.선임 교황은 적당한 통회를 하고 공적으로 용서받아야만 배교자들을 교회로 다시 받아들인다는 정책을 고수했고, 에우세비오도 이를 따랐다.이 때문에 배교자 그룹들로부터 맹렬한 반대를 받게 되었는데, 그들은 헤라클리오를 반교황으로 옹립한 뒤에, 보속 없이 곧바로 다른 성사를 받을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 논쟁이 끝없이 계속되자, 황제 막센씨우스가 개입하여 헤라클리오와 에우세비오를 시실리로 쫓아 내었다. 에우세비오는 불과 4개월 간 재임한 후 그곳에서 운명하였다 3.요안나 들라누에(Joan delanoue) 그녀의 부친은 앙주의 소뮈르에서 포목상을 하던 사람으로 12명의 자녀를 두었다. 그녀는 모친의 사망 후에 집과 가게를 상속받았고, 같은 이름을 가진 조카와 가업을 이어나갔다. 그녀와 조카는 상술이 뛰어났으나 주일과 축일도 문을 열었기에 주위 사람들로부터 좋은 소리를 듣질 못했고, 또 그녀는 돈에 푹 빠진 사람이 되어버렸다.그녀의 마음은 착하고 고왔지만, 신앙은 겉돌고 있었다. 1693년의 공헌축일에 낯설은 어느 노부인이 그녀에게 나타남으로써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그녀는 프란치스가라는 과부인데, 순례를 하고 지냈지만 영적생활은 뛰어났으므로 요안나에게 하느님으로부터 받은 계시를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나는 굶주렸으나 너는 내게 음식을 주지 않았고..." 하는 성서 말씀이었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회개하였다. 이때부터 그녀는 프란치스까의 계시 내용에 따라 고아와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을 시작하였다. 그녀는 작은 집을 짓고 12명의 고아를 돌보기 시작하니, 사람들은 이 집을 "섭리의 집"이라고 불렀다. 이것이 발전하여 1717년경에는 거대한 섭리의 집이 되었다. 이 수녀회가 소위 소뮈르의 섭리의 성 안나회이다 4.성 리베라토, Liberatus 아프리카의 반달족 왕인 후네릭은 재임 17년에 가톨릭과 반대하는 칙서를 반포하고, 모든 수도원의 해산을 명하였다. 캅사 교외에 살던 7명의 수도자들은 그들의 강압에 못이겨 아리아파와 타협하려다가, 용기를 내어 죽음으로써 이에 항거하였다. 이때 그들의 대표자가 리베라토였다. 그들은 쇠사슬로 묶인채 지하 감방에 갇혔다.그러나 간수에게 뇌물을 준 어느 신자가 밤낮으로 그들을 방문하였는데 이 사실이 발각되어 그들은 곧 화형에 처해졌다 5.성녀 클라라, Clara 클라라는 '아주 맑은'이란 뜻이다.프란치스칸과 아우구스띠니안 사이에는 이 거룩한 수녀가 서로 자기 수도회의 성녀라는 주장이 오랫동안 오갔다.그 이유는 클라라가 요안나의 지도를 받으면서 15년 동안 은수서에서 살았는데, 이곳은 곧 재속 프란치스꼬회원들의 근거지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스뽈레또의 주교에게 정규 수도원 생활을 간청하여 허가받을 때, 그 주교가 아우구스티노회의 회칙을 주었던 것이다. 이들의 은둔소는 1290 년에 수도원으로 세워졌고, 요안나가 죽고난 뒤에, 클라라는 자신의 뜻과는 관계없이 원장으로 선출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생활은 그 엄격성과 높은 덕으로 유명하다. 하루의 대부분은 침묵으로 지냈고, 눈이 오더라도 맨발로 다녔으며, 하루에 주의 기도를 백 번씩 정성껏 바쳤다. 그녀의 말과 표양은 공동체가 완덕을 지향하는데 큰 격려가 되었고, 하느님과의 일치는 관상생활의 모델이 되었다. 수많은 기적이 일어났고, 자주 탈혼에 빠졌으며, 수도원의 재산을 수도원 밖의 사람들도 이용하도록 배려하는 등 획기적인 삶을 살았다. 특히 클라라는 우리 주님의 고난에 대하여 큰 신심을 가졌다. 이 때문에 클라라는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모상이 인각되었다고 전해온다. 성녀는 1881년에 시성되셨다 추천 🔗 공유 스크랩🚩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