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이 쓰다

2003. 1. 15. 오후 12:4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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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밥이 쓰다 - 정끝별 -

 

파나마A형 독감에 걸려 먹는 밥이 쓰다

변해가는 애인을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고

늘어나는 빚 걱정을 하며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달아도 시원찮을 이 나이에 벌써

밥이 쓰다

돈을 쓰고 머리를 쓰고 손을 쓰고 말을 쓰고 수를 쓰고 몸을 쓰고 힘을 쓰고 억지를 쓰고 색을 쓰고 글을 쓰고 안경을 쓰고 모자를 쓰고 약을 쓰고 관을 쓰고 쓰고 싶어 별루무 짓을 다 쓰고 쓰다

쓰는 것에 지쳐 밥이 먼저 쓰다

오랜 강사 생활을 접고 뉴질랜드로 날아가버린 선배의 안부를 묻다 먹는 밥이 쓰고

결혼도 잊고 죽어라 글만 쓰다 폐암으로 죽은 젊은 문학평론가를 생각하며 먹는 밥이 쓰다

찌개그릇에 고개를 떨구며 혼자 먹는 밥이 쓰다

밥이 쓰다

세상을 덜 쓰면서 살라고,

떼꿍한 눈이 머리를 쓰다듬는 저녁

목메인 밥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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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삼 굉장히 와 닿는 시다.

이런 시가 와 닿다니, 서글퍼지려는 것인가 걱정도 되지만

처음 이 시를 읽었을 때 웃음이 났다.

" 그렇지...밥맛이 좀 쓰지... 쓰는 것도 좀 쓰지... 그렇지 쓰지!!"하면서...

서글픔... 글쎄,

언젠가 행복이나 사랑 그리고 꿈, 희망들이 사람을 살게 하는 원동력이듯

그 반대의 것도 사람을 살게하는 힘이 있다고 느낀 적이 있다.

그것은 쇼펜하우어의 인생론이란 책을 읽으면서였는데,

그 책에 보면 쇼펜하우어는 염세주의자이고 무신론자여서

인생이란 죽음을 위해 가는 것이고 사랑은 믿을 것이 못되며

사랑도 신도 실재하지도 실재할 수도 없다고 말했다...

나는 그 우울하고 무서운 책을 읽으면서 강한 반감을 가졌고,

인생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사랑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신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반드시 내가 증명해 보이겠다고 다짐을 하고 오기를 부리면서 읽었다.

당시 어떤 사상책이나 유명인의 자서전을 통해서

인생의 행로를 바꿔보겠다고 시작한 얄팍한 독서에서

내가 얻은 것은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은 내가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생각지 못한 통로를 통해서도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었고,

삶의 힘듦이나 고독 시련들은 훗날 인생의 참된 긍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때로는 개인에 따라 그 고독이나 시련의 날이 그 반대의 날보다 긴 경우가 있는데

마지막 하루를 위해서일지라도 나는 반드시 견뎌내리라고...!!!

(요새 취직 안되서 돌아버릴 지경이다.이런 된장!)

이상하게도 그 비관적이고 우울한 책을 통해서

그 동안 내가 가지고 있었던 비관적이고 지독히 우울했던 가치관들이

낙관적으로 변했었다.

그 어떤 희망의 책도 사랑의 메시지도 나를 이끌지 못했었는데.....!!!

 

지금도 그렇다.

오늘 내 기분도 그렇다. 어쩐지 뭔가 잘 될 것 같은 느낌이 있다.

유난히 더 힘들고 유난히 더 많이 내 한계에 부딪혀있는데도 불구하고

뭔가 괜찮아질 것 같은, 이 고비만 넘기면 좀 뭔가 나아질 것 같은 느낌!!

그것은 역시나 내게도 사람만이 희망이기 때문이 아닐런지.

 

오늘따라 글 쓰는게 왜 이렇게 어색한지 모르겠다.

여튼.... 글을 쓰는 일이 밥을 짓는 일과 같다고 귀뜸한 사람이 있는데

글을 쓰는 일이든 글을 읽는 일이든 밥을 짓는 것과 같고

쓴 밥을 넘기는 일과 같음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요즘처럼 쉽게 읽히고, 쉽게 쓰이는 글이 있는 이상,

누군가는 기억해야 할 것이 아닌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나를 귀히 봐주고, 칭찬해주고 자랑해주는 이가 있듯이

그 반대로 나를 없이 여기고 나쁘게 여기는 이도 물론 있을 것이다.

그것을 모르지 않는다.

그것이 오늘 굿뉴스에 글 올리는 것을 머뭇거리게 하고, 속상하게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함께 하고 싶은 마음... 그 마음만으로 내가 가끔 허락되어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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