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찬미예수
여름 특집 - 제주도 이야기 그 세번째는 이정재와 심은하가 열연(?)하고 박광수 감독이 만든 한불합작 영화 [이재수의 난]으로 유명해진 신축교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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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1년 濟州敎案에 대한 역사적 고찰 -
박 찬 식 (시메온, 제주교구사 편찬위원)
제 1 장 머리말
1901년 濟州島에서는 중앙 왕실에서 파견한 捧稅官의 조세 수탈과 프랑스 선교사를 앞세운 천주교회의 敎弊에 저항하여 도민들이 봉기하였다. 이 사건의 결과 제주 지역의 천주교도 수백 명이 民軍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따라서 이 사건은 大韓帝國 정부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 파견되었던 각국 외교관들에게도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 사건은 바라보는 시각에 따라서 여러가지로 그 성격이 규정될 수 있다. 사건의 한 단면만을 보았을 때, 그것은 '敎難'으로도 '民亂'으로도 불리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사건은 단지 국내적인 사건으로만 그친 게 아니라 大韓帝國과 프랑스와의 국제적인 외교사안으로까지 비화되었으므로, 포괄적 개념인 '敎案'으로 통용되는 게 무난한 듯하다.
濟州敎案은 韓末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최대의 교안이었고, 그 여파가 국내뿐만 아니라 국제적으로도 크게 미쳐졌다. 따라서 지금까지 濟州敎案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진전되어 왔다. 지금까지의 연구를 통하여 이 사건과 관련된 많은 자료가 발굴되었고, 각 자료에 대한 기초적인 검토는 어느 정도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료의 성격상 기록의 주체에 따라 상이하게 서술되는 부분이 있음으로 해서 아직도 자료에 대한 심층적인 비교분석 작업은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기존의 연구에서는 제주교안과 관련된 몇 가지 중요한 문제들이 소홀히 취급되어 있다. 우선 한말 제주 지역의 천주교 전파와 교세 확대 과정 및 천주교민의 사회적 성격 등이 거의 다루어지지 않아왔다. 당시 천주교의 교세 확장은 기층민들을 흡인시키는 요소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하였을 것이라고 전제한다면, 향촌사회 내부의 對천주교 인식은 각 계층별로 상이하였을 것이다. 따라서 제주교안을 단순히 반봉건.반외세적 민중운동으로 결론 내리기 전에 먼저 향촌사회 내부의 천주교를 둘러싼 여러 세력 사이의 관계를 분석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이 사건을 너무 제주도에만 국한된 특수한 성격의 것으로 규정하였던 문제점을 지적할 수 있다. 1901년 민란의 중요 원인이었던 捧稅官의 稅弊와 천주교회의 敎弊는 제주도만이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빈발하였던 점을 상기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천주교회뿐만이 아니라 개신교회의 선교 과정에서도 지역 주민들과의 충돌은 빚어지고 있었던 점도 파악되어야 할 것이다. 1901년 제주교안은 이러한 전체 상황을 염두에 둔 가운데 이해를 함으로써 그 성격이 뚜렷하게 부각될 것이다.
제 2 장 濟州地域 天主敎會의 성장과 敎民 구성
한말 제주지역의 천주교 전교는 1899년 4월 22일 뮈텔 주교가 페네(Peynet) 신부와 金元永 신부를 제주도에 파견하면서 시작되었다. 페네 신부는 제주에서의 전교에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페네 신부는 1900년 2월에 제주를 떠났고, 4월에 서울에서 열린 사제 피정에 참석한 후 전라도 水流 본당(김제군 금산면 화율리)으로 전임되었다. 따라서 제주에서의 초기 전교 활동은 김원영 신부가 주도하였다. 1900년 3월 22일자 김원영 신부의 편지에 의하면, 신자 수가 5명인데, 부활 때까지는 10∼15명이 될 것이라고 하였다.
1900년 4월 말의 정기 피정이 끝난 후 뮈텔 주교는 페네 신부 대신에 수류 본당의 라크루(Lacrout) 신부를 제주에 파견하였다. 라크루 신부의 부임 이후 라크루 신부는 제주본당을 담당하고, 김원영 신부는 1900년 6월 12일 정의군 한논(大畓洞)에 정착하고 이곳을 중심으로 전교하였다.
제주 선교 1년밖에 안된 1900년 후반에 이르자, 교세는 급속도로 확대되었다. 제주본당의 경우, 1900년 8월에 이르러서는 성당으로 사용되는 사랑을 증축하든지 아니면 새로 큰 집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될 정도로 교민 수가 급증하였다. 한논본당의 경우, 9월에 이미 6.70명의 예비신자가 있었는데, 1901년 초에는 영세자 50명을 배출하였고, 예비신자가 4백 명으로 급증하였다. 결국 1901년의 보고에 의하면, 2년 간의 전교로 242명이 영세하고, 6.7백 명의 예비신자를 확보하게 되었다.
이러한 급속도의 교민 수의 증가는 당시 천주교회가 제주 지역사회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중요 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로 말미암아 1901년 제주교안이 일어나게 되는 배경으로 작용하였다. 그러므로 제주교안 발생 직전에 있어서 제주지역 천주교회 교민들의 존재형태를 파악하는 것은 이 사건의 성격을 파악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작업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이와 관련하여 교세통계표와 한논본당 교적, {뮈텔문서}, 中文面 各里의 戶籍中草 등의 자료를 이용하였다. 우선 교세통계표와 교적을 이용하여 교민들의 지역별.연령별.성별 분포, 가족관계, 교회지도자의 성격 등을 분석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뮈텔문서} 등 교회측 자료와 호적중초 등의 자료를 대비하는 방법으로써 교민들의 사회적 지위를 파악하여 보았다.
1) 지역별 분포
교세통계표에는 각 지역별 신자.예비신자의 수가 기재되어 있다. 이를 표로 작성하여 보면 다음과 같다.
<표 1> 濟州島 지역의 교민 수(1899∼1910)
(괄호 밖은 신자 수, 안은 예비신자 수)
<표 2> 旌義郡 관내 지역별 교민 수(1900∼1901)
<표 3> 大靜郡 관내 지역별 교민 수(1900∼1901)
<표 4> 濟州郡 관내 지역별 교민 수(1909∼1910)
위의 표를 통하여 지역별 교민 분포의 몇 가지 경향을 파악하여 볼 수 있다.
첫째, 제주교안이 일어나기 전까지 교세는 한논본당 관할 구역인 제주도 남부 지역이 제주본당 관할 구역인 북부 지역보다 강하였다(<표 1> 참조). 그 까닭은 북부 지역의 페네 신부가 외국인 신부로서 전교상의 어려움을 겪었던 반면, 남부 지역을 맡았던 김원영 신부는 한국인으로서 1900년 6월 한논본당의 설립을 계기로 교세를 확장시켰기 때문으로 보인다.
둘째, 제주교안이 발생하기 전의 지역별 교민 수가 파악되는 한논본당 관할 구역만 대상으로 하였을 때(<표 2>와 <표 3> 참조), 우선 정의군 관내에서는 본당이 있었던 한논 지역과 그 인근 홍로 지역의 교세가 가장 강하다. 그런데 정의군 내에서 주목되는 곳은 양근 지역이다. 양근리는 중산간 화전 마을로서, 빈농들이 거주하였던 곳이다. 이곳은 한논본당과 떨어진 벽지에 위치해 있으면서도 교세가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아마 이 지역은 일종의 교민촌을 형성하였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대정군 관내에서도 교세가 강한 지역은 산촌인 색달리(중문면 색달리)로 나타나고 있다. 이곳도 당시에는 화전민들이 다수 살았던 곳으로서, 교민촌을 이루었던 곳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한논본당의 교민들은 대체로 본당이 위치한 지역을 중심으로 하여 산간 벽지에 이르기까지 넓게 분포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제주도 남부 지역의 경우 邑治 지역인 대정과 성읍에는 교민이 거의 확인되지 않고 있다.
셋째, 북부 지역인 제주군의 경우에는 1901년 당시 교세를 파악할 자료는 없다. 그러나 {뮈텔문서} 가운데 당시 천주교측 피해자 명단이 나와 있는데, 이를 통하여 교세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표 5> 참조).
<표 5> 제주군 관내 지역별 피해 교민 수(1901)
(근거 자료 - [辛丑八月 濟州三郡敎人家舍什物燒盡成冊], M-제주-70)
표에서 보듯이, 제주본당이 있던 읍내와 가까운 광양동에 교민이 집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금악리와 연평리는 산간 벽지와 섬 지역으로서, 제주군의 교민들도 본당과 떨어진 벽지에까지 교민촌을 이루고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교민 분포는 제주교안 이후인 1909년에까지 계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위의 <표 4> 참조).
2) 가족 관계
교적에 나타난 한논본당 신자 전체 124명 가운데 직계가족 구성(부부, 부자, 부녀, 모자, 모녀 관계) 신자 수는 46명(37%)으로 파악된다. 그러나 이는 부모명을 통해서만 파악한 숫자이므로, 실제로는 거의 50%를 상회할 것으로 보여진다. 따라서 당시 천주교민의 상당수는 직계가족과 친족을 중심으로 하여 입교하였을 것이다. 결국 당시 천주교민들은 대체로 친족공동체를 중심으로 한 폐쇄적 집단을 형성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3) 연령별 분포
한논본당 신자의 연령 분포를 표로 작성하여 보면 <표 6>과 같다.
<표 6> 연령별 신자 수
<표 6>을 보면, 20대 미만의 신자 수는 40명에 달하고 있는데, 이들은 대체로 부모의 입교에 따른 결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나머지 신자 가운데 20대에서 40대에 걸치는 청장년층이 59명(47.6%)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사회적 활동 능력이 왕성한 청장년층 남성 위주의 교민 구성은 당시 천주교회가 사회세력화되어 갔던 실정을 간접적으로 보여 준다고 하겠다.
4) 성별 분포
한논본당 신자 가운데 남자는 87명, 여자는 37명으로 파악되어, 남자 신자의 수가 상당히 많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남자 신자 가운데 20대에서 40대에 걸치는 청장년층은 42명으로서 같은 연령대의 여자 신자가 17명이었던 데 비하여 압도적으로 많다. 이는 19세기 조선 천주교 신자의 반수 이상을 여신도가 차지하였던 것과는 다른 양상이다. 이는 19세기 천주교회가 정부의 탄압을 받으면서 은밀하게 주로 부녀자들을 대상으로 포교가 이루어졌던 반면, 한말에 와서는 공개적인 포교가 이루어져서 남성 위주의 교회로 변화한 결과일 것이다. 물론 이 시기에도 여성들의 경우 일과 후에 성당에 모여서 정기적으로 기도 모임을 갖는 등 내세지향적인 성향이 강하였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남성 위주의 교민 구성은, 당시 천주교회가 사회적 이해관계에 민감한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었음을 보여 준다고 할 수 있다.
5) 교회지도자
한논본당 신자들이 세례를 받을 때 代父母로 나선 신자들은 먼저 세례를 받았던 사람들로서, 당시 제주지역 천주교회의 지도자급에 속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부모들의 면모를 통하여 당시 교회의 상층부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대부를 맡았던 남자 신자들로는 박고스마, 신바오로.신아오스딩, 신이시돌, 최요한, 김도마, 강도비아, 강마오로, 김시메온 등이 확인된다. 그리고 대모를 맡은 여신자는 이마리아, 임프란치스까, 백말따, 한막달레나, 김글라라 등이다. 이들 가운데 박고스마, 김도마, 이마리아, 백말따는 제주도 외에서 들어온 신자들로 확인된다. 특히 박고스마는 김원영 신부의 충실한 복사였고 회장이었다. 그는 본시 경상도 출신으로 영세한 지 몇 년 안되지만 젊고 능변이며 교리에 통달하여서 선교사들에게 유능한 인물로 인정받고 있었다고 한다. 그는 1901년 3월에 교민 무리를 이끌고 산저포로 가서 체임되어 가는 전목사 李庠珪에게 시위를 전개하는 데 주동 역할을 하였다. 그 뒤에 그는 민란참여세력에 의해 살해당하였다.
한편 제주본당의 경우, 라크루 신부가 1900년 5월 전라도 水流본당에서 제주본당으로 부임할 때 식모와 복사로 각각 데리고 왔다는 이마리아.신재순(아오스딩) 모자 또한 충청도 출신으로 천주교 탄압 시기에 사형당한 집안 출신이었다고 한다. 또한 제주본당의 지도자였던 자들은 대부분 崔亨順.李容鎬.張允善 등 유배인이었다. 그러므로 당시 제주지역 천주교회의 지도자들 가운데 다수가 도외에서 새로이 입도한 자들이었다는 특징을 살필 수 있다. 이러한 점은 제주교안 당시 제주도민들의 배타적 정서를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하였을 것이다.
6) 교민의 사회적 지위
당시 제주지역의 천주교민 가운데 주목되는 자들은 유배 죄인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李容鎬.崔亨順.李範疇.張允善 등이 천주교에 의탁하여 자신들의 지위를 도모하거나 신변 보호를 위해 입교하였다. 다음으로는 육지에서 섬으로 들어온 관리들 가운데 일부가 입교하였다. 우선 제주교안 직전에 제주도를 다녀갔던 內部視察官 丁裕燮이 확인된다. 그는 1900년 10월에 제주에 도착하여 세무 시찰 활동을 펴다가 김원영 신부의 본당에 예비신자로 입교하였다. 그리고 1900년 10월에 입도한 捧稅官 姜鳳憲도 입교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西歸鎭將에 부임하였던 許俊도 천주교에 입교하여 남부지역의 한논본당을 중심으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다음으로 제주지역의 향리들 가운데 일부가 천주교에 입교하였음이 확인된다. 제주목 書記 高百齡, 대정현 副吏房 金玉乭, 제주읍의 향리 高時俊.金壽石 등이 그들이다. 이들 외에도 민란참여자들에게 처단자로 지목되었던 高伯龍(고백령과 동일인인 것으로 여겨짐).高千龍.高蘭天.高一書 등도 향리층이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대다수 일반 평민들의 경우는 {뮈텔문서}를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정의군의 경우 {敎弊成冊}을 통하여 파악되는 교민들은 다음의 <표 7>과 같다.
<표 7> 旌義郡 교민들의 사회경제적 지위
위의 표에서 보듯이, 이들 가운데 다수가 경제적으로 빈민층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물론 마름들이 다수 보이는데, 이들은 기존 마름이 아니라 교세에 의지하여 새로이 마름이 되었던 자들이므로 이들의 경제적 처지가 모두 좋았다고는 할 수 없다.
이를 통해 보건대, 한말 제주 지역의 천주교민 가운데 유력양반층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반면 향리층의 천주교 입교는 두드러졌다. 그리고 나머지 대부분의 교민은 일반 평민층으로 여겨진다. 앞의 지역별 분포에서도 보았듯이, 화전민과 같은 빈민층 입교자는 상당수에 달하였을 것이다. 이들 평민층 교민들 가운데는 도외에서 입도한 자들도 다수 존재하였다는 점이 특색으로 보여진다. 그리고 유배인들 중 4명이 이 사건에 연루되고 있음이 주목된다.
이들 교민들은 각 계층별로 천주교에 입교하게 된 동기가 달랐던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주목되는 계층은 향리층으로서, 이들은 향촌사회의 중간계층으로서 특히 조세 수취의 실질적 업무를 담당하던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이들의 입교에는 현실적 이해관계가 크게 작용하였을 것이다. 이들은 제주에 파견되었던 捧稅官 姜鳳憲을 도와서 새로운 수세담당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이들은 천주교 신자라는 특권을 가지고 세력화하여 갔다.
한편 일반 평민층의 입교에는 물론 내세지향적인 동기가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나 이들이 입교한 주요 원인은 당시 현실적인 어려움에서 탈피하고자 하는 의도가 많이 작용하였다. 특히 교회가 지방관리들의 수탈로 어려움을 겪었던 민인들의 보호처로 인식되면서 다수의 입교가 이루어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유배인들은 제주도 내에 분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제주읍내에 함께 거주하면서 서로 교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김윤식의 {續陰晴史}를 통하여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당시 국내외정세에 대해서도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들은 순수한 종교적 동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프랑스를 배경으로 사회세력화한 천주교회의 힘에 의지하고자 입교하였던 것으로 보여진다.
제 3 장 濟州敎案의 원인
1901년 제주교안은 여러 가지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하여 발생하였다고 볼 수 있다. 대체로는 당시 세폐와 교폐가 복합되어 일어났다고 보여진다. 그러나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원인은 교폐라기보다는 세폐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1898년에 제주도에서는 방성칠란이라는 커다란 민란이 발생하였다. 이 민란은 육지에서 유입된 신흥종교인 南學의 교도를 중심으로 하여 발생하였다. 이 민란에는 당시 주로 牧場土를 경작하던 화전민들이 주로 참여하여 지방관리나 향임세력의 조세 수탈에 저항하였다. 그리고 일부 金洛榮.崔亨順과 같은 유배인들이 처음에 민란지도부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1898년 민란은 신흥종교와 화전민층이 결합하여 지방관.향리.향임층을 대상으로 전개되었다.
그런데 이 민란이 진압된 이후에도 세폐는 시정되지 않다가 1900년에 왕실에서 파견된 봉세관 강봉헌이 제주도에 와서 전 지역을 대상으로 과도한 세금 징수를 함으로써 도민들의 반발을 다시 사게 되었다. 더구나 강봉헌은 기존의 세금을 거두는 토착지배세력들을 배제시킴으로써 제주도내의 유력세력들로부터도 반발을 사게 되었다. 따라서 1901년 제주교안이 발생할 당시 전체 도민들에게는 세폐가 커다란 사회경제적 폐단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방성칠란이 진압된 지 1년 후인 1899년부터 유입된 천주교는 주로 화전민층과 일부의 향리층, 유배인들을 중심으로 보급되어 갔다. 그러나 외래종교에 대하여 반감을 가지고 있던 관, 토착지배세력, 제주도민들과의 충돌이 발생하면서 전체 도민들에게 교폐로 인식되어 버렸다. 이러한 천주교의 전래는 향촌사회 내부의 기존의 질서를 동요시켰다.
우선 선교사의 治外法權이 지방관의 官權과 충돌하면서 관권의 약화를 가져왔다. 선교사들이 누렸던 치외법권은 교민들에게까지 확대되어 세례를 받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예비신자들까지도 교세에 假托하고자 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일부의 천주교민들은 이러한 교회세력에 의지하여 자신들의 불리함을 해소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당시 제주지역의 천주교회는 특히 봉세관의 특권과 결합되면서 더욱 강한 사회세력으로 진전하였다. 기존의 수세자들을 배제시킨 가운데 다수의 천주교민이 舍音으로 기용되었다. 결국 사회세력화된 천주교회는 향촌사회에서 다양한 敎弊를 발생시켰다. 대부분의 교폐는 경제적인 문제로 야기되었다. 경제적인 문제 중에서도 토지.조세 수탈과 토지 매매상의 폐단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함으로써, 제주교안의 배경에는 토지소유권과 경작권의 문제가 심각하게 대두하였다. 그리고 토속신앙을 배격하는 사례도 상당히 많았는데, 천주교회와 전통신앙을 신봉하는 다수 도민들 사이의 대립도 심각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이러한 천주교회의 사회세력으로의 성장은 기존에 향권을 주도하였던 기득권 세력을 상당히 위협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대하여 大靜郡守 蔡龜錫의 경우에는 지역 향임층과 상인층을 규합하여 商務社를 조직하여 천주교회와 대립하기도 하였다. 관권의 약화는 관과 밀착되어 향권을 행사하고 있던 향임층과 같은 토착지배세력을 위협하였다. 이들은 향촌사회에서 교당 설립이나 포교활동을 적극적으로 저지하고자 하는 활동을 벌이기도 하였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旌義郡 下孝里와 西烘里 향임들이 자기 집 앞에 損徒牌를 설치하여, 자신의 鄕里에서 천주교민들을 몰아내겠다고 하는 것이었다. 제주교안 당시 제주도의 各里 향임층들이 대거 민란에 참여하였던 것은 이러한 당시 그들의 처지를 반영한다고 할 수 있다.
제 4 장 맺음말 -濟州敎案의 교회사적 의의-
한국의 교회사와 제주의 교회사를 통해서 신앙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순교사화를 우리는 무수히 접하고 있다. 제주교회사만 예로 들더라도 1866년 병인박해시 순교하였던 김기량(펠릭스베드로)과 같은 순교자를 자랑스럽게 내세울 수 있다. 그런데 제주교안의 과정에서 순교하였던 제주교회의 선조들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선뜻 판단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제주교안은 한국 천주교회와 제주 천주교회에 긍정적인 면보다는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여진다. 우선 제주교안을 통하여 천주교회는 순수 신앙집단으로 사회에 비춰진 게 아니고, 세속적인 힘을 가진 세력으로 인식되었다. 따라서 교안의 전개과정과 결말 이후에 도민들의 교회에 대한 인식은 한동안 우호적이지 못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서양 선교사들의 경건주의와 토착문화에 대한 몰이해로 빚어진 무리한 선교 방식은 도민들의 반발을 삼으로써, 교회에 대한 배척을 가져오게 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그러나 당시 교회의 선교 방식의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수백 명의 교우들이 교안의 과정에서 수난을 당하였다는 것은 신앙의 측면에서 곰곰히 되새겨볼 문제이다. 신앙의 씨앗이 뿌려진 지 2년도 채 안된 척박한 신앙의 여명기에 엄청난 수난을 겪었기 때문에 제주 천주교회는 당분간 성장하는 데 상당한 어려움을 겪었다. 이러한 사정은 제주교안 이후 제주에 사목차 왔던 여러 선교사들이 서울의 뮈텔 주교에게 하소연하는 내용을 통하여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경험은 오히려 제주 천주교회를 굳건하게 키우는 밑거름으로 작용하였다. 제주교안의 진원지였고 순교자가 많이 나왔던 서홍리, 대정, 신창, 제주읍내의 교회들은, 각각 시기를 달리하기는 하지만, 오히려 타지역에 비하여 교세가 성장하여 나아가는 추세를 보여주었다.
이러한 면에서 제주교안에 대해서는 역사적 해석과 더불어 신학적 해석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진다. 제주교안의 과정에서 순교하였던 제주 천주교회의 선조들의 죽음은 당시 사회의 부패상과 죄악상에 대한 代贖이었고, 미래의 제주 교회를 위한 희생양(Scapegoat)이었다고 보여진다. 선조들의 죽음에 대한 단순한 인간사 중심의 역사적 해석은 이 사건을 너무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해석하여 버리는 결과를 낳게 된다. 보다 넓은 신학적 해석이 요구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신학적 해석은 제주도에서 발생한 제주도 역사의 최대 비극이라 할 수 있는 4 . 3 사건의 경우에도 반드시 적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교회가 세속적으로 과거의 사건을 파악할 때 그 사건의 연속선상에 있는 현재도 인간의 범주에서만 머물러 버릴 따름이다. 현재의 우리들의 신앙을 통하여 과거를 바라보고,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태도가 필요하다고 보여진다.
제주도의 천주교회는 1899년 2명의 선교사가 파견되어 오면서 본격적인 선교가 이루어졌다. 앞으로 2년 뒤면 제주교구는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게 된다.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 신자들은 지난 한 세기를 돌아보고, 앞으로 2000년의 대희년을 계기로 하여 더욱 굳센 신앙을 약속하여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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