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특집]1. 제주도 100년 약사입니다

1999. 8. 4. 오후 1:12:56

글자

+ 찬미예수

여름 특집 - 제주도 이야기 그 첫번째는 제주도의 100년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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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100년 약사

 

제주도에 처음으로 천주교회의 복음의 씨가 뿌려진 경로는 마치 우리나라에 성교회가 들어온 것과 같이 도민들의 자발적인 입교와 포교의 결과로 이루어진 것이다.

본도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우리 교회와 접촉한 사람은 김복수라는 사람으로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났던 때에 풍랑으로 안남국에 포착하였다가 그 곳에서 만나게 된 일본 사신을 따라 일본의 오사까성으로 가서 구라파왕의 사신들을 만나보고 그들이 그리스도교를 믿으며 교리책 및 기도문을 가지고 있는 것을 본 후에 다행히 배편을 얻어 제주도로 돌아오게 되었다. 이로써 제주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도교라는 종교가 있음을 아는 사람이 있게 되었으나 그후 그리스도교 신앙에 대한 사정은 알 수 없게 되었다.

다음으로 제주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영세 입교한 사람은 펠릭스 베드로였는데 그는 1856년 풍랑으로 중국 광동해역까지 표류하던 가운데 함께 있던 동료 5명을 잃고 다행히 영국배에 구제되어 홍콩으로 가서 천주교 신부집으로 넘겨지게 되어 병을 치료받던 중 페낭 신학교에서 공부하다 요양차 홍콩에 와있던 조선 신학생을 만나서 그의 가르침으로 영세 입교한 후 조선에 귀국하여 서울에서 페론 권신부와 최양업 신부를 만나 교회서적을 얻고 제주도에 돌아와 도민 20여명과 그의 가족 40여명을 입교케 하였다는 기록과 1886년 병인박해시 몇몇 입교자와 함께 육지로 나갔다는 기록이 있으나 그 후의 신앙전파 사정 역시 알 길이 없다.

그 후 1898년 육지를 왕래하던 대정군 사람인 양베드로가 육지에 머물 때(1898년 4월) 영세 입교하고 고향에 돌아와 신아오스딩과 신바오로 형제(1901년 순교)와 대정면 보성리 김생원과 강도민고에게 전교하는 등 이웃 친지들을 통하여 포교를 시작하였다.

이들 평신도들의 열심한 포교활동으로 제주도에 신부들을 받아들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고 당신 경성교구장인 뮤델 주교에게 이 곳 제주도에 선교사를 파견해 주도록 청하게 되었다.

뮤델 주교가 마침내 이에 응하여 1899년에 파리외방전교회 소속인 당시 26세의 청년사제 불란서 사람 뻬이네 신부와 한국인 김원영 신부를 제주도에 최초의 선교사로 파견하게 되었다.

이들 두 신부는 1899년 5월 23일 배편으로 제물포를 떠나 목포를 거쳐 26일에 제주도에 도착하게 되었고 6월 14일에는 1,550냥을 주어 제주읍 남문에서 그리 멀지 않은 큰 길가의 가옥을 매입하여 우선 이 곳을 근거지로 삼아 전교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1900년 뻬이네 신부는 전북 본당으로 전임되고 그 후임으로 그 해 6월 라그루스 신부가 오게 되었으며 1901년 5월 10일(신축교안이 나는 그 해 그 달)에는 뭇세 신부가 건너와 라그루스 신부는 제주읍에 성당을 마련하고 김신부와 뭇세 신부는 정의군 서홍리와 한논에 성당을 마련하여 전교활동을 계속한 결과 이 곳 제주도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지 겨우 1년 반이 지난 1901년 봄까지 정식으로 영세 입교한 신자수가 242명이며 예비신자가 700여명을 헤아리게 되었으며 중요한 각 촌 리에 공소를 두었으니 이 때 제주도의 인구는 모두 4만 여명으로 도민 전체인구의 40분의 1이 천주교에 나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당시 제주도의 행정구역은 1목 3군으로 나뉘어져 있어 목사는 한라산 북쪽에 있는 제주군과 그 남쪽에 있는 대정군 및 정의군을 다스리고 있었다.

그 당시 제주도 사람들은 원래 종교적 신앙심이 강하여 무당 뱀신 등을 몹시 숭배하였고 가는 곳마다 신목(神木), 신당이 많아 제주속담에 당5백, 절5백 이라는 말이 있다시피 도민들은 어떠한 신앙생활에 열중하였고 이러한 현상은 특히 육지사람이 비교적 적게 건너와 살던 한라산 남쪽지방이 더욱 심하였다. 그러므로 제주 사람들은 참되고 올바른 새로운 종교를 알게 되면 종래의 미신행위를 버리고 새 종교를 믿게 될 소질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항상 생명의 위태로움 속에 지내는 바다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에게 그러하였으니 이러한 상황은 바로 천주교 포교활동에 순조로움을 가져다 준 원인의 하나가 되었다.

또한 당시 제주도는 높은 벼슬을 지내던 사람들이 죄로 몰리어 귀양 사는 곳으로도 이름나 있었는데 이러한 귀양살이 정객들이 참된 인생의 목적을 생각하던 끝에 천주교를 찾게도 되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당시 나라로부터 특별한 보호를 받던 불란서 신부들이 1899년부터 이 지방에 들어오게 되니 눈치빠른 도민 또는 귀양살이 정객들 중에는 이들 신부들을 가까이 함으로써 어떠한 이익이나 용서를 받고자 하는 움직임을 보여 신자 및 예비자의 수는 날로 많이 늘어나게 되었다. 그러한 귀양살이 죄인으로서 가장 먼저 교회에 나오게 된 사람은 홍문관 교리(校里)를 지내던 이용호였는데 그의 뒤를 따라 위원 군수이던 이범주, 최형순, 감찰이던 장윤선같은 이들의 입교를 들 수 있다.

이렇게 활발한 포교활동이 3여년간 계속되던 중 호사다마로 천주교를 박해하는 소위 신축교안이 1901년에 발생하였다. 여기서 잠깐 당시 제주도의 행정책임자의 모습과 사정을 살펴보면 제주 목사이던 이상규는 백정으로부터 1만냥의 돈을 사사로이 거둔 죄로 1901년 양력 1월에 면직되고 3월 2일에 제주군수로 부임한 김창수가 한 때 목사의 일까지 맡아 보았고 제주도 사람인 채구석이 1899년 8월 22일부터 대정군수를 지내고 또한 제주도 사람으로서 제주군수를 지내던 김희주가 1901년 3월부터 정의군수로 옮겨가 있었다. 그런데 당시 이상규에게 돈을 뺏긴 많은 도민들이 천주교회에 나오게 되었고 이밖에 때마침 나라에서는 부족한 왕실의 재정을 매우기 위하여 1900년부터 제주도를 비롯한 여러 섬에 봉세관을 보내어 이제까지 없었던 각종 세금을 걷게 하였는데 특히 제주도에는 그 해 가을부터 평안북도 사람인 강봉헌을 봉세관으로 보내어 온갖 잡세를 걷게 함으로써 섬사람들의 원한을 사게 하였다. 원래 제주 사람들은 오랫동안 외딴섬에서 바다를 끼고 살아왔기 때문에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새로운 제도나 문화를 물리치는 힘이 굳세었고 욱하는 성격이 많아서 한데 뭉쳐 민란을 일으킨 일이 많았었다.

그러한 한두 가지 사실을 들면 1897년에는 갑오경장으로 말미암아 제주도에도 두개 된 관찰사 및 경무청의 새로운 제도를 반대키 위한 민란이 일어나 이를 두지 못하게 하였고, 1898년에는 요언자(妖言者)이던 방성칠이 온갖 잡세를 걷는 일을 반대하기 위하여 수만명의 도민을 선동하여 관청을 습격한 일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곳의 관리들은 여전히 백성의 피를 긁어 모아 자기 배만 채우고 있었으니 제주교안에 일어나기 몇 달 전인 1900년 12월의 조사보고에 의하면 제주도의 목사와 군수들이 이 곳에서 거둔 세금을 가로채어 쓴 것이 1만냥 이상이나 되었고 특히 제주군수이던 김희주는 백성과 아전들로부터 사사로이 1만 5천 3백냥의 돈을 걷었으므로 파면되게 되었던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이 부패할 대로 부패한 정치에 대한 반발을 주원인으로 하여 일어난 신축교안의 발생 원인을 몇 가지로 나누어 분석해 본다면,

첫째는 앞서 말한 정치의 부패로 인하여 탐관오리들이 백성의 피땀을 긁어모아 저들의 배만을 채우고 있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새로 봉세관으로 부임한 강봉헌이 어업세 등 온갖 잡세를 걷는 한편 도민들이 섬겨오던 神木과 신당의 공유지와 국유지를 도민과 신자들에게 팔았다는 것이며,

셋째는 이러한 토지를 사들인 신자들이 그 토지 안에 있던 신목과 신당을 없애버림으로써 신자와 일반 도민들 사이에 여러 가지 말썽을 일으켰다는 것이고,

넷째는 열심치 않은 일부 신자와 사리를 잘 모르는 예비신자들이 때마침 임금으로부터 "신부를 특별히 대우하라"는 명령이 내려진 것을 미끼로 신부들의 권세를 믿고 어떠한 관직이나 권리를 얻고자 하여 민간에게 무리한 행패를 많이 끼쳤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또한 중요한 원인으로서는 당시 무당과 일본인의 농간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당시 급성장하는 교세에 따라 도민들이 떼를 지어 교회에 나오게 됨으로 인하여 무당들이 자신들에게 다니던 손님을 많이 잃게 되어 생활의 위협을 느끼게 되자 터무니 없는 거짓말을 퍼뜨려 천주교회를 비방한데서 온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원인으로서는 당시 교안발상의 중심지인 대정군의 군수가 제주도민이던 채구석으로서 그 곳 유림대표이던 오대현과 손잡고 상무사(商務社)라는 사사단체를 만들어 선동하는 글을 온 섬사람들에게 돌림으로 교안의 직접적인 원인을 만들었는데 여기서 특별히 알아둘 것은 대정군수 채구석은 때마침 그 곳을 왕래하던 일본인 멸치장수 아라가와 도메쥬우로들로부터 칼과 총 등 많은 무기를 얻어 가지고 제주읍 공격시에 사용한 것이니 이를 보면 대정군수 채구석은 일본 상인들과 손을 잡음으로써 이익을 독차지하려 했고, 일본인들은 그를 이용함으로써 불란서 사람들을 섬에서 내쫓고 한국을 손쉽게 경제적으로 침략하려 꾀하였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일본은 한국을 합치기에 앞서 이미 이 때부터 경제적으로 한국의 한 영토인 제주도를 침략하고 있었던 것이니 이와 같은 일본인의 배후조종의 농간도 교안의 중요한 원인의 하나였다.

이상과 같은 여러 가지 원인으로 신축년 봄 대정 오대현과 강우백 둘이서 선봉이 되어 자위민단(自衛民團)을 조직하여 대정으로부터 대중을 모아 성내(제주읍)로 돌입하여 관에 등장코자 하니 봉세관은 서울로 피신하였고 라그루스 신부는 신자들을 인솔하여 민중을 명월진과 대정읍까지 물리쳐 해산시키고 선봉 오대현을 한림 이형이 집에서 이백이 엄중히 설득하여 풀어주고 입성하게 되었다. 이에 오대현은 분을 이기지 못하여 앞서 말한 중앙정부의 세제(稅制)에 대한 반발과 외세에 대한 저항을 기반으로 가파도에 주거하고 있던 멸치장수 아라가와 도메주우로를 중심으로 한 일본 밀어업자들의 후원과 경제적 결탁으로 채구석을 우두머리로 하여 지방유림 및 그들의 노복을 중심으로 세워진 상무사를 주축으로 민중을 대대적으로 선동하여 1901년(신축년) 3월 21일(양력 5월 9일)에 채구석의 시종이며 상무사 집사인 이재수와 더불어 대중을 이끌고 제주 성내를 함락코자 하였으니 마침내 전화(戰火)가 일어나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1901년 3월 21일부터 발발한 이른바 신축교안(제주민란)은 당시 불란서 공사가 임금께 탄원하여 청국 태고에 있던 불란서 함대가 산지포에 입항할 때까지 도내 천주교 신자 700여명이 관덕정 마당 등에서 참살되는 등 상당한 피해와 후유증을 남긴 채 가라앉기 시작하였고, 그 해 양력 6월 10일 대한군대 강화진위대 병정 100여명과 수원병정 1백명 및 순검 13명 등이 이 곳에 옴으로써 본격적인 수습이 시작되어 그 후 민란주모자 이재수 등은 처형되었고 다수가 징역을 살게 되었다.

신축교안 당시 구원을 위하여 제주에 왔던 불란서군함 함장 모로네트는 관덕정 마당에 즐비하게 놓인 교인들의 시체를 보고 제주목사에게 청하여 이들을 매장할 땅을 약속받았으나 당시 목사 이재호는 1년 이상이나 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 얼마동안 시체들을 관덕정 앞에 그대로 버려두었다가 제주읍에서 좀 떨어진 사라봉 아래에 옮겨다 마구 묻고 말았다.

1902년 불란서공사가 한국정부에 두 차례나 해결을 독촉하였으나 사건발생 후 1년6개월이 지난 1903년 1월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홍종우가 구마슬 신부와 교섭하고 그 해 4월 아라동 부근 황무지인 황사평을 그 매장지로 결정을 보게 된 것이다.

이렇게 신축교안이 수습됨과 함께 서울에 머물렀던 구마슬 신부와 문제만 신부가 1901년 10월말경 제주도로 다시 건너와 선교가 계속되던 중 1902년 4월 23일 불란서 사람 다께. 엄신부가 제주에 건너와 마산 본당으로 전임되는 문신부의 후임으로 한논성당에서 전교하게 되었다. 이 때부터 구마슬신부는 1901년 초빙한 쌰르뜨르의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들을 교육에 종사케 하여 제주읍에 처음으로 신식학교인 제주사립 신성여학교를 설립(1909.10. 18 초대교장 : 김아나다시아 수녀)하여 본도 여성교육의 문을 열었고 다께. 엄신부는 성당을 한논에서 서홍리(현 복자수도원 자리)로 옮김과 아울러 이 곳을 연구하기 시작하여 벚나무의 원종을 발견했을 뿐만 아니라 귤나무 재배를 시작하여 제주도에 감귤재배의 효시를 이루는 등 이 두 분 신부의 16년간에 걸친 선교활동은 제주교회사 뿐만 아니라 제주도사에 금자탑을 이룩한 것이었다.

1911년 본도 포교관할이 대구교구로 이관되었고 1916년 구마슬 신부는 전주 본당으로 전임되었으며 이 때부터 일제의 탄압으로 인하여 1917년부터 1926년의 근 10여년간은 목포교회 주임신부가 매년 한 두 차례 건너와 돌보는 목자없는 교회의 쓰라림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1926년 7월 26일부로 일제의 탄압에 의하여 구마슬 신부에 의해 설립되었던 신성여학교가 무기휴교에 들어가게 되었다.

1926년 5월에 제주읍에 부임한 최덕홍 신부가 1930년 12월에 현 제주 중앙본당 자리에 고딕식 붉은 벽돌 성당을 당시 돈 7천원을 들여 건립하였으니 일제 말기에 공출되어 이제 그 모습을 찾을 수 없는 프랑스제 성종(聖種)은 성당과 더불어 제주도의 명물이었다.

1933년에는 제주도 포교관할이 대구교구에서 광주교구로 이관되면서 포교담당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성골롬반외방전교회로 이관되었고 동회 소속 빠뜨리치오 손신부가 제주본당을, 토마스 라신부가 서귀포 본당, 그리고 수이니 서신부는 서홍리 본당을 각각 맡아 사목하게 되어 교세가 확장일로에 있을 무렵 대동아전쟁의 발발로 1941년 12월 8일 이들 외국인 성직자와 신자 간부 10여명이 일본경찰에 체포 구속되어 해방시까지 영어의 생활을 하게 되었고 당시 성당건물은 일본육군 병원으로 사제관 등 교회 부속건물은 일본군 장교숙소 등으로 점거되어 또 다시 포교활동이 중단되었음은 물론 신자들은 난을 피하여 도내외로 흩어지게 되었으니 해방직후 도내 신자수는 겨우 100여명에 불과했었다.

해방을 맞아 그 동안 휴교에 들어갔던 신성여학교가 1946년 9월 3일 수이니 서신부에 의하여 신성여자중학교로 개설되어 1949년 8월 3일 설립인가를 받고 초대교장에 최정숙씨가 취임하여 본도 여성교육에 힘기울이게 되었으며 해방과 더불어 풀려나온 성직자와 신자들이 합심하여 교회복건을 위한 노력이 지대하였으나 3.1사건(1948)과 4.3사건은 도내 포교 활동에 다시 한 번 막대한 지장을 갖다 주었다.

1950년 6.25사변으로 한 때 본도 교회에 수많은 피난 성직자, 수도자, 신학생들을 비롯한 신자들을 수용하여 대성시를 이루게 하였고 그들의 힘을 얻어 선교활동도 활발히 전개되어 많은 성과를 거두었음은 물론 삼일사건 후부터 6.25사변 종결시까지 약5개년에 걸쳐 교회에서는 가톨릭 구제회 등을 통한 피난민과 도민들에 대한 구호사업도 현저한 바 있다.

이러한 전교활동의 결과로 교세확장에 따라 1952년 6월 29일에 한경면 신창리에 성당을 건립하여 초대 주임신부로 피난 성직자인 조응환 신부가 부임 사목을 담당하게 되었고, 6.25사변으로 대정읍 모슬포에 제1훈련소가 있게 됨을 계기로 1951년 훈련소의 강병대 군인교회를 중심으로 포교하여 1958년 6월 29일에는 성당을 건립하여 서귀포 본당에서 분리한 모슬포 본당을 설립하고 초대주임신부로 라흘린 파신부가 부임하였으며, 1954년 4월에는 한림입 대림리에 성당건립과 더불어 한림본당을 설립, 빠뜨리치오 임신부가 부임하였다.

이보다 앞서 1953년 11월 21일 신성여자고등학교 설립인가와 함께 최경숙씨가 초대교장으로 취임하여 명실공히 본도 여성 고등교육의 선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1962년 10월 26일 당시 한림본당 주임신부이던 빠뜨리치오 임신부에 의해 가축은행으로 출발했던 재단법인 이시돌 농촌산업 개발협회가 설립되어 한림읍 금악리 일대에 이시돌 목장과 한림읍 대림리에 사료공장을 신설하고 양돈사업을 주축으로 한 축우, 면양 등 축산사업과 이에 병행한 사료사업과 더불어 양모가공을 위한 한림수직사를 운영함으로써 본도에 축산사업의 뿌리를 내리게 하였다. 그리고 1965년 4월 1일 학교법인 신성학원 설립인가와 함께 초대 이사장에 하롤드 현대주교가 취임하는 등 우리교회는 활발한 포교활동과 더불어 본도 산업 및 교육 등 여러분야의 발전에 앞장서게 되었다.

이렇게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선교활동을 하는 가운데 1967년 3월 5일 한경면 신창본당 출신 고승욱 신부가 서품됨으로 본도 출신으로 최초의 사제가 탄생되는 기쁨을 갖게 되었고 1968년 4월 21일 제주시의 발전과 인구증가에 비례한 신자수의 증가로 제주중앙본당에서 동문본당이 분리 설립되어 초대 주임신부로 에드워드 변신부가 부임하였다.

1969년 10월 제주중앙성당이 협소하게 됨에 따라 부득이 50여년전 본도에서는 유일하게 고딕식으로 지어져 있던 제주도 명물중의 하나인 붉은 벽돌의 뾰죽당 성당이 신자들 뿐만 아니라 수많은 도민들의 아쉬움 가운데 허물게 되었고 당시 주임신부이던 요한 원신부에 의하여 현대식 성당의 신축을 보았으며 같은 해 12월 18일 본도 출신으로는 두 번째로 대정읍 모슬포본당 출신인 홍충수, 김창훈 두 신부가 서품되었다.

1970년 빠뜨리치오 임신부에 의해 성골롬반 외방선교회 수녀회의 책임하에 있는 병원이 한림읍 대림리에 유치되어 성이시돌 의원으로 개원됨으로써 오늘날까지 연평균 3만여명의 환자들에게 진료의 혜택을 주고 있다.

계속되는 교세확장에 따라 1970년 5월에 서귀포 중앙본당이 서귀포 본당에서 분리 설립되어 하오르드 양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했으며 1971년 5월 10일 역시 제주중앙본당에서 광양본당이 분리 설립되어 요한 원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여 도내에 모두 8개의 본당이 존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포교관할이 1971년 6월 28일(국내 공식발표 7월 14일) 광주대교구에서 분리되어 제주지목구(준교구)로 설정되었고 지목구장으로 광주대교구장이던 하롤드 현대주교가 취임하게 되었다.

이에 앞서 1970년 11월 28일 제주중앙본당 구내에 있던 신성여자중학교가 제주시 도남동으로 신축 이설되었으며 그 다음해인 1971년 7월 18일 제주중앙본당 출신 이태수, 허승조 두 신부가 서품됨으로 본도 출신 성직자를 4년 사이에 5명이나 맞게 되는 기쁨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같은 해 11월 20일 토마스 라신부가 목포 성골롬반병원에서 선종하여 그의 첫 부임지인 서귀포에 11월 24일 교구민의 슬픔 가운데 안장됨으로 외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본도에 묻힌 기록을 남기기도 했다.

1973년 9월 16일에는 성산읍 오조리에 성당을 건립하여 성산포 본당이 설립되고 하오르도 양신부가 초대 주임신부로 부임하였는데 교세확장의 불모지인 본도 동부지역에 유일하게 설립케 된다.

1975년 7월 5일 본도 출신으로 6번째로 제주중앙본당 출신 이대원 신부가 서품됨으로 본도에 우리 교회의 앞날을 더욱 밝게 하였다. 그러나 1976년 3월 1일 지목구장이던 하롤드 현대주교가 급서하여 황사평 교회묘지에 안장케 됨으로써 도내 전 신자들은 한 때 목자잃은 양떼같이 슬픔과 실망에 잠기게 되었고 이 기간중 지목구장 서리는 요한 원신부가 맡아보게 되었다. 이러한 슬픔의 와중인 1976년 5월 15일 한경면 신창본당 출신 고승욱 신부의 동생 고승헌 신부가 서품되어 본도에 유일한 형제신부의 탄생을 보게 된 기쁨도 갖다 주었으며, 그 다음해인 1977년 3월 21(국내 공식발표 4월 23일) 로마 교황 바울로 6세의 특별한 배려로 본도의 포교관할이 지목구에서 정식교구로 승격되었으며 하롤드 현대주교가 서거한 지 만 1년 3개월만인 1977년 5월 31일 주교좌 성당인 제주중앙성당에서 1977년 4월 15일(국내 공식발표 4월 23일)부로 제주교구장으로 임명된 박정일 주교의 성성식 및 교구설정식을 주한 교황대사 도세나 루이지 대주교와 국내의 많은 고위 성직자, 수도자와 신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가졌으니 이 날은 본도 교회사에 영원히 빛날 기념일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해 11월 20일 제주중앙본당에서 분리, 하롤드 현 대주교의 기념성당으로 건립된 서문본당이 축성되어 본도에 10개의 본당이 존립케 되었으며 1979년 6월 2일 본도 출신으로 8번째인 한림본당 출신 임승필 신부가 서품되었다.

제주사립 신성여학교로 설립되어 제주중앙성당과 역사를 함께 해 오던 신성여자 고등학교가 1979년 11월 17일 성당구내를 떠나 제주시 도남동 800번지로 교사를 신축 이전하였으며 1980년 7월 5일 성 안드레아 김대건사제 축일에 본당 교우와 전교구민의 힘으로 건립된 서귀포중앙본당의 신축 성당 축성식과 더불어 서귀포복장본당으로 개명되었다.

1981년 2월 10일 이시돌목장 빠뜨리치오 임신부에 의해 목장내에 이시돌 양로원이 설립 개원됨으로써 본도에 축산, 사료, 양모가공, 의료, 여성교육의 선구적 역할에 이어 우리 교회가 노인복자 사업에까지 활동영역을 넓히는 계기를 마련하였고, 1981년 9월 29일에는 수녀원과 강당 등으로 신축된 신제주 임시성당 축성과 함께 서문본당에서 분리, 신제주 본당이 설립되었으며 1982년 1월 30일 신창본당 출신 양영수, 서문본당 출신 임문철 두 신부가 서품되고 1982년 6월 1일 한림본당 관할인 이시돌 공소가 본 교구에서 12번째 금악본당으로 승격되었다.

1982년 6월 24일부로 교구장 박정일주교가 전주교구장으로 전임됨에 따라 또 다시 6개여월간 교구장이 공석이 되던 중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1984년 1월 6일(임명일자 1983. 11. 21) 주교로 성성된 김창렬 주교가 1984년 1월 26일 주교좌성당에서 성대히 착좌식을 가짐으로써 제3대 교구장으로 취임하였으며 1984년 2월 6일 교세확장의 불모지인 본도 동부지구에 유일한 성산포 본당 출신 현상보 신부가 서품됨으로 특히 성산포 본당 관할 신자들에게 더없이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주었다.

1984년 9월 20일 제주시 삼도일도 108번지 11에 지하 1층 지상 3층 연건평 612.81평 규모의 가톨릭 회관이 신축 낙성됨으로 성서성물 보급소, 교구단체 사무실 등이 들어섰고 각종 교육과 연수회를 개최할 수 있는 강당과 회의실, 교리실, 독서실, 소성당 등을 갖춘 명실공히 교구의 센타 구실을 할 장소가 되었다.

 

≪제주선교 100년 해적이≫

 

1592~98 제주인 김복수가 안남국과 일본 대판성에서 천주교와 접촉

1653. 네덜란드 천주교인 하멜, 대정 연안에 표착

1801 정난주(마리아) 제주목 관노로 대정에서 유배생활, 아들 황경한은 2살로 추자도에 귀양보냄

1845.  9. 김대건 신부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고) 주교와 다블뤼(안) 신부와 함께 귀국 중 제주도에 표착

1857.  3. 제주인 최초 영세자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1866. 김기량(펠릭스 베드로) 병인박해시 통영에서 순교

1898.  4. 양용항(베드로) 육지에서 세례받고 제주에 전교

1899.  5. 프랑스인 배가록(Jean Charles Peynet, 주임) 신부와 김원영(아우구스티노, 보좌) 신부 제주에 부임

1899.  6. 12 김원영(아우구스티노) 신부 한논(서귀포시 호근동 소재)

               본당 주임으로 부임

1900.  5.  4. 뻬네 신부 전북으로 전임. 구마슬(Marcel Lacrouts)                   신부 부임

1901.  5. 10. 무세(Jean Germaln Mousset) 신부 한논본당 주임

             으로 부임

1901. 신축교안이 일어나 예비신자 포함 700여명이 살해됨

1901. 샤르트르 성바오로 수녀회 소속 수녀 제주본당에 부임

1902. 4. 23. 엄 타케(Emile Joscph Tsquet) 신부 한논본당 주임으                 로 부임

1902.  6. 17. 한논본당을 '홍로'(서홍리 소재)로 이전

1909. 10. 18. 신성여학교 설립(초대교장 김시진 선생)

1911. 대구교구가 설립되면서 제주도가 조선교구에서 대구교구로                 이관

1916. 엄 타케 신부 목포 산정동으로 전임

1916. 구마슬 신부 전임

1916.  7. 25. 신성여학교 폐교

1916. 7-1922. 목자없는 교회. 목포교회 주임신부 에밀리오 엄 신부와                   주재용 신부 일년에 한두차례 방문 사목

1926.  5. 최덕홍(요한) 신부 부임

1926.  5. 26. 서귀포 본당 소속 고군삼 신부 대구 신학교에서 사제

              서품(1956년 환속)

1930. 12. 현 중앙성당 자리에 고딕식 벽돌 성당 건립

1933.  7. 포교관할이 대구교구에서 광주교구로 이관

             포교 담당도 파리외방전교회에서 성 골롬반 선교회로 이관

             성골롬반 선교회 소속 손 파트리치오(Patrick Downson)                 신부 제주 본당 부임

1934.  4. 서 스위니 신부와 라 토마스(Thomas Ryan) 신부, 홍로                 본당 부임

1937.  8. 홍로본당을 서귀포(현위치)로 이전 - 라 신부

1941. 12. 8. 태평양 전쟁 발발로 외국인 성직자와 신자 간부 10여명이                 일본 경찰에 체포, 구속. 성당 건물은 일본 육군 병원으                  로, 사제관 등 부속 건물은 일본군 장교 숙소로 사용.

             포교활동 중단.

1945. 해방직후 도내신자 100여명

1946. 10. 18. 신성여자중학원으로 개교

1947. 10. 라 신부, 서귀포 본당에 재부임

1949.  8.  3. 신성여자 초급중학교 인가(초대교장 최정숙)

              제1대 이사장, 패트릭. T. 부레난 주교 취임

1952.  1. 조응환(다두) 신부, 신창 성당 착공

1952.  4. 원요한 신부, 서귀포 본당 부임

1952.  4. 해성유치원 개원

1953. 11. 12. 신성여자고등학교 설립 인가(3학급)

1954.  4.  1. 한림본당 설립 - 주임신부 임 빠트리치오

1958.  6. 29. 모슬포본당 설립 - 주임신부 파 라홀린

1962.  4.  4. 신성학원 설립(이사장 하롤드 헨리 대주교)

1967.  3.  5. 고승욱(아우구스띠노, 신창) 신부, 독일 슈파이어 주교좌                  대성당에서 사제 서품

1968.  4. 21. 동문본당 설립

1969. 중앙성당 현대식 성당으로 신축

1969. 10.  1. 퀸(고) 신부, 서귀포본당 주임으로 부임

1969. 12. 18. 홍충수(마태오), 김창훈(다니엘) 신부, 모슬포본당에서

사제 서품

1970.  4. 성 이시돌 의원 개원

1970. 11.  9. 광양성당, 중앙본당에서 분리 신설, 서귀포 중앙본당

               (현 복자본당) 신설

1970. 11. 28. 신성여자중학교 이설(제주시 도남동 902번지)

1970. 12. 24. 광양본당 초대 주임으로 원요한 신부 부임

1971.  6. 13. 광양본당 축성미사(현대주교 집전)

1971.  7. 14. 제주교구(지목구)장 현 하롤드 대주교 부임

1971.  7. 18. 이태수(미카엘), 허승조(바오로) 신부, 중앙성당에서

              사제 서품

1971. 11. 20. 라 토마스 신부, 목포 성 골롬반 병원에서 선종

1973.  8. 23. 성산포 본당 설립(초대 주임신부 - 양 하오르드 신부)

1975.  7.  5. 이대원(미카엘) 신부, 중앙성당에서 사제 서품

1976.  3.  1. 현 하롤드 대주교 선종, 원요한 신부 교구장 서리

1976.  5. 15. 고승헌(마르꼬, 신창) 신부 사제 서품, 루이지 도세나

              교황대사 집전

1977.  3. 21. 지목구에서 교구로 승격

1977.  4. 15. 제주교구장 박정일 주교 임명

        5. 31. 박정일 주교 성성식, 교구 설정식(주한 교황대사 루이지                  도세나 대주교 집전)

1977.  8. 교구주보 발간

1977.  9. 25. 교구 순교자 현양대회

1977. 10. 16. 서문성당 첫미사 봉헌 - 원요한 신부

1977. 11. 20. 서문성당 축성 미사(박정일 주교 집전)

1979.  4. 29. 제주교구 평신도 사도직 협의회 설립(초대회장 현임종)

1979.  6.  2. 임승필(요한) 신부, 사제 서품

1980.  1. 서문성당에서 신제주 지역 미사 봉헌 시작

1980.  6. 13. 글라라 수녀원 및 성당 낙성식

1981.  9. 6. 교구설정 10주년 기념행사(신성여고)

1981. 10. 25. 신제주성당 축성(초대 이태수 신부)

1982.  6.  1. 금악공소 본당으로 승격(초대 임 빠트리치오 신부)

1982.  6. 24. 박정일 주교, 전주교구장으로 전임

1982.  8. 13. 원요한 신부, 교구장 직무 대행

1983.  1. 29. 임문철(시몬, 서문), 양영수(베드로, 신창)신부, 사제서품

1984.  1.  6. 제주교구장 김창렬(바오로), 주교성성 및 임명

        1. 26. 제주교구장 김창렬(바오로), 주교 착좌식(중앙성당)

1984.  9. 20. 가톨릭회관 신축

1985.  2.  2. 현상보(그레고리오) 신부, 성산포본당에서 사제 서품

1986.  1. 25. 양명현(도마, 서문), 김석순(마태오, 중앙) 신부,

               중앙본당에서 사제 서품

1986.  5.  8. 성요셉 양로원 봉헌식

1986.  9. 20. 교구 성체 현양대회(한라체육관)

1987.  2. 21. 고남일(요셉, 중앙)신부, 윤성남(프란치스코, 서문) 신부,                 사제 서품

1987.  4. 21. 시국선언문 발표 - 방인사제단 단식기도

1988.  1. 23. 남승택(가브리엘, 서문) 신부, 사제 서품

        2. 10. 중문공소, 효돈공소, 본당으로 승격

1988.  6. 12. 교구 성체 현양대회(한라체육관)

        6. 21. 성체 현시 행렬

        6. 26. 신제주성당 신축 성전 축성식(김창렬 주교 집전)

      11. 27. 광양성당 신축 성전 축성식 (교황대사 이반디아스 대주교                  와 김창렬 주교 공동 집전)

1989.  5. 27. 김녕공소 개축 봉헌식(김창렬 주교 집전)

        5. 30. 교구 성가 경연대회(문예회관)

   10.5-10.8. 제44회 세계 성체 대회 교구민 참석

1990.  1. 31. 신제주 신용협동조합

        2. 10. 이영조(바드리시오) 신부,  사제 서품(광양)

1990.  2. 22. 고산 공소, 본당으로 승격

1990.  5. 19. 교구 성가 발표회(문예회관)

1991.  1. 26. 이시우(안드레아) 신부, 사제 서품

1993.  2.  6. 고병수(요한, 신제주), 양요왕(요한, 서귀복자) 신부,

              사제 서품

1993. 10. 31. 교구 신앙대회(한라체육관)

1994.  1. 25. 현경훈(미카엘, 서귀복자), 김영태(베네딕도, 광양) 신부,                  사제 서품

1994.  3. 19. 서문성당 새성당 축성 및 봉헌식

1994.  9. 25. 대정성지 성역화(정난주 마리아 - 순교자)

1995.  2.  4. 강형민(다니엘, 고산), 김석주(베드로, 동문) 신부,

             사제 서품

1995.  4. 30. 동광본당 설립(초대신부 - 임문철)

1996.  2. 10. 문창우(비오, 동문) 신부, 사제 서품

1996. 10.  6. 제주교구 25주년 기념 신앙대회

1997.  1. 25. 송동림(레오, 성산포), 현요안(요한, 서문),

              현문권(토마스. A.성산포) 신부, 사제 서품

1997.  2.  5. 남원본당(초대 주임신부 강형민),

              표선본당(초대 주임신부 김준수) 설립

1997.  9. 11. 노형본당 설립(초대 주임신부 - 고병수)

              화북본당 설립(초대 주임신부 - 김석순)

1998.  1. 24. 허찬란(임마누엘, 광양) 신부, 사제 서품

1998. 12.  조천공소 본당으로 승격 (초대 주임신부 - 현요안)

 

- 작성 김경환(분도) -

 

 

첨부파일: 제주100년약사.hwp(49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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