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세건 - 80년5월 광주에서 (자게 - 삭제된글)

2008. 5. 15. 오후 6:10:39

글자
80년5월 광주에서
 
작성자   권세건(tkfrmadl7)  쪽지 번  호   120395
 
작성일   2008-05-15 오후 12:39:59 조회수   140 추천수   8
 
화려한 휴가 May 18 (O.S.T) 2007
김성현 작, 편곡
Track. 몇곡 듣기
 
     
평범한 사람들의 평생 잊지 못 할 열흘간의 기억
 
80년 5월 18일, 그날의 '작전명' (화려한 휴가) 다만, 꿈이길 바랐습니다
1980년 5월, 광주.
그 날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아니 믿기 싫었습니다.
광주에 사는 택시기사 민우(김상경 분). 어릴 적 부모님을 여의고 끔찍이 아끼는 동생 진우(이준기 분)와 단둘이 사는 그는 오직 진우 하나만을 바라보며 평범한 일상을 살고 있다. 진우와 같은 성당에 다니는 간호사 신애(이요원 분)를 맘에 두고 사춘기 소년 같은 구애를 펼치는 그는 작은 일상조차 소중하다. 이렇게 소소한 삶을 즐기는 이들에게 어느 날 갑자기, 생각지도 못한 무시무시한 일이 벌어진다.
무고한 시민들이 총,칼로 무장한 시위대 진압군에게 폭행을 당하고 심지어 죽임을 당하기까지 한다. 눈 앞에서 억울하게 친구, 애인, 가족을 잃은 그들은 퇴역 장교 출신 흥수(안성기 분)을 중심으로 시민군을 결성해 결말을 알 수 없는 열흘 간의 사투를 시작 하는데…
<작전명: 화려한 휴가>
5•17비상계엄 전국확대로 휴교령이 내려진 전남대 정문 앞에서 5월 18일 10시경 등교 중이던 전남대생들과 출입을 제지하는 계엄군이 최초로 충돌했다. 이에 전남대 학생들이 금남로에서 가두시위를 시작하자 오후 3시부터 작전명 [화려한 휴가]가 개시되었다.
3공수특전여단, 7공수특전여단, 11공수특전여단, 20사단, 31사단, 보병학교, 포병학교,기갑학교 등 총 47개 대대 소속의 장교 4727명, 사병 15590명 등 총2만명 이상의 대한민국 국군이 이 작전에 동원되었다.
장비는 "대간첩작전"에 준하여 각종 탄약을 휴대, 실제로 정부의 발포 허가를 받고 사용되었고 항공기(무장헬기 포함) 30대, 전차 7대, 장갑차 17대, 차량 282대가 진압에 사용되었다.
이 작전으로 인한 희생자는 사망 207명, 부상 2392명, 기타희생 987명 (광주민주유공자 등록현황 2003.1.31)으로 집계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추정치이며 현재까지도 정확한 집계는 발표되지 않고 있다.
Production Note
Ready
1980년 5월, 광주를 완성하다
철저한 고증과 끊임없는 노력으로 완벽한 재현에 성공
역사적 사건을 소재로 영화를 만든다는 것은 그 이야기가 얼마나 사실인가도 중요하지만 모두가 다 아는 사실이라면 얼마나 완벽하게 그 날을 표현해 냈느냐가 관건이다. 재현하고자 하는 그 시대상을 세심한 부분까지 완벽히 반영하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518 민주화 운동을 배경으로 한 만큼, 모든 스탭이 가장 주안점을 둔 요소는 바로 깊이와 밀도였다.
이에 <화려한 휴가> 제작진은 당시 국내외 언론 보도 기사 및 그 동안 방송된 관련 다큐멘터리를 모두 섭렵하는 등 방대한 양의 자료들을 토대로 철저한 고증을 통해 1980년 실제와 같은 세트를 제작했다. 또한 당시 그 일을 겪었던 생존자들을 직접 대면하고 1980년의 조각을 하나 둘씩 맞춰가며 그 날을 완성했다. 27년 전의 오늘을 완성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수년을 걸친 연구와 끊임없는 노력으로 1980년 5월의 열흘이라는 시간을 창조해냈으며, 갑작스런 사건 속에서 오로지 자신과 가족을 위해 무력에 투쟁했던 평범한 시민군의 이야기를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완성해냈다.
5개월의 촬영기간 & 100억의 제작비
세트_1980년 광주의 금남로가 다시 태어난다
지난 2006년 7월, 촬영에 들어간 <화려한 휴가>는 장장 5개월의 촬영기간 동안 1980년 5월의 열흘을 완벽하게 카메라에 담았다. 광주 북구 첨단 과학산업단지의 1만 7천여 평 부지에 제작된 금남로 세트장은 30억 원이란 제작비를 투자해 27년 전 시민군의 함성이 생생히 들리는 완벽한 금남로로 탄생했다. 도청의 모습은 누가 봐도 1980년 그날의 모습 그대로이며 도청을 중심으로 한 건물들과 도로, 표지판까지 철저한 고증을 거쳐 완성되었다. 도청은 100% 실물크기로 제작됐으며 나머지 건물들은 85%의 크기로 실제와 똑 같이 지어졌다. 그날을 기억하는 많은 광주 시민들은 <화려한 휴가>가 재현해낸 금남로를 보고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추억에 잠겼다.
이렇게 완성된 금남로 세트는 영화 속에서 계엄군과 시위대의 총격씬, 대규모 엑스트라가 동원된 시위씬 등 스펙터클한 장면을 담는데 큰 기여를 했으며, 화려한 볼거리를 제공하며 관객들에게 27년 전 광주의 완벽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의상, 소품_1980년 광주를 완성하는 나머지 장치
총 100억의 제작비가 들어간 <화려한 휴가>에는 금남로뿐 만 아니라 광주 시내 버스, 포니 택시, 그리고 무력진압에 사용됐던 장갑차와 군용 지프 등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1980년을 이루고 있다. 포니 자동차는 우리나라에서는 구하기 어려워 이집트에서 3대를 역수입하는 방법을 통해 공수됐었으며, 이에 금남로 거리에서 벌어지는 총격씬과 시위대의 모습은 마치 당시 뉴스 속보를 보듯 생생하고 치열하게 그려진다.
또한 출연하는 모든 캐릭터의 의상은 1980년을 표현하기 위해 중국에서 공수해 왔다. 현재 중국의 시골 지방 의상은 우리나라 80년대와 거의 흡사한 디자인과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에 1만여 벌이나 되는 의상을 중국에서 구해왔으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모든 캐릭터들은 이 의상을 입고 촬영에 임했다. 이에 세트, 소품, 의상 삼박자가 완벽한 조화를 이뤄 1980년 광주의 그날을 생생히 재현하고 있다.
Action
1,600명의 대규모 시위씬_모두의 화합으로 완벽한 재연 성공
<화려한 휴가>의 가장 큰 스케일을 볼 수 있는 장면은 단연 도청 앞 시위씬이다. 무고하게 희생당한 가족, 친구,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무력에 맞서는 시민들은 계엄군에 대항하며 시위대에 가담한다. 가장 중요한 장면 중 하나인 시위씬에는 약 1,600명이란 엄청난 수의 엑스트라가 동원되었다. 모두 중국에서 공수해온 80년도 의상을 입고 일사 분란하게 움직이며 촬영을 진행했다. 모두 한마음이 되어 한컷 한컷에 심혈을 기울였으며, 오랜 촬영으로 심신이 지친 엑스트라들에게 배우들이 직접 연기 지도를 하는 등 스탭, 배우, 엑스트라까지 모두가 하나가 되어 가장 힘들지만 가장 위대한 장면을 완성했다.
배우들의 열연_더욱 견고해지고 노련해진 <화려한 휴가>
518을 소재로 한 <화려한 휴가>는 어느 액션영화 못지 않은 장면들이 많았다. 투입된 탄약과 폭발물의 양도 많았고 탱크, 장갑차 등을 이용한 총격전 장면 또한 압권이다. 이에 배우들 역시 위험천만한 장면을 촬영할 때에도 몸을 사리지 않는 프로정신을 보이며, 그날의 생생함을 전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했다. 위험한 총격 장면과 몸싸움 장면에도 몸을 아끼지 않고 과감한 연기를 펼치는 배우들을 통해 <화려한 휴가>는 더욱 견고해지고 노련해졌다.
또한 <화려한 휴가>의 배우들은 1980년 그 당시의 광주 시민이 되어 감정 몰입에 충실했다. ‘강민우’ 역의 김상경은 촬영이 없는 날에도 늘 촬영장을 지키며 5개월 동안 ‘강민우’의 삶을 살았고 여자 주인공인 이요원 역시 당시 시내 가두방송을 한 ‘전옥주’를 모티브로 창조된 인물인 ‘박신애’를 완벽히 연기했다. 뿐 만 아니라 그 당시 남녀노소 불문하고 계엄군에게 구타를 당하는 장면을 위해 계엄군에게 머리채를 잡히는 연기를 하는 등 열연을 펼쳤다.
실화를 소재로, 실존 인물을 토대로 완성된 <화려한 휴가>
<화려한 휴가>를 보는 동안 가슴 한 켠이 먹먹해지는 건, 바로 당시 존재했던 인물들이 실제 겪었던 일을 담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화려한 휴가> 속 많은 장면들과 인물들은 1980년 치열했던 5월의 광주에 실존했던 인물과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완성되었다. 그리하여 <화려한 휴가>는 더욱 사실감 넘치고 감동적인 영화로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을 기억해주세요.
도청 위 조기를 올렸던 한 광주 시민
시민군에 가담한 민우는 시민군이 되어 계엄군으로부터 도청을 탈환한다. 이미 많은 사람들의 피를 보았고, 주변의 소중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민우는 도청 위 태극기를 조기로 게양하며 목숨을 잃은 사람들을 애도하며 사랑하는 사람들을 지키겠다는 다짐을 한다. 이는 광주민주화 운동 당시 실제로 도청 위 조기를 올렸던 인물을 근거해 탄생한 장면으로 <화려한 휴가>에서는 가슴 뭉클한 감동을 선사할 것이다.
도와달라는 애절한 가두 방송을 했던 두 여성
1980년 5월 27일 광주 시민군의 최후 항쟁이 있던 날 오후 3시,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이 시내로 진입하기 시작한다. "시민 여러분! 지금 계엄군이 광주 시내로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우리 형제, 우리 자매들이 계엄군의 총칼에 숨져가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 계엄군과 끝까지 싸웁시다. 우리는 광주를 사수할 것입니다.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 우리는 최후까지 싸울 것입니다. 시민 여러분...." 라는 애절한 시내 가두방송을 했던 두 여성은 <화려한 휴가>에서 이요원이 연기하는 ‘박신애’라는 인물로 탄생했다.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흘렸던 어린 아이
<화려한 휴가>의 예고편을 보면, 아버지의 주검 앞에서 ‘아버지’를 목놓아 부르던 한 어린아이의 모습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는다. 이 아이는 518 당시 실제로 아버지의 관 앞에서 영정사진을 들고 뜨거운 눈물을 흘리던 소년의 모습을 토대로 탄생한 인물이다. 당시 영정사진을 들고 있는 이 아이의 사진은 외신기자의 보도를 통해 알려져, 많은 사람들이 가슴 아파했던 것으로 유명하다.
*그날의 진실
도청 앞에 울려펴진 애국가의 진실
<화려한 휴가>에는 관객들이 믿지 못할 충격적인 장면들이 몇 있다. 그 중 하나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가슴에 손을 얹고 애국가를 제창하는 시민들을 향해 무참히 사격하는 계엄군의 모습이다. 그러나 실제로 계엄군의 총이 발포 될 당시, 광주 도청 앞에는 애국가가 울려 퍼지고 있었고,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애국가가 계엄군에게는 발포 명령을 암시하는 신호였을 것이라고 추측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 발포와 관련된 모든 그날의 진실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주남마을 버스 학살 사건
광주 시민들을 태운 버스 한대가 논길을 달리고 있다. 버스에 탄 시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사방을 주시하고 있다. 순간, 반대편에 보이는 군용 트럭. 두려움이 현실로 바뀌는 순간, 버스 안은 아비규환이 되고 버스를 발견한 군인들은 트럭에서 내려 버스를 향해 사정없이 사격 한다. 이 끔찍한 장면은 <화려한 휴가>의 한 장면이지만, 실체 대표적인 양민학살 사건으로 알려진 주남 마을 미니버스 총격 사건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다. 1980년 5월 23일, 광주 지원동 주남 마을 앞에서 18명의 광주 시민을 태운 소형버스에 무차별 사격을 한 이 사건으로 인해 버스 승객 18명 중 17명이 사망한 참혹한 사건으로 기억되고 있다.
짓밟히고 또 짓밟힌 사람들
<화려한 휴가>의 많은 장면들이 실화를 근거로 제작됐다. 사실적인 전달을 위해 그 당시 사진을 보며 연출했던 장면들도 넘쳐난다. 많은 관객들이 ‘설마..’라며 지켜보는 장면들 대부분이 그러할 것이다. 광주의 모든 시민들에게 무차별 가격을 감행하는 계엄군의 모습. 벌건 대낮에 길거리에서 남녀노소 불문하고 구타 당하며, 옷이 발가벗긴 채 연행되는 시민들. 국가안보를 위해 써야 할 탱크가 광주시내에 들어와 무고한 시민들을 향해 돌진하는 모습 등 이 모든 것이 그날의 진실이며, <화려한 휴가>가 담아 낸 모습이다.
글 출처 : 씨네 21
'화려한 휴가' 그 못다한 이야기
[학살진상 수사는 역사적인 책무입니다]
글쓴이 : 흑산도
▲ 허화평 전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 15일 "(80년 광주의)  계엄군은 착검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9일 촬영한 사진에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쫓고 있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붉은 색 원) 5.18 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 - 계속되는 오일팔 (1979.2.25-2004.5.18)>에서 발췌. ⓒ2005 신복진
▲ 5.18 광주민주화운동 진압 계엄군이 착검하지 않았다는 허화평씨 주장과 달리 신복진 <전남일보> 사진부 기자가 80년 5월 19일 당시 촬영한 사진에는 M16 자동소총에 대검을 꽂은 채 시민들을 구타하는 공수부대원의 모습이 생생히 담겨 있다. 5.18기념재단이 펴낸 <오월, 우리는 보았다-계속되는 5.18>에서 발췌.  ⓒ2005 신복진










[화려한 휴가의 기록]화려한 휴가의 기록]
5월 17일
밤 11시 40분, 문공장관 이규현은 5월 17일 24시를 기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발표했다. 계엄 확대가 발표되고 두 시간이 지난 후, 전남대와 조선대 캠퍼스에 특전사가 투입되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좌측 머리부분이 함몰된 광주항쟁 사망자
5월 18일
오전 10시, 휴교령이 내린 상태에서 전남대 정문 앞에 모여든 학생 100여명과 무장 공수대원이 대치하였다. 200-300명 정도로 수가 불어나자 학생들은 "계엄해제" "계엄군 물러가라" "휴교령 철회하라" 라는 구호를 외치기 시작했다. 곧 대치 중이던 공수부대 책임자가 "돌격 앞으로" 라는 명령을 내렸고, 공수대원들은 학생들에게 파고들면서 곤봉을 휘둘렀다. 곤봉은 쇠심이 박힌 살상용 곤봉으로, 이를 맞은 학생들이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좌측 가슴에 총상과 자상이 난 채 사망한 광주항쟁 사망자
"공수부대 병사들은 마음껏 모든 가능한 폭력을 행사하였다. 첫날부터 대검을 사용하였고, 지나친 폭력에 항의하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에게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대며 무지막지하게 구타하고, 여성들에게 폭행하고 옷을 찢고 심지어 젖가슴을 대검으로 난자하였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뒤쪽에서 본 위 사진 사망자의 총상 자국
"공수 놈들이 여고생을 붙잡고 대검으로 교복 상의를 찢으면서 희롱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60살이 넘어보이는 할머니 한 분이 "아이고! 내 새끼를 왜들 이러요?" 하면서 만류하자 공수놈들은 "이 씨팔 년은 뭐냐, 너도 죽고 싶어?" 하면서 군화발로 할머니의 배와 다리를 걷어차 할머니가 쓰러지자 다리와 얼굴을 군화발로 뭉게버렸다. 그리고 그들은 여학생의 교복 상의를 대검으로 찢고 여학생의 유방을 칼로 그어버렸다. 여학생의 가슴에서는 선혈이 가슴아래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물, 1988)
아...하늘이여....
"어느 할아버지는 "저럴 수가 있느냐, 나는 일제 때에도 무서운 순사들도 많이 보고, 6.25 때 공산당도 겪었지만 저렇게 잔인하게 죽이는 놈들은 처음 보았다. 학생들이 무슨 죄가 있길래 저러는가. 죄가 있다고 해도 저럴 수는 없다. 저놈들은 국군이 아니라 사람의 탈을 쓴 악귀들이야." 하면서 통곡했다. 어느 중년의 사내는 "나는 월남전에는 참전해서 베트콩도 죽여봤지만 저렇게 잔인하지는 않았다. 저런 식으로 죽일바엔 그냥 총으로 쏴 죽이지. 저 놈들은 죽여버려야 해" 하면서 오열을 터뜨렸다. 온 거리는 피의 강, 울음의 바다가 되었다."
무참하게 구타당한 채 사망당한  광주 영령
5월 19일
"5월 19일에 저질러진 공수부대의 만행은 어찌나 잔인했던지 진압하러 나온 경찰조차 시민들에게 울먹이면서 "제발 집으로 돌아가라, 공수부대에게 걸리면 다 죽는다"고 애원할 정도였다."
사살되거나 타살후 리어카에 실려 어디론가 이동을 기다리는 시신
"주위의 노인들이 공수대원의 폭력을 만류하자 그들은 노인들의 머리를 곤봉으로 후려쳤다. 노인들도 머리에서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이런 모습을 도망치며 바라본 시위 군중들은 어디서 그런 힘이 솟았는지 일시에 돌아섰다. 그리고는 "좋다, 다 죽여라!" 하면서 공수부대에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로타리 부근 전투에서 머리가 으깨지고 팔이 부러져 온통 피범벅이 된 부상자를 급히 병원으로 이송중이던 택시기사에게 공수대원이 부상자를 내려놓으라고 명령했다. 기사는 안타깝게 "당신이 보다시피 지금 곧 죽어가는 사람을 병원으로 운반해야 되지 않겠느냐" 라고 호소하자 그 공수대원은 차의 유리창을 부수고 운전기사를 끌어내려 대검으로 무참하게 배를 찔러 살해했다. 이런 식으로 최소한 3명의 운전기사가 살해당했는데, 이는 다음날인 20일, 또 하나의 기폭제였던 차량시위의 직접적인 계기가 된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어떻게 눈을 감았을꼬..
5월 20일
대검만으로는 모자랐던 걸까. 20일 오후부터는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사용하였다. 2시 30분경 공수부대는 화염방사기를 쏘아 여러 명의 시민들이 그 자리에서 타 죽었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택> (인물과 사상, 2003)
"시민들은 혹시나 자신들의 운명에 관한 새로운 소식이 TV를 통해 방영되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모두 열심히 시청하였지만 TV에서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연속극이나 오락프로만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방영되고 있었다. 그들은 텔레비젼을 보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분노를 느꼈다. 한 쪽에서는 죄 없이 같은 동포가 절규하며 죽어가고 있는데, 저 텔레비젼의 다리를 흔들어 대는 춤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하는 배신감이었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아.....아.....그저 눈물만....
 MBC 이외에도 KBS와 세무서도 불에 탔다. 신군부는 이 방화들을 '폭도론'의 증거로 TV 등을 통해 계속 보여주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얼마나 얼마나....
 "전남대에서 신역까지 도보로 이동하면서 아스팔트와 건물을 향해 사격을 실시한다. 트럭 위에서는 M60이 엄호사격을 하면서 한 발 한 발 신역을 향해 다가간다. 사병들을 향해 고함치기 시작했다. 후퇴는 없다. 후퇴하면 모두 쏴죽인다."
- 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 취재반 <10일간의 항쟁> (사회평론, 1995)
피멍이 들어 사망한 광주영령을 방치한 공수부대
5월 21일
오전 10시경 금남로에는 10만이 넘는 시민들이 모여 있었다. 시민들은 일단 정오까지 공수부대를 시외곽으로 철수시키겠다는 약속을 믿고 기다리는 중이었다. 약속한 정오가 지나도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오후 1시 정각, 건물 외부에 설치된 확성기를 통해 애국가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그건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알리는 신호였다. 광주시민들을 몰살시키려는 것이었을까. 시민들은 공수부대의 집단 발포를 정면으로 맞고 쓰러지기 시작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광주매일 정사 5.18 특별 취재반 <10일간의 항쟁> (사회평론, 1995)
거의 미이라가 된 상태로 방치된 시신
"공수놈들은 같은 동족을 살상하고도 쓰러진 사람들을 옮기지 못하도록 연발로 위협사격을 해대었다. 아직도 공수부대놈들의 사격선 부근에서 부상한 채로 살려달라고 외치는 시민들의 애원소리는 처절했고, 이는 그것을 바라보는 시민들의 피를 끓게했다. 공수놈들은 아직 죽지 않고 아스팔트 바닥 위에서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시민들을 구하려고 뛰어나가는 시민들에게조차 사격을 가해 사살해버렸다. 부근 건물의 벽에 바짝 붙어서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시민들은 모두 울고 있었다."
-박남선 <피고인에게 사형을 선고한다> (샘물, 1988)
얼마나 아팠을까 아
"순식간에 금남로는 피와 통곡의 바다가 되었다. 공수부대는 도청과 주변의 건물에 숨어 보이는 사람들마다 져격하였다. 1시 30분경에는 한 청년이 장갑차 위에서 윗통을 벗고 태극기를 높이 휘날리며 도청을 향해 '광주만세!' 를 외치며 달려들었다. 모든 시민들이 긴장되어 그를 응시하는 가운데 한 발의 총소리와 함께 피가 튀며 청년의 목이 꺽어졌다. 이 광경을 본 모든 시민들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충격에 온몸을 떨었다. 이제는 정말 돌이킬 수 없는 '전쟁' 이었다. 시민들은 곧 총을 얻기 위해 시내, 외의 무기고로 향했다."
- 최정운 <오월의 사회과학> (풀빛, 1999)
사살되거나 타살되거나 대검에 찔려 방치된 시신들
21일 저녁, 드디어 시민군은 계엄군을 도청에서 몰아내고 점거하는데 성공한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택> (인물과 사상, 2003)
5월 22일
22일 비공식적인 정전이 성사되고 종교 지도자들을 포함한 시민 수습위원회와 신군부 사이에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대화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날 계엄당국은 김대중을 광주폭동의 배후라고 발표했으며, 일부 특전사 지휘관들은 무력을 동원해 광주 '폭도들'을 '소탕'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 윌리엄 글라이스틴, 황정일 역. <알려지지 않은 역사> (중앙 M&B, 1999),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하는 아..........
전두환은 정석환에게 "최장군의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어 있을 터이니 용기를 잃지말고 분발하라고 전해달라"며 전두환 자신의 명의로 금일봉 1백만원을 최웅에게 전해달라고 지시했다.
- 정석환, <비화/ 5.18당시 정보부 전남지부장 정석환 비망록> (신동아, 1996 1월)
5월 24일
공수부대는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으로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 인근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저수지에서 멱을 감고 있던 아이들에게 집중 사격을 가하자 아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지만, 전남중학교 1학년이었던 박광범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또한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했다. 모두 피신했지만 신발이 벗겨져 뒤돌아섰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는 총에 맞고 즉사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님이여...
전남대학교 교수들은 <대한민국 모든 지성인들에게 고함>을 발표했다. "모든 사람들은 6.25때에도 이런 참혹한 살육전은 없었다고 울부짖으며 '모두 죽자' '죽여달라' 를 외치며 짐승 같은 계엄군과 맨몸으로 싸웠습니다..... (중략) 고립된 우리 광주 시민들에게는 무엇보다도 한시가 절박합니다. 민주시민이여! 민주화를 위해, 우리의 삶을 위해 일어섭시다."
- 김정남 <동포여, 무엇을 하고 있는가> (생활성서, 2002년 12월)
조국은 그대들에게 총칼로 잔학했는데..그래도 태극기를 덮고...
5월 25일
아침 8시, 황금동 부근에서 술집을 경영하는 21세의 장계범이라는 사람이 도청 농림국장실에 쓰러지듯이 허겁지겁 들어닥치면서 어깨를 움켜쥐고는 "독침을 맞았다!"고 소리쳤다.... (중략) 독침 사건이 발생하자 도청 안의 분위기가 갑작스레 살벌해졌다. 여기저기서 간첩이 침투했다는 소문이 돌고 모두들 수군거리며 도청 안에는 불안해서 못 있겠다며 상당수가 빠져나갔다...(중략) 이 사건은 사전에 계획된 것으로서 침투정보요원들의 도청지도부 교란작전이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길거리에 방치된 광주의 영령들
5월 26일
전남 도청에서 최초이자 마지막 내외신 기자회견이 열렸다. 미국의 일간지 <볼티모어 선>지의 기자 블레들리 마틴은 이 기자회견에서 만난 광주항쟁 지도부의 청년학생투쟁위원회 대변인이었던 윤상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미 그가 죽을 것임을 예감했다. 그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표정에는 부드러움과 친절함이 배어 있었지만,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그림자를 읽을 수 있었다. 지적인 눈매와 강한 광대뼈가 인상적인 그는 최후의 한 사람이 남을 때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 임창용 <'폭동'아닌 '민주항쟁' 자리매김 큰 몫 윤상원 5.18 시민군 대변인> (서울신문 1998 9월 10일)
다 피지도 못하고...여인이여...
5월 27일 0시를 기점으로 광주의 시외 통화가 끊기자 도청에 남아있던 사람들은 계엄군이 진입할 것이라는 것을 예감했다. "고등학생들은 먼저 총을 버리고 투항해라. 우리야 사살되거나 다행히 살아남아도 잡혀 죽겠지만 여기 있는 고등학생들은 반드시 살아남아야 한다. 산 사람들은 역사의 증인이 되어야 한다. 우리는 민주주의와 민족통일의 빛나는 미래를 위하여, 항쟁의 마지막을 자폭으로 끝내서는 안된다. 자, 고등학생들은 먼저 나가라."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절통하고 절통해서 어찌 눈을 감겠소...
5월 27일
새벽 4시쯤 도청 앞은 탱크를 앞세운 계엄군에 의해 완전히 포위되었으며, 금남로를 중심으로 시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계엄군의 장갑자 위에 장착된 서치라이트가 도청을 비추는 가운데 계엄군은 항복을 권유하는 최후 통첩을 방송했다. 그러나 도청 안에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고, 곧 총성이 울림과 함께 계엄군의 서치라이트가 박살났다. 다시 캄캄한 어둠이 내리깔렸고 계엄군의 일제사격이 개시되었다.
- 강준만 <한국 현대사 산책> (인물과 사상, 2003)
달아나던 시민군을 살해했던 계엄군은 8명의 투항자들을 전부 사살하였다. 한 계엄군 병사는 한쪽 발을 시민군 포로의 등에 올려놓고 사격하면서 "어때, 영화구경하는 것 같지?"라는 농담까지 던졌다.
- 전남사회운동협의회 편, 황석영 기록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풀빛, 1985)
 
신성구 ( (2008/05/15) : 괴수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 저들의 부모, 형제가 살고있는 고향땅(대구, 경북)에서도 저런 만행을 저지를 수 있었을까요?? 도저히 용서가 안됩니다. 어느 기자는 저들이 저지른 만행에 맞는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하며 결국 :인간 사냥꾼" 으로 표현하였더군요. "인간 사냥꾼" 전두환, 노태우, 정호용...xhak59)  
 
김양귀 ( (2008/05/15) : 6.25 전쟁보다도 더 무서웠다고만 ..... 표현하신 우리 친정 어머니.......우리들은 그것도 모르고...왜 이리 전화가 불통이냐고.....같은 한국사람이라도 같은 고향 사람이라도 서울에 올라와 살던 사람은 그날의 비극을 아직도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으니...슬픈일이지요.....오늘날도 미안마 독재사건 ..중국 대 지진사건...모두가 다 슬픈 일이어서 기도합니다...*주님 이 세계에 민주주의와 평화를 허락하소서~ 아멘***kykbd2481)  
 
이신재 ( (2008/05/15) : 이데올로기! 인간을 잔악하게 만들었습니다. 6.25때도 5.18광주도 그리고 지금도(좌파=빨갱이) 참으로 지독한 민족입니다. 이념 하나로 가족도 동족도 무참히 짓밟을 수 있으니 말입니다. 그때 광주에 불순분자(빨갱이)가 배후에 있었다고..... 지금 광화문 촛불 시위도 배후에 좌파 세력이 있다고..... 누굴까? 그들은?? 왜 좌파를 들먹일까???thomas3004)  
 
이인호 ( (2008/05/15) : 원흉들은 모두 어디로 사라졌는가? 가슴아프고 잊을 수 없는 기억입니다. 긴세월 자식을 가슴에 묻어두고 사는 어머니들의 마음에 평화를 빕니다.stefanlee)  
 
한승희 ( (2008/05/15) : 10.26, 12.12, 5.18, 군에서 중,고참으로 지내면서 고생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당시 수송부대에 근무했는데 공수부대 태우고 연대, 고대, 서울대, 등등... 참 고생 많이했습니다. 제 친구중에 광주 상무대에서 군생활한 친구가 있었는데, 진짜 전쟁난줄 알았답니다. 전라도 신병들오면 고생 참 많이 했습니다. 혹시, 저로인해 마음상했던 졸병들이 있었다면, 너무 늦었지만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hsh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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