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계 문헌이 씌어질 당시의 시대 상황
요한계 문헌의 집필 연도는 대략 서기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됩니다.
요한 복음서의 경우 1920년에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사본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서기 13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서기 85-90년에 성행하였던 “회당 추방”이란 표현이 요한 복음서에 언급된 점(9,22; 12,42; 16,2)으로 보아 요한 복음서의 집필 연도를 서기 90-1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요한계 문헌들도 요한 복음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저술되었다는 게 학계의 통설입니다.
이 시기에는 세 가지 상황을 설정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인들과의 완전한 결별입니다. 이 결별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뿐이라고 주장하는 유다교 유일신론자들과,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합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대립은 제1차 유다 독립전쟁(66-70년)과 바리사이파가 유다교의 주도 세력이 되는 얌니아 종교회의를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85-90년경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단죄했고, 라삐 가믈리엘 2세가 유다교인들의 ‘18조 기도문’에 ‘이단자들에 대한 저주’ 항목을 첨부함으로써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요한 복음서 안에 나오는 유다인들에 대한 격렬한 논쟁과 비판들이 이를 잘 증언합니다.
둘째, 영지주의자들의 득세입니다. 영지주의는 세상과 육체를 천상과 영혼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원론에 바탕을 두면서, 천상의 지식을 통하여 구원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2세기경의 이단입니다.
이 영지주의자들은 유다인들과는 다른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실체를 부정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110년경) 성인이 공격한 가현(假現)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레네오가 요한의 적대자로 묘사한 가현주의자 체린투스는, 영적 존재인 그리스도가 세례 때에 보통 사람 예수에게 내려왔다가 십자가 처형 전에 다시 빠져나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 1장의 로고스 찬가(1-18절)에는 영지주의를 반대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사셨다”는 고백이 있는데, 이 신앙고백은 요한의 편지들에 나타난 그리스도론과 일치합니다.
셋째, 주로 요한 묵시록의 집필 동기가 된 로마의 박해입니다. 주석가들은 요한 묵시록의 시대적 배경으로 로마 황제 도미치아누스(81-96년)의 박해를 지목합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 외에는 그리스도교 문헌이건 로마의 역사 문헌이건 도미치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큰 박해를 겪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더 이상 도미치아누스의 대박해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도미치아누스시대가 요한 묵시록의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요. 로마 역사가들은 도미치아누스의 폭정과 말년의 공포 정치, 특히 신하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내세워 숭배하도록 한 행위를 비난하였습니다.
도미치아누스는 자신을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dominus et deus noster)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하면서 로마와 황제를 동시에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같은 황제 숭배는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와 필연적인 충돌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머니 속 성서박사 시리즈 중에서>
요한계 문헌의 집필 연도는 대략 서기 1세기 말경으로 추정됩니다.
요한 복음서의 경우 1920년에 이집트에서 파피루스 사본 일부가 발견되었는데,
이는 서기 13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 판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서기 85-90년에 성행하였던 “회당 추방”이란 표현이 요한 복음서에 언급된 점(9,22; 12,42; 16,2)으로 보아 요한 복음서의 집필 연도를 서기 90-100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나머지 요한계 문헌들도 요한 복음서와 거의 같은 시기에 저술되었다는 게 학계의 통설입니다.
이 시기에는 세 가지 상황을 설정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유다인들과의 완전한 결별입니다. 이 결별은, 하느님은 오직 한 분이신 주님뿐이라고 주장하는 유다교 유일신론자들과, 나자렛 예수님을 하느님의 아들로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 사이에서 처음부터 예견된 일이기도 합니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의 대립은 제1차 유다 독립전쟁(66-70년)과 바리사이파가 유다교의 주도 세력이 되는 얌니아 종교회의를 거치면서 더욱 심해졌습니다.
85-90년경 유다인들은 그리스도인들을 이단자로 단죄했고, 라삐 가믈리엘 2세가 유다교인들의 ‘18조 기도문’에 ‘이단자들에 대한 저주’ 항목을 첨부함으로써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사이는 돌이킬 수 없이 완전히 벌어지고 말았습니다.
요한 복음서 안에 나오는 유다인들에 대한 격렬한 논쟁과 비판들이 이를 잘 증언합니다.
둘째, 영지주의자들의 득세입니다. 영지주의는 세상과 육체를 천상과 영혼의 그림자에 불과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원론에 바탕을 두면서, 천상의 지식을 통하여 구원으로 가는 길을 찾을 수 있다고 믿은 2세기경의 이단입니다.
이 영지주의자들은 유다인들과는 다른 이유에서 그리스도의 실체를 부정합니다.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110년경) 성인이 공격한 가현(假現)주의자들은 그리스도가 참으로 인간이었다는 사실을 부인했습니다.
예를 들어 이레네오가 요한의 적대자로 묘사한 가현주의자 체린투스는, 영적 존재인 그리스도가 세례 때에 보통 사람 예수에게 내려왔다가 십자가 처형 전에 다시 빠져나갔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요한 복음서 1장의 로고스 찬가(1-18절)에는 영지주의를 반대하여 “말씀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이 세상에 사셨다”는 고백이 있는데, 이 신앙고백은 요한의 편지들에 나타난 그리스도론과 일치합니다.
셋째, 주로 요한 묵시록의 집필 동기가 된 로마의 박해입니다. 주석가들은 요한 묵시록의 시대적 배경으로 로마 황제 도미치아누스(81-96년)의 박해를 지목합니다. 그러나 요한 묵시록 외에는 그리스도교 문헌이건 로마의 역사 문헌이건 도미치아누스 황제 아래에서 그리스도인들이 큰 박해를 겪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현대 주석가들은 더 이상 도미치아누스의 대박해 가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 도미치아누스시대가 요한 묵시록의 역사적 배경이 아니라는 말은 아니지요. 로마 역사가들은 도미치아누스의 폭정과 말년의 공포 정치, 특히 신하들에게 자신을 신으로 내세워 숭배하도록 한 행위를 비난하였습니다.
도미치아누스는 자신을 “우리의 주님이요 하느님”(dominus et deus noster)이라는 칭호로 부르게 하면서 로마와 황제를 동시에 숭배하도록 강요하였습니다. 이같은 황제 숭배는 한 분이신 하느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그리스도교와 필연적인 충돌과 갈등을 빚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주머니 속 성서박사 시리즈 중에서>
[출처] 요한계 문헌이 씌어질 당시의 시대 상황 |작성자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