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오로의 전도여행 (사도 13-28장)
제1차 전도 여행(45-49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살라미스→바포→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리스트라→이고니온→데르베→(귀환)
제1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 행전 13-14장에 쓰여 있다.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골로 4,10)와 바오로는 안티아키아에서 서쪽으로 25㎞ 떨어진 셀류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총독부가 있던 바포에서 전도하였다.
바포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 지역 베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사도 13,1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베르게에서 터키 중부 지역으로 가다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사도 13,14).
사도 행전 13장 14-52절에 따르면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두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설교하였는데, 이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불신하면서 전도사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이고니온을 거쳐 리스트라에서 전도하였다.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하던 중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 주자, 주민들은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오로는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까지 하였다(사도 14,8-18). 리스트라에 이어 데르베에서 전도한 다음(사도 14,20-21). 이제까지 전도한 지역들을 다시 들러 보살핀 후 아딸리아 항구에서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행 비를 탔다(사도 14,25-26).
1. 예루살렘 사도 회의(49년경) : 제1차 전도 여행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자 그들에게 예수 신앙만을 요구할 것인지 유대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 예루살렘 있던 사도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참석하였다. 이때의 합의 사항은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①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고, ②예루살렘 거주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며, ③예루살렘 모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교우들을 상대로 모금 운동을 펴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이다(1고린 16,1-4 : 2고린 8-9장 : 로마 15,25-28).
사도 행전 15장 1-29절에도 사도 회의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 결정 사항들이 사뭇 달라 회의에 참석한 바오로의 발언(갈라 2,1-10)에 더 신빙성을 둔다.
2. 안티오키아 사건 :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사도 회의 후에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들이고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두 부류의 신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게 여겨 손수 공동체 회식 겸 성찬례를 집전하였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로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선 안된다는 규정을 베드로가 어겼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그의 행동을 나무라자 그만 베드로는 겁을 먹고 이방인 교우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바르나바조차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함으로써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다. 이에 바오로는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고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바오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도 회의의 규정에 따라 교회 일치의 논리를 전개하였 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사도 회의와 안티오키아 사건은 제2차 전도 여행 다음에 있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제2차 전도 여행(50-52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프리기아→갈라디아→트로아스→필립비→데살로니카→
베레아→아테네→고린토→(귀환)에페소→예루살렘→안티오키아)
제2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 행전 15장 36절부터 18장 22절에 나온다.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고, 바오로와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 시민인 실라(사도 15,22. 32. 40 : 16,37)는 이미 제1차 전도 여행을 한 터키 남부 지역을 다시 찾아갔다. 아마도 다르소의 치드누스 강을 따라 북상하여 47㎞ 지점에서 길리기아 관문을 통과한 다음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로 갔을 것이다.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를 제자로 삼고(사도 16,1-3), 이어서 오늘날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런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디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교회를 창립하였다(갈라 4,13-15 : 사도 16,6).
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사도 16,8-10 : 20,6-12) 밤에 계시를 받고서는 에게 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에 닿았다(사도 16,6-11). 그리고 바오로는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교회를,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고린토 교회를 창설하였고,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린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 내륙으로 들어가 필립비에서 전도하였다(사도 16,13-15).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이며, 바오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 양면으로 후원하였다. 필립비 전도 말기에 바오로는 점쟁이 노비에게서 점귀신을 떼어 준 관계로 감옥에 갇혔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입교시켰다. 필립비를 떠난 바오로는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로 가소 전도하였다. 바오로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많은 시민을 입교시켰으나, 유대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자 바오로 일행은 올림푸스 산중에 있는 75㎞ 떨어진 베레아 마을로 피신하였다(사도17,1-10 : 1데살 2,13-16).
바오로가 베레아 마을에서 전도할 때 데살로니카에 사는 유대인들이 와서 훼방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 두고 홀로 아테네로 갔으나(17,10-15), 당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준이 높은 아테네에서의 바오로의 설교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사도 17,16-34).
실라와 디모테오가 아테네로 오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회 형편을 알아보고 그곳 교우들을 재교육하기 위하여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보냈으며(1데살 3,1-5),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89㎞ 떨어진 고린토로 가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그리고 디모테오가 고린토로 와서 데살로니카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것이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이는 바오로의 편지들 중에서 첫 번째 편지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제일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고린토 전도 말엽에는 유대인들이 바오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 갈리오 총독은 당대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으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 함부로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사도 18,12-17). 델피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51~52년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하였고 바오로 역시 같은 때에 고린토에 체류하였으므로 바오로의 연표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연대이다. 사도 바오로는 겐크레아 외항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 이스라엘 총독이 상주하던 가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사도 18,18-22).
제3차 전도 여행(53-58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페소→마케도니아→그리스→
(귀환)필립비→트로아스→밀레도스→가이사리아→예루살렘-<체포>
사도 행전 18장 23절부터 21장 16절은 제3차 전도 여행기이다. 바오로는 제2차 전도 여행 때 설립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로 가서 27개월 가까이 활약하였다(사도 19,8-10 : 20,31). 에페소에서는 전도가 잘 되었고(t1고린 16,9), 바오로는 제자 에바프라를 시켜 에페소 동쪽 500리쯤에 위치한 골로사이, 라오디게이아, 히에라폴리스에 교회를 세웠다(골로 4,13).
또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 유대주의를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다(갈라갈라 1,6-10). 에페소에서는 고린토 교회로 편지를 3통 써 보냈는데,
첫째 편지(1고린 5,9. 10)는 분실되었고, 셋째 편지(눈물 편지, 2고린 2,4 : 7,8)는 편린만(2고린 10-13장) 전해 오며, 단지 둘째 편지만 고린토 전서로 전해진다. 또한 에페소의 로마군 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필립 1,13 : 2고린 1,8-10) 필립비 교회에, 그리고 골로사이 교회의 신자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고린토 교회로 넷째 편지를 써 보냈는데(2고린 2,12-13 : 7,5-7 : 사도 20,1), 그것이 고린토 후서 1-9장이다.
마침내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가서 석 달 가량 머무르는 동안(사도 20,3)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해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로마서'이다. 고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58년 필립비 교회로 가서 과월절을 보내고(사도 20,6), 에페소 남쪽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 밀레도스, 두로, 하이파, 가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사도20,7-21,6).
로마호송(58~63년경)
가이사리아→시돈→미라→로도스→그레데→멜리데→시라쿠사→
레기움→보디올리→로마
바오로가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되기까지의 경위는 사도 행전 21장 17-36절에 적혀 있다. 아시아 출신 해외 유대인들이 나지르 서원 제사를 바치려고 성전에 온 바오로를 알아보고 민족과 종교의 배신자로 규탄하고 그를 폭행하였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한 로마군인들이 구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안티바드리스를 거쳐(사도 23,31) 지중해변 가이사리아 총독부 감옥으로 이송되어 미결수로 2년 동안(58~60) 갇힌 몸이 되었다(사도 23,12-24,27). 바오로는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하였다(사도 25,1-12).
그리하여 바오로는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사도 행전 27장 1절-28장 15절에 압송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60년 가을 (사도 27,9) 가이사리아를 떠나, 그레데 섬을 거쳐(사도 27,8-12) 항해하다가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멜리데 섬에 상륙하여 겨울 석 달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사도 28,11).
61년 봄 다시 배를 타고 시실리 섬을 거쳐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리 포구에 닿아 육로로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는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기는 하였지만(사도 28,16) 셋집을 얻어 자유롭게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2년 동안 지냈다(사도 28,30-31). 사도 행전의 바오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58년 봄 고린토에서 로마서를 쓸 때부터, 바오로는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로마 15,24. 28). 글레멘스 1세 교황(90/92~101)이 95년경 고린토 교회로 써 보낸 편지(5,1-6,1)를 보면, 바오로가 스페인에 가서 전도한 후에 다시 로마로 와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64~68) 모질게 박해하였는데, 이 박해 때 바오로와 베드로가 순교하였을 것이다.
테르톨리아노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네로 박해 때 순교하였는데, 베드로는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받았고, 바오로는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바오로는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있는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트레 폰타네에서 순교하고, 그 근처 현재의 바오로 대성전 자리에 묻혔다고 한다.
제1차 전도 여행(45-49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 →살라미스→바포→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
리스트라→이고니온→데르베→(귀환)
제1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 행전 13-14장에 쓰여 있다. 바르나바와 그의 사촌 요한 마르코(골로 4,10)와 바오로는 안티아키아에서 서쪽으로 25㎞ 떨어진 셀류기아 항구에서 배를 타고 바르나바의 고향인 키프로스 섬으로 건너가 살라미스와 총독부가 있던 바포에서 전도하였다.
바포에서 승선하여 터키 남부 지역 베르게에 이르렀을 때 요한 마르코는 전도를 포기하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고(사도 13,14),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베르게에서 터키 중부 지역으로 가다가 비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렀다(사도 13,14).
사도 행전 13장 14-52절에 따르면 바르나바와 바오로는 두 안식일에 걸쳐 회당에서 설교하였는데, 이방인들은 믿었으나 유대인들은 불신하면서 전도사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이고니온을 거쳐 리스트라에서 전도하였다. 바오로가 리스트라에서 설교하던 중 태생 앉은뱅이를 고쳐 주자, 주민들은 바르나바는 제우스 신이요 바오로는 헤르메스 신이라고 하면서 그들에게 제사를 바치려고까지 하였다(사도 14,8-18). 리스트라에 이어 데르베에서 전도한 다음(사도 14,20-21). 이제까지 전도한 지역들을 다시 들러 보살핀 후 아딸리아 항구에서 출발지였던 안티오키아행 비를 탔다(사도 14,25-26).
1. 예루살렘 사도 회의(49년경) : 제1차 전도 여행 결과 많은 이방인들이 입교하자 그들에게 예수 신앙만을 요구할 것인지 유대교의 율법 준수까지 요구할 것인지에 대한 문제가 크게 부각되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예루살렘 사도 회의가 소집되었고, 이 회의에 예루살렘 있던 사도들과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바오로와 바르나바도 참석하였다. 이때의 합의 사항은 갈라디아서 2장 1-10절에 잘 나타나 있다. 그것은 ①이방계 그리스도인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지킬 의무가 없고, ②예루살렘 거주 사도들은 유대인들에게 전도하고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인들에게 전도하며, ③예루살렘 모 교회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바오로와 바르나바는 이방계 교우들을 상대로 모금 운동을 펴기로 약속한다는 내용이다(1고린 16,1-4 : 2고린 8-9장 : 로마 15,25-28).
사도 행전 15장 1-29절에도 사도 회의에 관한 기록이 나오지만 그 결정 사항들이 사뭇 달라 회의에 참석한 바오로의 발언(갈라 2,1-10)에 더 신빙성을 둔다.
2. 안티오키아 사건 : 갈라디아서 2장 11-14절에 따르면 예루살렘 사도 회의 후에 베드로가 안티오키아 교회를 방문하였는데, 당시 그곳 그리스도인들 중 일부는 유대인들이고 또 일부는 이방인들이었다. 그들이 아무 거리낌없이 함께 모여 공동체 회식 겸 성찬을 거행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는 두 부류의 신자들이 함께 어울리는 것을 좋게 여겨 손수 공동체 회식 겸 성찬례를 집전하였다. 이런 소식이 예루살렘 교회로 알려지자 소동이 일어났다. 유대인은 이방인과 함께 식사해선 안된다는 규정을 베드로가 어겼다는 것이었다.
예루살렘 교회의 유대주의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를 찾아와서 그의 행동을 나무라자 그만 베드로는 겁을 먹고 이방인 교우들과의 회식 겸 성찬을 사양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베드로의 영향을 받아 안티오키아 교회의 유대계 그리스도인들, 심지어 바르나바조차도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의 교제를 끊기 시작함으로써 안티오키아 교회가 양분되었다. 이에 바오로는 그곳 교우들 앞에서 공공연히 베드로의 잘못을 꾸짖고 유대인이 이방인과 식사해서는 안된다는 율법 규정 때문에 교회 일치가 파괴될 수 없다는 논리를 폈다.
바오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사도 회의의 규정에 따라 교회 일치의 논리를 전개하였 던 것이다. 한편 예루살렘 사도 회의와 안티오키아 사건은 제2차 전도 여행 다음에 있었다고 보는 학설도 있다.
제2차 전도 여행(50-52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프리기아→갈라디아→트로아스→필립비→데살로니카→
베레아→아테네→고린토→(귀환)에페소→예루살렘→안티오키아)
제2차 전도 여행기는 사도 행전 15장 36절부터 18장 22절에 나온다. 바르나바와 요한 마르코는 키프로스 섬으로 가고, 바오로와 예루살렘 출신의 유대계 그리스도인이요 로마 시민인 실라(사도 15,22. 32. 40 : 16,37)는 이미 제1차 전도 여행을 한 터키 남부 지역을 다시 찾아갔다. 아마도 다르소의 치드누스 강을 따라 북상하여 47㎞ 지점에서 길리기아 관문을 통과한 다음 데르베를 거쳐 리스트라로 갔을 것이다. 바오로는 리스트라에서 디모테오를 제자로 삼고(사도 16,1-3), 이어서 오늘날의 터키 수도인 앙카라 주변을 지나가던 중 갑작스런 발병이 계기가 되어 갈라디아 지방에 이방인 중심의 여러교회를 창립하였다(갈라 4,13-15 : 사도 16,6).
트로아스에 이르러 교회를 세운 다음(사도 16,8-10 : 20,6-12) 밤에 계시를 받고서는 에게 바다를 건너 그리스의 항구 도시 네아폴리스에 닿았다(사도 16,6-11). 그리고 바오로는 그리스 북부 지역 마케도니아에 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교회를, 그리스 남부 지역 아카이아에 고린토 교회를 창설하였고, 네아폴리스에 닻을 내린 다음 에냐시아 국도를 따라 15㎞ 내륙으로 들어가 필립비에서 전도하였다(사도 16,13-15).
필립비 교회는 바오로가 유럽 대륙에 세운 첫 번째 교회이며, 바오로의 생계와 전도를 물심 양면으로 후원하였다. 필립비 전도 말기에 바오로는 점쟁이 노비에게서 점귀신을 떼어 준 관계로 감옥에 갇혔고, 그 기회에 간수의 가족을 입교시켰다. 필립비를 떠난 바오로는 암피볼리스와 아폴로니아를 거쳐 마케도니아의 수도 데살로니카로 가소 전도하였다. 바오로는 관례대로 안식일에 유대교 회당에 가서 설교하여 많은 시민을 입교시켰으나, 유대인들이 그의 전도를 반대하자 바오로 일행은 올림푸스 산중에 있는 75㎞ 떨어진 베레아 마을로 피신하였다(사도17,1-10 : 1데살 2,13-16).
바오로가 베레아 마을에서 전도할 때 데살로니카에 사는 유대인들이 와서 훼방하는 바람에 바오로는 실라와 디모테오를 베레아에 남겨 두고 홀로 아테네로 갔으나(17,10-15), 당시 정치적, 경제적으로 몰락하였지만 문화적으로는 수준이 높은 아테네에서의 바오로의 설교는 거의 성과가 없었다(사도 17,16-34).
실라와 디모테오가 아테네로 오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 교회 형편을 알아보고 그곳 교우들을 재교육하기 위하여 디모테오를 데살로니카로 보냈으며(1데살 3,1-5), 바오로는 실라를 데리고 아테네에서 남쪽으로 89㎞ 떨어진 고린토로 가서 18개월 동안 머무르면서 큰 교회를 세웠다(사도 18,1-17). 그리고 디모테오가 고린토로 와서 데살로니카 교회의 실정을 보고하자 바오로는 데살로니카로 편지를 써 보냈는데, 이것이 곧 '데살로니카 전서'이다. 이는 바오로의 편지들 중에서 첫 번째 편지일 뿐만 아니라, 신약성서를 통틀어 제일 먼저 쓰여진 작품이다.
고린토 전도 말엽에는 유대인들이 바오로를 아카이아 총독 갈리오의 법정으로 끌고 가서 고발하였다. 갈리오 총독은 당대의 유명한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의 형으로서 매우 현명한 사람이라 함부로 종교 문제에 개입하지 않았다(사도 18,12-17). 델피에서 발견된 금석문에 의하면 갈리오는 51~52년 아카이아 총독으로 재직하였고 바오로 역시 같은 때에 고린토에 체류하였으므로 바오로의 연표들 가운데서 가장 확실한 연대이다. 사도 바오로는 겐크레아 외항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 이스라엘 총독이 상주하던 가이사리아, 그리고 예루살렘 교회를 거쳐 안티오키아로 돌아갔다(사도 18,18-22).
제3차 전도 여행(53-58년경)
시리아의 안티오키아→에페소→마케도니아→그리스→
(귀환)필립비→트로아스→밀레도스→가이사리아→예루살렘-<체포>
사도 행전 18장 23절부터 21장 16절은 제3차 전도 여행기이다. 바오로는 제2차 전도 여행 때 설립한 갈라디아 지방의 교회들을 돌본 다음 아시아 지방의 수도 에페소로 가서 27개월 가까이 활약하였다(사도 19,8-10 : 20,31). 에페소에서는 전도가 잘 되었고(t1고린 16,9), 바오로는 제자 에바프라를 시켜 에페소 동쪽 500리쯤에 위치한 골로사이, 라오디게이아, 히에라폴리스에 교회를 세웠다(골로 4,13).
또 갈라디아 지방의 여러 교회에 유대주의를 부르짖는 그리스도인들이 설친다는 소식을 듣고는 '갈라디아서'를 써 보냈다(갈라갈라 1,6-10). 에페소에서는 고린토 교회로 편지를 3통 써 보냈는데,
첫째 편지(1고린 5,9. 10)는 분실되었고, 셋째 편지(눈물 편지, 2고린 2,4 : 7,8)는 편린만(2고린 10-13장) 전해 오며, 단지 둘째 편지만 고린토 전서로 전해진다. 또한 에페소의 로마군 부대 감옥에서 옥고를 치르는 동안(필립 1,13 : 2고린 1,8-10) 필립비 교회에, 그리고 골로사이 교회의 신자 필레몬에게 편지를 써 보냈다. 감옥에서 석방된 후 마케도니아로 건너가서 고린토 교회로 넷째 편지를 써 보냈는데(2고린 2,12-13 : 7,5-7 : 사도 20,1), 그것이 고린토 후서 1-9장이다.
마침내 바오로는 에페소를 떠나 마케도니아를 거쳐 고린토로 가서 석 달 가량 머무르는 동안(사도 20,3) 자신의 사상을 총정리해서 로마 교우들에게 보냈는데, 이것이 '로마서'이다. 고린토 교회에서 로마서를 집필한 다음 58년 필립비 교회로 가서 과월절을 보내고(사도 20,6), 에페소 남쪽에 자리잡은 항구 도시 밀레도스, 두로, 하이파, 가이사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다(사도20,7-21,6).
로마호송(58~63년경)
가이사리아→시돈→미라→로도스→그레데→멜리데→시라쿠사→
레기움→보디올리→로마
바오로가 상경하여 성전에서 체포되기까지의 경위는 사도 행전 21장 17-36절에 적혀 있다. 아시아 출신 해외 유대인들이 나지르 서원 제사를 바치려고 성전에 온 바오로를 알아보고 민족과 종교의 배신자로 규탄하고 그를 폭행하였다. 다행히 성전 북부에 주둔한 로마군인들이 구해 목숨을 건질 수 있었으나, 안티바드리스를 거쳐(사도 23,31) 지중해변 가이사리아 총독부 감옥으로 이송되어 미결수로 2년 동안(58~60) 갇힌 몸이 되었다(사도 23,12-24,27). 바오로는 총독의 재판이 불리하게 진행되자 로마 시민권을 내세워 황제에게 상소하였다(사도 25,1-12).
그리하여 바오로는 로마로 압송되었는데, 사도 행전 27장 1절-28장 15절에 압송에 관한 기사가 나온다. 60년 가을 (사도 27,9) 가이사리아를 떠나, 그레데 섬을 거쳐(사도 27,8-12) 항해하다가 파선하여 구사일생으로 멜리데 섬에 상륙하여 겨울 석 달 동안 그곳에서 지냈다(사도 28,11).
61년 봄 다시 배를 타고 시실리 섬을 거쳐 나폴리 만에 있는 보디올리 포구에 닿아 육로로 로마에 도착하였다. 로마에서는 경비병 한 사람의 감시를 받기는 하였지만(사도 28,16) 셋집을 얻어 자유롭게 손님을 맞아들이면서 2년 동안 지냈다(사도 28,30-31). 사도 행전의 바오로에 관한 이야기는 여기서 끝난다.
58년 봄 고린토에서 로마서를 쓸 때부터, 바오로는 예루살렘과 로마를 거쳐 스페인에 가서 전도하고 싶다는 말을 하였다(로마 15,24. 28). 글레멘스 1세 교황(90/92~101)이 95년경 고린토 교회로 써 보낸 편지(5,1-6,1)를 보면, 바오로가 스페인에 가서 전도한 후에 다시 로마로 와서 순교하였다고 한다. 64년 7월 19일 네로 황제가 로마시에 불을 지르고 나서 여론이 좋지 않자 그리스도인들을 방화범으로 몰아 4년 동안(64~68) 모질게 박해하였는데, 이 박해 때 바오로와 베드로가 순교하였을 것이다.
테르톨리아노에 따르면 베드로와 바오로는 네로 박해 때 순교하였는데, 베드로는 예수처럼 십자가형을 받았고, 바오로는 세례자 요한처럼 참수형을 당하였다고 한다. 전설에 의하면 바오로는 로마 남문 밖 교외에 있는 지하수가 세 줄기 솟아나는 트레 폰타네에서 순교하고, 그 근처 현재의 바오로 대성전 자리에 묻혔다고 한다.
[출처] 바오로의 전도여행 (사도 13-28장) |작성자 아녜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