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

2008. 12. 16. 오후 5:31:25

글자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이야기

<황 모니카 수녀님의 강의록을 정리하였습니다>

예수 성탄에 관한 이야기는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생생한 믿음을 일 깨우기 위하여 씌어졌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탄에 관한 이야기를 그리스도론적인 신앙 고백문들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말하자면 구체적인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받아들인다거나 나자렛 예수를 잘 아는 친척들이나 예수의 이웃들이 역사적 상황을 보고하는 내용으로 이해해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물론 루가 복음서가 씌어질 당시에 예수의 탄생과 가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사실들을 상세히 알고 있던 친척과 증인들이 아직 살아 있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증언이 루가의 작품 속에 많이 수용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루가가 추구하는 문제의 핵심은 하느님이 사람이 되신 신비를 깨우쳐 주려는 데 있다. 즉 나자렛 예수님이 메시아요 예언자라는 사실을 밝혀주는 데 집중되어 있다.

이 단락은 루가 복음서 전체를 이해하는 데 주요 관건이 되고 있으며, 저자의 의도가 잘 드러나고 있다. 그러니까 이 복음서의 핵심사상이 잘 드러나고 있다.
복음서 전체의 모든 사건에 앞서 이미 성령을 통한 동정녀 잉태로부터 그분은 세상 역사를 뛰어넘는 하느님이심을 선포하고자 했다.

복음서 가운데 가장 먼저 기록된 마르코 복음에는 예수의 이야기가 공생활부터 시작한다.
마르코보다 약 10년 후에 기록되어진 마태오와 루가 복음서는 예수의 어린 시절과 탄생의 이야기가 추가되어지며,
그보다 더 늦게 씌어진 요한 복음서는 아예 예수께서 창조 이전부터 계셨던 것으로 묘사한다.

이것은 역사에 실존한 인간 예수님이 초대교회에 의해 점점 신앙화 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처음에는 단순히 예수님의 행적만을 신앙하다가,
그분의 출생에 이르기까지 신앙을 드러내고 더 나아가 이미 그분은 창조 이전부터 계신 분임을 고백한다는 말이다.

예수의 탄생 및 어린 시절의 이야기는, 마태오와 루가 복음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줄거리, 심지어는 서로 모순되기까지 한 내용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사실 묘사라고 볼 수는 없다.

이 이야기들은 객관적인 사건들을 기록한 기사이기보다는 메시아, 예수의 의미를 밝힌 이야기로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내려오다가 80년경 마태오와 루가에 의해 채집되고 기록되었다.
이것은 예수님의 사생활을 화려하게 각색한 전설들을 소재로 한 것으로 사건에 대한 기록이라기보다는 예수에 대한 믿음을 서술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은 역사적 사실에 기인하고 있다.
예수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들은 사실을 반영한다.
예수님의 어머니가 마리아이고 아버지가 요셉이라는 것, 특히 예수님이 마리아의 아들이라고 불리었으며, 장인이었다는 것, 갈릴레아 나자렛에서 성장하셨고, 가난한 삶을 사셨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메시아를 기다리는 시대

예수 탄생 당시 팔레스티나의 통치자는 이두메 사람 헤로데였다.
성서에서는 다른 헤로데와 구별하기 위해서 헤로데 대왕이라고 한다.
로마는 헤로데를 유다의 왕으로 임명하고 기원전 37년 헤로데가의 정권을 통해서 유다를 통치하는 길을 선택했다.
한편 헤로데는 로마를 이용하여 엄청난 재량권을 가진 통치자가 되었다.
자치권에 대한 대가로 헤로데는 이곳 로마 변방의 군사적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예수의 탄생시기에 대한 마태오와 루가

예수의 탄생시기에 대해서는 마태오와 루가가 서로 다른 진술을 하고 있다.

1. 마태오 복음에 의하면,
예수님은 BC 37년 - 4년에 헤로데 대왕의 치하에 베들레헴에서 태어났다(2,1).
그렇다면 예수님은 늦어도 기원전 4년에 태어나셨다.

헤로데는 로마로부터 유다의 왕권을 위임받았다. 로마는 헤로데를 통해 팔레스티나를 통치하는가 하면, 헤로데는 로마를 이용하여 엄청난 재량권을 가진 통치자가 되었다. 자치권의 대한 대가로 로마 변방의 군사적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헤로데는 팔레스틴 사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성전의 주된 후원자가 되었고, 성전을 대규모를 개축한다. 뿐만 아니라 수로(水路) 건설, 도시화 작업 및 극장 건설 등을 통해 예루살렘을 명실상부한 최고의 도시로 만든다.
미개지를 개간하여 땅 없는 사람들의 정착지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그가 벌였던 거창한 성전 건축 사업 때문에 유다인들은 어느 정도 헤로데 정부의 합법성을 인정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대규모 건설사업은 무수한 노동, 대중의 희생을 전제해야 했으며, 납세로 인한 힘겨운 짐은 가중될 수밖에 없었다.
로마에는 충성을, 유다 사회와 종교의 엘리트들에게는 잘 보이기 위한 노력을 기울였지만, 서민들이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경제적 수탈과 정치적으로 억압적이었다.
헤로데의 개발정책은 마카베오 혁명에 의해 확립된 이스라엘의 자립적인 기반을 근본적으로 잠식시켰으며, 그의 잔인한 폭정은 가히 광적이어서 민중의 저항과 원성이 높았다.
헤로데의 화려한 궁전에는 많은 후궁과 군대 첩보원 등 엄청난 정권 안보 비용을 지출했다. 물론 이를 위한 재정은 여러 명목으로 국민에게서 몰수한 것이다.
그의 허영과 야욕은 이스라엘의 경제질서를 완전히 병들게 하였다. 자신에게 저항하는 자는 누구든지 투옥, 고문, 처형하였다.
이스라엘의 어린이 학살에 관한 이야기도 우연이 아니다.

이 암울한 시대에 백성은 메시아가 나타나기를 고대하였다. 메시아는 이 억압의 시대를 종식시킬 해방자이며, 하느님 나라의 정의로운 통치를 가져올 구원자이다.
민중은 어느 시대보다도 간절하게 갈망하고 있었던 메시아는 새 질서를 가져올 분으로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었다.
예수는 세례자 요한이 체포된 이후 갈릴래아로 돌아와서 하느님 나라 운동을 펼치면서 제자들을 부르시고, 제자들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그분을 따라나선다.
제자들은 언제나 예수와 함께 행동하였고, 예수님의 하느님 나라 운동에 가장 많은 것을 공유한 이들이다.
예수의 대중 활동 안에는 지지자들과 반대자들이 등장한다. 이 때 지지자들은 서민층이며, 적대자들은 주로 사회·종교적 지배층들이나 권위자들이다.
특히 적대자로 등장하는 전형적인 사람들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다.

1). 마태오 복음 저자 :
마태오 복음 저자는 유다인들의 관례나 관습이나 율법에 대한 그들의 전통을 잘 아는 유다계 그리스도인이었다.
그는 그리스말을 훌륭하게 구사하고 아람말과 히브리말도 잘 아는 문필가였다.
그는 복음의 시작과 끝을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이 제자들과 함께 사시면서 보호와 구원을 베푸시는 '임마누엘'이라는 진술로 장식했다.
하느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을 예수 안에서 성취하셨다는
관점에 따라 예수의 탄생에서부터 부활하시러 제자들을 온 세상에 파견하기까지의 전 과정을 해설했다. 예수님은 유다인들 뿐만 아니라 이방인들도 하느님 나라로 부르시는 메시아이시다.
이 하느님 나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활동 안에 이미 현존하고 세말(世末)에 숨김없이 드러난다. 이 세말도 이미 예수 안에 시작되었고 미래에 완성될 것이다. 현 시기는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가 않는가에 따라 구원이나 심판이 결정되는 때이다.
우리는 마태오 복음에서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나서 약 50년이 지난 시대의 교회 모습을 볼 수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권위에 참여하는 베드로를 중심으로 예언자들과 율사들과 현자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박해와 난관 가운데서도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는 것을 주된 사명으로 자각하고 있었다.
복음서가 씌어진 예수시대의 팔레스티나는 로마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다.
로마제국은 황제의 대리자인 총독 및 다른 분봉왕들을 통해서 각종 조세를 거두어 들였다.
한편 대지주들은 각양각색의 형태로 민중의 노동력과 잉여 생산물을 착취하였고,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엘리뜨들은 민중을 정신적·종교적으로 수탈하고 있었다.

2). 마태오 복음서를 보면 :
·구약의 2천년의 신앙의 역사를 담은 족보와 (단절될 뻔 했던 가계가
유다인들이 죄인으로 간주한 이방여인, 창녀, 윤리적으로 깨끗치 못한
이들을 통해 신앙의 첫 사람인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여 다윗의 후손임
을 밝힘 ; 이를 통해 예수의 정체를 밝힘),
·예수의 탄생과 이에 관련된 몇 가지 전승,
·예수의 지상에서의 공생활의 청사진과 같은 역할을 하는 세례자 요한
의 세례 운동과 예수의 세례 장면 및 광야에서의 유혹 이야기,
·본격적인 예수님의 구원활동의 내용에는,
- 하늘나라를 권위 있는 말씀으로 가르치시고,
- 온갖 형태의 병자들을 고쳐주시며,
- 마귀 들려 정상생활을 할 수 없는 이들을 해방시키시느라고 동분서주
하시는 모습,
- 직업상·신분상·경제적 가난 때문에 죄인 아닌 죄인 취급을 받고
살던 이들을 하늘나라의 복음 선포자로 택하시고,
- 사회적으로 쫓겨난 소외계층 사람들이나 종교적으로 죄인으로
낙인된 사람들과 친교까지 나누시면서
진정 하느님 나라, 구원이 무엇인가를 밝히심으로써, 당대 사회, 종교의 지도층들이 갖고 있는 축복과 구원의 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으심으로써, 그 동안 지도층들이 질서요, 전통이며 구원이라고 여겼던 모든 것들이 무색하게 되는 현실이었다.
따라서 귀찮은 존재가 등장했고, 그들의 존폐가 뒤흔들리며, 위상이 깨어져 가는 마당에, 도저히 보고만 있거나 그런 예수를 살려둘 수 없어 결국은 죽여야 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대로 예수 하나 죽임으로써 모든 것이 본래의 질서대로 유지될 것으로 보았던 것이 계산 착오였다.
예수는 부활하신 것이다.
그리고 당신을 믿는 이들 안에서 계속해서 구원활동을 벌이신 것이다. 마태오 신앙 고백자는 이러한 신앙고백을 저자 나름대로의 편집 의도에 따라 복음서를 구성하고 있다.

마태오는 대체로 마르코 복음서의 구조를 따르면서 예수의 어록과 자기 나름대로 수집한 특수사료를 수용했다. 그런데 그는 조직적 사고를 하는 편집자이므로 비슷한 말씀이나 사화를 주제별로 한 자리에 모아 놓았다.
그래서 다섯 차례에 걸쳐 예수의 말씀들을 모아 집성문을 엮었다.
마태오는 하늘나라에 관한 예수의 가르침을 집약하여 구약의 모세오경을 능가하는 새 율법을 제시하고자 했다.
5-7장에 '산상설교'(참된 의로움) -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강조,
10장에 '파견설교' (참된 제자상)
13장에 '비유설교' (일곱 가지 비유)
18장에 '공동체 설교' (참된 형제애)
24-25장에 '심판설교'가 그것이다.
그리고 마르코 복음 1-2장과 4-5장에 흩어져 있는 이적사화 18편과, 예수어록에서 취한 이적사화 두 편을 모아 8-9장에 이적사화 집성문을 엮었다.

3). 마태오의 그리스도론 :
마태오는 예수님을 유다인들이 기다리던 메시아로 확신하면서 그분을 예언의 성취자요 율법의 참해석자로 고백한다.
신약성서의 고백자들은 한결같이 예수님이 구약에 예언된 구원을 이룩하셨다고 말한다.
그런데 특히 마태오는 이를 예언과 성취의 도식으로 예수사건을 풀이했다.
이 도식 가운데 가장 두드러진 사례가 성취 인용문이다.
마태오는 우선 그리스도인들을 상대로 예수는 메시아라는 확신을 심고, 나아가 유다인들을 상대로 예수가 메시아임을 옹호하려고 예언과 성취 도식을 애용했다.
또 예수는 율법을 폐기하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셨다고 한다. 율법 속에 들어 있는 하느님의 뜻을 중히 여기셨다는 것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뜻이란?
마태오는 자기 나름대로 세 가지 답변을 제시한다.
①하느님은 제사나 십일조보다 자비를 바라신다.
②율법을 저 유명한 황금률로 환원(7,12에 네가 남에게 바라는 대로 해 주어라).
③율법을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환원(22,40에 하느님사랑과 이웃사랑).
마태오는 예수께서 밝혀주신 위의 율법의 참뜻을 익히고 행하는 사람을 참 그리스도인으로 보았다.
그리고 예수는 다윗의 아들이요, 그리스도, 메시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다.

4). 마태오의 교회론 :
저자는 교회 문제에 남달리 많은 관심을 쏟는다.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관계, 교직자, 교회 규범 등 당시로서는 매우 절박한 문제들을 깊이 다루었다.
하느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소수인을 제외하고는 예수는 물론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박해까지 했다. 그리스도인 절대다수는 이방민족이었다.
마태오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면서 이제 이스라엘 민족은 하느님의 백성일 수 없고 소수 유다인과 이방인으로 구성된 그리스도 교회가 하느님의 새 백성으로 보았다. 이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인 교회가 살아야 할 내용을 담은 18장은 교회규범으로 엮어, 교회에서 지킬 규범들을 제시하고 있다.
이 마태오의 교회론은 그리스도론, 아니 신론에 근거한다.
즉 그리스도께서 오로지 하느님의 뜻에 따라 말씀하고 처신하셨듯이, 교회도 마땅히 예수 그리스도의 뜻을 받들어 그분의 언행을 재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 어린이처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자,
- 보잘 것 없는 이들을 죄짓게 하지 말며, 업신여기지 말 것,
- 형제의 잘 못을 고쳐주고, 무한한 용서를 베풀 것,
- 청하면 들어주시는 하느님께 기도할 것,
- 무자비한 종의 비유를 통해 하느님처럼 자비로운 사람이 될 것.

2. 루가 복음에 의하면,
첫 장에서는 마태오와 똑 같은 사실을 전제하고 있다.
즉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대왕 치하에서 태어났고(1,5), 예수님은 그 보다 여섯 달 늦게 태어났다고 한다.
그러나 루가는 2장에 가서는 예수님의 탄생과 아우구스투스의 명령으로 시리아의 총독이었던 퀴리노에 의해 실시된 호구조사, 즉 납세자 등록과 서로 연결시키고 있다.
퀴리노 총독 재임 기간이 기원 후 6-7년이기 때문에 루가는 예수님의 탄생을 마태오보다 10년은 늦게 잡은 셈이다.

왜 그랬을까? 이는 기원전 4년과 기원 후 6년의 정치·사회·종교적 배경을 보면 이해할 수 있다.

1). 기원전 4년 탄생 설의 정치적 배경 :
4년은 30년이 넘게 통치를 해 왔던 헤로데가 죽은 해이다.
왕이 죽은 후 왕실은 그 후계권 장악을 위한 분쟁에 여념이 없었고, 여기에 예루살렘 성전을 중심으로 하는 귀족들이 가세하여 정부는 이루 말할 수 없는 혼란에 빠져들었다.
팔레스티나의 권력은 공백이 생기게 되었고, 막강한 군대 지휘권에도 혼란이 생김으로써 정부의 치안 유지 능력은 땅에 떨어졌다.
이렇게 되자 장기집권의 지배하에 짓눌렸던 백성의 폭발이 모든 영역에서 일어났다. 이러한 일은 헤로데 치하에서는 상상도 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헤로데는 전국 각처에 요새를 건설하여 백성의 저항을 원천 봉쇄하였고, 대규모의 호위군을 가지고 있었다.
헤로데가 취한 수단들은 거의 빈틈이 없어서 백성 가운데 어떤 중대한 저항이 일어날 기회를 전혀 주지 않았다. 어떠한 출구도 없었기 때문에 대중적 분노는 단지 그의 통치가 끝날 무렵에야 분출되었다.
대부분의 백성들은 잠재되어 왔던 새로운 정치에 대한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이 힘이 로마의 점령기간과 헤로데의 폭정기간에 억눌려왔기 때문에 그 동안 억눌린 억압이 폭발할 때는 더욱 커다란 힘을 발산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헤로데가 죽은 이후 이러한 폭발은 민중봉기의 형태로 강렬하게 일어났다.

이때 시리아의 로마 총독인 바루스라는 자는 제3군단이라는 대병력(1개 군단이 6,000명 정도)으로 쳐들어와 백성의 소요를 무자비하게 진압하고 돌아갔다.
이 기회를 틈타 가이시리아 로마 총독인 사비누스는 이 공백 상태를 이용하여 예루살렘에서 아우구스투스의 경제적 이익을 공공연하게 옹호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공백기간에 임시로 로마 총독은 헤로데의 재산을 몰수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자 예루살렘 주민들이 여기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였으며, 혈전을 벌인 끝에 그를 헤로데의 궁전에 감금시켰다. 이 일로 인해 성전의 일부가 불에 타버렸다.
그러자 다시 한번 전국적인 규모의 소요가 일어나자 시리아의 로마 총독인 바루스는 다시 한번 팔레스티나로 진격했다.
이 때 로마 군단은 나비태아 군대로 보강되어 있었다.
바루스는 갈릴래아를 평정하고, 반란군 지도자의 하나인 갈릴래아 사람, 유다의 가장 강력한 저항 본거지인 세포리스(나자렛 부근)를 초토화시켰으며, 사마리아를 거쳐 예루살렘으로 진격하여 소요를 일으킨 백성들을 분산시키고, 이 지역의 곳곳에서 2,000명이나 되는 유다인들을 십자가형에 처했다.
이렇게 기원전 4년은 산더미 같은 시체들을 남긴 채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으나 어느 때보다 강한 백성들의 염원이 분출되었던 시기였으며, 이후에도 이와 유사한 봉기들의 불씨로서 간직되었다.
이 모든 사건들 후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또는 헤로데의 영토를 분할하여 그의 세 아들들에게 위임하였다.

2). 기원 후 6년 탄생 설의 정치·사회·종교적 배경
이 시기 역시 또 한번 백성들의 저항이 일어난 시기다. 당대 팔레스티나 통치자인 아르켈라오를 반대하는 유다의 귀족들이 로마에 사절단을 파송해서 아르켈라오를 로마로 소환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르켈라오가 폐위되고 사마리아와 유다와 이두메를 로마 총독의 직접적인 위임통치 지역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이제까지 유다인에 의해서 간접통치를 해 오던 방식을 바꾸어 황제 직속령의 총독관구인 '유다 총독관구'로 삼아 로마가 직접 통치하게 되었다.

황제는 아르켈라오의 재산을 즉각 인수했고, 제국의 국고를 위해 조세와 관세를 요구했다.
이를 위해 시리아의 총독인 퀴리노는 6년에 유다와 사마리아와 이두메 지역에 호구조사, 즉 세금부과 업무를 시작했다.
그래서 루가복음 2,1에 보면,
"그 무렵에 로마 황제 아우구스또가 온 천하에 호구 조사령을 내렸다. 이 첫 번째 호구조사를 하던 때, 시리아에는 퀴리노라느 사람이 총독으로 있었다." 라고 언급되어 있다.
백성들은 이 호구조사에 격렬하게 반발했고, 결국 유다 전역에 걸친 납세 거부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나중엔 민족적 항거로 발전하였고, 특히 갈릴래아에서 심각하게 일어났다.
(이것은 훨씬 후대의 사건인 예수님의 심문과정에도 반영되어 있다. 즉 유다인 여자가 베드로에게 '당신은 그 갈릴레아 사람과 함께 다니던 자가 아니오?'라고 했듯이, 갈릴래아는 무정부주의자(無政府主義者)란 뜻으로 사용되었다.)
이 민중운동은 요세푸스에 의하면, 유다에서 강력한 세력을 형성했던 민중운동으로 발전했고, 66-70년의 1차 독립운동인 대 로마 무장항쟁으로 이어진다.

3. 이렇게 복음서에서 각각 다르게 추정하고 있는 예수의 출생연대는 다같이 팔레스티나의 백성이 해방의 열기가 정치적 사건으로 분출되어 나오던 시기이다.
이 두 시기는 모두가 팔레스티나 민중사의 특별한 시기로, 백성들의 분노가 민족적 저항으로 이어졌던 때이다. 동시에 백성에게는 가시화 되어 나타나는 때로서 새로운 시대를 향한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복음서가 이러한 격동기를 예수님의 탄생시기로 제시하고 있는 것은 그 당시 백성들이 예수님에 걸고 있던 기대를 반영한다.
물론 이 저항들은 성공하지 못했고 백성을 좌절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후에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죽음을 지켜본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들의 해방자로, 그들에게 새로운 하느님 나라의 정치를 펼쳐줄 메시아로 기대하게 되었다.
그래서 비록 실패로 끝나 역사 속에 묻어두었으나 민족적 해방에 대한 열기가 최고조에 다다랐던 두 시기를 예수님의 탄생시기로 믿게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백성들의 기대는 예수님이 몸소 보여주신 그분의 삶과 사건에서 유래한 신앙이었음은 분명하다.

이렇게 예수님 시대의 팔레스티나는 로마의 식민지 지배 아래 있었고, 로마제국은 황제의 대리자로서 총독이나 다른 분봉왕들(안티파스, 필립 등)을 통해서 각종 조세를 거두어 들였다.
한편 대지주들은 각양각색의 형태로 서민의 노동력이나 잉여 생산물을 착취하였고, 성전과 회당을 중심으로 하는 종교 지도자들은 백성을 정신적·종교적으로 수탈하였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 이야기는,
·로마 군대의 잔혹한 실상 앞에 짓밟히고,
·경제적으로는 수탈 당했던 민족의 현실이나, 유다사회의 상류층들에게
기본적인 생존권을 유린당했고,
·종교적으로는 중죄를 받기까지 하는 모순들이 잘 드러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과 어린 시절은 물론 이런 사회적 모순들을 스스로 체험하며 성장하셨다는 사실을 잘 드러내 주고 있으며, 이 내용 속에는 군중의 저항과 좌절이 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시아 대망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새로운 질서를 갈망하는 희망도 응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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