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순왕후는 왜 천주교를 탄압했나?

2008. 3. 3. 오후 5:21:17

글자
요즘 MBC 연속 사극 "이산" 과 관련된 내용입니다.
정순왕후는 왜 천주교를 탄압했나?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 김씨의 오빠 김귀주가 사도세자를 탄핵하여 뒤주에 가두어 죽게한 장본인입니다.
세손 시절의 정조도 제거하려 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고
 
영조 사후 정조가 즉위하여 임금이 되자, 
아버지 사도세자를 죽게한 노론 벽파 홍인한, 정후겸에게 사약을 내리고
정순왕후의 오빠 김귀주를 귀양보내어(김귀주는 나중에 감형되지만 병으로 죽습니다).
 
그후에 정순왕후는 정조를 독살했다는 학설도 있습니다.
정조가 죽자 어린 11살의 순조가 왕위에 오르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어(이 때 7번이나 수렴청정을 사양하는 쑈를 벌였답니다.)
이번에는 정순왕후가 오빠 김귀주를 귀양 보냈던 정조 측근과 남인계열을 제거하는데

정순왕후 세력의 정적인 남인계열과 시파에 천주교 신자가 많았던 탓에
수렴청정을 하던 정순왕후는 유교사상과의 다름을 핑계삼아
대대적인 천주교 탄압에 나서게 됐고 이것이 신유박해의 시작입니다.  
 

 정순왕후의 천주교 탄압
1801년 1월 10일 용상 아래에는 모든 문무백관들이 머리를 정순 조아리고 있었고, 용상에는 솜털도 가시지 않은 보송보송한 얼굴의 11살 난 순조가 앉아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긴장된 분위기를 깨는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수렴 뒤에서 터져 나왔다.

"...사람이 사람 구실을 하는 것은 인륜이 있기 때문이며, 나라가 나라꼴이 되는 것은 교화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이른바 사학(천주교)은 어버이도 없고 임금도 없어서 인륜을 무너뜨리고 교화에 배치되어 저절로 이적과 금수의 지경에 돌아가고 있는데, 저 어리석은 백성들이 점점 물들고 어그려져 마치 어린 아기가 우물에 빠져 들어가는 것 같으니, 이 어찌 측은하게 여겨 상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수령은 각기 그 지경 안에서 오가작통법을 닦아 밝히고, 그 통내에서 만일 사학을 하는 무리가 있으면 통수가 관가에 고하여 징계하여 다스리되, 마땅히 의벌을 시행하여 진멸함으로써 유종이 없도록 하라..."

목소리의 주인공은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 김씨였다. 김씨는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왕실의 최고 어른으로서 수렴청정을 시작해, 정국의 최대 쟁점으로 떠오른 사학을 엄금한다는 명령을 내리는 중이었다. 이는 마치 조선의 신분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정순왕후 김씨와 뜻을 같이 하는 노론 벽파가 반대당인 남인들과 일부 노론 시파를 탄압하기 위한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개혁군주 정조가 나라를 다스리는 동안 남인들은 하나의 세력을 이루게 되었다. 일부 남인들은 새로운 학문이자 종교였던 서학, 즉 천주교를 받아들였는데 이를 신서파라 한다. 그리고 정조 사후 정순왕후 김씨가 수렴청정에 나서면서 김씨와 손잡고 사학을 뿌리뽑는다는 명목으로 이들을 공격했던 노론 벽파 중심의 정치 세력을 공서파라 부른다. 정순왕후는 왕권과 다름없는 정치력을 행사하였다. 국왕과 똑같은 권위에 똑같은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해, 본인 스스로도 여주.여군임을 자처할 정도였다.



정권을 둘러싼 외척간의 싸움 - 김씨 가문 대 홍씨 가문

영조는 정실 왕비 두 명과 후궁 넷을 두었다. 첫 왕비는 정성왕후 달성 서씨이며, 서씨가 죽은 후 들어온 두 번째 왕후가 정순왕후 경주 김씨다.

정성왕후 서씨는 1692년 12월 7일 아버지 서종제와 어머니 우봉 이씨와의 사이에 오늘날 서울 종로구 가회동에 있던 사저에서 태어났다. 열세살이 되던 1704년 서씨는 연잉군 금(영조)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에 봉해졌는데, 그때 영조의 나이 열한살이었다. 서씨의 아버지 서석제는 조선 초기 뛰어난 학자인 서거정의 자손으로 사위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서씨는 혼인한 후 왕위에 뜻이 있던 영조와 동고동락한 사실상의 동지였다. 경종 시절 서씨의 조카 서덕수가 노론인 연잉군을 국왕으로 추대했음을 전하고 또 이 때문에 사형당하기도 했을 정도로, 서씨의 친정은 영조를 즉위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영조는 드디어 경종 4년 소론의 반발을 무릅쓰고 왕위에 오르는 데 성공하지만, 불행히도 정성왕후 서씨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영조는 결국 세 명의 후궁들에게서 2남 7녀를 낳았느데 제1후궁인 정빈 이씨가 효장세자와 두 명의 옹주를, 제2후궁인 영빈 이씨가 사도세자와 화평옹주, 화순옹주를, 제3후궁인 귀인 조씨가 화유공주를, 마지막 후궁인 숙의 문씨가 화령옹주와 화길옹주 등을 낳았다.

일곱 명의 딸 중 맏딸은 유아기 때 사망했고, 둘째 딸 화순옹주는 남편 월성위가 죽자 그 뒤를 따라 굶어 죽었다. 다섯째 딸 화협용주도 일찍 세상을 떠났고, 첫아들인 효장세자도 영조가 즉위하면서 세자로 책봉되었으나 열살에 요절하고 말았다. 그 다음 왕세자로 책봉된 왕자가 둘째 아들 사도세자였다.

서씨는 후궁들의 몸에서 난 소생들을 자기 자식처럼 애지중지했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사도세자에게는 특별한 관심을 쏟으며 돌보았다 그러기에 만일 서씨가 계속 살아 있었다면 사도세자는 아버지 영조에 의해 비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면했을 지도 모른다. 1725년 2월 15일 서씨는 예순여섯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고양읍 신도읍 용두리에 있는 서오릉의 홍릉에 홀로 안장되어 있다.

정순왕후 김씨는 1745년 11월 10일 여주 고을에서 태어나 열다섯살이 되던 1759년 6월에 영조와 혼인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이때 영조의 나이 예순여섯이었다. 임금은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처녀만 아내로 맞이할 수 있는 법이라, 열다섯 꽃다운 처녀가 노인에게 시집을 오게 된 것이다.

김씨가 영조에게 시집왔을 때 조정은 소론에 동정적인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고 있었다 이에 잔뜩 긴장한 노론측은 영조의 계비로 들어온 정순왕후 김씨를 중심으로 사도세자 폐위 작전에 들어가, 풍산 홍씨 가문과 함께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서 아사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사도세자가 죽은 후 홍봉한이 영조의 신임을 얻어 중책을 받자 이제는 정순왕후 김씨 집안에서 긴장하였다. 풍산 홍씨 집안과 경주 김씨 집안은 사도세자를 제거할 때는 같은 노론의 입장에서 함께 일을 추진했으나, 막상 이권 다툼이 발생하자 정적으로 바꿔었다.

정순왕후 김씨와 그의 동생 김귀주는 세손 정조가 즉위하면 김씨 집안이 몰락할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양자를 들여 김씨 집안의 정권을 강화하고 홍봉한을 정계에서 실각시켜려 하였다 그리하여 김귀주는 1790년 한유를 사주해 "홍봉한이 세손 정조를 제거하고 대신 은언군 인을 추대하려 한다"는 상소를 올리게 하였다 이 사건에 연루된 홍봉한은 청주로 귀양갔고, 그후 홍봉한을 회유하려던 세손이 영조에게 이를 모함이라고 아뢰어 귀양에서 풀려났던 일도 있었다



숨죽이며 때를 기다리다

정조는 즉위하자마자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고간 정후겸, 홍인한, 숙의 문씨, 문씨의 동생 문성국 등 사건의 관련자들을 문초하여 귀양 보낸 후,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을 제외하고 모두 사사시켰다 정순왕후 김씨의 동생 김귀주도 예외없이 귀양에 처해졌다. 정순왕후는 비록 대비였으나 정조가 이미 성인이었으므로 대리청정할 수도 없어 혜경궁 홍씨처럼 단식 등의 방법으로 항의할 수밖에 없었다

정조는 세손 시절부터 자신을 지켜준 홍국영을 도승지 겸 금위대장에 임명하여 개혁 정치를 전개해나갔다 그리고 당색에 물들지 않은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문신을 양성하는 규장각과 무신을 양성하는 장용영을 설치했다. 정조는 이 두 기관을 이용하여 왕권 강화를 꾀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정권에서 소외당한 영남 남인들을 자신의 정치적 기반으로 끌어들였다.

그런데 정조에게는 한 가지 고민거리가 있었다 그것은 정비인 효의왕후 김씨에게서 후사를 보지 못한 것이었다 1753년 12월 13일 서울 가회방에서 태어난 김씨는 열살 때인 1762년 세자빈으로 간택되었고, 아버지 김시묵은 명성왕후 김씨의 아버지 청풍부원군의 후손이며, 어머니는 좌찬성 홍상언의 딸이다.

영조는 현종대에 김씨 집안에서 왕통을 이어준 연유로 김씨를 간택했다고 한다. 영조는 손부 김씨를 맞아들이고 다음과 같은 글을 친히 써서 하사하기도 했다.

"오세(대) 후에 옛날을 이으니 이제야 종사가 튼튼해지는구려"

손부에 대한 영조의 기대는 자못 컸다. 그러나 김씨는 정조와 금슬은 좋았지만 몇 년이 가도 태기가 없었다. 14년이 넘도록 정조가 후사를 보지 못하자 조정과 왕실에서는 후궁을들일 것을 요구하였다, 영조의 3년상이 끝나고 부묘도 끝난 1788년 5월, 대왕대비 김씨는 후궁을 들이라는 한글교지를 내린 것이다. 이때 정무를 도맡아 처리하던 홍국영이 누이 홍씨를 왕실에 넣었으니, 바로 원빈 홍씨였다. 그러나 홍씨는 1년 만에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다음으로 들어온 후궁이 판관 윤창윤의 딸 화빈 윤씨였다. 정조는 아들을 보기 위해 화빈 윤씨의 처소를 자주 드나들었으나 역시 아무 소식도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정조는 공교롭게도 윤씨의 시중을 드는 나인에게 마음이끌렸다. 곧 창녕 성씨였다.

정조 6년(1782년) 9월 7일 드디어 성씨의 몸에서 왕자가 탄생했다 정조는 이를 기념하는 별시를 실시하기도 했는데, 이때 무과에 2천 6백명이나 합격시켰다고 한다. 그 정도로 기다리고 기다리던 왕자였다. 그리하여 성씨에게는 소용의 내명부 직첩을 내려주고 얼마 후 의빈으로 승격시켰다. 그러나 세 살 때 세자로 책봉된 문효세자는 다섯 살 때 요절하고 말았다. 아들을 잃은 성씨는 상심한 탓에 몸져 누웠고 얼마 후 세상을 떠났다. 후사가 없는 왕실의 분위기는 더욱 침울해졌고, 또다시 후사를 위해 주부 박준원의 딸 박씨를 후궁으로 맞아 수빈으로 봉했다.

이러한 상황이었으니 왕비 김씨는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었다. 시조부 영조가 친히 글까지 써서 하사하였는데 아들은커녕 딸조차 낳지 못하는 자신이 죄인처럼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날 김씨는 헛구역질을 하는 등 임신한 것 같은 생리현상들이 나타났다. 왕실에서는 경사가 났다고 하여 떠들썩하였고, 배가 점점 불러오자 조정에서는 산실청을 마련하였다. 그런데 열 달이 지나도 아기가 나오기는커녕 출산의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한 해가 지났건만 그대로였다. 아기를 낳아야겠다는 일념이 너무 과하여 상상임신을 했던 것이다.

이러한 해프닝이 벌어진 지 얼마 후 수빈 박씨가 왕자를 낳았다. 이 왕자가 정조의 뒤를 잇는 순조다. 정조는 뒤를 이을 후사를 보자 온 천하를 다 얻은 기분이었다. 이에 국정에만 전념하면 되었다. 집권 여당인 노론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영남 남인과도 손을 잡았고, 규장각을 통해 신선한 인재들도 속속 배출되었다. 그 인재들은 사대관에서 벗어나 청나라의 선진 문물을 받아들여야 부국강병할 수 있다는 사상을 가진 실학자들이었다.

이제 조정 안팎은 서서히 당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러한 개혁 정치가 채 정착되기도 전에 정조는 순조를 왕세자로, 노론 시파 김조순의 딸을 세자빈으로 책봉한 해에 그만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정조의 죽음과 함께 새로운 사상을 펼치려던 실학자들의 이상도 한풀 꺾이고 말았다.



천주교 탄압과 정권 장악

숨을 죽이고 기다리던 정순왕후 김씨에게 때가 왔다. 열한살의 어린 순조가 즉위하자 조정 대신들이 왕실이 최고 어른인 김씨에게 수렴청정을 청한 것이다. 김씨는 이 요청을 일곱 번이나 거절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에 지나지 않았다. 김씨는 마지못한 듯 허락하고 희정당에서 수렴청정의 예를 거행하였다. 이전에는 수렴청정 의식만 있었을 뿐이었는데, 이때부터 송나라 선인 태후와 정희왕후 윤씨의 고사를 토대로 절목을 갖추기까지 했다. 이 절목을 보면 임금과 똑같이 경연에 참여할 수 있으며, 청대, 그리고 진상 물건도 임금의 예와 똑같이 시행한다고 되어 있다. 수렴청정은 임금의 직접 통치와 다를 바 없었다.

최고의 권력을 가진 김씨는 자파 세력인 노론 벽파를 대거 등용하였다. 그리고 노론 벽파는 정조 재위 기간 동안 개혁의지를 함께 하며 등요된 시파, 신서파, 남인 세력들을 제거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그 첫 신호탄이 천주교 탄압이었다. 당시 남인들은 오랫동안 정권에서 소외당하면서 천주교, 즉 서학을 수용했기에 이를 이용하여 정계에서 제거하려 한 것이다.

천주교가 처음 소개된 것은 선조 집권기였으나 숙종 때 갑술환국 이후 출사의 길이 막힌 남인들이 서학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국가와 사회 조직의 개혁, 개조를 요구하며 성리학을 지배 질서로 하는 현실에 비판을 가하고 혁신을 부르짖게 되었다. 이러한 혁신 사싱에 양반 계층이 아니 다른 소외 계층도 호응하게 되어 그 세력은 점차 확대되어갔다.

초기에 새로운 학문으로 받아들여진 천주교는 점차 신앙 운동으로 바뀌게 되어, 정조 7년(1783) 중국에 사신일행으로 간 이승훈이 북경 천주교회다에서 최초의 영세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듬해 서울 남부 명례동에 최초의 천주교회가 설립되었다.

천주교는 그러나 정조 12년 효 사상과 군신 관계를 어지렵히고, 나라 전체의 기강을 무너뜨릴 수 있으므로 엄금해야 한다는 이경명의 상소를 계기로 사학으로 규정받게 되었다. 그후 조정 대신들의 입장은 천주교에 대해 우호적인 신서파와 철저하게 반대하는 공서파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정조가 천주교를 박해하지는 않고 탄력적으로 대응했기 때문에 교세는 비교적 확대될 수 있었다. 그라하여 중국인 신부 주문모가 입국하여 활동할 무렵에는 전구의 신도 수가 4천여 명을 헤아릴 정도로 성장했으며, 정조 말녀(180년)에는 1만 명에 이르게 되었다.

이처럼 교세가 나날이 확대되어가던 천주교는 정순왕후 김씨를 권력을 장악하면서 박해받기 시작했다. 1801년 1월 김씨는 오가작통법을 실시하여 천주교를 엄금, 근절하라는 강경한 명령을 내렸다. 오가작통법은 민가 다섯 집을 한통으로 편성하고, 그 중에서 통수를 뽑아 사학하는무리를 고발하도록 한 것이다. 다섯 집 중 한 집이라도 천주교를 믿으면 모두 연대 처벌하겠다는 강력한 법이었다.

정순왕후 김씨의 하교로 시작된 천주교 탄압에 벽파의 영의정 심환지와 공서파 대사간 목만중이 앞장섰다. 그리하여 천주교 신앙의 선구자인 이가환, 권철신 등이 고문받던 도중 옥사했으며, 이승훈, 정약종, 최필공, 홍교만, 홍낙만, 최창현 등과 중국 신부 주문모도 참형당했다. 뿐만 아니라 주문모에게 세례받은 정조의 이복동생인 은언군 인과 부인 송씨, 며느리 신씨등도 사사되었으며, 정약종 형제는 유배당했다.

이 사건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인해 더욱 확대되었다. 정약현의 사위인 황사영은 주문모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는 박해가 시작되자 충청도 제천군 봉양면에 배론이라는 토기를 만드는 천주교도의 마을에 숨어 지내면서 황심과 함께 이 일을 중국에 알리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보경주교에게 전달하려 한 이 백서는 중국에 도착하기 전에 발각되었고, 이 때문에 오히려 더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1년 동안 학살당한 교인 수가 300명에 달 할 정도였다. 물론 여기에는 노론 벽파를 비난하던 세력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정순와후 김씨는 이렇게 천주교도를 박해함으로써 에 조정을 노론 벽파로 채울 수 있었다.

그런데 순조가 즉위한 후 각처에서 대형 화재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순조 3녀에 평야부와 함흥부에서 큰 불이 나더니 그해 12월에는 창덕궁 선정전도 크게 불탔다. 또 그 닷새 후에는 장안의 종루 거리에서 다시 큰 불이 솟아 인심이 흉흉해 지기까지 했다. 정순왕후 김씨는 이 모든 일이 자신의 탓으로 돌아올 것 같아 미리 선수르 쳐 28일 수렴청정을 거둔다는 하교를 내렸다.

김씨는 내심 조정대신들이 그 명을 철회하고 간청하기를 원했다. 즉 조정 안팎에서 일어나는 불미스러운 일이 자신의 탓이 아니라는 것을 조정대신들에게 검증받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느덧 조정에서는 순조의 비 순원왕후 김씨의 아버지 김조순이 세력을 키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정순왕후 김씨의 바람은 김조순의 물밑작전으로 무산되고 말았다. 섭정을 거두고 난 지 1녀 후인 1805년 1월 12일 정순왕후 김씨는, 노론 벽파 중심의 조정을 세우고 예순한살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유해는 오늘날 경기도 구리시에 있는 동구릉의 원릉에 영조와 함께 합장되었다.

열다서 살의 어린 나이로 환갑이 훨씬 넘은 노인에게 시집간 김씨는 친정 집안을 위해 정계의 전면에 나서서 권력을 휘둘렀다. 영조가 살아 있을 때는 아버지 김한구의 당파와 뜻을 같이 하여 자신보다 열살이나 연상인 사도세자르 죽음으로 몰아가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으며, 순조가 즉위한 후에는 친정 집안의 당파인 노론벽파르 위해 300며에 이르는 천주교도로 학살하였다. 김씨의 전횡은 새로운 물결을 받아들이며 개혁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던 조선의 역사를 퇴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조선의 정치가 당파 중심에서 외척 중심으로 나아가는 데 발판이 되었다. 

 

 

[ 영조와 정순왕후의 결혼배경 ]

결혼하게 된 배경이라 ...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의 사망때문이겠지요.

조선왕조에서 왕비의 자리를 비워두는 경우는 거의 없었습니다.

왕비가 사망하면 간택으로 처녀 왕비를 얻는거죠.

이런 이유로, 정순왕후는 15세의 어린 나이에 66세의 영조의 계비가 된겁니다.

아래는 정순왕후의 간택에서의 일화입니다.

 

영조대왕이 본 왕비를 잃고 후비를 얻는 중에 세 처녀가 최후로 간택이 되었다.

먼저 대왕이 물었다.

"김한구의 딸 너는 어찌하여 아버지 이름을 수놓은 방석을 깔고 앉지 않느냐? 다른 처자는 저는 누구 딸입니다 하고 아버지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아서 내가 판단하기 좋게 하는데 말이다."

"저는 우리 아버지 딸입니다. 딸이 어찌 아버지를 깔고 앉겠습니까?"

"......"

대왕은 말을 못하였다. 아버지 이름이 수놓인 것은 바로 아버지가 아닌가? 부모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자는 불효라는 말이다. 왕비가 안되어도 좋다. 효녀만 되면 된다. 효녀 이름이 밖에 크게 소문나지 아니하여도 딸로서 도리만 다 하면 된다. 왕비 이전에 딸노릇하는 딸이 되겠다는 말이다. 대왕은 이것을 알고 묵묵히 있었다. 속으로는 갸륵하기도 하고 맹랑한 대답이라고 하겠지만 말이다.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이 드는고?"

한 간택에 오른 규수는

"대관령고개입니다."

다른 처자는,

"추풍령고개올시다."

라고 하는데 이 김한구 딸 김처자는,

"보릿고개라고 생각합니다."

라고 하였다. 보리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끼, 아니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인데 이 김처자가 실로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리고개라고 하니 어렵게 산 적이 있었나보다. 실제로 그 김처자는 어렵게 살았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디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욕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국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어머니(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음, 이번에 문제를 내겠는데 꽃 중에서 무슨 꽃이 제일인고?"

라고 하니 어떤 규수는 목련꽃이라고 하고 어떤 처자는 연꽃이라고 하는데 이 김처자는,

"목화꽃입니다." 라고 하였다.

목화꽃이라? 이 꽃은 화사하고 예쁜 꽃은 결코 아니므로 일반 상식으로는 맞는 답이 아니라고 하겠는데, 그 꽃이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이다. 이 점을 김처자는 말한 것이매 지금으로 말하면 실로 백성을 생각하는 실용적이고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사고를 갖고 있구나.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왕비라도 백성이 헐벗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고 있어야 한다는 점에서 대왕은 마음에 들었다.

이리하여 경주 김씨 김한구 딸 김처자는 영조대왕 말년에 계비가 되었으니 정순왕후다. 1759년(영조35년) 그의 나이 열네 살이었다. (출처 : 네이버지식iN  집필자 : emperor0112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리고개인데 이 김처자가 실로 넘기 힘든 고개가 보리고개라고 하니 어렵게 산 적이 있었나보다. 실제로 그 김처자는 어렵게 살았다. 몰락한 양반의 딸로 충청도 서산 당진 홍성 쪽에서 가난하디 가난하게 살다가 살다가 못 살아서 서울에 가면 아는 사람 연줄로 좀 벼슬이나 살까 한 아버지 뜻을 따라 가마를 빌려타고 보모랑 같이 서울에 왔는데 도중에 노비와 숙식비가 없어서 갖은 봉욕을 다 당하고 급기야는 벼슬을 살러가는 초행원님에게서 돈 좀 얻어 가죽옷도 얻어 입고 한겨울에 상경을 한 적이 얼마 전에 있었다. 그렇게 빈한한 김한국는 어찌어찌하여 벼슬을 살고 마침내 그의 딸이 이 간택에 뽑히게 된 것이다. 가난을 신물나게 겪어본 사람만이 보리고개가 가장 힘이 든 고개라고 할 것인데 바로 이 김처자가 그리 말을 한 것이다. 모름지기 나라의 어머니(국모)인 왕후가 되려면 백성이 겪는 그 고통이라는 대명사인 보리고개를 알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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