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께서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길에 계십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신다”는 이 말에 기쁨과 슬픔 두 가지가 느껴집니다. 예루살렘은 하느님께서 계신 성전이 있는 곳이지요. 보통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루살렘에 가는 것을 큰 자부심으로 느꼈습니다. 이 예루살렘에 가서 하느님의 큰 축제를 지내고, 자신의 신앙과 하느님과의 화해를 청하는 곳이니, “예루살렘으로 올라간다” 함은 기쁜 일입니다. 하지만 이 예루살렘 안에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려는 음모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여행을 지켜보는 우리들은 어느덧 예수님의 수난과 십자가를 떠올리게 됩니다. 올라감의 길뿐만 아니라, 내려감의 길도 함께 보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과 슬픔, 인간의 왕국과 하느님의 나라, 자신을 치장하는 겉멋(위선)과 삶의 본질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 속에 들어 있습니다.
세상이 어떤 것을 더 원할까? 이런 생각을 합니다. 세상은 왕국에서 한 자리 차지하는 것을 더 원할 것입니다. 잘 생긴 송아지를 잡아 성전 희생제물로 바치고, 값비싼 제물로 하느님과 가까워진 정도를 자랑하기를 더 원할 것입니다. 한걸음 물러나 반성하건대, 이런 겉멋이 세상만이 원하는 일이겠습니까? 신앙인들도 그렇고 사제들도 그렇고 예수님의 열둘도 그렇습니다. 예수님의 열둘도 예루살렘으로 올라 가시는 그 길의 의미를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라감의 길이 기쁨의 길이고 승리의 길인 줄로만 지래 짐작하고 있습니다. 땅으로 내려가 죽음을 통해야 하는 일임을 모르고 있습니다. “주님의 나라가 서기”를 바라는 열둘은 서로 주님의 나라에서 한자리 차지할 것을 마음에 두고 있습니다. 이런 마음이 불거져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사고를 칩니다. 마태오 복음 사가는 이 일이 얼마나 부끄러웠는지, 제베대오의 두 아들의 실명을 거론하지 못합니다. 주님 나라의 한 자리를 차지하려는 욕망을 은근 슬쩍 그 어머니에게 투사시킵니다. 하지만 우리는 병행을 이루고 있는 마르코 복음의 도움을 받아 제베대오의 두 아들이 “야고보”와 “요한”임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교육시키시고 임무를 맡긴 열둘조차 이 모양이니 하물며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연약하고 손상 받기 쉽겠습니까?
자기들이 무엇을 청하는지도 모르는 두 제자에게 예수께서는 자신이 마시게 될 고난의 잔을 마실 것이라고 예언하십니다. 예수님 오른편 · 왼편에 앉는 특권을 공백으로 남겨 놓으십니다. 복음을 듣고 있는 사람들에게 여백을 남겨 놓으셔서, 누구든지 예수님 오른편 · 왼편에 앉을 가능성을 열어 놓으신 것 같습니다. 예수님 오른편 · 왼편에 앉을 사람은 어떤 사람들일까 하는 생각이 바로 따라 나옵니다. 예수님 오른편 · 왼편에 앉을 사람의 판단 조건은 오늘 복음에 암묵적으로 그리고 분명하게 나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예수님을 보면서 땅으로 내려가셔야 하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암묵적인 판단조건을 찾을 수 있고, 이어서 나오는 복음 속에서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민족들의 통치자들은 왕노릇하고 높은 사람들은 내리누릅니다. 그대들 사이에서는 그럴 수 없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습니다.”
세상 속에서 신앙인으로 살아가는 모습이 오늘 제베대오의 두 아들처럼 좌충우돌하면서 살기가 쉽겠지요. 예수님을 따른다고 열심히 오름의 길을 걸었는데, 예수님께서 걸으신 길은 낮아짐의 길을 걸으셨으니… 우리의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깨닫게 될 때면 세상이 무너집니다. 하지만, 신앙인이라면 그 자리에 주저 앉을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로 고개를 다시 돌리고, 일어나서 예수님이 보여주신 길을 걷는 사람들이 신앙인일 것입니다. * 천주교 부산교구 복산성당 보좌 김정완 고스마 신부
Re:이 잔을 마실 수 있느냐 (2/23)
2005. 2. 23. 오전 9: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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