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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퇴근 후 순대국 한 투가리 어떻습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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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 나도 한때는 어엿한 직장인이었다. 출근과 퇴근을 반복하던 회사원이었다. 월급 통장이 있었던 그저 평범한 신분이 오래가진 못했지만 점심을 동료 사원들과 어울려 오늘 점심엔 무얼 먹어 볼까 근심까지 했던 사람이다. 퇴근 후엔 간단한(?) 회식이라도 없을까 기웃거리기도 하고 사람들을 충동질하기까지 했다.
내가 다닌 강남 신사동 먹자골목과 서울교대 근처엔 오만가지 식당이 있었지만 늘 먹었던 몇 가지로 한정되어 점심 때만 되면 이만저만 맘고생이 심했던 게 아니다. 술 안주도 국물을 선호하는 내 취향과는 달리 고기와 볶음, 튀김 등 기름진 것을 찾으니 먹고 나면 속이 더부룩하기 일쑤였다.
늘 먹을 것만 생각하며 어찌 세상을 살까마는 세상사 잘 먹고 잘 사는 게 남는 장사라면 지나칠까. 단언컨대 배불리 먹는 것보다 양질의 음식을 골라 먹는 시대다. 웰빙이 건강과 안전한 먹을거리, 편안하고 아늑한 잠자리에 세상 걱정 않고 사는 것이라면 이중에서 지금 내가 쉽게 터득하고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먹는 일이다.
하나를 먹어도 분위기가 맞아야 하고 한수저를 떠도 뒤끝이 깔끔해야하며 단무지 주는 한식당엔 가지 않는 게 원칙이다. 재료에 대한 이해가 되었는가를 보면 더 명확해진다. 겨울철에 자연 법칙상 나지도 않는 상추를 준다든가 오이를 내오고 호박으로 된장찌개를 끓이는 집은 이제 진절머리가 난다.
겨우내 잠자고 있어야 할 상추씨가 불쌍하고 오이를 길러내느라 온갖 추악한 오염원을 투여한 농민들마저 밉다. 여름 한철 맛나게 먹었으면 됐지 사람들은 일년 내내 호박으로만 된장찌개를 끓이니 이거 외식 한번 맘 놓고 할 수 있겠나. 조금만 생각하면 요즘 세상에 제일 맛있는 재료-무가 있는데도 응당 된장찌개는 호박으로만 끓여 내니 이놈의 상인들을 탓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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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집에서 120m만 가면 보문시장이 있습니다. 시장 가까이 있으면 여러가지로 편리하고 사시사철 해가 계절이 바뀌는 걸 알 수 있어 좋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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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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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장에 가면 이런 풍경이 있어야 마음이 놓입니다. 광장시장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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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 먹으러 가지 않으면 될 것을 이렇게 핏대를 높이는 이유가 있다. 음식점 주인들의 자성을 촉구하지 않고 눈감고 가는 것도 내 성미엔 맞지 않기 때문이다. 원칙과는 거리가 먼 밥상 차림은 결코 몸에도 이롭지 않다.
서론이 길어졌다. 이토록 음식 하나에는 세상을 보는 안목과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이는 지혜와 비닐이 아닌 손님과 가족을 가리지 않는 사랑을 바탕에 깔아야 한다. 대충대충 했다가는 도저히 양심상 할 수 없는 노릇이 음식 만들어 파는 일이지 않은가.
재료 값을 아껴서 돈을 벌 생각에만 집착하다 보니 원재료의 이력을 전혀 알지 못하고 눈짐작으로 대충 고르는 건 다반사다. 맛이 변질된 것, 봉지에 포장된 일회용을 꺼내 고춧가루와 파만 추가해 재탕해서 끓여 내기도 한다.
나아가 그들은 편리하게 맛을 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김치찌개 국물 맛을 진하게 하기 위해 가래떡 서너개 넣은 것쯤이야 문제가 아니지만 김치에 한번 들어간 화학조미료와 설탕을 다시 듬뿍 쳐 주고 말통에 들어 있는 공장에서 생산된 국물을 풀어 끓여 주고는 끝이다. 마늘, 버섯, 멸치, 양파, 생강 등 양념의 기본을 아끼고 제대로 된 된장 한번 담가 쓰지 않으므로 예전 먹었던 간장이 있을 리 없다.
모든 걸 시장에서 사다 쓰는 데 익숙하다. 그러니 애당초 손맛, 묵은 맛, 진한 맛, 걸쭉한 맛, 깔끔한 맛, 시원한 맛, 시골 맛, 고향의 맛, 엄마표 음식이 나오리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우물에서 숭늉 찾는 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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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집에서 직접 만든 옛날식 피창 순대. 신설동에서 고대 방향으로 가다보면 다리 건너에 있습니다. 피순대를 즐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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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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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순대와 여러 부위를 식지 않도록 보관했다가 한그릇 가득 썰어 담고 갖은 양념해서 끓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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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 이럼에도 퇴근 시간이 가까워오면 참새가 방앗간 앞을 쉬 지나치지 못하듯 당기는 게 있다. 날씨가 추울수록 국물 생각이 간절하고 ‘쐬주’ 한잔에 하루 힘들었던 일과를 말끔히 씻고 싶다.
시내 술집에 가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첫째, 적당한 자금이 필요하다. 둘째, 궁상 떨지 않고 같이 먹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셋째, 옷 매무새를 고치지 않아도 될 깔끔한 복장 차림이어야 한다. 넷째, 아무거나 가리지 않고 먹을 넓은 아량이 있어야 한다.
이 서너 가지가 충족되기도 쉽지 않다. 주머니가 비지 않았어도 누굴 불러내고 동료를 만들려면 두세배는 돈이 들어가고 남남 혹은 여자들끼리 수다를 떠는 것도 썩 내키지 않을 수도 있다. 처음 간 집이고 새로 개업한 집일수록 음식 맛을 보장할 수 없다. 적당한 나이를 먹었다면 시내 한복판 음식은 젊은 20~30대 위주로 식단이 마련돼 있으니 쉽사리 결정하기 쉽지 않다.
이런 불리한 환경에서 혼자서도 달랑 5천원짜리 한장 꾸겨 넣고 공사판에서 일하다가 왔던 양복을 입었던 상관없이 그대로 들어가면 크게 환영 받는 곳이 있다. 도심을 벗어나 집으로 오다 보면 출출해지매 집 밥에 물린 사람들이 즐겨 찾는 재래시장이다. 시장통이라 부르는 그곳엔 포장마차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아직은 다소 어둠침침하다. 시장 크기가 대수랴마는 용기를 내서 굽이굽이 골목길 돌아 비집고 들어 가다 보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른다. 좌판이 쫙 깔려 있고 호객 행위도 하지 않아서 좋다. 투명한 비닐로 조금 가렸을 뿐 사람 반, 차린 것 절반이다.
돼지머리, 껍데기, 귀때기, 족발, 차돌박이, 닭발, 모래주머니, 간, 순대, 허파, 곱창, 목울대, 혓바닥, 머리고기, 잡채, 국수가 놓여 있다. 주로 삶은 고기라 식어도 쫄깃하고 따뜻하면 더 맛있는데 살이 찔 염려는 붙들어 매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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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센 불에 잘 끓고 있는 순대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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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 첫 방문에 막걸리든 소주 한병 시켜 놓고 주인 아주머니와 맞짱을 떠도 더 좋아라 한다. 국물은 주문하지 않았는데도 알아서 대령이다. 술국도 좋고 오뎅 국물도 그만이다. 고기를 큼직하게 썰고 파 송송 써는 소리가 참으로 맛나게 들린다.
“아줌마, 풋고추 좀 썰어 줘요”하면 언젠가 다시 찾아도 잊지 않고 챙겨 준다. 막걸리라면 모를까 먹다만 소주는 따개를 막아 “담에 올 테니까 넣어 두세요”하면 군말 않는 편안함이 있다. 이 집 주인은 어디서 본 누이일까? 포근함에 술 한잔이 마냥 쓰지만은 않고 달달하다.
혼자 있어도 외롭지 않은 건 주인이 있고 옆집에 시끌벅적 맛있게 먹고 있음에 안도의 숨을 쉴 수 있음이다. 행여 내가 앉아 있는 곳에 손님 발길이 뜸하면 음식 맛이 조금 떨어지는가 생각해 보다가도 ‘배부르면 됐지, 뭐’하며 위안을 삼고 다음엔 바글바글 사람들이 들끓는 곳에 꼭 한번 가보리라 다짐해도 좋다.
“저기, 전은 얼마요?” “몇 점만 드려보끄라우?” “반접시만 주세요.”
고추 튀김 하나, 간 튀김 둘, 오징어와 고구마 튀김을 오복이 담아낸다. 여럿이 어울려 시장통에 자리를 잡았더라면 주거니 받거니 하다보면 추위는 물러가고 알딸딸한 취기가 몰려와 함께 놀자고 꼬드기면 흥이 절로 나니 시장판이 온통 내 차지다.
‘어매, 팥죽, 호박죽은 또 언제 먹어 본다냐?’하는 아쉬움이 남지만 꼭 오늘만 날인가. 비빔밥도 있고 순대국도 즐비하니 날씨가 더 추운 날을 잡아 시장 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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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머릿고기와 순대국은 새우젓이 좋습니다. 소화엔 새우젓.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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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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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숟가락 푹 떠서 먹고 소주 한잔 "캬~" "크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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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 며칠을 참지 못하고 순대국을 찾아 하이에나처럼 단골집에 들이닥쳤다.
“오셨소?” “예. 오랜만이지요?” “바쁘셨나 봅니다.” “확장하셨네요. 시장통이 몰라보게 달라졌어요.” “그거 드리면 되지라우? 소주도 한병?” “예.”
길음동, 홍제동, 대림동, 보문동 시장에 내가 즐겨 찾던 순대국밥집이 있다. 두번만 가면 내 식성을 알아차린다. 깍두기보다 배추김치를 찾고 매운 청양고추를 쫑쫑 썰어 내온다. 국물이 넉넉해야 하고 굳이 후추를 뿌릴 필요가 없다. 순대보다는 부위별로 한두점씩을 썰어 넣는다. 부탁하지 않아도 소주까지 내 주니 하루 지쳤던 내 상태를 죄다 꾀고 있으니 얼마나 간편하고 고마운가.
뚝배기가 끓을 때 새우젓으로 간을 맞추고 밥을 서너숟가락 말고 한 술 떠서 야금야금 먹어 본다. 소주 한잔 쭈욱 들이키면 싸한 그리움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나를 깨운다. 식기 전 후후 불며 입 천장이 벗겨져라 떠 먹고 속도를 조금 늦춰 술 먹는 타임으로 전환한다. 등짝은 화끈화끈 열이 오르고 땀이 밴다. 추위는 물러간 지 오래다.
쫄깃쫄깃하고 어쩌다가 푸석푸석하며 때론 야들야들하고 오도독 씹히니 이 한그릇에 돼지 한마리가 다 들어 있는가 보다. 들깨가 우러나 국물 한번 진하고 깻잎 몇 장이 이 한 겨울에 풋풋한 향기 전하니 절로 감탄이라.
"얼마에요?" "5천원!" "왜 이리 싸요? 얼마씩인데요?" "3천원, 2천원." "이래 가지고 남는가 모르겠네요."
실실 웃고 만다.
재래시장 살리기 별 건가. 발품 팔아 이렇게 나들이 한번 하여 푸짐한 인심에 내 몸을 한달에 서너번만 맡기면 되는 간단한 일이다. 시장엔 할머니가 쪼그리고 앉아 있다. 우리들의 누이, 한집 건너 이웃이 장사를 하고 있다.
국밥 한그릇엔 고기가 있고 채소가 쓰이니 한 곳에서 잘 팔리면 관련 산업 함께 뜨니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것 아닌가. 입가심으로 아이들과 나눠 먹을 붕어빵이나 귤 몇 개 사들고 오면 이 겨울 더 따뜻하게 나리라.
내가 지금껏 시장 근처 150m를 벗어나지 않은 건 이런 호사를 부리기에 이보다 좋은 곳이 없기 때문이다. 한 걸음이면 뭐든 살 수 있고 언제든 먹고 싶은 것 찾아 먹기에 딱이니 조금 허름하면 어떤가.
다음엔 녹두빈대떡집으로 가볼까나. 지금 서울 보문시장에도 나를 끌어내는 눈이 펄펄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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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녹두빈대떡도 비나 눈이 오는 날 먹으면 더 맛있습니다. 광장시장 시장통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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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 김규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