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곳에 가고싶다 - 슬픔의 역사는 말이 없고...남한산성

2004. 11. 30. 오후 11:49:56

글자

(배경음악 : 무엇을 먹을까 - 제4회 PBC창작생활성가제 출전곡)

<퍼온 글 - 레지오마래애 11월호>

슬픔의 역사는 말이 없고

한수산(요한크리소스토모)

 작가/세종대교수

 

 

  서울에서 전철 8호선을 타고 남한산성입구 역에서 내렸다.  거기서 9번 버스를 타니 바로 남한산성 안에 닿는다.  그렇게 가까운 곳에 남한산성은 있다.  휴일이면 등산객이 넘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잠깐 나들이 갈 수 있는 산자락들, 남한산성은 서울의 외곽에서 서울 사람들의 숨통을 띄워준다.

 

그러나 남한산성은 그 산자락마다에 서린 길고도 슬픈 역사를 말하지 않는다.  복원사업으로 잘 단장된 성곽이 산허리를 휘돌고, 보양식 먹거리를 내세운 식당들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무심하게 이 산을 찾는 사람들, 나 또한 그들과 아무것도 다르지 않았다.  이곳에서 수많은 교우들이 피 흘리며 순교했다는 성혈의 역사를 안 것은 영세를 하고도 아주 오랜 후였다.  이곳은 바로 가까운 광주, 양주, 용인, 이천 등지에서 잡혀 온 교우들이 치명, 순교한 성혈의 땅인 것이다.

 

광주시 중부면 산성리 남한산성은 사적 제57호로, 신라 문무왕 때 쌓은 옛터를 활용하여 1624년(인조2년)에 후금국의 위협과 이괄의 난을 계기로 2년에 걸쳐 축성한 산성이다.  그러나 지금 남한산성 안은 그야말로 음식점의 해방구이다.  식당들이 들어찬 드넓은 공원처럼 되어 버렸다. 건물들은 전통 한옥의 모양새를 하고 있지만, 그 꼴이 영 아니어서, 하려면 제대로 하지 하는 아쉬움이 드는 그런 곳이다.

산성 안 중앙에 있는 로터리를 돌아 내려오면 오른쪽으로 성지를 알리는 간판이 보이고, 길 안쪽으로 웅장하게 솟아오른 순교자 현양비가 있다.  지난 8월30일에 세운 것이다.  이 순교자 현양비를 봉헌하면서 순교를 주제로 한 학술 세미나와 주교님의 현양비 축성이 있었다.  두 개의 커다란 돌을 부드럽게 다듬고 앞뒤로 글을 새겼다.  거기 새겨진 순교자의 이름들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아니, 이름들이 아니다.  순교의 사료가 찾아지지 않아 이름도 적을 수 없는 무명 순교자들이다.  한덕운, 김덕심, 정은, 정 베드로, 지종혁, 정여삼, 이요한 .. 이렇게 이어지던 이름은 ‘….외(外) 300여 명 이라고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하듯 그렇게 끝맺고 있다.

 

현양비 앞, 심은 지 오래지 않아 아직 줄을 이루고 있는 잔디를 바라보며, 그래, 이제부터가 시작이구나 그런 생각을 한다. 우리 모두 힘을 모아 더 잘, 더 성스럽게 가꾸어가야 하지 않겠는가.

현양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면 기념관인 소성당이 있다.  전에 식당이었던 건물을 개조한 것이다.  비닐장판을 깐 성당이지만 안에는 십여 명의 신자들이 혹은 그룹으로 혹은 혼자서 기도와 묵상을 하고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며 안을 들어가 성체조배를 하면서, 천주교 신자가 된 것이 자랑스럽고 기뻤다.  시끄럽고 어수선한 유원지 한쪽에 이처럼 성스럽고 정갈한 영혼의 자리가 있다니.

소성당에는 성체가 현시되어 있고, 성 김성우(안토니오), 성 최경환(프란치스코)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화요일부터 토요일까지는 매일 오전 11시에 미사가 봉헌되며, 주일미사는 오후 2시에 있다.  특히 이곳 성지에서는 레지오 단체가 기도할 수 있는 성모상을 준비하고 많은 단체의 참여와 기도를 기다리고 있다고 한다.

 

소성당 뒤편에 야외 미사터로 향하는 오르막길이 있다.  드높이 서 있는 십자고상을 중심으로 제대가 있고 아름답고 고즈넉한 십자가의 길 이 미사터를 감싸고 돈다. 14처를 돌며 기도를 마치고 나오니 숲 속에 떠오르듯 성모상이 기다린다. 그 앞에서 다소곳이 앉아 교우들이 드리는 묵주기도 소리는 향기처럼 숲 속으로 퍼져나갔다.

 

성모상 뒤편에는 샘물이 푸른 이끼 낀 돌틈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누가 갖다 놓았을까. 루가복음 1장 32절의 말씀이 손바닥만한 종이에 코팅된 채 이끼 속에 세워져 있었다.

 그 아기는 위대한 분이 되어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불릴 것이다.

 기념관을 나와 동문을 향해 천천히 걸었다. 순교자들을 생각하는 이마에 가을 햇살이 따갑다.

구산에 성지가 조성되어 있는 김성우(안토니오) 성인은 1841년에 교수형을 받아 이곳에서 순교했는데 바로 그의 동생 김만집(아우구스티노)도 1842년 초에 남한산성 옥중에서 순교하였다. 더군다나 셋째 김문집(베드로)도 형과 함께 체포되어 감옥살이를 하다가 1858년경에 석방되었다가 다시 체포되어 아들, 조카와 함께 순교했다.

 

어디 그뿐인가. 1866년(병인박해)에는 정은(바오로)이 63세의 나이로 재종형제(6촌)인 정 베드로와 함께 1866년 12월 8일 남한산성에서 순교하였다. 이때 받은 형벌이 백지사였다. 이 형벌은 온몸을 결박하여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얼굴에 물을 뿌리며 창호지를 한 장씩 겹쳐 덮음으로써 숨이 막히도록 하는 방법이다. 참혹한 순교 끝에 버려진 정은의 시신은 가족들의 손으로 거두어져 지금 경기도 이천시 호법의 단내 성가정 성지에 안장되어 있다. 그러나 정 베드로의 시신은 유실되어 찾을 길 없었다.

동문 밖, 계곡 아래쪽에 있는 주차장도 형장이었다. 1801년 한덕운(토마스)은 지금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는 바로 그 자리에서 참수되었다.

 

동문에서 오른편으로 이어진 성벽 밑에는 네모난 구멍이 있다. 물이 빠지는 수구문이다. 바로 이곳으로 우리의 순교 선조들의 시신이 팽개치듯 버려져 시구문이란 이름이 붙었다. 처참한 생각이 한순간 가슴을 쥐어뜯게 만들지만 그러나 애처롭게도 이곳 안내문은 이런 순교의 역사를 알리지는 않는다. 여기에 왜 통절한 마음을 담은 십자가 하나도 세울 수 없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 생각을 하며 수구문의 크기를 직접 확인하고 싶어 더듬거리며 밑으로 내려갔다. 어두컴컴한 수구문 앞으로 다가설 때였다. 웬 아주머니 둘이 바로 그 수구문에 걸터앉아 떠들고 있지 않은가. 혼비백산까지는 아니더라도, 화들짝 놀라 위로 올라오면서 중얼거렸다. 거기가 시체 빠져나가던 구멍이요하고 소리라도 쳐버릴까. 하필이면 거기 앉아 있을 게 뭐람.

 

남한산성의 쓰라린 역사가 어디 그뿐인가. 1636년 조선은 청나라의 침입을 받는다. 인조는 강화도로 피하려 했으나 그 길마저 막혀 세자와 함께 남한산성으로 쫓겨 들었다. 왕이 도성을 떠나자 백성들은 앞 다투어 피난길을 떠나며 통곡하는 소리가 밤하늘을 울렸다.

강화도가 1월 22일 함락되고, 그곳으로 피난 갔던 빈궁과 왕자를 비롯한 사람들이 청군에게 잡혀 남한산성 밑으로 호송되어 왔다. 이 상황에서도 성 안에서는 최명길 등 주화파와 김상헌 등 주전파가 논쟁만을 거듭했다. 인조는 결국 항복하고, 조선은 청에 대하여 군신의 예를 행하며,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두 아들과 여러 대신을 인질로 심양에 보낸다는 등의 치욕적인 강화조건을 받아들인다. 인조는 지금의 잠실 선착장 부근 삼전도로 나와 청 태종에게 3번 엎드려 절하고 술을 올리는 성하지맹을 행하였다. 남한산성으로 피난한 지 46일째 되는 날이었다.

 

여기에 잊어서는 안 될 일이 있다. 1636년 1만 2천 7백 명을 동원한 훈련이 남한산성에서 있었다. 그러나 그해 12월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조선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항복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었기에, 유비무환의 대비책이 이토록 물거품이 된 것일까. 그때와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은 얼마나 다른가. 남한산성이 주는 또 다른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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