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음악 : 함께 - 개신교 CCM)
<보슬비 내리는 저녁 - 이규원/구성작가, 야곱의 우물 2월호>
드라마 줄거리가 풀리지 않아 저녁나절 양재천변을 걸었다. 사랑을 품고 남자를 찾는 여자가 남자의 배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상상하다 조금 걷기로 했던 것이다. 걷다 보면 좋은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한지에 먹물이 배이듯 조금씩 밀려드는 어둠 속을 걷노라니 촉촉이 내리는 보슬비와 더불어 그윽한 기분에 삶도 세상도 한층 아름답게 다가왔다.
우리 동네 성당 반장님이 전화를 걸어와 동행하며 두 시간여를 걸었다. 개나리 울타리를 이루는 곳에서 빗물을 받아 마시는 마른 가지를 만지며 반장님은 노란 꽃잎을 만지듯 예뻐하셨다. 그 모습이 정겨워 나도 줄지어 선 벚나무 가지를 쓰다듬으며 꽃잎을 숨기고, 아니 지금쯤 분주히 화사한 벚꽃을 잉태해 내느라 꺼칠해진 임산부를 닮은 겨울나무 가지를 끌어다 얼굴에 대보았다.
반장님은 술 취한 남편과 말다툼을 하다 바람을 쏘이러 나왔다고 했다.
2004년 1년간 남편의 총수입은 200만 원. 그 중에서 본인이 130만 원을 가져가 지난 1년간 70만 원으로 먹고 산 셈이라고 한다. 한 달에 6만 원도 안 되는 돈으로 먹고 산 격이니 팔자도 좋다며 반장님은 술 취한 남편을 향해 비꼬인 심사를 털어냈다고 한다. 그에 격분한 남편은 자신이 해놓은 밥과 찌개를 드시던 반장님을 향해 먹지 말라고 맞불을 피웠고, 반장님은 쌀은 자신이 샀다며 대꾸하자 얘기는 점점 더 치사해져 전기세와 수도세로 옮겨 붙고 드디어 솥단지를 하나 더 사서 따로 밥을 해먹자고 결말을 짓고 나오는데, 남편은 거실 유리창을 부숴버렸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오는 반장님의 등을 향해 콩을 볶아 달라는 청을 해 남편의 철없는(?) 생뚱맞음에 웃음 반 울음 반으로 속을 풀어내는데 눈가에 애틋한 연민이 고여 있었다. 눈먼 바르티메오를 바라보던 예수님의 눈길이 반장님의 남편을 향한 눈길과 오버랩되었다. 사랑 없는 연민이 어디 있으랴.
반장님의 남편은 일찍 부모님을 잃고 형수 밥을 얻어먹다 초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객지생활로 들어선 분이다. 그리하여 언뜻 단단해 보이지만 속마음은 여리기 짝이 없어 반장님은 늘 남편을 덩굴손이라고 비유하신다. 쭉쭉 혼자 크는 나무가 못 되고 기대고 오를 의지처가 필요한 존재라는 것인데, 그 나약함을 늘 술로 달랬다. 그러니 점점 가세가 기울 수 밖에 없었다.
먹고 살기 위해 반장님은 새벽부터 저녁 5시까지 일을 해왔다. 그러나 남편은 건설 노무자라 늘 일거리가 있는 것도 아닌데다 몸까지 불편해 늘 일을 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지금은 딸 셋과 아들을 다 대학에 보내지는 못했지만 건강하게 키워냈다. 자녀들의 건실함을 보면 반장님의 고난은 곧 끝이 날 듯하다. 다만 그동안 수고에 대한 대가로 몸이 앞날을 기약하기 어려운 지경이어서 안타깝다. 그래서 반장님은 양재천변의 약쑥과 질경이를 캐어 단방약을 만들어 드시고 더러 내게도 주신다. 지나다 질경이를 보면 토사곽란(급체)에는 질경이 뿌리가 좋다며 캐두기를 권하고, 온갖 배앓이와 여자들에게 좋다는 익모초를 마실 때는 장독대에 내놓아 밤이슬을 맞게 하여 아침에 먹어야 약효가 난다는 지혜를 내게 주신다.
옛날 여자들은 가족을 먹이고 지키느라 정작 자신은 꽃으로 피어날 에너지를 줄기와 뿌리에 저장하여 다른 이의 약이 되어주었던 것 같다. 사랑의 이상인 충실함과 희생이 이제는 드라마라는 유희를 통해서나 간접 체험되는 시대에 익모초 같은 반장님의 러브스토리를 보슬비를 맞으며 들었다.
나뭇가지에 잔잔히 맺히는 빗방울이 설레이게 아름다운 저녁, 한겨울에 내리는 보슬비는 얼어붙은 흙을 부드럽게 해 뿌리가 영양분을 빨아들이도록 도와주고 있을 것이다. 곧 다가올 화사할 봄날, 양재천변의 늘어선 벚나무들이 연분홍 꽃잎을 터뜨려 세상을 천국으로 만들 것이다. 이 빗속을 거닐던 나도, 스며들어 다른 생명의 양분이 되는 빗물 같은 사랑을 글 속에 투영시킬 수 있을지 봄날을 기대해 본다.
<여백이 있는 짧은 이야기>
부부의 사랑 : 2개월의 시한부 선고를 받은 암에 걸린 남편 곁에 아내가 울면서 간호한다. 내가 죽더라도 나만을 사랑해야해! 그러나 너무 예뻐 특히 눈과 코가 예뻐, 아내는 결단을 내림. 눈과 코를 베어냄, 사랑으로 하나 되 마침내 완치가 됨. 남편이 편지를 써놓고 떠나가 버림. 눈 한 쪽 없고 코가 없는 여인과 살 수 없소. -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나를 살리려고 눈과 코만이 아니고 목숨을 바쳐서 사랑하셨다. 내 몸이다 받아 먹어라. 내 피다 받아 마셔라. 그런데 우리는 주님을 어떻게 대하고 있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