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어머니의 부활신앙
[이제민 신부의 '내가 믿는 부활은?'-마지막] 2012년 03월 18일 (일) 14:55:45
재회의 희망, 어머니의 안심과 기쁨의 빛
금년 88세인 어머니가 몇 해 전 느닷없이 ‘우리가 죽었다가 부활하는 게 맞는가’ 하고 나에게 물었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라는 내 책을 읽고 부활에 대한 의심이 들었던 모양이다. “물론이지요.” 하고 내가 대답했다.
“그럼 그렇지. 누가 하는 말인데.” 하고 말하는 어머니의 얼굴에 안심과 기쁨의 빛이 역력하였다. 사후 천국에 가서 당신의 아들인 내가 오기를 기다리다 만나게 되리라는 것은 어머니에게 큰 희망이며 기쁨이다.
그러나 나는 어머니가 상상하는 사후의 재회가 우리에게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세상을 떠나면 나의 어머니는 더 이상 나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고 나도 더 이상 어머니를 보지 못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만나지 못하게 되겠지만 나는 살아 있는 동안 어머니를 계속 만나게 될 것이다. 나의 이런 어머니 만남은 나의 죽음과 함께 끝이 나게 될 것이다. 죽음과 함께 이 모든 것이 끝이 난다는 것은 재회의 희망을 가지고 살아가는 우리를 실망시키며 서운하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서운함을 달래기 위해 그런 날이 올 것이라고 믿는 것은 인생을 속이는 일이다.
그렇다면 죽음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는 희망 속에 위안을 얻으며 세상을 떠나게 될 나의 어머니의 꿈은 정녕 헛되기만 한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머니의 그 꿈은 내가 살아 있는 동안 나의 마음속에 살아 있게 될 것이다. 그러기에 나는 어머니에게 재회의 희망을 포기하라고 말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나 또한 어머니를 다시 만나게 되리라는 재회의 희망 속에 죽을 수 있다. 사람들은 내가 죽어 묻힌 무덤의 비석에서 어머니에 대한 나의 사랑을 느끼며, 천국에서 우리가 다시 만나 그동안 이루지 못한 행복을 누리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이다. 우리는 죽음과 함께 영원한 신비 속으로 사라질 뿐이다. 우리는 우리를 죽음의 신비에, 사라짐의 신비에 맡기는 삶을 새로 익혀야 한다. 이를 신학 개념으로 ‘신비로의 안내’(mystagogia)라 한다. 신비 속으로 사라짐을 서운하게 여기지 말고 받아들여라. 인생의 신비를 서운함을 지우려는 마음으로 채우지 마라. 인생이 정말 신비스러운 것은 이 사라짐 속에 생명의 역사가 지속된다는 것이다.
대화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2. 그렇다면 나의 죽음으로 어머니와 나의 이야기가 모두 끝이 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어머니는 세상을 떠날 때 나의 현재와 나의 미래를 가슴에 품고 있을 것이다.
어머니는 살아 있는 동안 이미 나의 미래를 만나고 있는 것이다. 그러기에 어머니가 죽어 이 세상에 계시지 않아도 나는 어머니와 대화할 수 있다.
이 대화 또한 나의 죽음과 함께 끝이다. 그리고 나는 나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어머니와 나의 사랑의 대화를 그들의 살아 있는 가슴에 남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미래의 후손들과 그들의 현재에서 대화를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나에게 어떻게 어떤 말을 걸어올지 궁금하지만 나는 지금 그들에게 대답하며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대화는 현재를 사는 사람들에게만 가능하다. 그렇게 예수님은 막달레나에게, 베드로에게, 토마스에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말을 건네셨다. 그분이 건넨 말은 그분이 살아 계시는 동안 그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이었다. 그 말씀을 알아듣는데 그들에게 많은 세월이 필요했다.
우리가 듣는 그분의 말씀은 그분께서 이미 2천여 년 전 그분이 살아계시는 동안 우리에게 하신 말씀이다. 예수님에게 이야기하듯 나는 어머니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이야기하듯 어머니는 나에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들의 이야기는 우주 속에 살아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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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힐데가르트는 많은 도판을 남겼는데, 그녀가 그린 우주와 인간과 신의 관계에 대한 그림(왼쪽 도판), 힐데가르트는 성직자뿐 아니라 누구나 하느님과 통교할 수 있음을 그림을 통해 드러냈다.(오른쪽 도판) | ||
태양은 여전히 따스한 빛을 내려 보내고..
나는 어머니의 믿음에서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내가 살지 못하는 부활의 삶을 어머니에게서 느낀다. 지구가 태양이 아니라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믿는 어머니에게도 태양은 여전히 따스한 빛을 내려 보낸다.
부활에 대한 어머니의 이야기가 미숙하다 하더라도 하느님은 당신 아들의 부활을 느끼게 해 주신다. 부활에 대한 어머니의 신앙을 보면서 나는 빙엔의 힐데가르트를 생각한다.
“위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나는 들었다. 너 비록 나의 보잘것없는 피조물 가운데 섞여 있지만, 그리고 많이 배운 학자들처럼 어려운 책을 술술 읽어내지 못하는 여인의 몸이지만, 그래도 너를 나의 빛으로 쓰다듬어 타오르는 해처럼 그 빛이 뜨거운 불꽃으로 네 속을 밝히고 있나니, 내가 너에게 보여주는 것을 세상에 대고 외쳐 말하여라.
머뭇거리지 말아라. 내가 내 영으로 너에게 말한 바를 그리하여 네가 이해한 바를 서슴없이 말하여라. 내 백성에게 참된 길을 보여주어야 하는데도 고집스레 입을 다물고 있는 자들, 자기 몸에 주인처럼 달라붙어 하느님의 얼굴을 피하고 진리를 부끄러워하는 자들, 그런 자들처럼 되지 말아라.
내가 너를 신비로운 영감으로 가르쳤으니, 비록 뭇 남성에게 짓밟히는 몸이지만 네가 보았고, 지금 네 안에 타오르고 있는 불에 대하여 터놓고 언제나 말하여라.”
(존 키르반 엮음, 이현주 번역, <빙겐의 힐데가르다와 함께 하는 30일 묵상>, 바오로딸 2007, 19-21)
나는 부활을 믿는 내 어머니를 보며 하느님을 찬미한다. 그리고 조용히 기도한다. “내 어머니의 언어를 통하여 하느님은 찬미 받으소서. 내 어머니의 언어를 통하여 저 또한 부활의 삶을 살게 하여 주소서.”
“주님, 어머니의 믿음에서 부활의 노래를 듣게 하여 주십시오. 어머니의 언어에서 당신의 음성을 듣게 하여 주십시오. 주님, 제 어머니의 언어에서 제가 부활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그리고 또 기도한다.
“주님, 사람들이 ‘제 말에 머물지 않고 제 말을 넘어 살아계신 예수님의 말씀을 알아들어’(마르티니) 부활의 삶을 지금 살게 하여 주십시오.”
내 어머니의 신학 수준이 그대로 우리 한국교회의 신학 수준이라면..
나는 나의 어머니가 올바로 하느님을 믿도록 전문 신학자가 되라고 요구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교회(사목자와 신학자)가 신학의 언어를 포기하고 어머니의 언어로만 신학을 해서도 안 된다.
교회는 미숙한 신학을 가진 자 안에도 현존하시는 하느님을 만날 수 있어야 하며, 이들을 대변해서 세상에 신앙의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한다.
교회는 내 어머니가 “나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말한 것에 안주하지 말고 올바른 믿음 위에 자신을 세워야 한다. 교회는 내 어머니가 교회의 믿음을 믿고 부활을 고백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교회에는 신학이 없다. 내 어머니의 신학 수준이 그대로 우리 한국교회의 신학 수준이라면 서글픈 일이다.
불행히도 우리 교회는 내 어머니가 믿듯이 그렇게 신을 믿고 있다. 내 어머니가 믿듯이 그렇게 부활을 믿고 있다. 내 어머니가 믿듯이 그렇게 마리아가 동정녀라고 믿고 있다. 자기가 사용하는 언어(개념)에 대한 성찰 없이 현대인에게 과거의 사고방식만을 전통이라는 포장지에 싸서 주입시키려하고 있다. 신학의 발전을 스스로 막고 있다.
우리 교회는 내 어머니의 신앙에서 하느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지 못하고, 내 어머니의 부활관에서 참 부활을 느끼는 감각을 가지지 못한다. 고작 단어 몇 개 더 아는 것을 학식으로 여기며 만족하는 것은 스스로 교회를 박물관의 유물로 만드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교회의 전통을 선포해야할 의무를 지닌 사목자는 더욱 달라야 한다. 신학을 공부한 사목자라면 마땅히 부활이 던지는 메시지에 대해서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신학을 공부하지 아니한 내 어머니의 언어로 이야기하면서도 대학의 언어로도 이야기할 수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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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소속으로 1980년 사제품,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구암천구교회와 반송천주교회에서 본당 사목을 하고, 지금은 마산교구 명례성지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교회-순결한 창녀', '하느님의 얼굴', '우리 아버지', '녹지 않는 소금', '교회는 누구인가?',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 '사랑이 보일 때까지',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제3의인생-수동의 영성', '말은 시들지 않는다', '만남 속으로'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