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데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용서를 하라고 가르치시는데 사도들은 “저희에게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말합니다. 마치 제자들이 주님 말씀에 동문서답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런데 왜 제자들은 용서하라는 말에 “믿음을 더해 주십시오.”라고 엉뚱해 보이는 요청을 하는지요?
물론 복음의 편집 과정에서 주제가 다른 단락으로 넘어가는 까닭에 그렇기도 하지만, 오늘 복음을 통해 우리가 사람을 용서하기 어려운 이유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되는 말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용서하기 힘든 근본 이유는 사람에 대한 ‘겨자씨’만 한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악인처럼 보이는 사람이라도 그 안에는 반드시 ‘선한 씨앗’이 있고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잠재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용서는 그 사람의 표면적인 태도와 모습을 ‘보고’ 하는 것이 아니며, 사람 안에 숨겨진 하늘 나라 겨자씨가 자라날 것을 ‘믿고’ 하는 것입니다.
용서는 이렇게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사람에 대한 근원적인 신뢰와 믿음이 용서의 시작입니다. 수없이 속고 또다시 상처를 받으면서도 사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믿고 기다리면, 사람들 내면의 선한 겨자씨를 발아시키고 자라게 하여 하늘 나라를 열어 줍니다. 자연의 씨앗이 움을 틔우고 자라는 데는 좋은 토양과 적당한 햇볕과 비와 바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사람들 내면의 하늘 나라 겨자씨가 움트고 자라려면 얼마나 많은 우리의 믿음과 사랑, 인내와 배려가 필요할까요? 용서하기 어렵다면 무엇보다 먼저 주님께 “믿음을 더하여 주십시오.”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연중 32주간 월요일(루카17,1-6)
용서해 주라하십니다
반영억라파엘신부
유혹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죄의 유혹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광야에서 단식을 마치신 후 마귀로부터 유혹을 받으셨습니다. 사람은 결코 유혹에서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그런데 유혹은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인간을 이용합니다. 그리고 유혹은 사람들이 자신을 그 도구로 사용되도록 허용함으로써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내가 동의함으로써 악의 상태에 머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유혹이 없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리석은 생각입니다. 오히려 극복할 힘과 능력, 지혜를 키워야 합니다.
때때로 용서보다는 앙갚음하고자 하는 유혹이 있습니다. ‘네가 이렇게 했으니 너도 이렇게 당해봐라.’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내가 이만큼 노력했는데,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데 이럴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습니다. 오늘은 속상하고 괘씸하게 생각한 이들에게 용서를 청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용서해 주신 그 크신 사랑에 대한 믿음을 더해주시길 기도합니다. 부족함과 허물투성이인 저를 당신의 도구로 써 주시는 주님께 성모님과 더불어 감사드리고 자주 걸려 넘어지는 연약함을 감싸주시길 희망합니다.
일곱 번뿐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시는 주님의 은총을 누릴 줄만 알았지 다른 사람을 그렇게 용서해야 한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살았습니다. 그럼에도 오늘 더럽고 추한 죄의 사슬을 벗겨주시며 면병을 당신의 거룩한 몸으로 축성하여 구원의 빵으로 나누어 주시길 원하시니 그 마음을 귀하게 여기지 못한 지난 시간에 자비를 청합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용서를 원하는 만큼 용서할 수 있는 은총을 허락하시고 저의 간구를 당신의 능력 안에서 열매 맺게 해 주십시오. 십자가 위에서 용서를 청하는 강도에게 천상낙원을 허락하시고 아버지 하느님의 자비를 간청하셨듯이 오늘 저에게도 자비와 구원을 주십시오. 성모님의 전구를 통하여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고 싶습니다. 당신의 뜻 안에 믿음으로 머물기를 소망합니다. 사람이 만물의 영장이라고 하지만 피조물인한 연약함 속에 자비가 필요합니다. 자비를 베풀어 주십시오. 구원을 주십시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