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1월 05일 금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와서 보시오.” (요한1,43-51)

제1독서<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습니다.>(1요한3,11-21)
1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12 악마에게 속한 사람으로서 자기 동생을 죽인 카인처럼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가 무슨 까닭으로 동생을 죽였습니까? 자기가 한 일은 악하고 동생이 한 일은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13 그리고 형제 여러분, 세상이 여러분을 미워하여도 놀라지 마십시오.
14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하기 때문에 우리가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는 것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15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6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
17 누구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 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18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9 이로써 우리가 진리에 속해 있음을 알게 되고, 또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을 것입니다.
20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더라도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마음보다 크시고 또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21 사랑하는 여러분, 마음이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면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확신을 가지게 됩니다.
<화답송>시편1001-2.3.4.5(◎1)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 온 세상아, 주님께 환성 올려라. 기뻐하며 주님을 섬겨라. 환호하며 그분 앞에 나아가라. ◎
○ 너희는 알아라, 주님은 하느님이시다. 그분이 우리를 지으셨으니 우리는 그분의 것, 그분의 백성, 그분 목장의 양 떼라네. ◎
○ 감사하며 그분 문으로 들어가라. 찬양하며 그분 앞뜰로 들어가라. 그분을 찬송하며 그 이름 찬미하여라. ◎
○ 주님은 참으로 좋으시고, 그분 자애는 영원하시며, 그분 진실은 대대에 이르신다. ◎
복음<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3-51)
43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에 가기로 작정하셨다. 그때에 필립보를 만나시자 그에게 “나를 따라라.” 하고 이르셨다.
44 필립보는 안드레아와 베드로의 고향인 벳사이다 출신이었다.
45 이 필립보가 나타나엘을 만나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고 예언자들도 기록한 분을 만났소. 나자렛 출신으로 요셉의 아들 예수라는 분이시오.”
46 나타나엘은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 하였다. 그러자 필립보가 나타나엘에게 “와서 보시오.” 하고 말하였다.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주님 공현 전 금요일 제1독서 (1요한3,11-21)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도 알다시피,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 (15)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며, 살인한 자는 영생이 그 안에 없으니 따라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그 안에 영생이 없다는 말이다.
여기에서 '미워하다'라는 뜻으로 번역된 '미손'(mison)의 원형 '미세오'(miseo)는 신약성경에서 40회 사용되었는데, 특히 요한1서에서는 형제 사랑과 관련하여 그 반대 개념으로 사용되었다.
요한은 요한1서 2장 9절에서 형제에 대한 미움은 어둠 속에 있는 표라고 말했으나, 본절에서는 더 극단적으로 살인하는 자라고 말한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이미 교훈하신 내용이다(마태5,21.22). 예수님께서 미움과 살인을 동일시하는 것은 살인은 미움(분노;화;성)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카인의 예와 같이 형제에 대한 미움의 극단적 행동은 살인으로까지 이어지며 그 살인의 시작은 미움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미움을 살인의 행위와 동일시하신 것이다.
'살인자'라는 뜻의 '안트로폭토노스'(anthropoktonos)는 고의적인 목적으로 계획되고 준비된 살인을 하는 자라는 말이다.
요한1서 3장 12절에서 '죽인'으로 번역된 '스파조'(sphazo)는 살인을 비롯해서 짐승의 살육을 포함한 단어지만, '안트로폭토노스'는 '사람'을 뜻하는 '안트로포스'(anthrophos)와 '죽이다'라는 뜻을 지닌 '크테이노'(ktein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오직 사람을 죽이는 자(murderer; manslayer)만을 지칭한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살인의 원조를 악마라고 말씀하셨다(요한8,44). 따라서 이 세상의 모든 살인자는 마귀에게서 났고, 그에게 속한 자들이다.
한편, 요한은 본절에서 요한1서 3장 14절의 '사랑하지 않는 자'를 '미워하는 자'로 제시함으로써, 미워함이 곧 사랑하지 않는 소극적 자세에 대한 적극적 반응임을 나타낸다. 또한 형제 사랑에는 어떤 회색 지대도 없음을 보여준다.
사실 하느님 대전에는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 곧 형제를 사랑하는 자와 미워하는 자 두가지 종류의 인간밖에 없다.
'영원한 생명' (eternal life)
형제에 대한 미움이 곧 살인임을 피력한 요한은 이러한 자를 영원한 생명과 관련시켜 설명한다. 여기서 특별히 영생을 말하는 것은,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이 실제 삶에 있어서는 형제를 무시하고 미워하면서도, 그들 스스로는 특별한 영지를 가지고 있으며
영생하는 자처럼 처신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요한은 그들의 주장이 허구임을 밝히기 위해서, 영생이 형제를 미워하는 자와는 전혀 상관이 없음을 설파했던 것이다. 실로 '영원한 생명'으로 번역된 '조엔 아이오니온'(zoen aionion)는 복음의 주제일 뿐 아니라 요한의 주요한 신학 주제에며,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요한은 예수를 믿는 자에게 영생이 있으며(요한3,15.16), 동시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임을 설파하였다(1요한5,20).
영원한 생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성도들에게 주어지는 은총으로서, 하느님과 더불어 영원히 살아가게 하는 구원(salvation)을 나타내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영생이 없다고 말함으로써, 형제 사랑이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도 부각시키는 것이다.
위의 요한의 서간을 읽으면서 우리는 참 구원과 영생에서 먼 사람들이구나!~~하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누구를 미워하고 욕하고 싸우는 것은 우리 속에 상대방에 대한 사랑과 상생 혹은 공생 공존의 의식이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너무 자조적인 생각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는 하느님의 말씀대로 경천애인,애주애인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들이고,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의 노력하는 마음을 보신다.

-주님과의 만남-
오늘 제1독서 요한1서의 주제는 ‘사랑’입니다. 무엇보다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온통 형제애에 대한 강조입니다.
사실 믿는 이들에게 형제애의 실천은 모두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오늘 요한사도의 말씀은 너무 자명하기에 주석이 필요없습니다.
사랑, 삶, 사람의 우리말이 재미있습니다. 사랑의 삶을 살기에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사랑할 때 비로소 참으로 살아있다 할 수 있습니다.
형제들을 사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갑니다. 사랑하지 않는 자는 죽음 안에 그대로 머물러 있습니다.
사랑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으면 살아있어도 살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살아있는 동안 사랑하라 주어진 시간의 선물들입니다.
하루하루가 사랑하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선물의 시간들입니다. 삶이 허무하고 무의미한 것은 사랑이 빠졌기 때문입니다.
자기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자이며 죽은 자입니다. 누군가를 미워하면 우선 내가 먼저 영적으로 죽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하는 누구나 하느님 안에 있고 하느님도 그 안에 계십니다. 그러니 사랑이 없으면 살아있다하나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살기 위해서라도 사랑해야 합니다. 그러니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는 것입니다.
사랑과 진리는 하나입니다. 진리의 표현이 사랑의 실천입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해 살아있는 진리를 체험합니다. 사랑하지 않으면 진리를 알길이 없습니다.
바로 사랑할 때 우리는 진리자체이신 주님을 체험하고 그분 앞에서 마음을 편히 가질 수 있습니다. 오늘 요한 사도는 제1독서에서 온통 사랑의 실천을, 형제애의 실천을 강조합니다.
바로 이런 형제애의 모범이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제자들입니다. 어제는 두 제자들 중 하나인 안드레아가 그의 형 시몬을 주님께 인도했고, 오늘은 필립보가 주님을 만납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나기위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중인 우리들입니다.
“나를 따라라.”
필립보는 물론 우리 모두를 부르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 사랑의 여정에 동참케 하는 주님이십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은 ‘사랑의 여정’입니다.
결국 영적성장과 성숙도 사랑의 성장이요 성숙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유일한 의미입니다. 과연 살아갈수록 사랑의 성장, 성숙인지 자문하게 됩니다.
필립보의 형제 사랑은 나타나엘을 주님께 인도함으로 환히 드러납니다. 나누고 싶은 것이 사랑의 본능입니다. 어제에 이은 똑같은 말마디가 “와서 보시오”입니다.
어제 요한의 두 제자를 직접 초대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이었고 오늘은 빌립보가 나타나엘에게 한 말입니다. 와서 보면서 주님의 사랑을 체험하고 배우라는 것입니다. 와서 보라는 주님의 초대에 응답해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백문이 불여일견입니다. 만남중의 만남이 주님과의 만남입니다. 예수님과 나타나엘의 만남은 언제 읽어도 감동적입니다.
참 사람과 참 사람의 인격적 만남이요, 참 사랑과 참 사랑의 만남입니다. 오늘날 가장 결핍된 것이 이런 사랑의 만남, 인격적 만남입니다.
하여 삶이 마냥 공허하고 허전한 것입니다.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있는 예수님은 한 눈에 나타나엘을 알아 보십니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이보다 더 좋은 찬사는 없습니다. 나타나엘처럼 사랑할수록 거짓이 없는 참 사람입니다. 죄가 없어서가 아니라 사랑할수록 마음의 순수와 진실입니다.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놀라서 묻는 나타나엘에게 주님의 말씀이 또 놀랍습니다.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 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언제나 우리를 눈여겨 보시는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나보다 더 나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평소 당신을 항구히 찾으며 진리 탐구에 전념했던 나타나엘을 눈여겨 봐뒀음이 분명합니다.
그러니 때가 무르익었을 때 주님과의 결정적 만남입니다. 결코 우연한 만남이 아닙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전광석화, 사랑의 눈이 활짝 열려 주님을 알아 본 나타나엘의 고백입니다. 이런 주님과 감격적 만남의 추억이 나타나엘에게는 평생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이 되었을 것입니다.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참 나를 알았고 주님도 알았으니 바로 이것이 구원입니다.
예수님에 관해 들어서, 읽어서가 아니라 긴 기다림 끝에 때가 되었을 때 이런 주님과의 직접적 은총의 만남입니다.
이어 나타나엘에게 주신 주님의 마지막 말씀도 우리에겐 깊은 깨달음이 됩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레서 오르내리는 것을 볼 것이다.”
아버지와 예수님과의 깊은 소통의 일치관계를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예수님을 통해 우리에게 내려 오시고 우리는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께 올라가니 예수님이야 말로 우리와 하느님 아버지 사이의 ‘천상 계단’임을 깨닫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체험하는 진리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중 주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 아버지를 만나 은총의 선물을 가득 받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요한 1서의 둘째 부분(3,11-5,12)의 주제어는 사랑이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들은 말씀은 이것입니다. 곧 우리가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3,11)
저자는 카인과 예수님을 비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여 살인을 저지른 카인과는 달리,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신 나머지 당신의 목숨마저 내놓으셨으니, 우리도 그분의 모범을 따라 서로 사랑하라고 권고한다.
히브리서 11장 4절에도 "믿음으로써, 아벨은 카인보다 나은 제물을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믿음 덕분에 아벨은 의인으로 인정 받고, 하느님께서는 그의 예물을 인정해 주셨습니다." 라고 되어 있다.
여기서 카인보다 더 나은 제물을 드린 아벨의 믿음은 무엇인가?
속죄제, 번제등 희생물을 잡아서 규칙대로 드리는 제사는 모세 시대 이후에 율법을 통해 들어왔다. 카인과 아벨의 시대는 모세 이전의 시대이다. 그때에는 제사에 대한 규례가 없었다.
다만 자연 계시와 아담과 하와를 통한 감사의 제사가 있었을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제사는 수확의 한 절기, 혹은 목축의 한 절기가 지난 후에 드려야 하고, 반드시 감사의 제사여야 옳다. 창세기 4장 4절의 '세월이 흐른 뒤에'라는 표현이 바로 그것이다.
그렇다면,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사를 거절하시고, 아벨의 제사를 기쁘게 받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곡물이든, 동물의 희생물이든, 제물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마음의 자세와 태도에 달려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세월이 흐른 뒤에 카인은 땅의 소출을 주님께 제물로 바치고, 아벨은 양 떼 가운데 맏배들과 굳기름을 바쳤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은 기꺼이 굽어 보셨으나, 카인과 그의 제물은 굽어보지 않으셨다. 그래서 카인은 몹시 화를 내며 얼굴을 떨어 뜨렸다."(창세4,4)
창세기 4장 4절을 보면, 하느님께 예물을 드리는 카인과 아벨의 태도가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벨이 드린 양 떼 가운데 '맏배들'이 무엇인가? '첫 새끼들'이라는 말이다. 성경을 보면 '맏배(첫 새끼)'는 하느님의 것으로 구별되고 있다. 즉 '맏배(첫 새끼)'는 만물이 하느님의 것임을 압축해서 나타내는 상징이다.
따라서 맏배를 드렸다는 것은, 일상 생활에서 하느님을 향한 아벨의 고백과 행위, 그리고 태도를 엿볼 수 있는 척도이다.
아벨은 양이 새끼를 낳을 때마다 생명의 탄생을 무한히 경이로워하고 감사하면서, 생명의 주권(절대권)은 하느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을 마음에 새긴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맏배를 하느님께 드리려고 미리 구별(성별)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봉헌의 정신이다.
그런데 아벨의 봉헌의 정신을 알 수 있는 표본은 맏배만이 아니다. 그는 또한 '굳기름'을 드렸다는 것이다. 히브리어로 '기름을 드렸다'는 것은 '최상품, 가장 좋은 것으로 드렸다'는 뜻이다.
이것은 아벨이 하느님을 향한 사랑과 충성과 믿음의 고백을, 자신의 일상의 삶의 가장 중심으로 여기며 살았다는 증거이다.
카인은 아우 아벨을 들에 데리고 가서 살인을 한다(창세4.8). 카인이 아우 아벨을 죽여 형제의 관계가 완전히 파괴된 것은, 그전에 먼저 카인과 하느님과의 관계가 깨어졌기 때문이다.
둘 중에 하나를 택하는 것이 자유이다. 그러나 이 자유는 인간에게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도 있다. 믿음과 정성에 있어서, 하느님 마음에 들었던 아벨의 '양떼의 맏배들과 굳기름'을 받으시는 것은 하느님의 자유이다.
하느님의 자유는 절대 진리와 절대선에서 나오는 무한히 완전한 자유요, 그르침이 없는 자유이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이러한 자유와 선택에 간섭하고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이 카인의 죄이다.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가 수직적으로 깨어진 사람은 수평적으로 부모와 형제, 형제와 형제, 자연과의 관계도 깨어진다는 진리를 창세기에서 야휘스트 저자가 우리에게 가르쳐 준다.
다시 말해서 수평적으로 깨어진 인간과의 관계, 형제들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싶으면, 먼저 수직적으로 하느님과의 관계를 올바로 회복하라는 것이다.
이런 구약의 사상을 염두에 두고, 오늘의 요한 1서 말씀으로 돌아가 생각을 해보자.
결국 카인과 예수님이 비교될 수 있는 차원도 아니지만, 카인에 의해 죽은 아벨의 모습속에서, 아버지 하느님(성부)께 충성과 순명을 하시면서 인류(우리 죄인들)를 위해 목숨을 대속의 제물로 내놓으신 예수님이 미리 예표되고 암시됨을 알아야 한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우리 존재와 생명의 근원이시요 목적이신 하느님, 우리 영혼, 육신 생명의 참 부모이신 하느님을 만유 위에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로 하느님의 모상으로 창조되고 그리스도가 피로써 구속한 인간들을(한 부모 아래 같은 형제, 자매요 같은 자녀들) 미워할 수 없다는 것이다.
형제들을 사랑하는 사람은 이미 죽음을 벗어나 생명의 나라에 들어와 있지만,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죽음 속에 그대로 머물러 있다는 것이다.(14)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 살인자는 아무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을 지니고 있지 않습니다."(15)
"그분께서 우리를 위하여 당신 목숨을 내놓으신 그 사실로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아야 합니다."(16)
"누군든지 세상 재물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자기 형제가 궁핍한 것을 보고 그에게 마음을 닫아 버리면, 하느님의 사랑이 어떻게 그 사람안에 머무를 수 있겠습니까? 자녀 여러분,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합시다." (18)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한가? 수직적인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은 수평적인 눈에 보이는 형제의 사랑으로 반드시 드러나야 한다는 것이다.(17-18)
주님 공현 전 금요일 복음 (요한 1,43-51)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7ㄷ)~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48ㄴ)
'거짓이 없다'로 번역된 '돌로스'(dolos; deceit; false)는 '미끼', '올무', '속임', '간교함', '교활함', '거짓됨' 등을 뜻한다.
이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와 사람을 더럽게 하는 요소들 가운데 하나이며(마르7,22),
사탄의 속성 가운데 하나이고(마태26,4), 하느님께서 죽어 마땅하다고 경고하신 죄의 목록 중에
포함된 것인데(로마1,29), 나타나엘의 마음 속에는 대개의 사람들에게 발견되는 이것이 없다는 게 그의 훌륭한 인품에 대한 예수님의 증거이다.
특히 '없다'로 번역된 '우크 에스틴'(ouk estin; is nothing)이라는 현재 시제는 사실은
그가 계속적으로 온전한 마음을 유지했음을 시사한다.
요한 복음 1장 48절에 보면,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I saw you under the fig tree.'
이스라엘 사람들은 누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다, 포도나무 아래에 있다, 올리브나무
아래에 있다'라고 하면, 그것은 묵상기도 중에 있다, 명상 중에 있다는 말로 알아듣는다.
우리들은 이런 성경 말씀에 대한 전지식이 없기 때문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무슨 뜻이길래
나타나엘이 놀라운 반응을 나타내면서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요한1,49) 라는 신앙 고백을 할까? 하고 의아해한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묵상기도를 하고 있을 때 그 주변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나타나엘의 놀라움과 신앙고백의 반응은 자신의 영혼의 속,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내면의 기도 내용을 알아차리시고 다 알고 계시는 분은 인간이 아닌 하느님 밖에 더 계시는가?
바로 그것을 아시는 예수님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된 메시아이시다라는 말이다.
'무화과나무'에 해당하는 '쉬케'(syke; fig tree)는 이스라엘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수종이며, 유다 민족의 번영을 상징하는 표현으로도 나타난다.
더욱이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하고 그늘이 짙어서, 그 무성한 가지 아래 앉아 율법을 배우고 기도와 묵상을 하는 것은 경건한 유다인들의 오래된 관습이었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는 지적은 그가 메시야 오심을 희망하면서 경건한 생활에 힘써 왔다는 것을 알게 한다.
특히 '있는 것을'로 번역된 '온타'(onta; when you were)는 현재 분사 시제로 그가 계속해서 무화과나무 아래 앉아 이 일을 했음을 나타내고 있다.
그가 이같이 하는 모습을 '보았다'라고 했는데, '보았다'에 해당하는 '에이돈'(eidon;
I saw)은 시각으로 감지하는 것을 나타내는데, 카나 출신 나타나엘이 경건하게 묵상에 잠긴 모습을 신적(神的) 전지(全知)로 이미 보셨던 것이다.
아마 나타나엘은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구약의 율법과 예언서에 약속된 메시야가
과연 오셨는가?
도대체 세례자 요한은 누구이며, 예수라는 분은 누구신지를 아버지 하느님께 물으면서 묵상하고 있었을거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타나엘에게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천주 성자 이신데, 같은 하느님으로서 성부 하느님 사이에 천사가 왜 필요하겠는가?
이것은 육신을 취하신 예수님의 현재 위치이신 이 세상과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은 초월적인 영적인 차원에 계시는 성부 하느님 사이의 간극을 의미하는 말이다.
동시에 성령의 도구인 천사들이 성자 하느님과 성부 하느님 사이를 오르내리는 것은
여기 나타나엘의 묵상기도를 포함해서 지상에서의 모든 기도가 반드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부 하느님께 봉헌되며, 성부 하느님으로부터의 기도의 응답도 반드시 예수님을 통하여 주어진다는 명명백백한 진리를 계시하시는 내용이다.
또한 성령의 도구인 천사가 날개가 있다면 단번에 성부 하느님께 오를텐데, 오르락 내리락 한다는 것은 우리도 완덕의 근원이시고 모범이신 예수님을 통해 아버지 하느님께 가는 길이 step by step 한 단계 한 단계씩 서서히 이루어진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우리에게 주시는 완덕과 성덕에의 진보도, 은총과 은사를 받아 하느님의 영광과 교회의 선익을 위해 봉사하는 일도 서서히 이루어지는 일이므로, 너무 욕심을 내거나 예수님을 앞서 가거나 서둘러서는 안되고, 한 단계 한 단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밟아 가야한다는 사실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2024년 01월 05일 금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금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예수님 시대에 유다인들은 기도와 묵상을 하는 장소로 무화과나무 그늘을 주로 활용하였다고 합니다.
나타나엘이 “무화과나무 아래” 있었다는 사실은, 그가 하느님 말씀과 율법을 자주 묵상하고 기도하는 사람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또한 필립보에게 “나자렛에서 무슨 좋은 것이 나올 수 있겠소?”라고 말한 점으로 미루어 볼 때, 나타나엘은 성경에 대한 지식이 매우 많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은 메시아를 위한 장소로 나자렛을 주목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자렛에서는 메시아가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는 나타나엘에게 필립보는 “와서 보시오.”라고 말합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첫 번째 제자들에게 하셨던 말씀이기도 합니다.
나타나엘은 필립보가 전한 말씀을 ‘듣고’, 들은 말씀 그대로 ‘실천’합니다.
예수님께 ‘와서’ 그분을 ‘봅니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고백합니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이 고백은 나타나엘이 가진 성경 지식으로는 결코 인정할 수 없는 고백이었습니다.
많은 신앙인은 말씀을 ‘공부’하고 ‘연구’하여야만 말씀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오늘 복음은 나타나엘을 통하여 분명한 사실 하나를 알려 줍니다.
말씀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길은 ‘들음’과 ‘실천’입니다.
‘들음’과 ‘실천’이 빠져 있는 성경 공부와 연구는 성경 지식이 많아지게 할 수는 있지만, 말씀 안에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고 체험하는 길로 우리를 반드시 안내하여 주지는 못합니다.
말씀을 통하여 살아 계신 하느님을 만나는 방법은 아주 단순합니다. 듣고, 들은 것을 그대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김재덕 베드로 신부)
주님 공현 전 토요일 복음
“복음을 인간의 감정(知慧)으로 풀면, 하느님의 뜻(智慧)에서 벗어나 거짓이 될 위험이 크다.
복음(요한1,47-51)
47 예수님께서는 나타나엘이 당신 쪽으로 오는 것을 보시고 그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보라, 저 사람이야말로 참으로 이스라엘 사람이다. 저 사람은 거짓이 없다.” 48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저를 어떻게 아십니까?” 하고 물으니, 예수님께서 그에게 “필립보가 너를 부르기 전에,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내가 보았다.” 하고 대답하셨다.
= 무화과나무 아래 있는 것이 거짓이 없는 것? - 나타나엘이 마지막 때의 계시(啓示)인(미카4,1-5) 하느님의 가르침, 하느님의 이름, 뜻, 길로 살아가고자 갈망(渴望)했고 노력했다는 말씀이신데~
(미카4,1-5) 1 마지막 때에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은 산들 가운데에서 가장 높이 세워지고 언덕들보다 높이 솟아오르리라. 백성들이 이리로 밀려들고 2 수많은 민족이 모여 오며 말하리라. “자, 주님의 산으로,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올라가자.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될 것이다.”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3 그분께서 수많은 백성 사이의 시비를 가리시고 멀리 떨어진 강한 민족들의 잘잘못을 밝혀 주시리라.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리라.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도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4 사람마다 아무런 위협도 받지 않고 제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에 앉아(쉼, 안식) 지내리라. 만군의 주님께서 친히 말씀하셨다. 5 정녕 모든 민족들은 저마다 자기 신의 이름으로 걸어가지만 우리는 주 우리 하느님의 이름으로 언제까지나 영원히 걸어가리라.
= 포도나무- 신약(新約)을, 무화과나무- 구약(舊約)을 모형(模型)한다. 2권(卷)이 아닌 한권이듯, 한 나무로 하나의 뜻을 말한다.
* 나무, 기둥, 계약, 같은 단어 “스타오로스”- 나무는 하느님의 구원의 계약(기둥)을 뜻하며 십자나무(새 계약)를 모형 한다.
그래서 그 모든 나무의 실체, 진리이신, 곧 모든 것을 품어 없애시고 참(眞)을 주시는 안식(쉼()의 주님께 오는 것을 보시고 ‘거짓이 없다’하신다.(마태12,8)
그것이 하느님의 영원한 뜻(진리), 그 하나의 길이다. 또한 나단의 예언(豫言)인 불안(不安), 불의(不義) 없는 한 곳이다.(2사무7,10)
49 그러자 나타나엘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스승님은 하느님의 아드님이십니다. 이스라엘의 임금님이십니다.” 50 예수님께서 나타나엘에게 이르셨다. “네가 무화과나무 아래에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해서 나를 믿느냐?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을 보게 될 것이다.” 51 이어서 그에게 또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천사들이 사람의 아들 위에서 오르내리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 더 큰일 - 하늘이 열리고 예수님 위로 하늘을 오르내리는 일인데, 하늘이 어떻게 열리고 주님 위를 어떻게 오르내리나?
- 아담의 범죄(犯罪)이후로 사람들이 갈 수 없도록 좁아진, 그 좁은 문으로 막혔던 하늘 문(휘장)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인 십자가(十字架)로 열리고(찢어지고), 죽었던 이들이 살아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열린 하늘로 들어가게 됨을 말씀하심이다.
(마태27,50-52) 50 예수님께서는 다시 큰 소리로 외치시고 나서 숨을 거두셨다. 51 그러자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까지 두 갈래로 찢어졌다. 땅이 흔들리고 바위들이 갈라졌다. 52 무덤이 열리고 잠자던 많은 성도들의 몸이 *되살아났다.
(로마5,10)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예수님께서 사흗날에 부활(復活)하시고 승천(昇天)하시기 전(前)~
(사도1,3) 3 그분께서는 수난을 받으신 뒤, 당신이 살아 계신 분이심을 여러 가지 증거로 사도들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러면서 사십 일 동안 그들에게 여러 번 나타나시어, 하느님 나라에 관한 말씀을 해 주셨습니다.
= 하느님나라에 관한 말씀(가르침), 곧 제자(우리)들이 해야할 하느님의 일에 관한 말씀을 다시 주신 것이다. ‘믿는 일’이다.
(요한6,28-29) 28 그들이 “하느님의 일을 하려면 저희가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묻자, 2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하느님의 일은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는 것이다.”
= 보내신 이,- 하느님께서 우리의 속죄(贖罪)제물로 당신 외아들을 보내셔서 ‘십자나무에 달리게 하신 그 주님만을 믿으라.’ 하신 것이 아니다. 그 ‘십자가의 주님을 진리(眞理)를 깨닫고 믿게 해 주실 다른 보호자 성령(聖靈)’님까지를 말씀하심 이다.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하실 때~ 배고플 때 양식(糧食)을 주셨고, 아플 때 병(病)을 고쳐 주셨고, 풍랑(風浪)이 일 때는 풍랑을 물리쳐 주심으로 보호(保護)해 주셨다.
그 모든 것들은 하늘나라에서 하느님과 주님으로 살게 될 안식(安息)의 모형들이다. 이제 남겨진 제자들은 예수님 승천 후, 믿음으로 살아야만 한다. 보이는 것 안에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달아 믿음으로 살아야 할 때’라는 것이다.(히브11,3) 사람의 길(지혜)로는 안 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계시, 지혜이신 다른 보호자 성령께서 이끌어 주셔야한다. 그러면 위협(威脅)받지 않고, 곧 거짓 가르침에 흔들리지 않고 십자나무, 그 새 계약(契約)아래에서 하느님의 영원한 용서, 자유, 안식을 살게 된다.
그래서 돌아가시기 전~
(요한14,16.26) 16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깨닫도록)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믿게) 해 주실 것이다.
(로마8,24-26) 24 사실 우리는 희망으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보이는 것을 희망하는 것은 희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희망합니까? 25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희망하기에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립니다. 26 이와 같이, 성령께서도 나약한 우리를 도와주십니다. 우리는 올바른 방식으로 기도할 줄 모르지만, 성령께서 몸소 말로 다할 수 없이 탄식하시며 우리를 대신하여 간구해 주십니다.
(1코린2,9-10)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우리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주님과 하느님의 지혜(智慧), 진리의 영이신 성령을 믿고 사는가, 땅(인간)의 길(지혜)을 믿고 사는가~
(로마8,9-10) 9 그러나 하느님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사시기만 하면, 여러분은 육 안에 있지 않고 성령 안에 있게 됩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는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10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시면, 몸은 비록 죄 때문에 죽은 것이 되지만, 의로움(믿음) 때문에 성령께서 여러분의 생명이 되어 주십니다.
= 이것이 우리가 해야할 ‘더 큰일’이다.
(요한14,12) 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버지께 가기 때문이다.
= 모든 거짓, 죄악(罪惡)들을 품고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시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빛의 나라에서 영원한 용서, 자유, 쉼, 안식, 평화, 생명을, 곧 죽음도 슬픔도, 울부짖음도, 괴로움이 없는 따듯하고 포근한 하느님의 품, 영원한 안식, 사랑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우리 모두를 위한 사도(使徒)의 기도로 마친다.~
(에페1,16-19) 16 기도 중에 여러분을 기억하며 여러분 때문에 끊임없이 감사를 드립니다. 17 그 기도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느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여러분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어 여러분이 그분을 알게 되고, 18 여러분 *마음의 눈을 밝혀 주시어, 그분의 부르심으로 여러분이 지니게 된 희망이 어떠한 것인지, 성도들 사이에서 받게 될 그분 상속의 영광이 얼마나 풍성한지 여러분이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19 또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비는 것입니다.
☨ 천주의 성령님!
아버지의 나라(진리)가, 아버지의 뜻(더 큰일)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흙인 나)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