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01월 04일 목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요한1,35-42)
제1독서<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1요한3,7-10)
7 자녀 여러분, 아무에게도 속지 마십시오. 의로운 일을 실천하는 이는 그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사람입니다.
8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9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 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하느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가 없습니다.
10 하느님의 자녀와 악마의 자녀는 이렇게 뚜렷이 드러납니다. 의로운 일을 실천하지 않는 자는 모두 하느님께 속한 사람이 아닙니다.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도 그렇습니다.
<화답송>시편98,1.7-8.9(◎3ㄷㄹ) ◎ 우리 하느님의 구원을 온 세상 땅끝마다 모두 보았네.
○ 주님께 노래하여라, 새로운 노래. 그분이 기적들을 일으키셨네. 그분의 오른손이, 거룩한 그 팔이, 승리를 가져오셨네. ◎
○ 소리쳐라, 바다와 그 안에 가득 찬 것들, 누리와 그 안에 사는 것들. 강들은 손뼉 치고, 산들도 함께 환호하여라. ◎
○ 주님 앞에서 환호하여라. 세상을 다스리러 그분이 오신다. 그분은 누리를 의롭게, 백성들을 올바르게 다스리신다. ◎
복음<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요한1,35-42)
35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서 있다가,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 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 ‘그리스도’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주님 공현 전 목요일 제1독서(1요한3,7-10)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3,8)
요한은 요한1서 3장 1-3절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입어 하느님의 자녀가 된 성도의 신분과 이러한 성도는 미래의 영광을 희망하며, 현재 주님을 본받는 순결한 삶을 살아야 함을 역설하였다.
이어서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부터 12절까지 하느님의 자녀는 불법을 행치않고 그리스도 안에 머무르는 삶을 살아야 함을 강력하게 강조함으로써, 앞 단락의 내용을 한 걸음 더 진전시킨다.
여기서 요한의 논리는 그분 안에 죄가 없기 때문에 그리스도안에 머무르는 자는 논리적으로 죄를 범치 않는다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죄를 멸하기 위해 오셨기 때문에 그분 안에 머무르는 자는 죄에 대하여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악마는 끊임없이 성도들을 유혹하여 죄를 짓도록 부추긴다. 그리고 이 유혹에 빠지는 자는 악마에게 속하게 된다.
그러나 하느님의 씨를 소유한 자는 이러한 유혹에서 승리하여 지속적으로 하느님 안에 머무를 수 있게 된다(1요한3,9).
죄에 대하여 승리하는 자는 바로 하느님께 속한 사람인 것이다.
한편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에서 죄를 지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크게 개의치 않았던 이단들을 염두에 두고 죄를 짓는 자마다 불법을 자행하는 것이라고 단정적으로 선언한다.
여기서 '불법'으로 번역된 '아노미안'(anomian)의 원형 '아노미아'(anomia)는 '율법'에 해당하는 명사 '노모스'(nomos)에 부정 불변사 '아'(a)를 접두시켜, 문자적으로 '율법이 없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성경에서는 주로 하느님께서 주신 계명에 대한 불순종이란 의미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원어적 의미로 볼 때, '불법을 자행하다'라는 말은, 곧 하느님의 율법을 파괴하는 자라는 말이다. 진리와 교리를 왜곡하여 분명히 하느님을 거스르는 범죄를 행하면서도 자신의 행위들을 합리화시키며, 자신의 잘못된 사상과 주장을 가지고 성도들을 속였던 당시 영지주의 이단들을 향하여 요한은 이러한 그들의 행위야말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삶의 기준으로 주신 율법을 파괴하는 불법임을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요한은 요한1서 3장 4절에서 "죄를 저지르는 자는 모두 불법을 자행하는 자입니다. 죄는 곧 불법입니다." 라는 사실을 명시적으로 밝히며, 죄와 불법은 별개의 것이 아닌 하나라는 사실을 분명히 밝혀주고 있다.
요한은 불변하는 진리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현재형 시제를 구사하여 '죄= 불법'은 결코 변경시킬 수 없는 진리임을 증거하고 있다.
요한이 이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당시 교회안에 신은 영적 세계에만 관심을 가지며 악한 물질로 구성된 육체의 죄에는 관여치 않는 것으로 보고, 죄와 불법의 관계를 부정하는 영지주의 이단들이 득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자신들의 죄가 하느님의 율법을 깨는 불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오류에 빠져있었다.
죄로 번역된 '하마르티아'(hamartia)는 '과녁에서 빗나가는 것'이란 문자적 의미를 가지며, 실제로는 하느님께서 전하신 법으로부터 벗어나는 모든 행위와 상태를 말하고, '불법'으로 번역된 '아노미아'(anomia)는 '법이 없는 상태' 즉 하느님의 법을 깨뜨리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요한1서 3장 4절은 하느님께로부터 달아나 인간 본성대로 살아가는 것이 곧 하느님의 법을 위반하는 삶임을 규정하는 의미를 지닌다.
요한은 이러한 죄의 개념과 특성을 요한1서 3장 5절이하에서는 그리스도와 악마를 대조하여 잘 설명하고 있다.
요한은 5-7절에서 그리스도안에 머무는 자는 죄에 탐닉하지 않게 된다는 사실에 대해 밝힌다.
그리고 8-10절에서는 악마에게 속한 자와 하느님께 속한 자를 상호 대조시켜, 전자는 죄를 범하지만 후자는 죄는 범하지 않는다고 밝힘으로써 하느님의 자녀된 성도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잘 보여준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한 사람입니다'(8)
본절은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에 대하여 묘사한 7절 하반절과 대조를 이루고 있다.
의로움을 실천하는 이는 그리스도께서 의로우신 것처럼 의로운 반면, 죄를 짓는 자는 악마에게 속하여 죄를 짓는 다는 사실을 비교하여, 성도는 의로움을 실천해야 한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부각시키는 것이다.
사실 죄를 저지르는 자는 악마에게 속해 있다는 사실을 증거하는 것이다.
'속한'에 해당하는 '에크 ~에스틴'(ek ~estin)은 현재시제로, 앞으로 속하게 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속해 있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에크'(ek)는 기원,출생을 뜻하는 전치사로서, 범죄하는 자들이 악마에게 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죄의 기원이 악마임을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악마는 바로 죄의 아비로서 태초부터 범죄한 자이다.
성도의 의로운 행위는 자신의 소속과 기원이 하느님께 있음을 보여주고, 불의한 행위로 범죄하는 자는 자신의 소속과 기원이 악마(ho diabolos;호 디아볼로스; the devil)에게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악마는 처음부터 죄를 지었기 때문이다'
이유 접속사 '호티'(hoti)로 시작하는 본문은 죄를 짓는 자가 왜 악마에게 속하였는지 그 이유를 설명하는 문장이다.
요한은 그 이유를 악마가 '처음부터' 범죄하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여기서 '처음'으로 번역된 '아르케스'(arches)의 원형 '아르케'(arche)는 어떤 일의 시점을 가리키는 것으로서, 천지의 시작을 가리키는 '태초'와 어떤 일련의 과정의 처음 시점을 가리키는 '시작', '처음'이라는 뜻으로 사용된다.
본절에서는 다른 어떤 수식어도 없이 '아르케스'(arches)를 단독으로 사용하여, 모든 것의 시작 시점인 '태초'를 가리키고 있음을 보여준다.
즉 인간이 창조되기 전에 벌써 영계에 교만하여 타락한 악마가 있었고, 이들에 의해서 범죄는 먼저 선행되었으며,이들에 의해서 인간의 타락이 이루어진 것이다.
따라서 악마는 모든 인간 범죄의 근원이 되고, 현재 죄를 범하는 모든 자들의 아비가 되어(요한8,44) 세상의 어두움을 주관하고 있다(에페2,2 ;6,12).
'그래서 악마가 한 일을 없애 버리시려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나타나셨던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본절에서 '일을'로 번역된 '에르가'(erga)의 원형 '에르곤'(ergon)은 '행위', '행실', '역사'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복수형으로 사용되어 악마가 여러 측면에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범죄를 일삼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러한 악마의 일들을 하나로 요약하면, 사람들로 하여금 하느님의 뜻에 대항하여 범죄하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런 악을 없애 버리시려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없애 버리시려고'로 번역된 '뤼세'(lyse)의 원형 '뤼오'(lyo)는 보통 '풀다', '놓아주다' 의 의미로 사용되지만, '파괴하다', '헐어 버리다', '폐하다' 라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서는 가정법 부정 과거 능동태로 사용되었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시어 악마의 일을 파괴하시되, 매우 적극적으로 완전하게 파괴하심을 보여준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저지르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씨가 그 사람안에 있기 때문입니다' (3,9ㄱ)
여기서 '~에게서'에 해당하는 전치사 '에크'(ek)는 기원의 의미를 나타낸다. 또한 '태어난'에 해당하는'게겐네메노스'(gegennemenos)의 원형 '겐나오'(gennao)는 출생을 의미하는 동사이며,본문에서는 완료분사로 쓰였다.
따라서 본문은 하느님을 기원으로 하여 출생한 자를 지칭하며, 인간의 육체적 출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으로 거듭난(새로난) 것을 말한다.
요한 복음 3장 3-8절, 야고보서 1장 18절,그리고 베드로 전서 1장 23절 등에도 죄인의 거듭남(새로남)에 대한 진술들이 나오는데, 이 모두에게 공통적으로 말하는 진리는 죄인의 영적 거듭남(새로남)이 자신의 의지, 소망, 힘 혹은 교육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직 위로부터 주시는 은총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이다.
즉 하느님의 주도적 권세와 능동적 역사하심으로 죄인의 거듭남(새로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 계시 진리의 일관된 주장이다.
그렇게 해서 새롭게 출생한 자는 과거 타락한 본성의 자아가 추구해 온 것들에 등을 돌리고 하느님을 따라 그의 말씀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쫓아 살아가게 된다.
'하느님의 씨'
'씨'로 번역된 '스페르마'(sperma)는 '씨앗'을 의미한다.
요한에 의하면, 하느님의 씨가 하느님께로부터 난 성도들 안에 있어 그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게 한다고 설명한다. 많은 학자들은 그 씨를 '말씀'과 '성령'이라고 주장한다.
먼저 '말씀'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베드로 전서 1장 23절과 야고보서 1장 18절의 진술에 있다. 베드로는 성도의 거듭남(새로남)에 대해서 말하면서 '썩어 없어지지 않는 씨앗' 곧 살아계시며 영원히 머물러 계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났다고 말하며, 야고보는 진리의 말씀으로 낳았다고 말한다.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일 때만이 거듭남(새로남)의 체험을 할 수 있다.
요한은 바로 생명력을 배태하고 있는 '씨'란 이미지를 거듭난 새 생명의 이미지와 연결시키는 것이다. 그리고 거듭난(새로난) 자는 결국 죄에 대하여 승리한다는 점에서 하느님의 말씀은 죄에 대한 승리와도 연결된다.
하느님의 말씀이 성도안에 머무를 때,죄를 이기고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1요한1,10; 2,5.14). 그리스도 안에 머무는 삶은 한마디로 거듭난(새로난) 자안에 머물고 있는 하느님의 말씀과 동행하는 삶이다.
둘째,'성령'이라는 주장의 근거는 요한 복음 3장 5-8절에 있다. 예수께서는 니코데모와의 대화에서 거듭남(새로남)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성도가 성령으로 거듭난다는 사실을 밝히셨다.
바오로 역시 하느님의 자녀들은 하느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고 말하였다(로마8,14).
성령께서 내주하시는 성도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 살아가게 됨으로써, 삶에서 육의 욕망을 이루지 않고, 성령의 열매들을 맺게 된다(갈라5,16-23).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세례자 요한은 다시 한번 증언합니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이 말을 듣고 그의 제자인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는 예수님을 따라갑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머물고 그분의 제자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처음으로 부르신 제자들이 갈릴래아 호수에 있던 어부들이었다는 공관 복음의 내용과 달리
오늘의 말씀은 요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께서 제자를 부르시는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께서 묻습니다. “무엇을 찾느냐?”
이 표현은 요한복음에서 처음 나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요한 복음서를 읽는 모든 이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여러분은 요한복음에서 무엇을 찾습니까?’ 다르게 해석하면 ‘여러분은 무엇을 원합니까?’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와서 보아라.” 이는 모든 이를 향한 예수님의 초대입니다.
복음서를 통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그분의 업적을 깨닫도록 초대하시는 것입니다.
이제 이 초대를 받은 모든 이는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안드레아와 다른 제자처럼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입니다.
우리말로 표현된 “묵었다”의 본뜻은 ‘머물다’입니다.
그리고 머문다는 표현은 요한 복음서에서 믿는다는 의미로도 사용됩니다.
예수님과 함께 머무는 것은 믿음에 대한 표현이고,
이것으로 두 제자가 처음으로 예수님을 믿고 따르게 되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다음에 안드레아는 형인 시몬, 곧 베드로를 찾아가 말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세례자 요한의 증언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게 된 안드레아는 다시 베드로에게 증언합니다.
요한복음의 부르심은 이렇게 증언을 통하여 이어집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복음(요한1,35-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39)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인 안드레아와 요한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은 '와서 보아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유대의 랍비들이 교훈을 할 때에 자주 사용하고, 탈무드에서도 흔히 찾아볼 수 있는 어투로서 권위있는 이가 제자를 부를 때 사용하는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는 상투적 어법 이상의 뜻이 들어 있다.
'와서 보아라'에 해당하는 '에르케스테 카이 옵세스테'(erchesthe kai opsesthe; come and see; come and you will see)에서 우리는 두 동사의 시제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선 '와서'로 번역된 '에르케스테'(erchesthe; come)는 원형 '에르코마이' (erchomai)의 현재 명령형이다. 희랍어에서 명령법은 명령이나 금지만을 나타내지 않고 요청을 나타내거나(마태,12), 명령인 동시에 허락 혹은 찬성을 나타내기도 한다.
예수님께서 안드레아와 요한에게 '에르케스테'(erchesthe)라고 하신 것은 명령인 동시에 그들의 요청에 대한 허락이기도 한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언제든지 당신을 찾는 이들을 피해서 숨지 않으시며, 당신에게로 오는 이들을 거절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지금 곧 오라'는 뜻으로 현재 명령형을 사용하신 것이다.
또한 '보아라'로 번역된 '옵세스테'(opsesthe; see)는 '호라오'(horao)의 미래형이다. 희랍어에서 미래 시제는 미래에 있어서의 계속적 동작이나 반복적 동작을 나타낸다.
그리고 '호라오'(horao)가 단순히 '보다'라는 의미뿐만 아니라 '경험하다'(experience)나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지각하다'(perceive)라는 뜻으로도 쓰인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이 대답이 가지고 있는 뜻은 대단히 중요하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그들이 당신 안에 있는 영적 생명과 위대한 권능의 비밀을 알고싶어 했음을 아시고, 그들이 예수님께 나아오기만 하면 앞으로 계속적으로 원하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즉 예수님께서는 당신께 나아오는 사람이 경험하게 될 풍성한 영적 축복을 '호라오'(horao)라는 단어에 담아서 전달하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의 허락이 떨어지자 두 사람은 즉시 그분께서 계신 곳으로 가서 그날 예수님과 함꼐 거기서 묵었다.
'그분과 함께 묵었다'에 해당하는 '카이 파르 아우토 에메이난'(kai par auto emeinan; and abode with him; and spent with him)에서, 전치사 '파라' <para; 모음 앞에서는 '파르'(par)>가 여기처럼 여격을 지배하게 되면 공간적 접근성을 나타내어 '곁에'(by), '가까이'(near), '함께'(with)라는 뜻이 된다.
여기서는 그들이 예수님께서 머무시는 집에서 충분한 소통을 하여 시간을 보냈다는 의미로 쓰였다.
당시 예수님께서 누구의 집에 머무르고 계셨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안드레아와 요한이 추구한 것은 화려한 궁궐에서의 연회와 같은 속된 것들이 아니었기에, 그분께서 계신 곳이 아무리 보잘것 없어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언제든지 예수님과 함께 머물거나(stayed) 함께 시간을 보내는(spent that day) 사람만이 제자로서의 도리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길을 발견하게 된다 (요한15,1-5; 필리4,13).
예수님에게서 물질적인 부나 화려함, 명예나 권력 같은 것들을 기대하는 사람들은 십자가 고난의 길을 추구하시는 그분과 함께 머물 수가 없다.
사도 바오로처럼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죽어야만(갈라2,20) 그분께서 어디에 계시든지 기꺼이 함께 할 수가 있는 것이다.
한편 여기에 나오는 '오후 네시쯤'은 유대 시간 계산법을 따른 것이고, 로마 시간 계산법을 따르면 오전10시를 가리킨다.
요한 복음사가는 이날 예수님을 만난 것이 자신들의 인생을 변화시킨 중요한 사건이었기에, 그 시간까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2024년 01월 04일 목요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오늘의 묵상 (사제 김재덕 베드로)
믿음은 어떻게 생길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누군가를 믿게 되었나요? 첫 만남부터 믿음이 생기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자주 만나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친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앎’이 생깁니다. 그 앎이 좋아 더 자주 만나면 좋아하게 됩니다.
좋아하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 사랑하게 되고, 마침내 그 사람을 믿게 됩니다.
우리는 대부분 이러한 과정을 거쳐 누군가를 이미 믿고 있습니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한 점이 한 가지 있습니다.
누군가를 믿을 때는 이러한 과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좀처럼 예수님께는 이러한 과정을 겪을 기회를 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그분을 자주 만나지도 않고, 그분과 함께 시간을 보내지도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려고도 않습니다.
그러면서 ‘믿음이 없다.’고 말합니다. 예수님과도 이러한 과정을 함께하십시오.
복음에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은 “와서 보아라.”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자 다음과 같이 행동합니다.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가다’(직역: 오다), ‘보다’, ‘묵다’(직역: 머무르다). 제자들은 이 세 가지 행동으로 예수님을 메시아로 고백합니다.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예수님에 대한 ‘앎’과 ‘믿음’이 생기게 된 것입니다.
‘오다’, ‘보다’, ‘머무르다’는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알게 하여 주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하여 주는 행동들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오래 하였어도 예수님께서 어떤 분이신지 잘 모르고, 믿음이 언제나 제자리인 것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제자들이 보여 주는 세 가지 행동을 예수님께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성체 안에 살아 계신 예수님께 ‘오십시오.’ 그분을 ‘바라보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시간을 가지십시오.
믿음은 다른 과정이 아닌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생기고 자라고 열매를 맺습니다.
(김재덕 베드로 신부)
2024년 1월 4일 [주님 공현 대축일 전 목요일]
세상 지식으로 예수님을 만나면, 짝인 그리스도(용서)를 못 만난다.
(요한 1,35-42)
35 이튿날 요한이 자기 제자 두 사람과 함께 *그곳에 다시 서 있다가,
= 이튿날(듀오-짝) 앞의 짝으로 그곳에 다시 섰다는 것이다.
앞절 1,29 요한은 예수님께서 자기 쪽으로 오시는 것을 보고 말하였다. “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33 물로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그분께서 나에게 일러 주셨다. ‘성령이 내려와 어떤 분 위에 머무르는 것을 네가 볼 터인데, 바로 그분이 성령으로 세례를 주시는 분이다.’
= 그 증언의 짝으로 그곳, 그 자리에 다시 서 있는 것이다.
36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것을 *눈여겨보며 말하였다. “보라,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
= ‘반복하여 말한다. 복음의 핵심이다’는 뜻이다.
37 그 두 제자는 요한이 말하는 것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갔다. 38 예수님께서 돌아서시어 그들이 따라오는 것을 보시고, “*무엇을 찾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이 “*라삐, 어디에 묵고 계십니까?”하고 말하였다. ‘라삐’는 번역하면 ‘스승님’이라는 말이다.
= 스승님께 배울 것이 있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 한테 들은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 성령과 함께 하시는~’ 그 말의 의미, 뜻을 더 알고 싶다는 것이다.
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보아라.” 하시니, 그들이 함께 가 예수님께서 묵으시는 곳을 보고 그날 그분과 함께 묵었다. 때는 오후 *네 시쯤이었다.
= 함께 묵었는데, 곧 밤을 함께 지냈는데 4시? 그것은 밤을 함께 지낸 것이 넷(4)의 의미라는 것이다. 공관복음 모두 첫 제자들을 뽑는데 ‘네(4)사람’으로 소개한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네(4)시’로 말하고 있다. 모두 넷, 그 4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땅의 숫자 4, 동서남북, 춘하추동, 곧 땅의 완성을 말한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땅의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는 것이고, ‘함께 묵었다’가 그 넷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밤, 잠은 모두 죄와 죽음을 뜻한다. 그 어둠, 죄의 존재들이 죄를 없애시는, 빛이신 분과 함께 지냈으니 그 땅의 어둠들이 하늘의 빛의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곧 빛(善)이 어둠(惡)으로 들어오신 빛의 죽음, 신의 죽음, 하늘(3)의 죽음,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4의 완성, 땅의 구원이 완성되는 것이다.
40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님을 따라간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시몬 베드로의 동생 안드레아였다. 41 그는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나, “우리는 메시아를 만났소.” 하고 말하였다. ‘메시아’는 번역하면‘그리스도’이다.
= 스승과 함께 밤을 묵고 나서, 곧 성령이신 분과 한 몸이 되고 나서, 그 스승 예수님이 ‘메시아’로, ‘그리스도’로 믿게 되었다는 것이다.
42 그가 시몬을 예수님께 *데려가자, 예수님께서 시몬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너는 요한의 아들 시몬이구나. 앞으로 너는 케파라고 불릴 것이다.” ‘케파’는 ‘베드로’라고 번역되는 말이다.
= ‘데려가다’- 예수님과 함께 묵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인하여 ‘시몬’에서 ‘베드로’가 된 것이다. 곧 진리의 성령이신 그리스도로 - 물이 없는 시몬에서 생명수가 나오는 반석(케파)이 되었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생명의 말씀(물)을 ‘갖은자, 선포할 수 있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는 누군가의 말, 그 사람의 말로 예수님을 듣고 성당에 왔다. 그러나 그 사람의 관점으로 들었던 그 예수님을 알면, 믿으면 안된다. 시간 낭비며 헛된 수고요 헛된 신앙이 된다. 성령을 받아 그분의 보호하심, 이끄심으로 어둠인 나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해 어둠으로 들어와 주신, 죽어주신 그 ‘그리스도’를 깨달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내 소원이나 들어주시는 예수님이 아닌, 하느님의 뜻인 나의 구원을 위해 죽어주신 그 ‘그리스도’를 깨달아야 한다는 것이다.
(1사무3,19) 19‘사무엘이 자라는 동안 주님께서 그와 함께 계시어, 그가 한 말은 한마디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셨다.’
= 하느님과 함께하는 말, 곧 하느님의 말씀이 땅의 것으로, 곧 사람의 욕망을 위한 말이 안 되게, 하느님의 뜻을 위한 말씀이 되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하느님의 뜻인 구원을 위한 대속, 그 진리의 가치가 소중함을 성령께서 가르치시고 깨닫고 믿게 해 주셔야, 그때 올바른 참 신앙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가끔 일부 사제들께서 ‘나는 성령은 모르지만 예수님의 사랑은 안다’. ‘사랑으로 산다’고 하시는데, 그것은 어불성설이다. (이사55,9 1코린2,5참조) 인간의 생각으로는 알 수 없는 예수님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반드시 성령과 함께 해야 한다. 성령은 갈망하고 구하면 주신다고 하셨다.(루가11,13)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면 진리, 곧 성령을 깨닫게 될 것이라 하셨다.(요한8,31~) 그래서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라고 한 것이다.(로마8,9)
(1고린 6,19-20) 19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그 성령을 여러분이 하느님에게서 받았고, 또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것이 아님을 모릅니까? 20하느님께서 값(대속)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갈라1,4) 4 그리스도께서는 하느님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우리를 지금의 이 악한 세상에서 구해 내시려고, 우리 죄 때문에 당신 자신을(속죄 제물로) 내어 주셨습니다.
= 그러니 하느님의 영광을, 곧 그분의 신성과 본성인 이타의 그 십자가의 사랑을 드러내야 한다. 그 하느님의 사랑이 빛나도록 자랑해야 하는 것이다. 죄 투성인 나, 매일 죄에 떨어지는 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당신 아드님을 속죄 제물로 내어주신 그 하느님의 사랑(용서)에 감사하며, 용서의 삶을 이웃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 하느님의 사랑(용서)으로 서로 용서하며 사는 것, 그래서 이웃도 그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용서의 삶, 구원의 삶을 살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리스도로 얻는 땅의 완성, 그분과 함께 밤에 묵는 넷(4), 구원인 것이다.
(갈라5,14) 14 사실 모든 율법은 한 계명으로 요약됩니다.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여라.”하신 계명입니다.
☨나는 나 자신의 것이 아닌 하느님의 것임을 알게, 믿게 해주신 천주의 성령님! 사랑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