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5주간 화요일]회개 (마태11,20-24)
모세는 강가에서 건져져 파라오의 딸의 아들이 되었는데, 자라서 동족을 편들다가 살인을 하고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친다. (탈출 2,1-15ㄴ)
그 무렵 1 레위 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2 그 여자가 임신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그 아기가 잘생긴 것을 보고 석 달 동안 그를 숨겨 길렀다.
3 그러나 더 숨겨 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 상자를 가져다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 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었다.
4 그리고 아기의 누이가 멀찍이 서서 아기가 어떻게 되는지 지켜보고 있었다.
5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다. 시녀들은 강가를 거닐고 있었는데, 공주가 갈대 사이에 있는 상자를 보고, 여종 하나를 보내어 그것을 가져오게 하였다.
6 그것을 열어 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기는 히브리인들의 아이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였다.
7 그러자 아기의 누이가 나서서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였다.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
8 파라오의 딸이 “그래, 가거라.” 하자, 그 처녀가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왔다.
9 파라오의 딸이 그에게 말하였다.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
10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 공주는 그 아이를 아들로 삼고,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 하면서 그 이름을 모세라 하였다.
11 모세가 자란 뒤 어느 날, 그는 자기 동포들이 있는 데로 나갔다가, 그들이 강제 노동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때 그는 이집트 사람 하나가 자기 동포 히브리 사람을 때리는 것을 보고,
12 이리저리 살펴 사람이 없는 것을 확인한 뒤에, 그 이집트인을 때려죽이고서 모래 속에 묻어 감추었다.
13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14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당신은 이집트인을 죽였듯이 나도 죽일 작정이오?” 하고 대꾸하였다. 그러자 모세는 “이 일이 정말 탄로 나고야 말았구나.” 하면서 두려워하였다.
15 파라오는 그 일을 전해 듣고 모세를 죽이려 하였다. 그래서 모세는 파라오를 피하여 도망쳐서, 미디안 땅에 자리 잡기로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지 않는 고을들을 꾸짖으시며,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11,20-24)
20 그때에 예수님께서 당신이 기적을 가장 많이 일으키신 고을들을 꾸짖기 시작하셨다.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21 “불행하여라, 너 코라진아! 불행하여라, 너 벳사이다야! 너희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티로와 시돈에서 일어났더라면, 그들은 벌써 자루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하였을 것이다.
22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티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24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제1독서 (탈출2,1-15ㄴ)
그가 이튿날 다시 나가서 보니, 히브리 사람 둘이 싸우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잘못한 사람에게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하고 말하였다. 그자는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2,13-14ㄱ)
'잘못한 사람'에 해당하는 '라샤'(rasha)는 '죄인', '악인'(창세18,23), '살인자'(민수35,31), '악인', '악을 행하는 자'(시편75,5; 잠언24,19)로도 번역된다.
이것은 단순히 판단을 잘못하여 실수를 한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사악한 행동을 한 '악인'을 일컫는 말이다.
'당신은 왜 동족을 때리시오?'
'동족'에 해당하는 '레아'(rea)는 '친구'(창세38,12; 신명13,6), '여인', '연인'(예레3,1.20; 호세3,1)으로도 번역되는 단어로서 '매우 친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말이다.
모세가 서로 싸우고 있던 두 히브리인들에게 '본토인'(레위18,26)이라는 뜻의 '에즈라'(ezra)라는 말 대신에 특별히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같은 동포, 동족간의 관계가 '친구'와 '연인'처럼 친밀한 관계이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었다.
모세는 지금까지 왕궁에서 성장해 왔기 때문에 히브리인들이 당하는 것과 같은 고통을 체험하지는 못했지만, 히브리인들에게 뜨거운 민족애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은 탈출기 2장 9절에 나오는대로, 모세의 어머니 요케벳(민수26,59; 남편은 아므람 : 1역대6,3; 23,13)이 단순히 수유만을 책임지는 것이 아니라 유아 교육까지도 맡게 되었고, 모세가 '주님 신앙'을 갖게 되고 40년에 가까운 궁중생활에서도 히브리인으로서의 민족 의식을 잃지 않았던 것은,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요케벳을 통한 히브리식 교육의 덕택이라고 본다.
히브리인들은 보통 3살 정도에서 젖을 떼었으므로(창세21,8; 1사무1,22-24 ; 2역대31,16) 탈출기 2장 10절에서 아이가 자랐다는 말은 젖을 먹지 않아도 될 만한 나이인 서너 살이 되었다는 뜻이다.
따라서 모세가 어머니의 품을 떠나 이집트의 궁전으로 들어간 때는 그의 나이가 3,4세 정도로 보는 것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3-4년을 어머니의 젖을 먹고 양육되었으니, 모세의 피속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는 것이고, 적어도 어머니의 무릎팍에서 전수된 성조들로부터 물려받은 신앙과 선민의식과 민족애는 40년간의 이집트 궁중에서의 고등 교육에서도 지워지지 않게 되는 것이다.
오히려 이집트 궁중에서 왕자 교육을 받으면서 더욱 더 자신의 민족에 대한 의식과 사랑이 확고부동하게 성장했을 것이다.
바로 그러한 시각으로 자신의 동족(동포)들을 바라보는데, 같은 혈통을 가지고 동일하게 이집트인으로부터 극심한 고통을 당하며, 주님 신앙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 이해하며 사랑하기는 커녕 서로 때리고하는 모습을 보자 모세는 그들에 대한 분노가 일어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우기라도 했소?'
여기서 '지도자'로 번역된 '사르'(sar)는 '다스리다', '주관하다'(에스텔1,22; 잠언8,16)라는 뜻을 지닌 '사라르'(sarar)에서 유래한 단어로, '우두머리', '주관자'(잠언28,2), '관리', '사람'(1열왕5,16)이라는 뜻인데, 탈출기 1장 11절에 나오는 '감독'과 동일한 단어이다.
그 히브리 사람은 자신들에게 고역을 부과하기 위해서 이집트인들이 세운 관리 제도를 기준으로 해서 모세가 자신들의 일에 관여할 수 있는 권한이 도무지 없음을 말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집트 왕자의 신분이었던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눈에 동포들의 아픔을 외면하고 자기 혼자 궁중에서 호의호식하는 민족 배반자로 비쳐졌을 수도 있다.
결국 히브리인의 이러한 반감어린 말로 인해, 같은 동족으로서 동족의 문제에 과감히 끼어든 모세의 동포애는 산산히 부서지고 말았다.
그리고 '판관'으로 번역된 '쇼페트'(shophet)는 '판가름하다', '판결하다'(민수35,24) 뿐만 아니라 '징벌하다', '심판하다'(2역대20,12)는 의미도 있는 '샤파트'(shaphat)의 분사형이다.
따라서 이것은 단순히 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재판장', '판관'(신명1,16)이란 뜻만이 아니라 상벌을 시행하는 '관원', '통치자'(시편2,10), '방백', '판관'(1사무7,16)의 뜻도 있다.
이 구절은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때와 방법이 아닌 모세 자신의 방법과 자기식의 의(義)로 모세가 스스로 자기 힘으로 동족 이스라엘을 구하고 싶다는 표현을 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것이 바로 '누가 당신을 우리의 지도자와 판관으로 세웠다는 말이요?' 의 내면적 뜻이다.

연중 제 15주간 화요일(탈출2,1-15ㄴ)
히브리서 11장 23절에 이런 말씀이 나온다.
" 믿음으로써, 모세가 태어났을 때에 그의 부모는 그를 석달동안 숨겼습니다.
그들이 보기에 아기가 잘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임금의 명령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탈출기 2장 1절에는 "레위집안의 어떤 남자가 레위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고 되어 있다.
탈출기는 모세의 부모를 레위 족속 출신이라 소개하고 있고,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을텐데,
그들이 다른 이스라엘 백성과 차이점이 있다면, 믿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하면서 이집트 문화의 영향을 받아 하느님을 섬기기 보다 우상숭배의 죄악속에 빠져들었는데,(에제20,5-9참조)
모세의 부모는 그렇지 않았다.
그리하여 믿음의 영웅들의 리스트인 히브리서 11장에 이름이 들어 있는 것이다.
탈출기 6장 20절에는 모세의 부모의 이름이 <아므람>과 <요케벳>으로 나오는데,
오늘은 이들의 믿음을 묵상해 본다.
요셉을 알지 못하는 이집트의 새로운 통치자 파라오가 히브리 남자 아이가 태어나면,
다 나일강에 던져버려 죽이도록 명령했는데, 이 명령을 거역하는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집안 전체가 죽임을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살벌한 상황속에서, 태어난 아이를 기르기로 작정했다는 것은 보통 결단이 아니다.
히브리서 11장 23절에서, 모세의 부모가 죽음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이 아이를 기르기로 결심하는 그 결단의 배경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첫째, 아이가 '그들이 보기에 잘 생겼다'는 것이다.
'잘 생겼다'는 단어는 단순히 신체적인 아름다움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보시기에 합당하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사도행전 7장 20절에는 "하느님 보시기에 귀여운 아이" 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의미는 '하느님이 쓰시고자 하는 소중한 아이' 라는 확신이 있어,
어떤 댓가를 지불하고 가족 전체의 목숨을 희생하더라도,
그 아이를 길러야 한다는 결단을 부모가 내렸다는 것을 추정할 수 있다.
어떤식으로든 아이의 부모는 하느님의 계시를 받고
그렇게 행동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 아이를 '석달동안 숨겨 키웠다'고 했는데, 이 '석달'의 의미가 무엇인가?
아마 태어나고 얼마 동안은 몰래 키우기가 쉬웠는데,
석달쯤 되니, 막 소리를 지르고 움직이기 시작했기에,
비밀리에 키우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이 석달의 기간은 아마도 모세의 부모가 당국의 눈초리를 피해서
아이를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기간이었을 것이다.
그들은 믿음으로 하느님을 신뢰함으로, 그들이 할 수 있는 데까지 최선을 다한 것이다.
세째로, 모세의 부모는 임금의 명령도 두려워하지 않았다고 되어 있다.
모세의 부모는 단순히 그 나라를 지배하고 있던
실질적인 통치자 파라오에게 시선을 둔 게 아니라,
그보다 더 높은 권위이신,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 시선을 두었다.
모세의 부모가 파라오의 분노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 이런 믿음을 훈련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믿음으로 아이를 양육할 것을 결심한 것이다.
사도행전 5장에 보면, 베드로와 사도들이
국가로부터 예수의 이름으로 가르침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받았을때 한 고백과,
같은 고백을 모세의 부모가 했다고 볼 수 있다.
"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이 더욱 마땅합니다."(사도5,27)
탈출기 2장 3절에 "그러나 더 숨겨둘 수가 없게 되자,
왕골상자를 가져와 역청과 송진을 바르고
그안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 두었다."고 되어 있다.
'왕골상자'의 '왕골'은 갈대를 말하는데, 보통 파피루스 갈대라고 말한다.
종이를 만들 수 있는 파피루스라 해서, 보통의 얇은 종이라 생각하면 안되고,
<아주 견고한 종이>로 성경을 기록하기도 했고,
이 갈대로 배를 만들 수도 있었다.
굉장히 두꺼운 갈대로 만들어진 상자안을
물이 스며들지 않게 역청과 송진을 발라 강가 갈대 사이에 놓아두고,
누이 미리암(만12-15세 사이로 학자 추정)으로 하여금
지켜보게 했다.(탈출2,4)
모세의 부모는 아이가 물속에 떠내려가서
혹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을 차마 지켜볼 수 없어,
모세의 누이를 보내어 지켜보게 했는데,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 상황속에 어떻게 간섭하시는가를
보고자 하는 믿음의 기대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제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소중히 보신 하느님께서
그 믿음에 응답하신 일련의 기적들이 일어난다.
탈출기 2장 5절에는 " 마침 파라오의 딸이 목욕하러 강으로 내려왔는데~~ "라고 되어 있다.
그 당시 이집트 궁중안에는 훌륭한 목욕 시설이 있었다고 고고학자들은 증언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외목욕을 하고 싶어 때를 맞추어 공주가 이곳에 등장한다.
시녀들이 강가를 거닐다가 갈대사이에 있는 상자를 발견하게 되는데,
공주가 가져 오라해서 열어보니 아기가 울고 있었다.
공주는 그 아기를 불쌍히 여기며,
"이 아이는 히브리인들의 아이가운데 하나로구나~"하였다.
그 당시 파라오의 명령에 따라 히브리아이들을 다 죽이는 상황에서
"어휴~재수없어! 히브리아이 잖아" 하고 버릴 수도 있었던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 순간 기적이 일어난다.
어떤 성서학자는 " 상자가 열리고 아이가 우는 순간,
하느님께서 파라오 공주의 마음속에 잠자고 있던
모성애의 본능을 일깨웠다"고 말한다.
그때 아기의 누이 미리암이 나타나
" 제가 가서 공주님 대신 아기에게 젖을 먹일 히브리인 유모를 하나
불러다 드릴까요?" 하고 파라오의 딸에게 말하고,
파라오의 딸이 "그래, 가거라" 하자,
가서 아기의 어머니를 불러오고,
파라오의 딸은 "이 아기를 데려다 나 대신 젖을 먹여 주게.
내가 직접 그대에게 삯을 주겠네."라고 말한다.(탈출2,7-8)
사탄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하느님의 구원의 역사를 깨트리기 위해,
그 나라의 통치자인 파라오를 통해 모세를 죽이고자 시도했지만,
하느님은 모세의 부모의 믿음을 보시고,
파라오의 딸인 공주를 이용해서
이 살벌한 상황속에서 양육비까지 받아가면서 보호받게 하셨다.
"그리하여 그 여인은 아기를 데려다 젖을 먹였다."(탈출2,9)
"아이가 자라자 그 여인은 아이를 파라오의 딸에게 데려갔다."(탈출 2,10)
탈출기 2장 9절에서 10절 사이에 시간의 간격이 얼마나 될까?
아마 젖을 뗄 때까지, 짧으면 3-4년이고,
어떤 학자들은 이집트 아이들의 공식적인 교육이 시작될 시기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으니, 7살까지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빠르면 3년에서, 길면 6-7년동안
모세의 어머니가 모세를 데리고 무엇을 했겠는가?
모세의 부모는 틀림없이 그들이 할 수 있는 모든 신앙교육과
히브리인 민족 교육을 그에게 시켰을 것이다.
모세는 이제 이집트 궁중으로 들어가 이집트의 최고 고등 교육을 받게 된다.
다신론의 교육,우상들에 대한 교육,이집트의 역사와 문화,과학과 철학 교육 등등을 받게 된다.
그러나 이 모든 교육이, 모세가 어머니의 무릎에서 받았던 신앙교육을 무효화시키지는 못할 것이다.
모세의 몸에는 히브리인의 피가 흐르고 있기 때문에~~
그리고 하느님께서 그를 거느리시고 계시기 때문에~~
연중 제15주간 화요일 복음 (마태11,20-24)
"그리고 너 카파르나움아, 네가 하늘까지 오를 성싶으냐? 저승까지 떨어질 것이다. 너에게 일어난 기적들이 소돔에서 일어났더라면, 그 고을은 오늘까지 남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 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23~24)
카파르나움(Gapernaum)은 예수님의 갈릴래아 활동의 전략적 요충지였으며(마태4,13), 특히 예수님께서 많은 기적을 베푼 곳이었다(마태8,5~12; 14~17; 9,1~8).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권능을 많이 체험하고도 완고하고 사악하여 그들의 교만이 하늘에 닿았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마침내 심판을 선언하셨다.
여기서 '아니'(not)라는 뜻을 지닌 부정(否定) 불변사 '메'(me)는 부정적인 대답이 예상되는 질문에 쓰인다.
이런 원어의 뉘앙스를 살려 해석하면, '네가 하늘까지 높아지겠느냐? 그러나 결코 높아지지 못할 것이다'라는 뜻이 된다.
즉 카파르나움이 하늘에까지 높아질 수 없음을 반어법적으로 강조해 주는 것이다.
특히 이 구절은 구약의 이사야서 14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나는 하늘로 오르리라. 하느님의 별들 위로 나의 왕좌를 세우고 북녘 끝 신들의 모임이 있는 산 위에 좌정하겠다. 나는 구름 꼭대기로 올라가서 산 위에 좌정하리라.'는 말을 연상시킨다.
이 구절은 역사상 바빌론을 가리키며,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을 나타낸다.
당시 카파르나움의 교만함이 역사상 대제국 바빌론의 교만과 영적으로는 사탄의 교만에까지 비교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의 후반부 역시 하늘까지 교만했다가 저승으로 떨어졌던 사탄의 세력에 대한 이사야서 14장 12~13절의 묘사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저승'에 해당하는 '하두'(hadou; hell; the depths)의 원형 '하데스'(hades)는 '보다'(to see)라는 뜻을 가진 '에이도'(eido)에 부정 접두어 '아'(a)가 붙어 보이지 않는(not to be seen) '지하의 깊은 세계'라는 뜻을 가진다.
신약에서 '저승'은 무신론자들이 벌을 받는 장소로 여겨졌다.
특히 마태오 복음 11장 23절과 24절의 문맥을 볼 때, '저승'은 '소돔'(Sodom)에 비유된다.
성경은 소돔(Sodom)이 하늘의 유황불이 내려 멸망했다고 말한다(창세19,1).
그런데 고고학자들에 의하면, 소돔 부근의 아스팔트(역청) 구덩이(창세14,10)이 있어 지진에 의해 땅이 함몰했고, 석유와 가스의 폭발 때문에 불바다가 되어 사해 속으로 사라졌다고 본다.
마치 땅이 입을 벌려 코라에게 딸리 모든 사람과 모든 재산을 삼켜 버렸으므로 그들이 저승에 빠졌던 것처럼(민수16,31~33), 소돔도 땅속으로 꺼져들어가 멸망했던 것이다.
실제로 소돔이 세계에서 가장 낮은 곳에 위치한 사해 저지대에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지중해보다 해발 392m가 더 낮은 지중해의 해수면 아래에 잠기게 된 소돔은 지구상의 저승과 같은 곳이다.
그러니까 마태오 복음 11장 23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완고하고 사악한 죄를 저지른 카파르나움이야말로 지상의 저승인 소돔보다 더 깊은 저승까지 낮아질 것이라는 예수님의 엄정한 심판의 선언이 담겨져 있다.
한편 마태오 복음 11장 24절의 '견디다'는 뜻으로 번역된 '아네크토테론'(anektoteron; more tolarable; more bearable)은 '지속할 수 있는', '참을 수 있는'이란 뜻을 가진 '아네크토스'(anektos)의 비교급이다.
이러한 비교급의 뉘앙스를 가지고 다시 번역하면, '소돔 땅의 사람들이 카파르나움 사람들보다 심판을 더 잘 견디고, 더 잘 참아낼 수 있을 것이다'는 뜻이다.
이것은 마치 심판에도 등급이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지만, 본문은 심판의 차별성에 강조점이 있다기 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카파르나움 사람들의 죄가 참으로 크며, 심판 날에는 반드시 처벌받게 될 것이라는 확실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제1독서에서 파라오의 딸은 물에서 건져 낸 아이의 이름을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냈다.”라는 의미로 “모세”라고 부릅니다. 모세 입장에서 볼 때 ‘건져 내어진 이’라는 의미를 지닌 ‘마수이’라는 이름이 더 적절해 보입니다. 그러나 파라오의 딸은 무의식적으로 ‘건져 내는 이’라는 뜻을 가진 “모세”라는 이름을 사용하는데, 모세는 이 이름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 바다에서 건져 내는 역할을 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모세가 구출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이가 바로 파라오의 딸이라는 점이 참 역설적입니다.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을 떠나지 못하게 하는데, 그의 딸이 모세를 구출해 냄으로써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땅을 떠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줍니다. 더 나아가 파라오 역시 모세를 죽이려 하지만, 이 때문에 모세는 광야로 나가 하느님을 만나게 됩니다.
오늘 복음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코라진과 벳사이다, 카파르나움을 꾸짖으십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 지역, 특히 카파르나움은 예수님의 활동 중심지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많은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가장 많은 기적을 행하신 곳이 그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예수님을 믿고 따르지 않습니다. 이렇게 보니, 믿음은 예수님 말씀을 많이 듣는다고, 또 그분이 일으키는 기적을 많이 본다고 생기는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자주 경험하지만, 믿음은 파라오 같은 사람을 만나 극도의 어려움을 겪을 때 더 강해지나 봅니다. 어려움 속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그분에 대한 믿음이 굳건해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릴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진정으로 만나고 참된 부활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를 두고 우리는 신앙의 역설이라 부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