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토마스 사도 축일]믿음 (요한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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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오로 사도는, 에페소 신자들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라고 한다. (에페2,19-22)
형제 여러분, 19 여러분은 이제 더 이상 외국인도 아니고 이방인도 아닙니다. 성도들과 함께 한 시민이며 하느님의 한 가족입니다.
20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1 그리스도 안에서 전체가 잘 결합된 이 건물이 주님 안에서 거룩한 성전으로 자라납니다.
22 여러분도 그리스도 안에서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거처로 함께 지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당신 옆구리에 손을 넣어 보고 의심을 버리고 믿으라고 하신다. (요한 20,24-29)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성 토마스 사도 축일 제1독서(에페2,19~22)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어진 건물이고,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20)
에페소서 2장 20-22절에서 바오로는 교회를 건물에 비유하고 있다.
단순히 건물이 아니고 예루살렘 성전을 자기 육체로 허무신 그리스도께서 새롭게 세우신 성전이다.
이 성전 건물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터)위에 세워졌고, 그 모퉁잇돌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며(20-21절), 건물의 재료는 그로 말미암아 거듭 난 성도들이다(22절; 1코린3,9).
여기서 '사도들'과 병행하여 쓰인 '예언자들'은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교회를 세우신 후
교회가 이 땅에 뿌리 내리던 초대 교회 시대에만 있었던 신약 교회의 예언자들을 가리킨다 (1코린12,10.28.29; 에페4,11).
한편 '여러분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기초 위에 세워진 건물'이란 표현은 다음의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먼저 코린토 전서 3장 11절에서는 성전 건물의 기초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으며 코린토 전서 3장10절을 보면 사도 바오로 자신이 그 기초를 놓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본문의 기초 역시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놓은 기초' 라고 보고 그 기초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킨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기초 위에 놓여 있으며, 이러한 교회는 사도들과 예언자들의 복음 전파에 의하여 확장되어 간다는 의미가 된다.
둘째로 본문의 '기초'를 건물의 '기초'라고 보지 않고, '시작'이라는 의미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도들과 예언자들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기초 위에 지어진 새 성전에 놓인 최초의 돌로서 그 위에 계속해서 다른 성도들이 돌이 되어 세워질 수 있는 '시작'이 되었다는 의미가 된다.
'기초'로 번역된 '테멜리오'(themelio)가 '기초', '토대', '터' 뿐만 아니라 '시작'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이 두 견해 모두 타당하다고 볼 수 있다.
사도들과 예언자들은 하느님의 구원 경륜과 계획과 섭리를 따라 모든 사람들을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의 복음을 깨달은 자이다.
그들은 자신이 깨달은 복음을 전함으로써 교회의 '기초'를 닦았고 또 친히 교회 구성원의 구심점이 되어 다른 모든 성도들이 그들을 따라 신앙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본보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리스도 예수님께서는 바로 모퉁잇돌이십니다'
'모퉁잇돌'에 해당하는 '아크로고니아이우'(akrogoniaiu)의 원형 '아크로고니아이오스'(akrogoniaios)는 '끝'(마태24,31), '머리'(히브11,21)를 의미하는 '아크론'(akron)과 '모퉁이'(마태21,42), '구석'(사도26,26)을 의미하는 '고니아'(gonia)의 합성어로서 문자적으로는 '모퉁잇돌'(the chief corner stone),'구석머리' 정도의 의미를 갖는다.
여기서는 건물의 벽과 벽이 만나는 지점에 세워서 건물의 기초로 삼을 뿐 아니라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하는 기초들을 말한다.
고대 근동 지역에서는 건물을 세우는 자가 자신의 이름을 바로 이 모퉁잇돌에 새겨 건물이 자신의 소유임을 표시하였다.
에페소서 2장 20절은 이사야 28장 16절의 말씀의 성취라고 볼 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세우신 교회의 기초이실 뿐 아니라 교회가 그분의 소유임을 나타내는 모퉁잇돌이시다.
그리스도께서는 다른 사람을 시키지 않고 당신 친히 직접 교회의 모퉁잇돌이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주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보라, 내가 시온에 돌을 놓는다.
품질이 입증된 돌, 튼튼한 기초로 쓰일 값진 모퉁잇돌이다.
믿는 이는 물러서지 않는다. " (이사28,16)
성 토마스 사도 축일 복음(요한20,24-29)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 (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와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호'(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 (apistos; faithless)와 '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가 서로 대조 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 진정한 믿음에 이르는 사랑의 열정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오늘은 예수님의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 ‘쌍둥이’라고도 불린 토마스 사도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갈릴래아 출신의 어부였던 그가 어떻게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는 불신의 대표적 인물로 언급되곤 합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서의 진술을 중심으로 좀 더 깊은 묵상을 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예수님께서 베타니아에 들르셨을 때, 제자들에게, “다시 유다로 가자." 하고 말씀하십니다(11,7). 그러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스승님, 바로 얼마 전에 유다인들이 스승님께 돌을 던지려고 하였는데, 다시 그리로 가시렵니까?”(11,8) 하고 만류합니다. 그런데 토마스만은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요한 11,16) 하고 말합니다.
토마스는 예수님의 예루살렘을 향한 고통스럽고 위험한 마지막 여정을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깊은 의미를 분석하거나 거기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자신을 부르신 주님의 고통에 기꺼이 동참하여 그분의 고난과 죽음을 함께 겪어내려 했을 것입니다. 그는 인간적 용기 그 이상의 사랑과 믿음의 열정을 지녔던 것이지요.
예수님께서 최후만찬 석상에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내 아버지의 집에는 거처할 곳이 많다. 내가 가서 너희를 위하여 자리를 마련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데려다가 내가 있는 곳에 너희도 같이 있게 하겠다. 너희는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알고 있다.”(14,1-4)
그러자 토마스가 예수님께 말씀드립니다. "주님, 저희는 주님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알지도 못하는데, 어떻게 그 길을 알 수 있겠습니까?”(14,5)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14,6) 하시며 길을 알려주십니다. 토마스는 맹목적으로 믿지 않고, 진지하게 그리고 열정적으로 영원한 생명의 길을 찾았던 것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지 못한 토마스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20,25) 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에게 나타나시자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요한 20,28) 하고 고백합니다.
주님의 상처를 손으로 만져보지 않고는 못 믿겠다던 그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뵙고는 더 이상 만지지 않고 신앙을 고백합니다. 그의 태도는 참 신앙에 이르기 위한 그의 순수한 열정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더 굳게 믿으려고 의문을 던졌던 것이지요. 그의 현실적이고 감각적인 태도 또한 확고한 신앙에 이르는 방편이었습니다.
토마스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른 제자들과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고기를 잡고, 예수님께서 숯불에 구워주신 물고기와 빵으로 함께 아침식사를 하지요. 그러나 토마스와 다른 제자들은 더 이상 주님이신지 묻지 않았습니다(21,12). 그의 모든 신앙여정은 이미 강렬한 사랑으로 변모되어 있었던 것이지요. 그는 그 사랑의 열정과 확고한 신앙으로 인도에서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한 것으로 전해집니다.
오늘 나는 토마스 사도와 같은 사랑의 열정을 지니고 있습니까? 진정하고 확고한 믿음에 이르기 위해 얼마나 진지하게 고민하고 사색합니까? 말이 아닌 행동으로 주님의 일에 동참하고,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 자신을 내놓고 있습니까? 다시 사랑의 불씨를 되살릴 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