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월요일]나를 따라라(마태8,18-22)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이 간청하자, 소돔과 고모라에서 의인 열 명이라도 찾을 수 있다면 그곳을 파멸시키지 않겠다고 하신다. (창세18,16-33)
사람들은 마므레의 참나무들 곁을 16 떠나 소돔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이르렀다. 아브라함은 그들을 배웅하려고 함께 걸어갔다.
17 그때에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앞으로 하려는 일을 어찌 아브라함에게 숨기랴?
18 아브라함은 반드시 크고 강한 민족이 되고, 세상 모든 민족들이 그를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19 내가 그를 선택한 것은, 그가 자기 자식들과 뒤에 올 자기 집안에 명령을 내려 그들이 정의와 공정을 실천하여 주님의 길을 지키게 하고, 그렇게 하여 이 주님이 아브라함에게 한 약속을 그대로 이루려고 한 것이다.”
20 이어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소돔과 고모라에 대한 원성이 너무나 크고, 그들의 죄악이 너무나 무겁구나.
21 이제 내가 내려가서, 저들 모두가 저지른 짓이 나에게 들려온 그 원성과 같은 것인지 아닌지를 알아보아야겠다.”
22 그 사람들은 거기에서 몸을 돌려 소돔으로 갔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주님 앞에 그대로 서 있었다.
2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4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 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5 의인을 죄인과 함께 죽이시어 의인이나 죄인이나 똑같이 되게 하시는 것,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그런 일은 당신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온 세상의 심판자께서는 공정을 실천하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26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7 아브라함이 다시 말씀드렸다. “저는 비록 먼지와 재에 지나지 않는 몸이지만,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28 혹시 의인 쉰 명에서 다섯이 모자란다면, 그 다섯 명 때문에 온 성읍을 파멸시키시렵니까?”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마흔다섯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파멸시키지 않겠다.”
29 아브라함이 또다시 그분께 아뢰었다. “혹시 그곳에서 마흔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마흔 명을 보아서 내가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0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그곳에서 서른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 일을 실행하지 않겠다.”
31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주님께 감히 아룁니다. 혹시 그곳에서 스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스무 명을 보아서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2 그가 말씀드렸다. “제가 다시 한 번 아뢴다고 주님께서는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혹시 그곳에서 열 명을 찾을 수 있다면 …… ?” 그러자 그분께서 대답하셨다. “그 열 명을 보아서라도 내가 파멸시키지 않겠다.”
33 주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말씀을 마치시고 자리를 뜨셨다. 아브라함도 자기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고 당신을 따르라고 하신다. (마태8,18-22)
그때에 18 예수님께서는 둘러선 군중을 보시고 제자들에게 호수 건너편으로 가라고 명령하셨다.
19 그때에 한 율법 학자가 다가와 예수님께, “스승님,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스승님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2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여우들도 굴이 있고 하늘의 새들도 보금자리가 있지만, 사람의 아들은 머리를 기댈 곳조차 없다.”
21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어떤 이가, “주님,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게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2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따라라.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
연중 제13주간 월요일 제1독서 (창세18,16-33)
아브라함이 다가서서 말씀드렸다.
"진정 의인을 죄인과 함께 쓸어버리시렵니까? (23)
혹시 그 성읍 안에 의인이 쉰 명 있다면, 그래도 쓸어버리시렵니까?
그 안에 있는 의인 쉰명 때문에라도 그곳을 용서하지 않으시렵니까? (24-25)
~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소돔 성읍 안에서 내가 의인 쉰 명을 찾을 수만 있다면,
그들을 보아서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다가서서'로 번역된 '와익가쉬'(waiggash)의 원형 '나가쉬'(nagash)의 기본 뜻은
어떤 목적을 가지고 '가까이 가다'(창세27,27; 2사무1,15), '접근하다'(민수4,19; 사도20,21)이다.
당시 아브라함은 하느님과 대면하여 서 있었는데, 그 자리에서 더욱 하느님 앞으로
다가섰다는 사실은 그가 소돔 성을 향해 얼마나 간절한 심정을 가졌는지를 반영한다.
이것은 또한 하느님께 대한 아브라함의 친밀함과 기도에 대한 확실한 응답을
얻기 위한 간절함이 들어있는 행동이다.
시편 73장 28절의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가까이 있음이 저에게는 좋습니다."
라는 말씀을 떠오르게 한다.
창세기 18장 23절의 '의인'에 해당하는 '차디크'(tsadiq; the righteous)는
'의로운'(창세20,4; 시편116,5), '옳은'(잠언25,26; 이사41,26)이란 뜻으로서,
본문에서는 '의로움을 지닌 사람'(탈출9,27; 잠언18,17), '옳고 참된 것을 말하는 사람'(이사41,26),
특히 '의롭고 흠없는 사람', '하느님의 법도를 순종하는 사람'(창세6,9; 시편5,13)이란 의미로 쓰였다.
즉 의인의 기준은 성품의 완전함이 아니라 하느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른 태도를 가진 사람을 일컫는 것으로서, 하느님의 뜻과 의지에 따라 살고
하느님의 율법을 준행하려는 경건한 사람을 가리킨다.
반대로 '악인'에 해당하는 '라샤'(rasha; the wicked) 역시 일차적으로는
'사악함'(시편5,5), '불의'(잠언4,17), '죄악'(시편125,3; 에제7,11)을 뜻하는 말이나
하느님의 성품과 그의 뜻에 위배되는 사람을 의미하는 말로 쓰였다.
그리고 '쓸어버리시렵니까'에 해당하는 '싸파'(sapa)는 '밀다'(이사7,20),
'잡아채다', '빼앗다'(이사40,15), '치다'(1사무26,10)라는 뜻으로서,
어떤 쌓여 있는 사물을 '휩쓸어 파괴시켜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 이 단어가 하느님의 심판과 관련하여 사용될 때는 '파괴시켜 버리다'(destroy),
'쓸어 버리다'(sweep away)라는 의미로 사용된다.
이런 차원에서 창세기 18장 23절은 하느님께서 경건한 사람들을
악인과 함께 멸망시키거나 쓸어 버려서는 안된다는 아브라함의
간절한 호소를 보여 주고 있다.
한편 창세기 18장 24절에서 아브라함은 구체적으로 하느님께 기도하는데,
먼저 의인 쉰명에서 시작하여 여섯 차례에 걸쳐 의인 열 명이라도 있으면,
동성 연애 때문에 망하는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을 유보시켜 달라고 간구한다.
그가 이처럼 쉰 명에서 시작한 것은 소돔과 그 인근 성읍(고모라, 아드마, 츠보임,
초아르; 창세기 14장), 즉 다섯 성읍들에서 적어도 한 성읍에 의인 열 명 정도는
있을 것이라는 추측에서였다고 볼 수 있다.
또 다른 추측으로는 당시 소돔 성의 인구가 얼마였는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소돔이 비옥한 평지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아(창세13,12) 전체 인구는 많았고,
그 가운데 쉰 명은 지극히 적은 수였기에 이 정도의 의인은 있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그러나 송봉모 신부님의 아브라함에 관한 글에서는
그 당시 소돔 성읍의 인구를 만 명 정도로 본다.
어쨌든, 아브라함이 이렇게 적은 수를 내세워 소돔성의 구원을 호소한 것은
의인 쉰 명이라도 크게 생각하실 것이라는 하느님의 자비를 믿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혹시 ~있다면'으로 번역된 '울라이 예쉬'(ullai yesh)에서
'울라쉬'는 '아마도' 라는 뜻이며, '예쉬'는 '~이 있다'(there is)란 뜻이다.
직역하면, '아마도'(쉰 명은)있을 것입니다'이다.
이것은 아브라함의 의심섞인 추측을 반영하는 말이다.
즉 그많은 소돔성의 인구 중에 설마 쉰 명이 없을 것인가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그곳 전체를 용서해 주겠다' (26)
'용서하다'에 해당하는 '나사'(nasa)의 기본적 의미는 '들어 올리다'(예레4,6; 에제3,14)이고,
'(사람의 머리를)들다'(욥기10,15; 즈카2,4)라는 뜻도 있다.
이것은 죄인의 머리를 들게 해주는 것이나 죄벌의 비천하고 낮은 자리에서 들어 올려서
다시 높여 주는 행위가 모두 죄를 용서해 주는 것과 관련이 있기에, '용납하다',
'사유하다', '용서하다'(창세13,6.7; 미카7,18; 탈출10,37참조)란 뜻도 지니게 되었다.
또한 '그곳 전체'에 해당하는 '레콜 함마콤(lekol hammaqom; all the place; the whole place)은
'콜'(kol)이 '모두', '다', '전체'(창세2,2), '모두', '전부'(신명1,22)라는 뜻이 있으므로,
이것은 '의인 뿐만 아니라 악인도 거주하는 모든 성읍(지역)'을 가리킨다.
따라서 창세기 18장 26절은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이 제시한 조건(창세18,24)을
기꺼이 수락하고 풍성한 자비를 약속해 주셨음을 보여 준다.
이 약속은 죄인을 징벌하시는 하느님의 공의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에 합당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은총(자비)에 근거한 것이다.
하느님도 아브라함도 여섯 번의 흥정을 통해 이토록 서로 자비에 호소하고 자비를 표출하지만,
기어이 자비를 받아 입을 만한 의인들이 없어 불과 유황의 징벌에 놓이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구원하시는 원리를 볼 수 있다.
즉 의인으로 말미암아 악인도 구원에 동참하는 길이 열려지는 것이다.
이러한 구원의 원리는 단 한 사람 뿐이었던 의인 예수님, 무죄하신 예수님을 통해
수많은 죄인들이 구원받는 십자가 사건에서 최고의 절정을 이루는 것이다(로마5,18; 에페2,8.9).

♣ 과거와 미래를 현재화 하는 투신의 삶 ♣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먼저 집에 가서 아버지의 장사를 지내고”(8,21) 따르겠다는 이에게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 두어라.”(8,22)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에는 예수님을 추종하는 이들이 지녀야 할 중요한 태도가 담겨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나를 따르라’는 예수의 부르심은 한 인간의 자식 된 도리를 다하는 것 이상으로 훨씬 중요하고 급박하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성숙은 삶의 우선순위와 중심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달라집니다. 이 가장 기본적인 중심과 순위가 뒤바뀌는 순간 인생은 하느님과 무관한 죽음의 길로 치닫게 됩니다.
삶의 중심을 하느님께 두고 예수님처럼 사랑을 실행하는 것을 인간의 그 어떤 것보다 우선시 할 때 우리는 참 행복에 이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일에 무관심 하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 누구를 만나든 하느님을 품고 행하고 만나야 하며, 무엇이든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예수님께서는 왜 유대인들이 그토록 중요시하였던 장례 의무까지도 무시하시며 자신을 따르라고 하신 까닭은 우리가 하느님께서 정해 놓으신 유일무이한 시간에로 초대받았으며 그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절박하기 때문입니다. 가까워오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 또한 예수님에게나 제자들 모두에게 급박한 까닭입니다.
또한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예수님처럼 죽음이 아닌 생명을 위해 자신을 투신하라는 것입니다. 죽은 이들의 장사는 죽은 이들이 지내도록 내버려두라는 말씀은 무덤을 파주는 사람처럼 영적으로 죽은 사람, 생명의 부르심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고집스럽게 죄를 버리지 못하는 사람이 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순간 말로써 험담과 거짓과 중상모략을 하고, 죽음의 문화에 동참하는 행동을 하며, 미움과 증오, 시기 질투, 온갖 탐욕적인 생각을 하는지 모릅니다. 생명을 지니면서 역설적으로 반생명적인 말과 생각과 행동을 하며 살아간다면 죽은 이들의 장사를 지내는 죽은 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과거에 집착하거나 과거 지향적 삶에서 벗어나 과거를 현재화(아남네시스)하고 미래를 현재화(프로렙시스) 하라는 말씀입니다. 과거에 묶여 사는 사람은 바리사이나 루카복음의 돌아온 아들의 비유에 나오는 큰 아들처럼 사사건건 ‘왜?’라는 물음을 자주 던지고 불평불만을 터트리며 하느님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의 제자답게 과거를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고 하느님께서 미래에 나를 통하여 이루실 일을 내 삶의 현재 안으로 가져오도록 힘써야겠습니다. 우리는 어렵고 힘들고 이해되지 않는 상황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이나 베드로처럼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은총과 뜻을 헤아리려고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제 예수님의 제자로서 그분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안일함에서 벗어나 일상의 삶 안에서 부딪치는 모든 것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수난’에 참여해야겠습니다. 이 절박한 은총의 때를 뒤로 제쳐두고 나를 위한 현세적이고 육적인 일에 몰두하며 시간을 허비하는 일이 없어야겠지요. 오늘도 과거의 추억이나 상처에 파묻히거나 미래에 대한 걱정 속에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장사’를 치르는 ‘죽은 이’의 길을 가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