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금요일] 간음 죄 (마태 5,27-32)
바오로 사도는,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려고,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닌다고 한다. (2코린 4,7-15)
형제 여러분, 7 우리는 보물을 질그릇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8 우리는 온갖 환난을 겪어도 억눌리지 않고, 난관에 부딪혀도 절망하지 않으며,
9 박해를 받아도 버림받지 않고, 맞아 쓰러져도 멸망하지 않습니다.
10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1 우리는 살아 있으면서도 늘 예수님 때문에 죽음에 넘겨집니다. 우리의 죽을 육신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2 그리하여 우리에게서는 죽음이 약동하고 여러분에게서는 생명이 약동합니다.
13 “나는 믿었다. 그러므로 말하였다.”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와 똑같은 믿음의 영을 우리도 지니고 있으므로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므로 말합니다.”
14 주 예수님을 일으키신 분께서 우리도 예수님과 함께 일으키시어 여러분과 더불어 당신 앞에 세워 주시리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15 이 모든 것은 다 여러분을 위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은총이 점점 더 많은 사람에게 퍼져 나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이 넘치게 하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마음으로 간음한 것이라고 하신다. (마태 5,27-32)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7 “‘간음해서는 안 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28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마음으로 그 여자와 간음한 것이다.
29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0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온몸이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지체 하나를 잃는 것이 낫다.
31 ‘자기 아내를 버리는 자는 그 여자에게 이혼장을 써 주어라.’ 하신 말씀이 있다.
32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금요일 제1독서(2코린 4,7-15)
"우리는 이 보물을 질그룻 속에 지니고 있습니다. 그 엄청난 힘은 하느님의 것으로, 우리에게서 나오는 힘이 아님을 보여 주시려는 것입니다." (7)
앞선 코린토 후서 4장 1-6절에서 예수님만을 진실하게 증거한 사도로서의 기본 직분 수행 자세에 대해 피력한 바오로는, 이제 코린토 후서 4장 7절이하 15절에서 약함 속에서 고난을 무릅쓰고 사도로서의 직분을 수행하는 사목 자세에 대해 설명한다.
사도 바오로가 여기서 '이 보물(보배)' 이란 무엇을 지칭할까? 어떤 이는 코린토 후서 4장 1절에서 언급하고 있는 '이 직분' 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하기도 하지만, 문맥상 바로 앞에 나오는 코린토 후서 4장 6절의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의미한다고 본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이 값진 보물이 값싼 질그릇 속에 담겨 있는 것으로 묘사하며 양자 사이에 극명한 대조를 이끌어 내고 있다.
이 질그릇 비유는 로마서 9장 20-23절에서 바오로가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절대적 주권과 피조물의 연약함을 효과적으로 대조하기 위해 사용한 적이 있는데, 이사야 29,16; 30,14; 45,9; 64,7; 예레18,6 ; 19,1-11; 애가 4,2; 욥기10,9 등에서도 나타난다.
물론 각각의 비유는 문제의 차이에 따라 그 의미나 강조점에 있어서도 차이가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이 질그릇 비유의 상징어는 그 그릇의 가치가 형편없다는 뉘앙스가 담겨져 있다.
Manson은 바오로가 언급한 질그릇을 두고 '코린토의 잡화점들에서 구매할 수 있는
값싸고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 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들은 이러한 부서지기 쉬운 도기 등잔과 같다.
왜냐하면,그들은 그들의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몸에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빛의 원천이신 하느님으로부터 유래된 빛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해 이 구절의 의미를 확실하게 밝혀준다.
즉 바오로는 질그릇이란 표현을 통해 인간의 육체가 지닌 한계성과 연약성을 설득력있게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Hughes는 이 비유를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과 관련된 것으로 간주한다. 실제로 코린토 후서 2장 14절이나 코린토 전서 4장 9절과 같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의 장대한 광경과 관련된 비유를 사용했다는 점을 감안할 때 무리한 견해는 아니다. 그에 따르면, 로마 군대의 승전 행진에 있어서 금과 은을 질그릇에 넣어 운반하는 것은 당시 관례였다.
B.C.167년 마케도니아 전투에서 Aemilius Paulus가 거둔 승리를 기념하는 행사에서 은화를 담는 750개의 질그릇을 운반한 일이 있었다 (Plutarch).
이러한 사실로, 자신이 소유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이 자신의 연약한 육체에 담겨 있다는 것과 유사하다는 점을 자각한 바오로에 의해, 얼마든지 차용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어떤 견해를 취하든 그러한 사실은, 바오로의 복음 선교 활동이 연약한 자신의 인간적인 본성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오직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지식의 빛을 받아 그것을 전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세울 자로 여기지 않고, 오직 하느님만을 높이 드러내실 분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자신의 연약함과 비천함을 깊이 아는 자일수록 겸손한 마음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심을 인정하게 된다.
'우리는 언제나 예수님의 죽음을 몸에 짊어지고 다닙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10)
코린토 전서 15장 31절에서 바오로는 '나는 날마다 죽음을 마주하고 있습니다' 라고 언급하며 시편 44장 23절의 '저희는 온종일 당신 때문에 살해되며 도살될 양처럼 여겨집니다' 라는 예언이 자신에게 이루어지고 있음을 체험적으로 고백한 적이 있다.
실제로 예수님께서도 요한 복음 15장 20절에서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 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라고 말씀하셔서, 그리스도인이라면 그리스도의 고통에 필연적으로 동참하게 될 것을 밝힌 적이 있다.
그런데 '죽음을' 에 해당하는 '네크로신'(nekrosin)은 단순히 '죽음'(dying or death) 그 자체만을 가리키는데, 본 단락에서는 고난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였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죽음뿐 아니라 그때 수반된 죽음의 고통까지 말한다.
또한 '짊어지고 다닙니다'에 해당하는 '페리페론테스'(peripherontes)는 '지니고 돌아다니다' 라는 의미를 지닌 '페리페로'(periphero)의 현재 분사 능동태이다.
이것은 '항상'으로 번역된 '판토테'(pantote; always)란 표현과 더불어 바오로가 어디를 가든지 어떤 환경에 처하든지 항상 죽음의 고통을 지니고 다녔음을 말한다.
바오로는 '나는 예수님의 낙인을 내 몸에 지니고 있습니다' (갈라6,17)하고 말한 것처럼 그의 경험 세계 속에서 그리스도가 당했던 죽음의 고통에 날마다 동참하는 삶을 살았던 것이다. 사도 바오로의 위대성은 이처럼 예수님의 삶을 철저하게 자신의 삶에 적용하여 실천한 데 있다.
'우리 몸에서 예수님의 생명도 드러나게 하려는 것입니다'
목적의 의미를 나타내는 '히나(hina)가정법' 구문인 본문은 상반절에 나타난 바오로 사도의 행동의 목적이 무엇인지 보여준다.
즉 바오로가 날마다 주님의 복음을 위해 죽음의 고통에 몸소 동참하고 있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을 그 몸에 드러나게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예수님' 으로 번역된 '투 이에수'(tu Iesu)는 소유격으로서 바오로 자신의 생명이 바로 예수님께서 구원해 준 생명이며 그 예수님께 속한 생명임을 강조한다.
즉 '생명도'로 번역된 '헤 죠에'(he zoe)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본질적으로 새로운 생명 곧 부활의 씨앗이 되었음을 함축한다.
또한 '드러나게'로 번역된 '파네로테'(phanerothe)는 '분명히 나타내다' 라는 의미를 지닌 '파네로오'(phaneroo)의 수동태이다. 여기서의 수동태는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하느님이심을 암시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에 참여함으로써 하느님에 의해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필리3,10).
예수님께서 질그릇같이 연약한 자신의 몸에 십자가의 고통을 담아냈듯이 그와 일치한 그리스도인들 역시 현세에서의 고통을 감내해야만 한다. 그 고통의 길은 바오로가 진술했듯이 죽음을 각오해야 한다.
그러나 비록 죽음의 상황에 처해지더라도, 그 고통에의 동참은 결코 무익하지 않다. 이것이 무익한 인내가 아닌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던 것처럼 그리스도인들 역시 그 부활의 첫 열매를 쫓아 영광스러운 몸의 부활을 경험할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자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 것이며 그와 함께 영원히 왕노릇할 것이다.
이처럼 그리스도인들이 현재의 고통 속에서도 희망을 품을 수 있는 것은 예수님 부활의 생명이 궁극적으로 약속되어 있기 때문이다.
♣ 소유의 눈길이 아닌 하느님 창조의 눈길로 ♣
예수님께서는 유다법에서 남편의 소유물처럼 다뤄졌던 아내의 존엄성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누구나 이미 간음한 것이다.”(마태 5,28) 곧 간음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남의 아내를 차지하려는 흑심조차 품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또 말씀하십니다.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5,29-30) 이는 마음이 깨끗하지 않으면 눈과 손을 빼버리는 것이 소용없다는 말씀입니다. 올바른 삶의 근원은 정결한 마음에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지요(5,8).
이어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불륜을 저지른 경우를 제외하고 아내를 버리는 자는 누구나 그 여자가 간음하게 만드는 것이다. 또 버림받은 여자와 혼인하는 자도 간음하는 것이다.”(5,32) 남편이 아내를 소박하며 이혼장을 써주는 것은 이혼을 당한 여자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극히 미흡한 제도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혼인의 신성함을 강조하십니다. 한 번 맺은 결혼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유효하므로, 이혼은 물론 재혼까지도 허용하지 않으십니다(마르 10,2-12). 결국 아내를 소박하는 것은 아내로 하여금 재혼하도록 몰아붙이는 것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첫 번 결혼이 엄연히 유효한데 재혼하는 것은 간음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께서는 남이 죄를 지을 기회를 절대로 주지 말아야 하며 여자의 존엄성을 절대로 보장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남자나 여자나 상대방을 내보낼 권리가 없다는, 이른바 혼인의 불가해소성을 원칙으로 세우신 것입니다. 그러나 마태오 교회는 이를 완화하여, 아내가 불륜을 저지른 경우에는 예외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가 일반적으로 이혼과 재혼을 허용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오늘의 말씀에 우리 자신을 비추어 봐야겠습니다. 무엇보다도 죄의 뿌리인 마음을 정결하게 갖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이성(異性)은 하느님의 아름다운 창조물입니다. 성(性)은 소유의 대상이나 도구가 아니라 고귀한 인격 자체이지요. 성은 하느님의 생명이 발현되는 근원적인 자리요 힘입니다. 성은 상호존중의 통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보시니 좋더라." 하신 하느님의 눈으로 서로를 바라봐야 할 것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생각입니다. 마음은 모든 죄악이 생겨나는 근원적인 자리이지요. 마음이 비뚤어져 혼탁해지면 비합리적인 사고를 하게 되어 그릇된 행동을 낳습니다. 따라서 창조의 하느님을 품고 “깨끗하고 순수한 마음으로” 이성을 바라보아야겠습니다. 그런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고 대할 때 모든 만남은 성사(聖事)가 되겠지요.
이제 소유의 눈길이 아닌 ‘있는 그대로’ 봐주는 창조의 순수한 눈길을 지녀야겠습니다. 욕망의 눈길이 아니라 사랑의 눈길로 서로를 바라봐야겠습니다. 이런 눈길을 지닐 때 성차별이 들어설 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부부관계는 하느님의 성사로 바뀔 것입니다. 성(性)은 고유하고 아름다운 다름이기에 어떤 경우에도 차별의 요소가 될 수 없습니다. 인간은 하느님의 창조물이라는 그 이유만으로 모두 존엄한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오늘 복음은 여섯 번째 계명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는 이 계명은 혼인의 유대를 보호하기 위한 법률이면서,
동시에 사회의 안정은 가정의 안정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계명을 말씀하시면서,
혼인 생활의 순수성을 보장하려면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간음은 음란한 생각을 품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지적하시며,
그런 생각 자체를 뿌리 뽑으라고 하십니다.
죄의 유혹은 사소한 것에서부터,
별로 죄의식을 느끼게 되지 않는 부분부터 차례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그것이 한 번 두 번 거듭되다 보면 나중에는 어떤 것이 죄인지,
그게 무엇 때문에 죄라고 하는지 혼란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네 오른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빼어 던져 버려라.
또 네 오른손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 던져 버려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육신 자체가 그렇게 나쁘거나 악한 것이라는 의미는 아닙니다.
사람의 인간적 조건이 그렇게 약한 것이기에 처음부터 죄에서 단호히 멀어지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특별히 눈과 손을 언급하신 것은, 유혹이 사람의 육신을 이용하고, 특별히 눈과 손을 이용하기 때문입니다.
유혹이 덮칠 때 신자들은 철저히, 그리고 그 자리에서 물리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빼어 던져 버리고, 잘라 던져 버리라고 하신 것은 이런 단호함을 표현하신 것입니다.
유혹은 아주 조그마한 틈이라도 발견하면 그 틈새를 파고들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나약하지만 우리가 하느님께 마음을 열 때, 하느님께서 직접 우리 안에 활동하십니다.
그런 하느님께 의지하며 우리 몸으로 하느님께 영광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이성근 사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