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0주간 월요일]행복하여라 (마태5,1-12)

2019. 6. 10. 오전 4:4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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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년 6월 10일 다해   

 [연중 제10주간 월요일]행복하여라 (마태5,1-12)



주님의 말씀을 따라 아합 임금에게 가뭄을 예고한 엘리야는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낸다. 주님께서는 까마귀를 시켜 그에게 먹을 것을 주신다. (1열왕17,1-6)
그 무렵 1 길앗의 티스베에 사는 티스베 사람 엘리야가 아합에게 말하였다. “내가 섬기는, 살아 계신 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두고 맹세합니다. 내 말이 있기 전에는 앞으로 몇 해 동안 이슬도 비도 내리지 않을 것입니다.” 2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3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4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 5 엘리야는 주님의 말씀대로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로 가서 머물렀다. 6 까마귀들이 그에게 아침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고, 저녁에도 빵과 고기를 날라 왔다. 그리고 그는 시내에서 물을 마셨다.


바오로 사도는 코린토 신자들에게 보내는 둘째 서간을 시작하면서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에 대하여 강조한다. 곧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위로해 주시어 우리가 다른 이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신다는 것이다. (2코린1,1-7)
1 하느님의 뜻에 따라 그리스도 예수님의 사도가 된 바오로와 티모테오 형제가 코린토에 있는 하느님의 교회와 온 아카이아에 있는 모든 성도에게 인사합니다. 2 하느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3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4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환난을 겪을 때마다 위로해 주시어, 우리도 그분에게서 받은 위로로, 온갖 환난을 겪는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게 하십니다. 5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치듯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내리는 위로도 우리에게 넘칩니다. 6 우리가 환난을 겪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고,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여러분이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위로는 우리가 겪는 것과 똑같은 고난을 여러분도 견디어 나아갈 때에 그 힘을 드러냅니다.7 우리가 여러분에게 거는 희망은 든든합니다. 여러분이 우리와 고난을 함께 받듯이 위로도 함께 받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산으로 오르신 예수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행복하여라.” 하고 여덟 가지 참행복을 선언하신다. (마태5,1-12)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제1독서 (1열왕17,1-6)


주님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내렸다. "이곳을 떠나 동쪽으로 가, 요르단 강 동쪽에 있는 크릿 시내에서 숨어 지내라.  물은 그 시내에서 마셔라. 그리고 내가 까마귀들에게 명령하여  거기에서 너에게 먹을 것을 주도록 하겠다."(3~4)


엘리야가 하느님의 지시를 받아 피신할 장소인 '크릿'에 해당하는 '케리트'(kerith)는  '자르다'라는 뜻의 동사 '카라트'(karath)에서 유래한 지명으로서 '분리','단절'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시내는 어떤 두 지역을 분리하는 경계선 역할을 했거나 다른 지역과는 단절된 오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곳은 사람들의 발길도 뜸했을 것이며,도피의 장소로서는 적합한 곳이다.


그리고 '시냇가'에 해당하는 '뻬나할'(benahal)에서 '시내'를 뜻하는 명사 '나할'(nahal)'시내', '골짜기', '강' 등으로 번역된다. 

여기 본문에서 '나할'(nahal)우기에는 급한 여울의 시내를 이루지만, 건기에는 곧 물이 말라버리는 와디(Wadi)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크릿 시내'의 지형은 사람들이 생활하기에 불편한 이었을 것이고, 가뭄이 계속되자 엘리야는 이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열왕17,7~9).


한편, 이 '크릿 시내'가 '요르단강 동쪽'에 있다고 말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일까?

'요르단강 동쪽'은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역사적으로 의미가 깊은 장소이다.

이곳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약속의 땅인 가나안로 들어오기 직전에 머물렀던 장소로서, 하느님께서 하늘에서 내려주시는 만나로 일용할 양식을 삼았던 장소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곳에서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해서 살아가는 법을 배웠던 것이다.

또한 이곳은 모세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자신의 사명을 마친 장소이기도 했다.

따라서 이곳은 엘리야가 하느님께서 주시는 음식을 먹으면서 오직 하느님만을 의지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예언자의 사명을 수행할 것을 암시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엘리야를 '크릿 시내'로 인도하시는데, 그 이유는 일차적을 그에게 물을 공급하시기 위해서였다.엘리야가 하느님께로부터 물을 공급받아 마시는 것은 앞으로 전개될 사건들과의 연관성 속에서 상징적 의미가 있다.

즉 그동안 바알을 숭배하던 아합을 비롯한 북부 이스라엘 백성들이 앞으로 발생할 가뭄에 대해서 속수무책이었던 것에 반해서, 엘리야는 재난 가운데서도 하느님의 돌보심과 사랑으로 보존되며, 결국 바알 숭배자들과의 대결에서 승리하게 될 것을 암시하는 것이다.


한편,'까마귀들'에 해당하는 '오레빔'(orebim)은 성경에서 부정한 새로 언급되어 나온다(레위11,5; 신명기14,14).

하느님께서 사람이나 다른 큰 짐승들이 아니라 율법에서 부정한 짐승이라고 해서 사람들이 쳐다보지도 않는 '까마귀들'을 통해 하느님의 사람인 엘리야를 지켜주고 보호해 주고 살려주는 놀라운 섭리와 안배가 들어있다고 볼 수 있다.

 

까마귀는 원래 시체와 썩은 것들을 먹는  매우 게걸스러운 본성을 지닌 날짐승이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명령하시니 순종하여  엘리야에게 먹을 것을 나르게 된다.

 

이것은 자연 만물이 본성을 거슬러서라도 하느님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음을 보여주며, 본래 하느님을 섬겨야 할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거슬러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을 대적하는 현실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게 한다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제1독서(2코린1,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시며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십니다."  (3)


코린토 2서 1장 3~7절에는 위로의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감사의 고백이 나온다. 이런 내용으로 구성된 본 단락은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찬미, 찬송하리로다') 라는 감탄사로 시작된다.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로 번역된 '율로게토스'(eulogetos)의 원형 '율로게오' (eulogeo)구약에서 하느님을 찬양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히브리어 '바룩'(baruk)의 역어이다.


이것은 다니엘 3장 26절과 시편 144장 1절, 시편 41장 14절, 시편 72장 18절,  시편 106장 48절의 찬양문 말미에 나오는 표현으로서 당시 사람들에게는 매우 익숙한 표현이다.

이 표현이 등장한 후에는 일반적으로 찬양의 이유들이 열거된다.


사도 바오로 역시 찬양의 이유를 코린토 2서 1장 4~7절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 이유를 언급하기 전에 사도 바오로는 코린토 2서 1장 3절에서 자신이 찬양하는 하느님을 여러 다양한 표현으로 묘사한다.


첫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이시다.

이것은 '찬미받으시기를 빕니다'라는 표현이 더 이상 유다교적 송영이 아니라 그리스도교적 의미를 드러낸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구약에 유다인들이 믿었던 하느님, 곧 유다인 조상들의 하느님이 이제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육화(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알려진 것이다(갈라4,4).


에페소서 1장 3절과 베드로 1서 1장 3절'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느님'에서도 볼 수 있듯이 신약 성경 곳곳에서 이 표현이 널리 사용되고 있다는 것이 초대 교회 당시 예배나 기도에 매우 널리 사용되었음을 암시한다.

 

둘째, '그분은 인자하신 아버지'이시다.

이 표현은 지혜서 9장 1절에 나오는 '자비의 주님'('퀴리오스 투 엘레우스'; kyrios tu elleus)이란 표현을 연상시키는데, 이것은 유다교 종교 의식에 사용된 전례적 표현에 속한다.


당시 회당 예배에서 사용되던 기도문은 보통 '오, 우리 아버지, 자비로우시며 너그러우신 아버지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로 시작했다.

 

사도 바오로는 여기서 '자비'를 뜻하는 표현으로 유다인들이 주로 사용하던 '엘레오스'(elleos)를 사용하지 않고 '오익티르몬'(oiktirmon)을 사용했는데, 그 의미는 같다.

이것은 히브리어 '라하밈'(rahamim)의 역어이며, 사도 바오로가 즐겨 쓰던 단어이다(로마12,1; 필리2,1).


'라하밈'은 본래 몸 속의 내장을 지칭하는 단어인데, 불쌍한 자를 보면 내장까지 뒤틀릴 정도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긴다고 해서 '불쌍히 여김', '동정', '연민', '긍휼'이라는 의미가 여기에서 파생되었다.

따라서 '오익티르몬'의 아버지라는 표현 삶의 실오라기 한 줄 같은  희망까지 끊어지게 했던 숱한 환난과 역경 가운데서 사도 바오로가 생생하게 체험했던 자비로우신 하느님께 대한 묘사이다.


세째, '모든 위로의 하느님'이시다.

여기서 '위로의'로 번역된 '파라클레세오스'(parakleseos)의 원형 '파라클레시스'(paraklesis)는 문자적으로 '곁에서 부름받음'이라는 뜻이며, 하느님의 내적 속성인 자비가 외적인 행위로 구체와 됨을 나타내는 표현으로서, 코린토 2서에서 자주 등장한다(2코린 2,8; 5,20; 16,1; 8,4.6.17; 9,5; 10,1; 12,8.18).


이 표현은 특히 이사야서 40장 1절, 51장 3절, 12절, 19절에서도 등장하는데, 거기서는 주로 메시아적 전문 술어로 사용된다.


사도 바오로가 코린토 2서 1장 3절에서 이 단어를 사용하는 것은 자신에 대한 위로와 구원을 총체적인 메시아적 구원에 결부시켜 파악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또한 이것은 사도 바오로가 단순히 환난 가운데서 위로받았음을 의미뿐만 아니라 그러한 환난으로부터 구출받았다는 사실도 나타낸다(2코린1,4~7).


특히 이 '위로'란 표현을 코린토 2서 1장 3~7절에서 10회나 사용함으로써, 사도 바오로 자신이 하느님의 위로를 깊이 체험했으며, 이에 대해 감동과 감격을 하고 있음을 잘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파라클레시스'는 성령 하느님의 속성 중 하나이다.


이런 관계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을 '파라클레토스'(위로자, 협조자, 변호자, 상담자 등등)로 불렀다(요한14,26).

사도 바오로는 제3위 성령 하느님의 역사하심을 통해 성부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를 경험했던 것이다



 연중 제10주간 월요일 복음(마태5,1~12)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받을 상이 크다.  사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를 받았다." (11~12)


마태오 복음 5장 11~12절은 10절에 나오는 여덟번 째 행복의 보충 내용이기도 하지만, 더 나아가서는 3절~10절까지의 전체 팔복(八福)의 보충 내용으로서의 성격이 있다.


특히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로움 때문에'해당하는 '헤네켄 디카이오쉬네스'(heneken dikaiosynes; for righteousness)와 비교할 때, '~때문에', '~을 위하여' 라는 뜻을 지니는 '헤네켄'(heneken; for)동일하고, 다만 '의로움'(디카이오쉬네스; dikaiosynes)이 '나'(에무; emou; me)로 바뀌어진 것만 차이가 있다.


사실 마태오 복음 5장 6절과 10절에 나오는 '의로움' 해당하는 '디카이오쉬네'(dikaiosyne; righteousness)윤리적인 의로움인 동시에 인간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종교적인 의로움이다.

죄인을 심판하고 멸하시며 의인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심판과 구원의 기준인 '공의'(公義)로 이해하는 것이다.


하지만 마태오 복음 5장 10절의 '의로움'은 6절보다 종교적인 측면이 더 강한 의로움이며, 인간으로 하여금 구원에 이르게 하는 하느님의 의로움으로서, 궁극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의로운 삶은 바로 '의로움', '의'(義)의 전형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삶이며,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서 박해를 받는다는 뜻과 동일한 것이다.


한편 마태오 복음 5장 3~10절까지 나오는 팔복(八福)의 서술에서는 모두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토이'(autoi; they)3인칭 남성 복수 주격 인칭대명사가 사용되었다.

그러나 마태오 복음 5장 11절과 12절에서는 '너희'에 해당하는 '휘마스'(hymas; you)라는 2인칭 복수 대명사가 나온다.

이렇게 인칭이 바뀐 것은 지금까지 말했던 객관적인 진리를 이제는 예수님 앞에 있는 제자들에게 적용시키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마태오 복음의 일차적 독자였던 초대 교회 시대의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이 당면한 현실, '모욕과 박해를 당하고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들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도 미래에 주어질 하느님의 상을 바라보면서, 결코 좌절하지 말 것을 교훈하기 위한 목적도 들어 있는 것이다.


유다계 그리스도인들은 당시 유다인들로부터 하느님의 거룩함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자로 취급되어 극심한 박해를 받았고, 또한 로마 지배 세력으로부터 황제 숭배를 거부한다는 반국가사범이란 죄목으로 잔인하게 처형당했으며, 일반 믿지 않는 대중들로부터는 자신들의 믿음 생활 때문에 질시받고 부도덕한 자들로 매도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마태오 복음 5장 11절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으로 말미암아 당하는 고난을 삼중적으로 표현하여 강조하셨는데, 이러한 극심한 고난을 당할 때 사람들은 실의에 빠져 애통해할 수 밖에 없기에, 이제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두 번 거듭 명령형 사용해서 이러한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것을 제자들에게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기뻐하고'에 해당하는 '카이레테'(chairete; rejoice)의 원형 '카이로'(chairo)'기뻐하다', '안녕하다'는 뜻으로서, 마음에 기쁨이 넘쳐나며 행복에 겨운 상태를 표현하는 단어이다.

그리고 '즐거워하여라'에 해당하는 '아갈리아스테'(agalliasthe; be glad)의 원형 '아갈리아오'(agalliao)'영화롭게 하다', '높이다'는 뜻이 있는 '아갈로'(agallo)'뛰다', '솟아나다'는 뜻이 있는 '할로마이'(hallomai)의 합성어로서 밖으로 넘쳐나오는 기쁨을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희열을 느끼는 을 뜻한다.

특히 이 두 단어가 모두 현재형으로 쓰인 것 지금 극한 고난의 상황에 있어도 그 기쁨이 넘쳐나야 함을 보여 준다.


이런 의미에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 박해는 절망과 고난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장차 받게 될 영광과 기쁨의 약속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5장 12절에서 '상'으로 번역된 '미스토스'(misthos; reward)'품삯', '임금', '보상'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는데, 박해를 이겨낸 공로에 대한 '보상'으로 이 상이 주어진다고 볼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기준이 아닌 당신의 기준에 다라 각자에게  적절한 상을 주신다(마태20,1~16; 루카17,7~10).

또한 그리스도를 위해 박해를 받는 자에게 '상이 크다'는 약속에서 '크다'에 해당하는 '폴리스'(polys; great)는 크기가 크다(large)는 뜻이 아니라 양이 아주 많은 (much) 것을 뜻한다.


이것은 천국에서 다른 사람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많은 상을 받는다는 뜻이 아니라 지상의 어떤 보상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갖가지 보상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따라서 믿는 이들은 극한 고난 가운데서도 미래에 종말론적으로 주어질 이 상을 바라보며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가 있는 것이다.


끝으로, 믿는 이들이 고난 가운데서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가 추가적으로 설명되고 있다.

'너희에 앞서 예언자들도'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은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해 박해받았던 사실을 회상케 하며, 지금 이 설교를 듣고 있는 자들도 '나 때문에'(마태5,11) 즉 그리스도 때문에 고난을 받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 준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과 하느님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과거에 예언자들이 하느님을 위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헌신했듯이, 이제는 제자들이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신 그리스도 당신 자신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하여 헌신할 것을 촉구하시는 것이다



 거꾸로 찾아가는 행복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 슬퍼하는 사람, 온유한 사람,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 자비를 베푸는 사람, 마음이 깨끗한 사람, 평화를 위하여 일하는 사람, 옳은 일을 하다가 박해를 받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이처럼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행복은 세상살이 하는 우리네 가치 기준과 전혀 다릅니다. 

정신적 만족과 물질적 풍요를 추구하고, 주기보다는 받고 싶어 하고, 슬픔과 고통보다는 기쁨을 맛보며 살고 싶어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바람이지요. 따라서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자면 마음부터가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뜻은 분명합니다. 

진정 행복해지고 싶거든 세상을 거슬러가야 한다는 것이고, 물질 중심과 인간 중심적 사고와 행동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행복의 원천이 세상이나 인간적인 것들에 있지 않다는 말씀입니다. 나아가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 또한 물질의 소유나 육신의 쾌락과 욕구 충족에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참 행복은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과 함께 있을 때에 가능한 것입니다. 사람은 관계를 맺는 대상으로 채워지고 그것을 닮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재물에 눈이 멀면 그 사람은 인간성을 상실하고 물건이 되어가겠지요. 먹고 마시는 것에 중독이 되면 영적 시각을 잃어버리고 육신의 만족을 정신없이 추구할 것입니다. 다른 이들의 말과 반응에 촉각을 세우고 살아가면 사람에게 매이게 됩니다. 

참된 행복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바로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알려주시는 길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어디를 향해야 하고 또 무엇을 추구하며, 어떤 존재와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하는가를 알려주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나를 참 행복으로 이끌어주심을 믿는다면 오늘 당장 내 삶의 방향과 사고방식을 ‘거꾸로’ 뒤집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역설적으로 하느님 때문에 핍박을 받고, 하느님의 일에 참여하는 이들 곧, 자비를 베푸는 이들,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평화를 이룩하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축복을 받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건 분명 세상적 관점에서는 엄청난 손해요 바보짓이지요. 

그러나 참 행복을 원한다면 세상 논리나 사고방식과 처세를 거슬러 하느님의 진리와 사랑으로 핍박을 견디어내고, 하느님을 위해 하느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이렇게 하느님 때문에 거꾸로의 인생을 살려면 모든 것이 하느님으로부터 오며 주님만이 내 행복의 원천임을 믿는 가난한 마음이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도 하느님을 찾아가는 가난한 순례자로서 하느님을 받아들이기 위해서 자신의 욕망을 버리고 하느님께 의지하는 겸손한 마음을 지녀야겠습니다. 왜냐하면 행복의 근원인 하느님을 소유하고 그분과 함께 있는 것보다 더한 행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아가 영의 가난을 자비로 실천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비를 받으려면 먼저 자비를 실행하는 사람이 되어야겠지요. 자비는 우리의 허물을 씻어주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는 지름길임을 기억하여, 자비를 공동선을 위한 사회적 사랑으로 표현되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오늘도 헛되고 헛된 현세의 가치와 물질에 휘둘리지 말고 '거꾸로'의 행복을 찾는 복된 날이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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