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금요일]나를 따라라 (마태9,9-13)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사라를 안장하고, 그의 고향으로 종을 보내 레베카를 데려오게 하여 아들 이사악의 아내로 맞아들이게 한다. (창세 23,1-4.19; 24,1-8.62-67)
1 사라는 백이십칠 년을 살았다. 이것이 사라가 산 햇수이다.
2 사라는 가나안 땅 키르얏 아르바 곧 헤브론에서 죽었다. 아브라함은 빈소에 들어가 사라의 죽음을 애도하며 슬피 울었다.
3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죽은 아내 앞에서 물러 나와 히타이트 사람들에게 가서 말하였다.
4 “나는 이방인이며 거류민으로 여러분 곁에 살고 있습니다. 죽은 내 아내를 내어다 안장할 수 있게, 여러분 곁에 있는 묘지를 양도해 주십시오.”
19 그런 다음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 마므레, 곧 헤브론 맞은쪽 막펠라 밭에 있는 동굴에 자기 아내 사라를 안장하였다.
24,1 아브라함은 이제 늙고 나이가 무척 많았다. 주님께서는 모든 일마다 아브라함에게 복을 내려 주셨다.
2 아브라함은 자기의 모든 재산을 맡아보는, 집안의 가장 늙은 종에게 말하였다. “네 손을 내 샅에 넣어라.
3 나는 네가 하늘의 하느님이시며 땅의 하느님이신 주님을 두고 맹세하게 하겠다. 내가 살고 있는 이곳 가나안족의 딸들 가운데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지 않고, 4 내 고향, 내 친족에게 가서 내 아들 이사악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오겠다고 하여라.”
5 그 종이 아브라함에게 물었다. “그 여자가 저를 따라 이 땅으로 오려고 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제가 아드님을 나리께서 떠나오신 그 땅으로 데려가야 합니까?”
6 그러자 아브라함이 그에게 대답하였다. “너는 내 아들을 그곳으로 데려가는 일이 없도록 조심하여라.
7 하늘의 하느님이신 주님, 곧 나를 아버지의 집과 내 본고장에서 데려오시고, ‘내가 네 후손에게 이 땅을 주겠다.’고 나에게 말씀하시며 맹세하신 그분께서 당신 천사를 네 앞에 보내시어, 네가 그곳에서 내 아들의 아내가 될 여자를 데려올 수 있게 해 주실 것이다.
8 그 여자가 너를 따라오려고 하지 않으면, 너는 나에게 한 맹세에서 풀리게 된다. 다만 내 아들만은 그곳으로 데려가서는 안 된다.”
세월이 흘러 62 이사악은 브에르 라하이 로이를 떠나, 네겝 땅에 살고 있었다.
63 저녁 무렵 이사악이 들에 바람을 쐬러 나갔다가 눈을 들어 보니, 낙타 떼가 오고 있었다.
64 레베카도 눈을 들어 이사악을 보고서는 얼른 낙타에서 내려, 65 그 종에게 물었다.
“들을 가로질러 우리 쪽으로 오는 저 남자는 누구입니까?” 그 종이 “그분은 나의 주인입니다.” 하고 대답하자, 레베카는 너울을 꺼내어 얼굴을 가렸다.
66 그 종은 이사악에게 자기가 한 모든 일을 이야기하였다.
67 이사악은 레베카를 자기 어머니 사라의 천막으로 데리고 들어가서, 그를 아내로 맞아들였다. 이사악은 레베카를 사랑하였다. 이로써 이사악은 어머니를 여읜 뒤에 위로를 받게 되었다.
아모스 예언자는 빈곤한 이를 짓밟는 자들에게,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날이 올 것이라고 전한다. (아모 8,4-6.9-12)
4 빈곤한 이를 짓밟고, 이 땅의 가난한 이를 망하게 하는 자들아, 이 말을 들어라!
5 너희는 말한다. “언제면 초하룻날이 지나서 곡식을 내다 팔지? 언제면 안식일이 지나서 밀을 내놓지? 에파는 작게, 세켈은 크게 하고, 가짜 저울로 속이자.
6 힘없는 자를 돈으로 사들이고, 빈곤한 자를 신 한 켤레 값으로 사들이자. 지스러기 밀도 내다 팔자.”
9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그날에 나는 한낮에 해가 지게 하고, 대낮에 땅이 캄캄하게 하리라.
10 너희의 축제를 슬픔으로, 너희의 모든 노래를 애가로 바꾸리라. 나는 모든 사람이 허리에 자루옷을 두르고, 머리는 모두 대머리가 되어, 외아들을 잃은 것처럼 통곡하게 하고, 그 끝을 비통한 날로 만들리라.
11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12 그들이 주님의 말씀을 찾아, 이 바다에서 저 바다로 헤매고, 북쪽에서 동쪽으로 떠돌아다녀도 찾아내지 못하리라.
예수님께서는 세관에 있던 마태오를 부르시고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며,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하신다. (마태9,9-13)
그때에 9 예수님께서 길을 가시다가 마태오라는 사람이 세관에 앉아 있는 것을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마태오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
10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탁에 앉게 되셨는데, 마침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 11 그것을 본 바리사이들이 그분의 제자들에게 말하였다. “당신네 스승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
12 예수님께서 이 말을 들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튼튼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13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 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제1독서 (아모8,4-6,9-12)
"보라, 그날이 온다.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내가 이 땅에 굶주림을 보내리라.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주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여 굶주리는 것이다. "
앞선 아모스서 8장 4~6절에서는 타락한 선민의 대표로서의 북부 이스라엘 왕국의
지배층을 향하여 주 하느님 심판의 원인으로서의 저들의 악행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아모스서 8장 7~10절에서는 저들의 악행을 결코 잊지 않으시는
주 하느님께서 하늘이 놀라고 땅이 움직이는 심판을 내리실 것이며,
이로 인하여 백성들이 애통할 것을 예고하였다.
이제 아모스서 8장 11절이하 13절에서는 심판날이 반드시 도래한다는
사실과 더불어 그때에는 말씀이 단절될 것을 경고한다.
이러한 내용을 시작하는 본문은 '주 하느님의 말씀이다'라는 표현보다
'보라, 그날이 온다'라는 표현이 먼저 나온다.
하느님의 말씀을 인정하지 않고 우상을 섬기기를 마지않던 자들이
멸망하는 날이 올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는 아모스서 8장 11절부터 13절까지
단락의 첫 부분에서 '보라'라는 의미의 감탄사를 가장 먼저 기록한 것은
새로운 단락이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동시에 청중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리고 이에 이어지는 '그날이 온다' 에 해당하는 '야밈 빠임'(yamim baim)에서
'빠임'(baim)은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뽀'(bo)의 분사형이다.
분사형은 문맥에 따라 과거, 현재 혹은 미래의 의미를 모두 가질 수 있지만,
본문에서처럼 '힌네'(hinne; 보라)와 같은 감탄사와 함께 사용되는 경우에는
모두 미래적 의미를 가질 뿐만 아니라 단순한 미래에 대한 예상이 아닌,
예언자에 의해 선포되는, 반드시 성취될 미래에 독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도록 하기 위해 사용되는 것이 보통이다.
즉 본문은 북부 이스라엘에 대한 심판날이 올 것이라는 사실을
아모스서 8장 11~13절의 맨 앞에 기술함으로써 그것을 확실히 선언하고
그것의 성취를 강조한 것이다.
'양식이 없어 굶주리는 것이 아니고, 물이 없어 목마른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범죄한 이스라엘에 심판으로 보내실
기근의 성격을 설명하는 내용이다.
본절 상반절의 하느님께서 내리신 '굶주림'(기근)이라는 표현이나
본문의 '양식'이라는 표현은 모두 '라아브'(laab)로 동일하다.
창세기 41장 54절 등에서 '흉년'이라는 의미로 번역된 '라아브'(laab)는
개인적 가난이나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하여 굶주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보다
자연적 재해나 인위적 전쟁등으로 인해 국가적으로
굶주릴 수밖에 없는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이 기근이나 주림은 개인적 노력으로는 결코 피할 수 없는
재앙의 결과인 것이다.
또한 '양식'에 해당하는 '레헴'(lehem)은 장기적 생존을 위해
넉넉하게 쌓아 둔 양식이라는 의미보다 하루 정도의 식사를 의미하는
빵(떡)으로 번역되는 단어로서(창세18,5; 판관8,5),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상적으로 먹는 기본적 식사를 가리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영역본들은 '레헴'을 '빵'(bread) 혹은 '음식'(food)이라고 번역하였다.
즉 본문이 말하는 먹을 것의 부족은 쌓아 놓은 양식이 없어서
앞으로가 걱정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당장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할 수 없을 정도로 매우 긴박한 상황을 나타낸 것이다.
또한 물이 없어 목마르다는 표현에서 '목마름'(갈증)에 해당하는
'차마'(tsama)라는 표현도 전쟁 등으로 인해 마실 물이 없어
당장 사람이 목말라 죽어가는 긴박한 상황을 묘사하는 경우에
사용되는 표현이다(애가4,4; 호세2,3).
그런데 본문은 하느님께서 보내신 기근이 이러한 양식이나
물을 먹지 못한 기근이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굶주림과 갈증이 없을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이것은 하느님 심판의 근본적 원인이 육신을 위한 양식과 물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이 아니고, 하느님의 말씀을 먹지 못해서 생긴 기근 때문임을 나타내며,
육식의 양식과 물보다 영적인 양식, 즉 주 하느님의 말씀의 중요성과
그것을 지금 당장이라도 취해야 한다는 긴박성을 동시에 나타낸다.
이상 본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은 가르침을 준다.
첫째, 인간 존재가 먹고 마시는 일과 관련한 육체적 필요만을
충족해서 살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영적인 양식과 영적인 음료인 하느님의 말씀이며,
이것을 먹고 마셔야 살아갈 수 있음을 보여준다(신명8,3; 마태4,4).
둘째, 하느님의 말씀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므로
하느님의 말씀이 기근이라는 표현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떠났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이것은 더 이상 이스라엘이 하느님의 보호하심과 자비로이 여기심,
하느님의 은혜를 받을 수 없게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즉 하느님의 떠나심은 먹을 것이나
마실 물로 인한 기갈보다 더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다.
북부 이스라엘 사람들은 먹을 것이나 마실 것만을 추구하였지만,
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느님께 대해서는
추구하지도 않고 순종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어리석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들을 핍박하며
심지어 그들의 말씀 선포를 가로막기까지 하였다(아모 7,13; 12,12).
북부 이스라엘에 닥칠 심판은 단지 먹을 것과 마실 것이 바닥나서
발생한 기근이 아니고, 이처럼 하느님의 말씀을 추구하기는커녕
거부하고 배척한 북부 이스라엘의 교만이 자초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연중 제13주간 금요일 복음 (마태9,9-13)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다." (12)
이 구절은 세리,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는 예수님의 행위를 비난하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에게 예수님께서 일침을 가하시는 대목이다.
예수님께서는 이 비유를 통해 메시야이신 당신의 사명이 바로 스스로 죄인임을 인정하는 이들을 불러 회개시키러 온 것임을 밝히고 있다.
여기서 '건강한'에 해당하는 '휘기아이논테스'(hygiainontes; healthy; whole)는 '건전하다', '바르다', '참되다'는 뜻을 지닌 '휘기아이노'(hygiaino)의 현재 분사로서, 육체적으로 건강하다는 뉘앙스를 지니고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 윤리적으로 바르다'는 뉘앙스를 더 강하게 띄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말씀하시는 스스로 '건강한 이들'이란, 종교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이들이 아니다.
많은 문제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지 스스로 올바르다고 자부하면서, 인간의 영적 악함을 깨끗하게 하러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불필요하다고 하며 거부하는 이들을 말한다.
이들은 바로 당시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비방하던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 그리고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모두 지칭하며, 그 외에도 예수님을 필요하지 않다고 거부하는 영적으로 교만한 자들 모두를 포함한다.
그리고 '병든'에 해당하는 '카코스'(kakos; sick)도 육체적으로 병들고 허약한 것 뿐만 아니라 도덕적으로 악한 것을 의미하는 단어이기에, '병든 이들'이라는 표현에도 '죄인들'이라는 뜻이 있다.
이들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정해 놓은 종교적 기준에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로서, 하느님 대전에 진실로 구원자를 필요로 하여 자신의 죄에 대해 가슴을 치는 모든 이들을 가리킨다.
'의사'에 해당하는 '이아트루'(iatrou; a physician; a doctor)이신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들을 위해 오신 분이며, 마태오 복음에서 잔치에 초대되어 온 모든 죄인들도 그 중에 포함될 것이다.
자신을 죄인으로 인정하며, 예수님이 구원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죄인들은 예수님께 선택 받을 수 있지만,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처럼 계속해서 자신들의 의로움을 자랑하며 율법주의와 형식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이들은 구원자이신 예수님의 선택에서 영원히 제외될 것이다.
'회개시키러'로 번역된 '메타노이아'(metanoia)는 '마음을 고치다'라는 동사 '메타노에오'(metanoeo)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마음을 바꿈'이라는 뜻이다.
루카 복음 5장 31절에서 예수님께서 막연히 죄인들을 선택하신 것이 아님을, 루카 복음 5장 32절에서 죄인들을 선택한 목적을 분명하게 언급하시면서 밝히신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를 인식하고 참회하는 죄인들의 마음을 고쳐서 새롭게 만들기 위해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이 부정하게 여겨 접촉하는 것을 꺼리는 죄인들과 함께 친교를 나눔을 밝히신 것이다.

♣ 단죄와 배척이 아닌 서로를 품는 자비 ♣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오신 까닭과 제자의 소명이 무엇인지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예수님께서 집에서 식사를 하실 때 “많은 세리와 죄인도 와서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습니다.”(9,10) 그분께서는 죄인의 구원하시려고 그들과 함께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의인으로 자처하는 이들보다 죄인 취급을 받는 의지할 데 없는 ‘공적인’ 죄인을 부르러 오셨습니다. 율법을 지키지 않는 이들을 죄인으로 낙인 찍어 상종하지도 않던 바리사이들은 이를 못마땅하게 여깁니다. 그들은 죄인들과 세리들을 종교생활에서 배제하고 회개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습니다. 경건한 사람이 이런 부류와 함께 식사하는 것은 매우 수치스러운 일로 보았습니다(바빌론 탈뭇 브라콧 43b).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세리들과 함께 음식을 나누는데 반발한 바리사이들을 탓할 수 없는 듯 보입니다. 왜냐하면 예언자 아모스는 사업상의 거래에서 속임수를 쓰고 가난한 사람을 등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단죄한 바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모스의 단죄는 회개를 유도하기 위한 경고였을 뿐이었는데 그들은 결정적으로 단죄해버린 것입니다.
바리사이와는 달리 예수님께서는 죄인들을 가까이 대하시고 사랑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심으로써 그들에게 용서와 화해의 가능성을 보이시면서 회개를 호소하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이스라엘 백성 모두를 품으시려고 애쓰셨지만 특히 소외된 사회적 약자들에게 애정을 쏟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것입니다.”(9,13)
우리는 관계 속에 살아가면서 죄로 기우는 경향 때문에 죄를 짓고 살아갑니다. 여기서 두 종류의 죄인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는 마음이 굳어져 후회할 줄 모르는 죄인입니다. 그들은 어떤 잘못에도 양심의 가책이나 괴로움을 느끼지 않고 자기 허물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회개의 필요성도 전혀 느끼지 않고 스스로 의롭다고 믿으며 하느님과 무관하게 살아갑니다.
또 다른 부류는 자신의 비참함을 알고 하느님의 자비를 구하는 이들입니다. 우리 모두 죄인인 우리를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회개에로의 부르심에 마음을 열어야겠습니다. 주님의 자비 앞에서 죄를 인정하고, 영혼의 치유자이신 그분의 자비에 맡길 줄 알아야겠지요.
오늘 복음에 비추어 신앙공동체의 삶과 사회생활에 대해서도 성찰해 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를 보기 보다는 남의 죄에 민감하고, 또 자신의 잘못에 대해서는 한없이 너그러우면서도 남의 작은 허물조차 참지 못하는 바리사이의 탈을 쓰고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봐야 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죄인과 의인을 가르고, 은연중에 죄인을 공동체의 삶에서 배제시키는 일이 없어야겠습니다. 어떤 때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오히려 더 냉정하고 가혹한 ‘낙인찍기’를 하고 있음을 보기도 합니다. 한 번 실수하면 헤어나지 못하고, 틈만 나면 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들춰내고 어떤 책임이나 봉사에서도 배제시키는 경우들이 종종 일어나기도 하지요.
무릇 ‘죄인을 부르러 오신’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오히려 신앙공동체에서나 사회생활 중에 죄나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이 그 공동체의 넘치는 사랑으로 다시 새롭게 시작할 수 있어야겠지요. 회개는 가혹한 단죄나 처벌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손길 안에서 더 깊이 그리고 더 빨리 일어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 모두 영혼의 어둠 속을 헤매는 죄인임을 고백하면서 서로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전하고 나누는 ‘상처입은 치유자’가 되도록 배척하고 단죄하는 마음을 버리고 하느님의 자비를 청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