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3주간 토요일]새 술은 새 부대에 (마태 9,14-17)

야곱은 어머니 레베카의 도움으로 아버지 이사악이 맏아들인 에사우에게 내리려던 축복을 받는다. (창세 27,1-5.15-29)
1 이사악은 늙어서 눈이 어두워 잘 볼 수 없게 되었을 때, 큰아들 에사우를 불러 그에게 “내 아들아!” 하고 말하였다. 에사우가 “예, 여기 있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2 그가 말하였다. “네가 보다시피 나는 이제 늙어서 언제 죽을지 모르겠구나.
3 그러니 이제 사냥할 때 쓰는 화살 통과 활을 메고 들로 나가, 나를 위해 사냥을 해 오너라.
4 그런 다음 내가 좋아하는 대로 별미를 만들어 나에게 가져오너라. 그것을 먹고, 내가 죽기 전에 너에게 축복하겠다.”
5 레베카는 이사악이 아들 에사우에게 하는 말을 엿듣고 있었다. 그래서 에사우가 사냥하러 들로 나가자,
15 레베카는 자기가 집에 가지고 있던 큰아들 에사우의 옷 가운데 가장 값진 것을 꺼내어, 작은아들 야곱에게 입혔다.
16 그리고 그 새끼 염소의 가죽을 그의 손과 매끈한 목둘레에 입힌 다음,
17 자기가 만든 별미와 빵을 아들 야곱의 손에 들려 주었다.
18 야곱이 아버지에게 가서 “아버지!” 하고 불렀다. 그가 “나 여기 있다. 아들아, 너는 누구냐?” 하고 묻자,
19 야곱이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저는 아버지의 맏아들 에사우입니다. 아버지께서 저에게 이르신 대로 하였습니다. 그러니 일어나 앉으셔서 제가 사냥한 고기를 잡수시고, 저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20 그래서 이사악이 아들에게 “내 아들아, 어떻게 이처럼 빨리 찾을 수가 있었더냐?” 하고 묻자, 그가 “아버지의 하느님이신 주님께서 일이 잘되게 해 주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1 이사악이 야곱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오너라.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인지 아닌지 내가 만져 보아야겠다.”
22 야곱이 아버지 이사악에게 가까이 가자, 이사악이 그를 만져 보고 말하였다. “목소리는 야곱의 목소리인데, 손은 에사우의 손이로구나.”
23 그는 야곱의 손에 그의 형 에사우의 손처럼 털이 많았기 때문에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그에게 축복해 주기로 하였다.
24 이사악이 “네가 정말 내 아들 에사우냐?” 하고 다져 묻자, 그가 “예, 그렇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25 그러자 이사악이 말하였다. “그것을 나에게 가져오너라. 내 아들이 사냥한 고기를 먹고, 너에게 축복해 주겠다.” 야곱이 아버지에게 그것을 가져다 드리니 그가 먹었다. 그리고 포도주를 가져다 드리니 그가 마셨다.
26 그런 다음 아버지 이사악이 그에게 말하였다. “내 아들아, 가까이 와서 입 맞춰 다오.”
27 그가 가까이 가서 입을 맞추자, 이사악은 그의 옷에서 나는 냄새를 맡고 그에게 축복하였다.
“보아라, 내 아들의 냄새는 주님께서 복을 내리신 들의 냄새 같구나.
28 하느님께서는 너에게 하늘의 이슬을 내려 주시리라. 땅을 기름지게 하시며 곡식과 술을 풍성하게 해 주시리라.
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오면 당신 제자들도 단식할 것이라고 하시며,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고 하신다. (마태 9,14-17)
14 그때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 하고 물었다.
1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16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17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제1독서(창세27,1~5.15~29)
"뭇 민족이 너를 섬기고, 뭇 겨레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는 네 형제들의 지배자가 되고, 네 어머니의 자식들은 네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에게 축복하는 자는 복을 받으리라." (29)
'너를 섬기고'로 번역한 '야아브두카'(yaabduka)의 원형 '아바드'(abad)는 '일하다'(탈출20,9), '봉사하다', '섬기다'(1사무4,7)의 의미이다.
또한 '무릎을 꿇으리라'로 번역한 '웨이쉬타하우'(weishithahau)의 원형 '샤하'(shaha)는 '숙이다', '굽히다', '엎드리다'(이사51,23)는 의미인데, 여기서는 강조 재귀형으로 사용되었다.
이 경우 '샤하'는 '하느님께 기도로 영광돌리다', '하느님께 경의를 표하며 절하다' (1열왕1,47)는 뜻도 있지만, '사람을 향해 존경과 경의를 표시하다'(시편45,12)는 뜻도 가진다.
따라서 이 구절은 장차 뭇 민족들이 야곱 후손들을 위해 노동과 수고로 봉사하며 또한 야곱 후손들이 이방 민족들로부터 크게 존경과 영광을 받게 되리라는 예언이다.
이 예언대로 야곱의 후손들은 나중에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세웠고, 다윗과 솔로몬 때는 이웃 나라들로부터 조공을 받는 등 크게 융성했다.
그러나 이것은 단순히 혈육적인 야곱 후손인 이스라엘만을 위한 축복이 아니라 영적으로 재해석되어야 한다.
즉 야곱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제들의 나라가 되고 거룩한 민족이 된 것처럼 (탈출19,5.6), 야곱의 혈통을 이어받아 이 세상에 오신 하느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사탄의 세력을 굴복시키시고, 우리를 임금의 사제단과 거룩한 민족, 그분의 소유가 된 백성으로 삼으셨다(1베드2,9).
이런 차원에서 이 구절은 과거에 베풀어지고 끝난 축복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영적으로 야곱의 후손이 된 모든 하느님의 백성을 향한 축복의 약속이기도 한 것이다.
시편 104장 15절의 '행복하여라, 이렇게 되는 백성! 행복하여라, 주님을 하느님으로 모시는 백성!'이라는 말씀대로, 주님을 하느님으로 알고 하느님만을 참된 신(神)으로 섬기는 백성은 이렇게 영육간에 크고 풍성한 축복을 약속받는 자들이 된다.
'너를 저주하는 자는 저주를 받고'
'너를 저주하는 자는'로 번역한 '오르레카'(orreka)에서 '저주하다'에 해당하는 '아라르'(arar)는 마음으로 증오하고 입으로 저주하는 행위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저주를 이루기 위해 목적을 가지고 훼방하는 모든 행위를 다 포함한다.
더군다나 여기서 '오르레카'(orreka)는 능동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현재 행위가 중단되지 않고 계속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결국 야곱의 후손을 망하게 하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집요하게 저주하고, 끊임없이 행동을 훼방하는 것을 말한다.
이사악은 이렇게 계약의 자손들을 훼방하고 저주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대신하여 저주를 내리고 심판해 주실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들의 발이 비틀거릴 때 복수와 보복은 내가 할 일, 멸망의 날이 가까웠고 그들의 재난이 재빨리 다가온다.'(신명32,35)
이러한 약속은 신약 시대의 계약의 계승자인 성도들에게도 그대로 계속된다.
'사랑하는 여러분, 스스로 복수할 생각을 하지 말고 하느님의 진노에 맡기십시오. 성경에서도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하고 주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로마12,19)
'저주를 받고'로 번역한 '아루르'(arur)는 수동 분사형으로 사용되어 과거적 의미를 담고 있어서, 직역하면 '저주를 받았고'이다.
하느님의 백성을 저주하며 훼방하는 자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전능하신 능력과 절대적 권세로써 심판하시므로, 이런 자는 이미 하느님의 저주 아래 있으며, 저주를 받은 것과 다름이 없다는 사실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하느님의 백성은 이미 저주 아래 놓인 자를 직접 대적해서 실수를 자초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연중 제13주간 토요일 복음 (마태9,14-17)
"아무도 새 천 조각을 헌 옷에 대고 꿰매지 않는다. 헝겊에 그 옷이 땅겨 더 심하게 찢어지기 때문이다. 또한 새 포도주를 헌 가죽 부대에 담지 않는다. 그렇게 하면 부대가 터져 포도주는 쏟아지고 부대도 버리게 된다. 새 포도주는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 그래야 둘 다 보존된다." (16~17)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신랑을 빼앗길 날'은 예수님의 죽음을 예고하는 표현이다.
여기서 '빼앗길'에 해당하는 '아파르테'(aparthe; will be taken)는 '~로 부터' (from)라는 의미를 지니는 전치사 '아포'(apo)와 '들어올리다', '가져가다'는 뜻이 있는'아이로'(airo)의 합성어인 '아파이로'(apairo)의 가정법 부정(不定) 과거이다.
여기서 부정(不定)과거(Aorist)가 쓰인 것은 이 일이 반드시 일어날 것임을 드러낸다.
마태오 복음을 읽는 초대 교회 유다계 크리스찬들은 이미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을 경험했으므로, 이 단어의 상징적인 뜻을 충분히 알고 있었을 것이다.
A.D.100년경에 기록된 것으로 보이는 '12사도의 가르침'인 '디다케'(didache)를 보면, 바리사이들이 단식하던 월요일과 목요일이 아니라 수요일과 금요일에 단식하는 새로운 전통을 당시 그리스도인들이 세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신 초대 교회 시대에 마태오 복음 9장 15절의 가르침대로 단식이 시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예수님을 잃은 인간적인 슬픔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아드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인간의 죄악을 슬퍼하며 그 죄를 보속하고, 무죄하신 예수님의 고통에 동참하기 위해 단식을 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래서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믿는 그리스도인들의 단식은 아직도 메시야가 도래하기를 기다리는 유다 공동체들의 단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유다인들의 형식적이고 위선으로 치우친 단식에 대해 현실의 삶 속에서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단식이라고 비판했다.
그가 강조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단식은 자신의 삶이 변화되고 이웃을 사랑하게 하는 단식인데, 복음의 윤리적인 면이 동반되는 단식이었다(이사58,6).
한편, 마태오 복음 9장 16절에서 '헌 옷'에 해당하는 '히마티오 팔라이오'(himatio palaio; an old garment)는 형식적이며 경직된 이전의 모든 구질서와 낡은 가르침을 의미하며, '새 천 조각'에 해당하는 '에피블레마 라쿠스 아그나푸'(epiblema rakous agnaphou; a patch of unshrunk cloth; a piece of new cloth)는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시작된 새 질서와 새 가르침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아직 줄어들지 아니한 새 옷감을 헌 옷감에 대어 기워놓으면, 당장에는 쓸모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옷을 물로 세탁할 경우에 새 옷감이 줄어 들면서 헌 옷감을 잡아당겨 옷에 주름이 지거나 찢어져서 옷 전체를 망가뜨리게 되므로, 그런 일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새 것과 헌 것이, 즉 예수님의 복음과 유다인들의 율법주의적 사고가
절대로 조화를 이룰 수 없다는 뜻이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과거의 가르침을 폐지하거나 반대로 과거의 가르침에 단순하게 덧붙인 차원의 것이 아니고, 과거의 가르침의 근본 정신을 밝히며, 이것을 형식적으로 준수하는 것이 아니라 삶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키게 함으로써 온전하게 완성시키신 것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 9장 17절에서 발효되지 않은 '새 포도주'에 해당하는 '오이논 네온'(oinon neon; new wine)을 가죽 부대에 넣어두면 차츰 발효가 되어 처음보다 더 큰 부피로 팽창하게 된다.
신축성이 있는 새 가죽 부대(wineskins)는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딜 수 있지만, 헌 가죽 부대는 탄력성과 신축성이 없기 때문에 새 포도주의 팽창력을 견디지 못하고 터지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의 가르침을 새 포도주로, 유다교의 고루한 가르침을 헌 가죽 부대로 비유하시면서 유다교가 예수님의 가르침을 결코 수용할 수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신 것이다.
즉 바리사이들과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제대로 수용하기 위해서는 구태의연한 과거의 가르침에 얽매여서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을 비판만 해서는 안되고, 자신이 변화되어야만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마태오 복음 9장 16~17절은 율법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고, 율법의 정신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구현되었으므로(요한1,45; 마태5,17),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새 계약과 약속의 말씀을 따라야만 과거의 율법을 바로 준수하는 것이 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