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14주간 목요일]거저 주라 (마태10,7-15)
요셉은 형제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아우가 자신임을 밝히고, 하느님께서 자신을 형제들보다 앞서 보내신 것이라고 한다. (창세 44,18-21.23ㄴ-29; 45,1-5)
그 무렵 18 유다가 요셉에게 나아가 말하였다. “나리, 이 종이 감히 나리께 한 말씀 아뢰겠습니다. 나리께서는 파라오와 같으신 분이시니, 이 종에게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19 나리께서 이 종들에게 ‘아버지나 아우가 있느냐?’ 물으시기에,
20 저희가 나리께 대답하였습니다. ‘저희에게 늙은 아버지가 있고, 그가 늘그막에 얻은 막내가 있습니다. 그 애 형은 죽고 그의 어머니 아들로는 그 애밖에 남지 않아, 아버지가 그 애를 사랑합니다.’
21 그러자 나리께서는 ‘그 아이를 나에게 데리고 내려오너라. 내 눈으로 그를 보아야겠다.
23 너희 막내아우가 함께 내려오지 않으면, 너희는 다시 내 얼굴을 볼 수 없다.’ 하고 이 종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24 그래서 저희가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에게 올라갔을 때, 나리의 말씀을 아버지에게 전하였습니다.
25 그 뒤에 저희 아버지가 ‘다시 가서 양식을 좀 사 오너라.’ 하였지만,
26 저희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저희는 내려갈 수 없습니다. 막내아우가 함께 가야 저희가 내려갈 수 있습니다. 막내아우가 저희와 함께 가지 않으면, 저희는 그 어른의 얼굴을 뵐 수 없습니다.’
27 그랬더니 나리의 종인 저희 아버지가 저희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내 아내가 나에게 아들 둘을 낳아 주었다는 것을 너희도 알지 않느냐?
28 그런데 한 아이는 나를 떠났다. 나는 그 애가 찢겨 죽은 것이 틀림없다고 말하였고, 사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아이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29 그런데 너희가 이 아이마저 나에게서 데려갔다가 무슨 변이라도 당하게 되면, 너희는 이렇게 백발이 성성한 나를, 비통해하며 저승으로 내려가게 하고야 말 것이다.’”
45,1 요셉은 자기 곁에 서 있는 모든 이들 앞에서 더 이상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모두들 물러가게 하여라.” 하고 외쳤다. 그래서 요셉이 형제들에게 자신을 밝힐 때, 그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2 요셉이 목 놓아 울자, 그 소리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3 요셉이 형제들에게 말하였다. “내가 요셉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아직 살아 계십니까?” 그러나 형제들은 요셉 앞에서 너무나 놀라, 그에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4 그래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나에게 가까이 오십시오.” 하고서는, 그들이 가까이 오자 다시 말하였다.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도들을 파견하시며,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고 하신다. (마태10,7-15)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제1독서(창세44,18~21.23ㄴ~29; 45,1~5)
"그러나 이제는 저를 이곳으로 팔아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 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창세45,5)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라고 번역된 '웨알 이하르 뻬에네켐'(weal yhar beenekem)에서 '웨알'(weal)은 '~마십시오'(do not)이고, '이하르'(yhar)는 '화내다'(be angry)이며, '뻬에네켐'(beenekem)은 부사구로서 '너희 스스로에게'(with yourselves)이다.
한마디로 '그러므로 당신은 스스로에게 화내지 마십시오'(And do not be angry with yourselves)이다.
요셉의 이 말은 형 자신들이 팔았던 동생 요셉이 이집트에서 막강한 권력을 가진 재상이 되었으니 죽을 죄를 지은 것이라고 스스로 비관하지 말라는 권면이다.
본문에서 사용된 부정어 '알'(al)은 '일시적인 금지'를 나타낸다.
요셉은 그의 형들에게 일단 마음을 진정하고 자신의 설명을 들으라는 의미로서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라고 말하였고, 그 다음 문장의 '왜냐하면'이라는 뜻을 가진 접속사 '키'(ki; because)를 통해 그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여기서 '보내신 것입니다'에 해당하는 '셸라하니'(shellahani; sent me)의 기본형 '샬라흐'(shallah)는 '보내다'라는 뜻을 지닌 단어이다.
그런데 성경의 많은 경우에 하느님의 말씀, 즉 '구원', '도움'(시편20,3)이나 '재앙'에 관한 소식을(여호24,12) 전하기 위해 사자를 보낼 때도 이 단어가 사용되므로, 구세사안에서 약속의 실현이라는 관점에서 상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구약 성경의 그리스 번역본인 70인역(LXX)은 '샬라흐'(shallah)를 '아포스텔로'(apostello)라고 번역했는데, 이 말이 신약 성경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복음 전파를 위해 보내신 '사도'를 의미하는 '아포스톨로스'(apostollos), 즉 '보냄을 받은 자', '파견된 자'의 어원이 되었다(마태10,2; 루카17,5; 로마1,1).
따라서 요셉이 '여러분 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라고 한 말의 의미에는 하느님께서 그에게 주신 사명을 이루기 위해 먼저 이집트로 '보냄을 받은 자'가 되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이런 사실은 실제로 요셉을 이집트로 판 자들은 형들이었으나 본문의 주어가 '하느님'(엘로힘)으로 나오는 데서도 확인된다.
즉 요셉의 형제들이 시기심 때문에 요셉을 미디안 사람들에게 팔았던 사건을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이루게 될 야곱 일가의 생명을 보존시키기 위해 먼저 요셉을 이집트에서 준비시키는 과정으로 사용하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결국 요셉의 이야기는 한 인간의 고난과 역경에도 불구하고 그가 승리한 사실을 전해주는 의미 뿐만 아니라 당신의 선택하신 백성을 보존하고 계약을 계승시키려는 창조주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가 주제인 것이다.
*************************
어제 독서에 보면, 요셉이 형들에게 막내 아우 벤냐민을 가나안에서 이집트로 데려오면 살려줄 거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을 들었을때, 형들은 자신들에게 가중되는 고통의 압박감 때문에, 지난 과거를 뉘우치는 이야기를 주고 받는다.
창세기 42장 23절에 형들이 요셉과 자신들 사이에 통역이 서 있었기 때문에 요셉이 못 알아듣는 줄 알았으나~ "요셉은 그들앞에서 물러나와 울었다"고 되어 있다.
요셉이 위선자인가? 겉으로는 형들을 엄하고 무섭게 대하고, 돌아서서 우는 이중인격자인가?
이것은 아이들을 혼낸 후에, 돌아서서 괴로워 우는 어머니의 모습과 같다.
사랑하기 때문에 때리는 것이다. 깊은 참회를 경험하게 하기 위함이다.
그리고 창세기 43장 27-30절을 보면,
요셉은 형들이 아버지 야곱을 설득해서 동생 벤야민을 데리고 와서 다시 만나게 되었을때,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고는 눈을 들어, 자기 친 어머니 라헬의 아들 친동생 벤냐민을 보며,
자기 아우에 대한 애정이 솟구쳐 올라 울음을 참았다가 서둘러 안방으로 들어가 그곳에서 운다.
이렇게 요셉은 다시 해후하게 된 형제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 때문에 하염없이 마음속 깊은 곳, 뼈속 깊은 곳에서 울음이 솟아나는 순수한 피와 감성의 소유자이다.
하지만 공인인 재상으로서의 자신의 위치와 마음으로는 이미 용서해 주었지만~
형들의 참회를 이끌어내고 진정한 화해의 단계에 이르기까지 공적으로 울음을 드러내지 않고 감추는 절제의 미덕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제 창세기 44장 18-34절을 보면,
유다가 아버지 야곱의 마음을 더 아프게 할 수가 없어 벤야민 대신에 자신이 종이 되겠다고 나서는 목숨건 간절한 애원에, 더 이상 요셉은 자신을 억제하지 못하고, 신하들은 다 물러가게 하고, 형제들 앞에서 목놓아 운다.
그 소리가 얼마나 큰지, 이집트 사람들에게 들리고 파라오의 궁궐에도 들렸다.
이 대성통곡의 의미가 무엇인가?
단순히 형들에게 왕따 당하고 자신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아넘긴 형들의 배신에 대한 상처와 한풀이인가?
그동안 오랜 세월동안,아버지와 가족과 생이별을 하고 고아처럼 살면서 갖은 고생을 하다가~ 기근이 동기가 되어 극적 조우를 하게 된 애증의 눈물인가?
형들이 요셉 자신에게 한 과거 행위들을, 바닷가 모래톱위에 새겨진 글자처럼 비바람과 파도에 씻어버리고 망각의 피안으로 날려버린, 형들의 실종된 죄의식과 무뎌진 양심을 회복하고, 뉘우치게 하는 과정속에서 그래도 아직 남아있는 인간성의 선함을 발견하고 화해하게 하는, 느님의 섭리와 안배하심에 대한 감사의 눈물인가?
어쨌든 요셉은 형들을 가까이 오라 하고 "내가 형님들의 아우 요셉입니다. 형님들이 이집트로 팔아넘긴 그 아우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저를 팔아 넘겼다고 해서 괴로워하지도 자신에게 화를 내지도 마십시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이 땅에 기근이 든지 이태가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다섯 해 동안은 밭을 갈지도 거두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시어, 여러분을 위하여 자손들을 이땅에 일으켜 세우고, 구원받은 이들의 큰 무리가 되도록 여러분의 목숨을 지키게 하셨습니다.
~~서둘러 아버지를 모시고 이곳으로 내려오십시오."(창세45,4-14참조)
위의 요셉의 말속에서 형들에게 형님들이라는 존칭을 쓰고, 자신을 아우라 하며, 우리라는 단어를 씀으로써~~ 정안에서의 위계질서와 한식구라는 동질성과 관계를 바로잡고 회복을 한다.
또한 분명히 형님들이 자신을 이집트로 팔아 넘긴 것을 지적하나, 이제 충분히 자신의 행위를 알아듣고 참회했으니, 죄책감과 자책에서 벗어나라고 충고한다.
그 다음 이제는 마음과 시선을 들어 올려 모든 일들 위에 초월하여 있는, 하느님의 크나큰 섭리와 안배를 바라보면서 그들과 온전히 화해를 이루고 수평적인 관계 회복을 한다.
우리는 여기서 용서와 화해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요셉은 이미 형들을 만났을때 마음으로 이미 용서했다. 용서는 상대방과 관계없이 내가 하느님의 마음으로, 하느님의 가르침에 따라 하면 된다.
그러나 화해는 다르다. 요셉이 형들을 감옥에 가두고, 막내동생을 데려 오라 하고, 아버지 야곱의 안부를 묻고,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고 다시 불러 들이는 과정이 바로 자신과 형들의 잘잘못을 따지며 화해하는 과정인 것이다.
이것이 이루어질때, 인간들의 상호 주고 받은 상처와 고통 너머로~~
아니 그것안에서도 선을 끌어내시며 당신의 일을 하시는 하느님의 섭리와 안배가 보이고,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게 된다.
하느님께서 요셉을 이집트의 재상으로 만드신 이유가 무엇인가? 단순히 형들을 보호하고 도와주기 위해서인가? 아니다.
사실은 아브라함의 하느님, 이삭의 하느님, 야곱의 하느님이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하느님은 이런 과정을 통하여, 자격없고, 부도덕하고, 혈기많은 야곱의 열두 아들들을 단련하시고, 믿음의 열두 지파를 세워서, 하느님의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서 그렇게 하신 것이다.
"요셉은 자기 아우 벤야민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벤야민도 그의 목을 껴안고 울었다. 요셉은 형들과도 하나 하나 입을 맞추고 그들을 붙잡고 울었다. 그제야 형들은 그와 이야기 했다."(창세 44,14-15)
눈물은 이렇게 상처를 닦아 주는 치유를 가져오고 화해를 가져온다.
형제들간의 이 울음은, 창세기 46장 29절의 요셉이 고센으로 올라가 아버지 야곱을 만나 ~ 목을 껴안은채 한참 우는 장면으로 절정에 달하고 목적을 이룬다.
이처럼 요셉의 영적 통찰력은 인간적인 육정을 초월해서 하느님의 일과 구원의 대 드라마에서 빛을 발하는 것이다.
연중 제14주간 목요일 복음 (마태10,7-15)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7)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도 지니지 마라. (8)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0)
어떤 고을이나 마을이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거에 머물러라.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2)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4)
마태오 복음 10장 7절의 '거저'에 해당하는 '도레안'(dorean; freely)는
받는 이의 관점에서는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고 선물로서 받은'이라는 뜻이고,
주는 이의 관점에서는 '어떤 결과도 기대하지 않고 주는'이라는 뜻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먼저 예수님께로부터
아무 대가도 치르지 않은 선물로서의 구원을 받았다.
이제는 받은 그대로 자신들에게 돌아올 아무런 이익도 기대하지 않고,
구원을 베푸시는 주님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라는 말씀이다.
그리고 마태오 복음사가는 10장 9절에서 전직 세리 출신으로서
금전 계산에 빨라서 돈의 종류를 일일이 나열한다.
금('크뤼소스'; chrysos; gold), 은('아르귀로스'; argyros; silver),
구리('칼코스'; chalkos; brass)로 세분하면서, 동시에 짧은 문장 안에
'마라'라고 한 번밖에 번역되지 않은 부정을 나타내는 접속사
'메'(me; neither)와 '메데'(mede; nor)가 세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한다.
그 뜻은 복음을 전한 것에 대한 보답으로서 불의하게 어떤 대가를
바라거나 받아서는 안된다는 것인데, 마태복음사가는 복음 선포자가
가져야 할 청렴성과 신앙의 강직성에 대해 더욱 강조한다.
또한 마태오 복음사가는 10장 10절에서 9절과 유사하게 부정을 나타내는
접속사 '메'(me)와 '메데'(mede)가 네 번이나 사용되어 매우 강조하고 있는 것이 있다.
10절에 기록된 여행 보따리나 여벌 옷, 신발이나 지팡이는
유대인들이 여행할 때 가지고 다니던 여행 필수품인데,
이것을 지니지 말라는 명령을 내리는 것이다.
'여행 보따리'에 해당하는 '페라'(pera; bag for the journey)는
여행에 필요한 물건들을 넣는 도구였고, '옷'에 해당하는 '키톤'(chiton;
coat; tunic)는 먼 거리를 걸어서 여행하는 자가 반드시 준비해야 할 필수품이었고,
'지팡이'에 해당하는 '라브도스'(rabdos; staff; stick)는 광야에서
짐승들을 만났을 때에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왜 복음 전파의 임무를 부여받고
파견되어지는 당신의 제자들에게 이런 기본적인 필수품의 소지를 금했을까?
이것은 천국 복음을 전해야 할 제자들이 마태오 복음 6장 25절이하
34절까지의 '세상 걱정과 하느님의 나라'에 관한 산상 설교의 말씀을
먼저 솔선하여 실천해야만 복음을 전할 자격이 생기기 때문이고,
'목숨을 부지하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또 몸을 보호하려고
무엇을 입을까~'(마태6,25)를 걱정하지 말고, 오직 이 모든 것들을
공급하여 주시는 하느님만을 의지하고 신뢰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10절 후반에 '받는 것은 당연하다'에 해당하는 '악시오스'
(aksios; is worth of)를 통해 복음 전파자가 먹을 것을 받는 것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음을 강조하고 있다.
복음 전파자는 오로지 복음을 전하는 하느님의 봉사자로서
자신의 생계를 위해 일하지 않기 때문에 일정한 수입이 없기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일꾼'에 해당하는 '에르가테스'(ergates; worker)가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는 말은, 복음 전파자들에게는
생계 걱정을 하지 말라는 의미와 더불어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복음 전파자들의 생계를 책임지라는 뜻도 지니고 있다
(1코린9,14.17,18; 1티모5,18).
또한, 복음 전파자가 육신의 편안을 위해 더 나은 숙식을 제공하는
집으로 옮겨 복음 전파자의 관심이 오로지 복음 전파에 있다는 사실이
희석되게 하지 말라는 당부와 더불어, 복음 전파의 가치를 바로 이해하고
복음 전파자들을 충심으로 도와줄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을 찾아
한 곳에 머물기를 명한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전하는 예수님의 제자들을 영접하지 않는 이들은
이교도 취급을 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여행에서 본국으로 돌아올 때 이교도 지역의 흙을
묻혀 들어오는 것을 부정하게 여겨 신발을 터는 관습이 있었다.
마태오 복음 10장 14절의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버려라'에서
'털어 버려라'에 해당하는 '에크티낙사테'(ektinaksate; shake off)는
'밖으로'라는 뜻의 전치사 '에크'(ek)와 '흔들다'는 의미의
'티낫소'(tinasso)가 결합되어 '흔들어 분리시키다'는 뜻을 지니는
'에크티낫소'(ektinasso)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부정 과거 명령형은 단 한번의 행동으로 끝내는 경우에 사용되기에
이것은 미련을 두지 말고 단호하게 먼지를 털어 버리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거절은 단순히 복음 전파자의 숙박을 거부한 것의 뜻일 뿐만 아니라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거절한 행위로서 이러한 불신앙의 행위는
결국 15절의 하느님의 심판을 불러오게 된다는 것이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복음을 전하는 봉사자들은 사심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거저 받은 복음을 대가를 바라지 않고 기쁘게 전했는지,
오로지 전할 복음의 내용에 충실하며 자신의 전존재와 미래를
온전히 생명의 절대권을 가지신 주님께 의탁하고 맡기는
신앙으로 살아왔는지를 성찰해 보아야 한다.
동시에 하느님의 자녀들은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 때문에
현세적 생계 수단과 돈벌이를 포기한 복음의 전파자들의 생계를
책임져 주기 위해서 자신이 획득한 수입의 열의 하나를
봉헌하는지를 물어 보아야 한다.
제1독서에서 요셉은 형제들에게,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 때문에 괴로워하거나, 스스로에게 화를 내지 말라고 권고합니다.
오랫동안 형제들로 말미암아 고초를 겪은 것을 생각하면 복수를 해도 시원하지 않을 터인데 요셉은 그러지 않습니다.
오랜 고초를 겪은 뒤 재상이 되면서 자신에게 주어졌던 과거의 모든 사건이 하느님 손길 안에서 이루어진 사건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목숨을 살리시려고 하느님께서는 나를 여러분보다 앞서 보내신 것입니다.”
자신의 고통이 지니는 참된 의미를 올바로 해석하였던 요셉은 원수와 같은 형제들을 용서합니다. 아니, 그들 잘못 안에서 활동하고 계시던 하느님의 손길을 보고, 형제들의 잘못을 기꺼이 받아들입니다.
그렇게 요셉은 모든 것을 바로잡습니다. 마치, 예수님을 보는 듯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할 것입니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말라는 예수님의 말씀 속에서, 이 일이 긴급히 이루어져야 할 일임을 알게 됩니다.
제자들은 자기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챙기지 못한 채 복음 선포에만 전념해야 합니다.
그런데 복음을 전하는 제자들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이들은 그들을 박해하기도 할 것입니다.
형제들이 요셉에게 그러하였던 것처럼 어떤 형제들은 그들을 팔아넘기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개의치 않고 계속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은 우리 목숨을 살리려고 하느님께서 다른 이들보다 앞서 보내신 이들이기 때문입니다.
(염철호 요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