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보고 듣고 (루가 10,17-24)
주님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알았다고 욥이 고백하자,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신다. (욥기 42,1-3.5-6.12-17)
1 욥이 주님께 대답하였다.
2 “저는 알았습니다. 당신께서는 모든 것을 하실 수 있음을, 당신께는 어떠한 계획도 불가능하지 않음을!
3 당신께서는 ‘지각없이 내 뜻을 가리는 이자는 누구냐?’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저에게는 너무나 신비로워 알지 못하는 일들을 저는 이해하지도 못한 채 지껄였습니다.
5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6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12 주님께서는 욥의 여생에 지난날보다 더 큰 복을 내리시어, 그는 양 만사천 마리와 낙타 육천 마리, 겨릿소 천 쌍과 암나귀 천 마리를 소유하게 되었다.
13 또한 그는 아들 일곱과 딸 셋을 얻었다.
14 그는 첫째 딸을 여미마, 둘째 딸을 크치아, 셋째 딸을 케렌 하푹이라 불렀다.
15 세상 어디에서도 욥의 딸들만큼 아리따운 여자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그들에게도 남자 형제들과 같이 유산을 물려주었다.
16 그 뒤 욥은 백사십 년을 살면서, 사 대에 걸쳐 자식과 손자들을 보았다.
17 이렇게 욥은 늘그막까지 수를 다하고 죽었다.
예수님께서는,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오자, 그들의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라고 하신다. (루가 10,17-24)
그때에 17 일흔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1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19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20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21 그때에 예수님께서 성령 안에서 즐거워하며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를 드립니다.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2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들이 누구인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버지께서 누구이신지 아무도 알지 못한다.”
23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돌아서서 제자들에게 따로 이르셨다.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행복하다. 24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많은 예언자와 임금이 너희가 보는 것을 보려고 하였지만 보지 못하였고, 너희가 듣는 것을 들으려고 하였지만 듣지 못하였다.”
야곱의 우물가에서 사마리아여인을 기다렸다가 대화하시는 예수님(요한복음4장)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욥기42,1-3.5-6.12-17)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 왔던 이 몸, 이제는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5)
욥기42장 5절은 하느님의 계시 말씀을 직접 들은 욥의 진한 감동을 잘 드러내고 있다. 욥은 과거에 가졌던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하느님께 대한 지식이 아니라 경험적이고 훨씬 정확한 하느님께 대한 지식을 가진 데 대해 감사의 심정을 말하고 있다.
'당신에 대하여 귀로만 들어왔던 이 몸' 에 해당하는 '레셰마으 오젠 셰마으티카'(leshemah ozen shemahthika)는 직역하면 '내가 귀의 들음으로 당신을 들었습니다' (by the hearing of the ear i heard thee)이다.
여기서 '귀로만'에 해당하는 '오젠'(ozen)이 사용된 것은 자신이 지금까지 하느님을 직접 체험한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말을 통해서만 들어왔음을 강조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이다.
이것은 욥이 지금까지 조상들의 전통과 종교적 교훈, 그리고 친구들의 말, 신학적 이론을 통해서만, 하느님께 대하여 알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지금까지 욥이 알고 있었던 하느님은 어떤 '매개체'를 통하여 아는 하느님이었고, 어떤 매개체를 통해 인식된 욥의 하느님께 대한 믿음은 불완전하고 관념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욥은 이제는 그 어떤 매개체없이 직접적으로 하느님을 대면하고 있다.
여기서 시간적 의미를 나타내 주는 '이제는' 에 해당하는 '웨앗타'(weatha)는 문자적으로 '그러나, 지금은' 이라는 뜻이다.
이것은 욥이 과거 하느님을 알고 경험했던 방법과 현재 하느님을 알고 체험하는 방법이 현저하게 다르다는 것을 강조하는 말이다.
이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 주는 것이 '제 눈이 당신을 뵈었습니다' 라는 표현이다. 이에 해당하는 '에니 라아테카'(eni taatheka)는 '주시하다', '생각하다', '분별하다' , '경험하다' 라는 뜻의 동사 '라아'(raah)와 '눈'을 뜻하는 명사 '아인'(ain)이 결합된 표현이다. 따라서 직역하면 '제 눈으로 당신을 분별하다. 제 눈으로 당신을 경험하다' 가 된다.
그러므로 본절의 '귀'와 '눈'이 각각 의미하는 것은 욥에게 있어서 하느님께 대한 '간접적인 체험'과 '직접적인 체험'이다.
사실 욥이 어떤 매개체없이 직접 하느님을 보고 대면한 것은 그가 엄청난 고난과 시련 속에서 간절하게 열망했던 원의 (욥기 19,27)가 실현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기꺼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속에서 내 간장이 녹아 내리는구나.'(욥기19,27)
그리고 하느님께 대한 이러한 직접적 체험은 그동안 욥에게 있었던 하느님께 대한 여러가지 부정적 의식들과 의구심들을 깨끗하게 털어버리고, 새롭게 하느님과의 관계를 정립하도록 하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욥이 이렇듯 하느님을 직접 대면함으로써, 하느님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할 수 있었던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의 창조물을 소재로 하여 끊임없이 욥에게 말씀하셨던 질문 공세와 설득이 있었기 때문이다.
욥기 38장~41장에서 전개된 욥을 향한 하느님의 그 많은 물음과 권면의 말씀들은 마침내 욥으로 하여금 하느님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게 했을 뿐 아니라, 그에 의해 창조된 인간은 오직 하느님의 주권과 그 섭리에 절대 순명하는 일만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절감하게 하였다.
즉 하느님의 이러한 선언적 말씀은 욥에게 정확한 신(神)지식과 함께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이다.
'그래서 저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먼지와 잿더미에 앉아 참회합니다.' (6)
욥기 42장 2절은 욥이 하느님의 섭리와 절대 주권에 대한 새로워진 믿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욥기 42장 3절은 욥이 무지한 말로 하느님의 뜻을 가리우고, 교만하게도 인간으로서는 알 수 없는 하느님의 행하심에 대해 함부로 말했음을 고백하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욥기 42장 4~5절은 하느님의 계시를 직접들은 감동에 대한 고백과 하느님의 계속적인 교훈을 요청하는 내용이었다.
이러한 내용에 이어지는 욥기 42장 6절은 욥의 진심어린 회개를 다루고 있다.
하느님께 대한 욥의 직접적인 체험은 그로 하여금 온전히 자신을 부정하는 '회개'의 자리에 이르게 했던 것이다.
여기서 '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며' 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므아쓰'(emas)의 원형 '마아쓰'(maas)는 '멸시하다', '가볍게 여기다', '거절하다'(이사7,15; 잠언15,22) 라는 뜻이다.
이렇게 자기 스스로를 멸시하고 거절한다는 욥의 말은 그가 지난 날 하느님의 기준이 아닌 자신의 기준에 근거를 두고 행동한 모든 일을 혐오하듯이 깊이 반성하고, 그것에서 벗어나려는 굳은 의지를 가졌음을 보여준다.
이것은 하느님을 만난 사람이 경험하는 자아 부정(자기 부인)이다. 그리고 이러한 '자아 부정'은 곧바로 철저하게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회개'로 이어지고 있다. 여기서 '먼지와 재'는 '비탄과 신음', '회개'를 나타내는 상징적 표현이다.
그리고 직설적 어법이 사용된 '참회합니다'에 해당하는 '웨니하므티'(wenihamthi)의 원형 '나함'(naham)은 문자적으로 '슬퍼하다', '애통하다' 라는 뜻이며, '마음을 바꾸다','의견을 뒤집다' 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탈출32,12; 예레18,8; 아모7,3.6).
원문으로 볼 때, 이 단어에는 과거에 대하여 크게 슬퍼하고 애통해 한다는 의미와 더불어 자신의 생각과 마음의 태도를 완전히 바꾸는 철저한 각성과 변화에 대한 결단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욥이 회개한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욥의 친구들이 도식적 인과응보의 틀을 가지고 지적하는, 특정한 행위와 관련된 구체적 범죄가 아니다.
욥기 31장 전반에 걸쳐 욥 스스로 단호하게 부정했던 사회적, 도덕적 윤리적 범죄가 아니다. 그것은 우선, 고난에 처한 욥이 지금까지 하느님 대전에 취한 태도를 들 수 있다.
과거에 욥은 의인이 고통받고 악인이 잘 되는 현실적 모순 상황과 관련해서 하느님의 정의(공의)에 대해 의문을 품고 있었고, 이유를 알 수 없는 자신의 고난에 대해 해명해 달라고 하느님께 항변하기도 했다.
인간적 입장으로는 지극히 자연스런 것이지만, 욥이 한 가지 간과한 것이 있다.
그것은 욥이 하느님께 그 자신의 고난과 이유를 물으며 항변하기 이전에, 피조물로서 절대적 주권을 가지신 하느님 대전에 절대 순명하는 자세를 가져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욥은 절대자이신 하느님대전에 자신이 당하는 고난의 이유를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이에 대해 항변하고 원망한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그의 죄의 유무를 가리시거나 고난의 원인이 무엇인지를 언급하지 않으시고, 다만 당신의 절대 주권과 위대하고 섬세한 섭리에 대해 선언하시고 열거하시며, 욥으로 하여금 사람이란 초월자요 창조주이신 하느님 대전에서 자신의 유한한 사고로 그분의 무한한 섭리를 판단하기 전에 그분의 절대 주권을 인정하고, 그저 거기에 순명해야 함을 교훈하신 것이다.
다음으로 욥이 참회했던 것은 욥 자신이 행해 온 의로운 행위에 대해 그 스스로 집착했던 것을 들 수 있다.
욥은 하느님을 대면하기 전 자신의 도덕성과 의로운 삶을 상당히 가치있는 것으로 평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의 변론에서 자신이 심지어 하느님 대전에서도 지금까지의 행실에 대해 당당히 변론한 것이라고까지 말했다. 이러한 사실은 그의 변론 전반에 나타나고 있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이 그의 변론 말미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욥기 31장 한 장 전체에 걸쳐 계속되는 욥의 회상은 과거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한 부분이며 고백이지만, 지나치게 자기식의 의(義)(self-righteousness; self-justification)를 강조한 것으로 들려질 소지가 충분히 있다.
욥의 윤리적 삶에 대한 회상은 그가 극심한 고난을 당할만큼 자신이 직접적으로 특정한 죄를 범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내뱉은 말이었지만, 그것에 근거해서 하느님 대전에 자신의 의로움을 증거하겠다고까지 한 것은 교만이 아니라고 할 수 없다(욥기9,34.35; 13,3 ; 31,35).
결국 욥은 하느님과 대면한 후, 하느님의 무한한 섭리를 인간의 제한된 이성과 지식으로 함부로 판단한 자신의 태도가 얼마나 그릇된 것이며, 자신이 내세웠던 도덕적, 윤리적 삶이 하느님 대전에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지를 확고하게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연중 제26주간 토요일 복음 (루카10,17-24)
그때에 일흔 두 제자가 기뻐하며 돌아와 말하였다. "주님,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들까지 저희에게 복종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뱀과 전갈을 밟고 원수의 모든 힘을 억누르는 권한을 주었다. 이제 아무것도 너희를 해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영들이 너희에게 복종하는 것을 기뻐하지 말고, 너희 이름이 하늘에 기록된 것을 기뻐하여라." (17~20)
루카 복음 10장 1~16절은 일흔두 제자가 하느님 나라의 확장을 위해 파견된 내용이 기록되어 있고, 이어지는 10장 17~20절은 선교 여행에서 돌아온 제자들의 보고와 이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교훈의 말씀이 기록되어 있다.
여기서 '기뻐하며'에 해당하는 '메타 카라스'(meta charas; with joy)는 '기쁨과 함께'라는 말인데, '메타'(meta)가 '함께'라는 뜻의 전치사이기 때문이다. 이제 이들이 기쁨에 넘쳐 있었던 구체적 이유가 다음에 이어진다.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신 것(루카9,1)과 마찬가지로, 일흔두 제자에게도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을 주셨다. 이것은 이들이 주님의 이름 때문에 마귀를 쫓아냈다고 보고한 사실로 보아서도 분명하다.
루카 복음 사가는 제자들을 파견한 당사자를 '주님께서는'(루카10,1)이라고 기록하여 제자들이 행하는 모든 권세와 권한이 예수님께로부터 기인되었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사실은 루카 복음 10장 17절에서도 그대로 드러나는데, 여기서도 제자들은 예수님을 '주님'('퀴리에'; kyrie)으로 부르고 있다.
이들이 마귀들의 복종을 받아낸 것은 그들 스스로의 능력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주님의 이름 때문에'로 번역된 '엔 토 오노마티 수'(en to onomati su; in your name)가 잘 말해준다.
'엔 토 오노마티 수'(en to onomati su)는 직역하면 '당신의 이름 안에서'이다.
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이름, 즉 '오노마'(onoma)는 단순한 호칭 이상의 의미를 지니며, 본질적 속성이나 실체 및 그 실체의 권위를 의미한다(요한5,43; 10,25; 사도10,48).
따라서 루카 복음 10장 17절은 제자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것, 즉 구마의 이적이 예수님의 권세에 의해 가능했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모든 권세의 원천은 예수님이시며, 제자들은 단시 그 권세를 받아 행하는 자일 뿐이라는 사실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복종합니다'에 해당하는 '휘포탓세타이'(hypotassetai; are subject; submit)는 '굴복시키다', '복종시키다'는 뜻을 지닌 '휘포탓소'(hypotasso)의 현재 직설법 수동태로서 '복종하고 있습니다', '굴복하고 있습니다'는 뜻이다.
사건이 일어난 시점은 과거인데, 제자들이 현재 시제 동사로 말하는 것은, 자신들이 구마 행위를 한 것이 너무나 놀랍고 뜻밖이어서, 예수님 앞에 보고하고 있을 때에도 그 일이 눈앞에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루카 복음 10장 18절에서 '나는 사탄이 번개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고 말씀하신다.
'나는 보았다'라고 번역된 '에테오룬'(etheorun; i saw; i behold)의 원형 '테오레오'(theoreo)는 깊은 흥미와 뚜렷한 목적을 가지고 사물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것을 뜻하는 단어이다.
예수님께서는 영계의 사령관으로서 뚜렷한 목적을 가지시고 아주 세밀하게 영계의 모습을 지켜보신 것이다. 이 동사가 계속적이거나 반복적인 경험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직설법으로 사용되어 일흔두 제자들이 마귀들을 쫓아낼 때, 예수님께서는 마귀들의 우두머리인 사탄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것을 계속해서 지켜보고 계셨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묵시록 12장 7절~10절, 13절과 요한 복음 12장 31절에도 나오지만, 여기서 일흔두 제자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행한 구마 이적은 종말론적으로 사탄이 패배할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보여 주는 명백한 표적임과 동시에, 이미 도래한 하느님 나라의 능력과 효과를 나타낸다(루카11,18~22; 마르3,27).
그리고 루카 복음 10장 19절에 나오는 '뱀과 전갈'은 둘 다 치명적인 독을 가진 짐승들인데, 이것들은 사탄의 세력들을 상징할 때 주로 사용된다(창세3,1~15; 시편91,13; 2코린11,3; 묵시9,3.5.10).
따라서 뱀과 전갈을 밟는다는 것은 루카 복음 10장 18절과 같은 맥락에서 일흔두 제자에게 사탄의 세력을 물리칠 수 있는 권세가 주어졌다는 것을 가리킨다.
끝으로, 루카 복음 10장 20절의 '~이 아니고 ~으로'에 해당하는 '메~데'(me~ de; not ~but)라는 문장 구조인 전형적인 히브리어 격언구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 본문을 살펴본다.
루카 복음 10장 20절의 말씀은 마귀들이 복종하는 것으로 인해 기뻐하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제자들의 이름이 생명의 책(묵시20, 12.15)에 기록되어 구원받게 된 것에 비하면 구마 이적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또한 마귀를 쫓아낸다고해서 그것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보증 수표가 되는 것도 아니다(루카7,22.23).
구마 이적의 능력은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이기 때문에 주어지는 부가적 특권인 것이다. 그리고 '기록된'으로 번역된 '엥게그랍타이'(enggegraptai; are written)는 '등록하다', '기록하다'라는 뜻을 지닌 '엥그라포'(enggrapho)의 완료 수동태이다. 이 단어가 완료형으로 쓰인 것은 제자들의 이름이 '이미' 하늘 나라의 생명의 책에 기록되었다는 것을 드러낸다.
또한 이 동사가 수동태로 사용된 점을 통해 제자들의 이름을 기록한 이가 바로 선택과 구원의 주도권을 가지신 '하느님'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우리 하늘 나라의 봉사자로 불리운 자들은 항상 자신이 무엇을 하는 것처럼 착각해서는 안되고, 겸손되이 모든 권세와 능력과 은사의 원천이신 주 하느님만을 바라보며, 그분의 이름을 부르고 ,그분을 드러내야만 한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

♣ 사랑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 품는 제자의 길 ♣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위한 투신의 끝자락에 죽음이 기다리고 있음을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예루살렘을 향한 길을 걸으시기로 작정하십니다(9,51). 이 길은 절망의 길이 아니라 자신을 희생 제물로 봉헌함으로써 모두를 살리고 해방시키기 위한 희망의 길이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러나 기쁨과 확신에 차서 자신의 길을 걸으셨지요. 우리 또한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걷도록 불렸습니다.
예수님께서 보내신 심부름꾼들이 예수님을 모실 준비를 하려고 사마리아인들의 한 마을로 들어갑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적대시하는 유다인들 가운데 한 사람인 예수님을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유다인들 역시 사마리아인들과 상종하지 않았기에”(요한 4,9) 갈릴래아 지방에서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인 사마리아 지역을 피해 다녔습니다.
사마리아인들은 기원전 722년 아시리아에 정복당한 북왕국 이스라엘에 정착했습니다. 그들은 야훼 신앙을 받아들이고 가리짐 산에 자신들을 위한 성전을 짓습니다. 그럼에도 유다인들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종교적, 민족적인 갈등이 지속되면서 적대감도 커갔던 것입니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께서 냉대를 받으시자 화가 나서, “주님, 저희가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불살라 버리기를 원하십니까?”(9,54) 하고 묻습니다. 제자들은 고난 받는 메시아에 대해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꾸짖으십니다. 예수님의 생각은 제자들과 너무나 달랐던 것이지요. 그러나 그분은 적대관계에 있는 사마리아인들도 따뜻한 자비로 품으려 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는 예수님의 마음을 지니고 그분처럼 행동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보게 해주시며,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키시기 위해 오셨지요. 따라서 우리도 언어와 종족, 신분과 빈부의 차이에 따라 차별하고 단죄하지 않도록 해야겠습니다. 선을 품지 않은 사람들을 힘으로 굴복시키려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 프란치스코는 다음과 같이 권고합니다. "당신 때문에 원수를 참으로 사랑하게 하시고, 저희가 아무에게도 악을 악으로 갚는 일이 없이 원수를 위하여 당신 앞에서 열심히 전구하게 하시며, 당신 안에서 모든 것에 도움이 되도록 힘쓰게 하기 위함이나이다.”(‘주님의 기도’ 묵상 8).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능동적 사랑이 우리를 살릴 것입니다.
살아가면서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 미워하는 사람, 피하고 싶은 사람, 적대관계에 있는 사람을 만나곤 하지요. 그러나 그런 인생길 자체가 바로 십자가 죽음이 기다리는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길임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이 길목에서 우리는 예수님처럼 처신해야 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살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처럼 고통과 죽음의 상황에서 그 죽음을 말없이 사랑으로 받아 삼킬 수 있어야겠습니다. 또 주님께서 그 죽음을 생명으로 바꿔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거룩한 인내도 필요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예수님께서 걸으셨던 그 길을 관대함과 호의와 끈기로 기쁘게 걸어감으로써 “하느님께 피어오르는 그리스도의 향기”(2코린 2,15)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오늘 나의 예루살렘을 향해 순례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특히 내가 싫어하고 미워하며, 불편함을 느끼는 이들을 하느님의 자비로 품고, 그들과 함께 생명의 꽃을 피우는 행복한 순례가 되길 기도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