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토요일]성경 연구 ( 요한 7,40-53.)
예레미야 예언자는 도살장에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은 자신을 없애려는 음모를 꾸미는 악인들을, 사람의 마음속을 아시는 만군의 주님의 정의로우신 심판에 맡겨 드린다.(예레미야 11,18-20)
18 주님께서 저에게 알려 주시어 제가 알아차리게 되었습니다. 당신께서 저에게 그들의 악행을 보여 주셨습니다. 19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
20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시편 7,2-3.9ㄴㄷ-10.11-12(◎ 2ㄱ)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나이다.
○ 주 하느님, 당신께 피신하오니, 뒤쫓는 모든 자에게서 저를 구하소서, 저를 구해 주소서. 사자처럼 이 몸 물어 가지 못하게 하소서. 아무도 구해 주는 이 없나이다. ◎
○ 주님, 제 의로움, 제 결백을 보시고, 제 권리를 찾아 주소서. 이제 악인들의 죄악은 끝내시고, 의인들은 굳세게 하소서.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시다. ◎
○ 하느님은 나의 방패, 마음 바른 이들을 구하시는 분. 하느님은 의로우신 심판자, 하느님은 언제든 진노하시는 분. ◎
루카 8,15 참조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 바르고 착한 마음으로 하느님 말씀을 간직하여, 인내로 열매를 맺는 사람들은 행복하여라!
◎ 말씀이신 그리스도님, 찬미받으소서.
예수님을 메시아라고 믿는 이들과 그렇지 못한 이들 사이에 논란이 일어난다. 니코데모가 예수님을 두둔하자, 유다인 지도자들은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다며 그를 힐책한다.(요한 7,40-53)
그때에 예수님의 40 말씀을 들은 군중 가운데 어떤 이들은, “저분은 참으로 그 예언자시다.” 하고, 41 어떤 이들은 “저분은 메시아시다.” 하였다.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이들도 있었다. “메시아가 갈릴래아에서 나올 리가 없지 않은가? 42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43 이렇게 군중 가운데에서 예수님 때문에 논란이 일어났다. 44 그들 가운데 몇몇은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그분께 손을 대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45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46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47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48 최고 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49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50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51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52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제1독서 (예레11,18-20)
그런데도 저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같았습니다. 저는 그들이 저를 없애려고 음모를 꾸미는 줄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저 나무를 열매째 베어 버리자. 그를 산 이들의 땅에서 없애 버려 아무도 그의 이름을 다시는 기억하지 못하게 하자."(19)
예레미야서 11장 19절에서 예레메야는 자신을 '순한 어린양'으로 비유한다. 11장 19절의 '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에 해당하는 '로 야다으티'(lo yadahthi)를 통해 '순한 어린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설명해 준다.
예레미야서 11장 18절에서 밝힌 것처럼 주님의 계시가 아니고서는 예레미야가 자신에 대한 살해 음모를 알 수 없었다는 사실을 '순한 어린양'의 비유와 '저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라는 직접적인 고백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순한 어린양'에 해당하는 '케베스 알루프'(kebes alluph)는 '길들여짐', '고분고분함' 이라는 의미의 명사 '알루프'(alluph)와 '어린양'(레위14,5; '어린 숫양')이라는 의미의 명사
'케베스'(kebes)로 이루어졌다.
아마 사무엘 하권 12장 3절의 나탄의 비유에서 나오는 것처럼 '케베스 알루프'는 집안에서 키우는 길들여진 어린양 (작은 암양)을 가리킬 수도 있다. 또한 본절에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순한 어린양' 이라는 표현이 보여주는 것과 같이 자신이 도살당한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 순순히 도살장으로 끌려갈 만큼 현실을 직시하지 못하는 존재이다.
한편 이처럼 예레미야는 현실에 어두운 반면에 예레미야를 죽이려는 자들은 아주 용이주도 하였다. 이것은 '없애려고'와 '음모를 꾸미는 줄'이란 표현에서 잘 드러난다.
먼저 '없애려고'에 해당하는 '하셰부'(hashebu)는 '계산하다', '세어보다'(창세15,5), '짜다', '꼬다'(탈출28,15), '궁리하다', '고안하다' (탈출35,32)라는 의미의 동사 '하샤브'(hashab)의 완료형이다.
이 동사는 바로 이 '하샤브'(hashab)동사에서 유래한 '마하샤보트'(mahashaboth)를 목적어로 취하고 있다. 즉 '음모를 꾸미는 줄'에 해당하는 '마하샤보트'(mahashaboth)는 '꾀', '계획'(잠언15,16), '모략', '계략'(다니엘11,25), 모해', '흉계' (애가3,61), '계획'(잠언19,21), '생각'(이사55,7)이라는 명사 '마하샤바'(mahashaba)의 복수형이다.
즉 본문에서는 실을 가지고 천을 짜듯이 매우 정교하고 철저하게 궁리하는 것을 나타내는 동사와 이 동사의 명사형이 북수형을 목적으로 취하여 아나톳 사람들이 일시와 장소 그리고 전개 과정 등에서 철두철미한 살해 계획을 모의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주님의 말씀 선포라는 예언직을 수행한 것에 대한 백성들의 응답이 이처럼 그 예언자를 죽이겠다는 치밀하고도 의도적인 살해 계획이라는 사실을 주님의 계시를 통해 알게 되었을 때, 예레미야는 너무나 큰 절망과 낙심에 빠졌을 것이다.
한편 예레미야서 11장 19절 후반부의 아나톳 사람들이 멸망시켜 버리겠다고 하는 열매와 나무는 무엇인가?
겉으로 보면, '나무'는 분명 '예레미야'를 가리키기에 그의 '열매'는 예레미야의 자녀가 된다. 그러나 예레미야서 17장 1절과 2절에 의하면, 예레미야는 독신 생활을 명받았고 그로 인해 자녀를 둘 수 없는 처지에 있었다. 그후의 기록을 보아도 예레미야의 결혼나 자녀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으므로 본문의 '열매'라는 표현은 상징적인 의미를 지녔다고 본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이것을 예레미야의 입에서 증거되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본다. 즉 당시 아나톳 사람들은 예레미야를 거부하고 박해할 때 다른 이유 때문에서가 아니라 그가 전하는 하느님 말씀 때문에 그를 거부하고 그 모든 것을 없애 버리려 했던 것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는 지도자들> 영진 모세 신부
"성전 경비병들이 돌아오자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왜 그 사람을 끌고 오지 않았느냐?' 하고 그들에게 물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습니다.'
하고 성전 경비병들이 대답하자, 바리사이들이 그들에게 말하였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요한 7,45-49)"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예수님을 잡아 오라고 성전 경비병들을 보냈었는데(요한 7,32)
경비병들이 그냥 돌아옵니다.
그분처럼 말하는 사람은
지금까지 하나도 없었다는 경비병들의 말은,
그들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고 압도당했음을 나타냅니다.
(경비병들의 말을 "그분의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하느님의 말씀이다."
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서
그동안 자기들이 경험하지 못했던
신적인 힘과 권위를 느꼈고,
그래서 예수님을 체포할 수 없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마르코복음을 보면,
예수님께서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에
사람들이 몹시 놀랐다는 말이 나옵니다(마르 1,22).
예수님의 가르침은 '하느님의 힘'이
들어 있는 가르침입니다.
"너희도 속은 것이
아니냐?" 라는 바리사이들의 말에는
"예수는 사람들을 속이는 사기꾼이다."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이 말을 한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들어보지도 않고,
소문만 듣고서 예수님을 사기꾼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들은 왜 그렇게
판단했을까?
예수님이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것이 그 이유일 수도 있고(요한 7,41),
또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것과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요한 7,42).
(우리는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고 베들레헴에서 태어나셨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을 갈릴래아의 나자렛 출신으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또 요셉이
다윗 가문의 후손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예수님의 활동이 제도권 밖에 있었다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이유였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의
눈에는
예수님이 자기들의 통제를 받지 않는 한낱 '야인'으로만 보였을 것이고,
그래서 예수님을 인정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권력으로 통제하지 못했던 세례자 요한의 활동도
인정하지 않았던 사람들입니다.)
"최고의회 의원들이나
바리사이들 가운데에서 누가 그를 믿더냐?" 라는 말은,
지도층에서 예수를 인정하지 않고 있고, 믿지 않고 있으니
예수는 가짜
메시아라는 뜻입니다.
(메시아가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말은 신성 모독에
해당됩니다.)
더욱이 예수님께서는 당시의
기득권층 사람들,
즉 사제들과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교만과 위선을 자주 비판하셨는데,
그들은 그 비판을 듣기 싫어했고, 예수님께
적대감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는 옳게 살고 있다." 라는 교만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듣기 싫어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기득권에 위협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요한
11,47-48).
그래서 그들은 회개하기는커녕 예수님을 박해했습니다.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라는 말은,
"율법을 모르고 율법대로 살지 않는 어리석고 천한 자들은
구원을 받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압도당해서
예수님을 체포하지 않고 그냥 돌아온 경비병들은
율법도 모르고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기 때문에
예수라는 사기꾼에게 속은 것이라는 뜻으로 말한 욕설입니다.
그러나 경비병들이
실제로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지금 바리사이들이 하는 말은
다른 사람의 신앙생활을
함부로 심판하고 단죄하는 죄를 짓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제들과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사람들에게 보이려고'
겉으로만 신앙생활을 하는 위선자들이라고 비판하셨습니다(마태 6장).
그런데 그들은
"예수는 사기꾼이다."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상황을 제3자 입장에서 객관적으로 바라보면 어떻게 될까?
바리사이들의 말 뒤에
니코데모의 말이 이어지고 있는데,
니코데모가 한 말은 객관적인 입장에서 하는 말입니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요한 7,51)"
이 말은 신명기
1장과 17장 등에 있는 규정을 바탕으로 한 말인데,
최고의회가 예수님을 체포하려고 한 것은,
또 조사도 하지 않고 예수님을 죄인
취급하는 것은
율법을 위반한 일이라는 것을 지적하는 말입니다.
(니코데모의 말에는, 경비병들을 꾸짖고 있는 바리사이들 자신들이
더
율법대로 살고 있지 않다는 비난도 들어 있습니다.)
오늘날에도 탐욕과 교만과
위선을 버리지 않고,
또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행복이 진리가 아니라
지상에서의 부귀영화가 진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또 세속의
기득권을 지키는 일에만 집착하는 사람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예수님의 말씀들을 자기에게 아무 쓸모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나,
사람들을 속이는 허황한 말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신앙인이라고 해도,
기득권에 집착하고
세속적이고 물질적인 복을 받기만을 바란다면,
그것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본의 아니게)
예수님을 '사람들을 속이는 자'로 만드는 일이
되어버립니다.
사순 제4주간 토요일 복음 (요한7,40-53)
"율법을 모르는 저 군중은 저주받은 자들이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전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우리 율법에는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 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러자 그들이 니코데모에게 대답하였다.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요?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49~52)
예수님께 대해 약간의 호의적인 반응이라도 보이는 사람에 대해서 질책하던(요한7,47) 바리사이들은 이제 그들을 율법도 모르는 자로 매도하며 저주까지 퍼붓고 있다.여기서 '저 군중'에 해당하는 '호 오클로스 후토스'(ho ochlos houtos; this people)는 랍비 문학에 나오는 '암 하아레츠'(am haarets), 곧 '땅의 백성'과 동일한 뜻이다.
랍비들의 규범은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과 관련하여 6가지 사실을 규정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증거를 위임하거나 취하지 말 것, 그들에게 비밀을 말하지 말 것, 그들을 고아의 보호자로 삼지 말 것, 그들에게 자선비의 관리를 맡기지 말 것, 일체의 매매 행위와 친교를 하지 말 것을 규정한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을 저주받은 무리로 여겼다. 이것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독선적인 우월감과 아집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요한 복음 7장 50절의 '니코데모가 그들에게 말하였다'에서 '말하였다'로 번역된 '레게이'(legei; asked)는 '레고'(lego)의 3인칭 단수 현재 시제로서 그의 등장이 극적이었음을 나타낸다.
그 이유는 요한 복음 7장 45절의 '돌아오자', '물었다' 그리고 7장 46절의 '대답하자'가 모두 부정 과거형으로 나오는 반면에, 여기 '말하였다'만 현재형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이것은 니코데모의 말이 당국자들로서는 예상치 못한 일이었으며, 그 어조가 매우 적극적이고 반복적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레고'(lego)라는 단어는 독자들로 하여금 니코데모가 말했다는 사실보다는 그 말의 내용에 관심을 집중하게 한다.
'그들'에 해당하는 '아우투스'(autous; them)는 스스로 의롭다고 자신하여 다른 사람들을 업신여기는 자들(루카18,9)을 가리킨다.
니코데모는 무조건 예수님께 대해 적대적으로 대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의 태도가 옳지 못하다고 판단했기에, 용기를 내어 그 부당성을 지적했다. 니코데모는 불의를 보고서도 자신에게 돌아올 이해 득실을 따져서 가만히 침묵하는 그런 자는 아니었다.
한편 요한 복음 7장 51절에서 니코데모는 율법이 사람을 판결하는 원칙을 당국자들에게 상기시키고 있다.
니코데모가 여기서 변호하고 있는 대상인 '그 사람'에 해당하는 '톤 안트로폰' (ton anthropon; the man)은 'a man'이나 'the man'으로 영역된다. 'a man'은 예수님이 아닌 다른 사람도 그 대상이 될 수 있는 반면에, 'the man'은 그 대상이 예수님께 국한된다는 차이가 있다.
여기서 니코데모는 산헤드린 최고 의회가 이미 논의를 마친, 예수님을 제거하는 문제에 대해 항의의 뜻을 전달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the man'이 옳은 것 같다.
또한 '심판하게'에 해당하는 '크리네이'(krinei; judge; condemn)는 '판결하다', '단죄하다', '언도하다', '처벌하다' 등의 포괄적 의미를 지니는 법적 술어로 쓰였다.
니코데모는 여기서 율법이 판결하는 두 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하나는 말을 들어보는 것이고, 또 하나는 행위(하는 일)을 알아보는 것이다.
'본인의 말을 들어보고'는 먼저 당사자에게 변명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며, '하는 일을 알아보고'는 그가 무엇을 행하였는지 확인 절차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알아'로 번역된 '그노'(gno; know)는 '기노스코'(ginosko)의 부정 과거 가정법인데, 이 동사는 관찰과 경험에 의해서 아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어떤 사람을 판단하기 위해서는 관찰이라는 확인 절차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을 니코데모가 지적한 것이다.
율법에 정통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도 당연히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을 알고는 있었겠지만, 이미 편견과 선입견 속에 사로잡혀 판단력을 상실한 그들에게 그의 제안은 무의미한 것이었다.
끝으로, 요한 복음 7장 52절의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라는 질문은 이미 니코데모가 갈릴래아 출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전제하고 있지만, 동시에 니코데모를 예수님을 지지하는 무리와 동등하게 취급하여 비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들은 진실을 말했던 니코데모를 무시해 버리고, 예수님을 변호하려는 그의 입을 막아 버리고 있다. 여기서 '예언자'를 나타내는 '프로페테스'(prophetes; prophet)에는 정관사 '호'(ho; the)가 붙어 있지 않다.
이것은 메시야와 동일시되는 신명기 18장 15절에 나오는 '나와(모세와) 같은 예언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의미의 예언자를 모두 통칭하는 것이다.
즉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메시야를 포함하여 그 어떤 예언자도 갈릴래아에서 나올 수 없다고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예언자 요나, 호세아, 나훔이 갈릴래아 출신이고, 아모스와 엘리야 및 엘리사도 갈릴래아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열왕14,25참조).
그러나 당시 바리사이들은 이러한 역사적 사실마저 왜곡할 정도로 지독한 지역적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 잡혀 있었기에, 진리를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성경에 메시아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그리고 다윗이 살았던 베들레헴에서 나온다고 하지 않았는가?”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성경과 율법의 전문가인 바리사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지식으로 논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지식과 논리는 그들의 권력이 되고, 그것으로만 모든 것을 판단합니다.
스스로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그들은 남의 가르침을 듣지도 않거니와, 자기 이론과 기존 방식을 뒤집는 계시를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수석 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은 성경에 관한 학자들이지만, 그 안에 담긴 삶의 진리, 곧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사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그분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빛과 생명의 주인이신 그분께서 자신을 드러내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그분의 빛을 볼 수 있도록 진지하고 심오한 열망만을 가질 뿐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미 가지고 있는 지식, 논리,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버리지 못한다면 이러한 열망마저 헛될 뿐입니다.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 예언자는 복음서의 예수님처럼 비록 암울하고 힘든 미래를 기다리고 있지만, 하느님의 손에 모든 것을 맡기고 하느님의 구원을 기다립니다. 참된 구원은 지식과 논리에 있지 않고,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