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화요일]벳자타 못가 병자치유 (요한5,1-16)

2016. 3. 8. 오전 5:15:51

글자


 

[사순 제4주간 화요일]벳자타 못가 병자치유 (요한5,1-16)

벳자타 못(THE POOL OF BETHESDA)


성전 오른쪽에서 흘러내리는 물이 강을 이루어 온갖 생명을 자라게 하는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는, 성전이 구원의 표상이요 이스라엘 백성의 삶의 중심임을 보여 준다.(에제 47,1-9.12)
그 무렵 천사가 1 나를 데리고 주님의 집 어귀로 돌아갔다. 이 주님의 집 정면은 동쪽으로 나 있었는데, 주님의 집 문지방 밑에서 물이 솟아 동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그 물은 주님의 집 오른쪽 밑에서, 제단 남쪽으로 흘러내려 갔다. 2 그는 또 나를 데리고 북쪽 대문으로 나가서, 밖을 돌아 동쪽 대문 밖으로 데려갔다. 거기에서 보니 물이 오른쪽에서 나오고 있었다.
3 그 사람이 동쪽으로 나가는데, 그의 손에는 줄자가 들려 있었다. 그가 천 암마를 재고서는 나에게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발목까지 찼다. 4 그가 또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무릎까지 찼다. 그가 다시 천 암마를 재고서는 물을 건너게 하였는데, 물이 허리까지 찼다. 5 그가 또 천 암마를 재었는데, 그곳은 건널 수 없는 강이 되어 있었다. 물이 불어서, 헤엄을 치기 전에는 건널 수 없었다. 6 그는 나에게 “사람의 아들아, 잘 보았느냐?” 하고서는, 나를 데리고 강가로 돌아갔다.
7 그가 나를 데리고 돌아갈 때에 보니, 강가 이쪽저쪽으로 수많은 나무가 있었다. 8 그가 나에게 말하였다.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9 그래서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닿는 곳마다 바닷물이 되살아나기 때문에, 고기도 아주 많이 생겨난다. 이렇게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
12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시편 46(45),2-3.5-6.8-9(◎ 8)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 하느님은 우리의 피신처, 우리의 힘. 어려울 때마다 늘 도와주셨네.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네. 땅이 뒤흔들린다 해도, 산들이 바다 깊이 빠진다 해도. ◎
○ 강물이 줄기줄기 하느님의 도성을, 지극히 높으신 분의 거룩한 거처를 즐겁게 하네. 하느님이 그 안에 계시니 흔들리지 않네. 하느님이 동틀 녘에 구해 주시네. ◎
○ 만군의 주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네. 야곱의 하느님이 우리의 산성이시네. 와서 보아라, 주님의 업적을, 이 세상에 이루신 놀라운 일을! ◎      


새로운 성전이신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예루살렘 ‘양 문’ 곁 벳자타 못가에서 서른여덟 해를 앓아누워 있던 병자를 고쳐 주시자, 유다인들은 안식일 규정을 어겼다고 예수님을 박해한다.(요한 5,1-16)
1 유다인들의 축제 때가 되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셨다.
2 예루살렘의 ‘양 문’ 곁에는 히브리 말로 벳자타라고 불리는 못이 있었다. 그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3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 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4)
5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 6 예수님께서 그가 누워 있는 것을 보시고 또 이미 오래 그렇게 지낸다는 것을 아시고는,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그에게 물으셨다.
7 그 병자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8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9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
그날은 안식일이었다. 10 그래서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그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다.
11 그가 “나를 건강하게 해 주신 그분께서 나에게,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셨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12 그들이 물었다.
“당신에게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한 사람이 누구요?” 13 그러나 병이 나은 이는 그분이 누구이신지 알지 못하였다. 그곳에 군중이 몰려 있어 예수님께서 몰래 자리를 뜨셨기 때문이다.
14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5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16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제1독서 (에제47,1-9.12)

 

"이 물은 동쪽 지역으로 나가,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들어간다. 이 물이 바다로 흘러들어 가면,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8)  

에제키엘서 47장 8절주님의 집(성소)에서 발원한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가서 그 바다를 살릴 것이라고 천사가 에제키엘에게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천사는 그냥 '물'이라고 하지 않고 '이 물'이라고 표현했다. 

'이 물'에 해당하는 '함마임 하엘레'(hammaim haelleh)에서정관사와 지시대명사가 결합된 '하엘레'(haelleh; these)와 더불어 '함마임'(hammaim; water)에도 정관사 '하'(ha)가 있다. 

이것은 사해 바다를 살릴 물이 에제키엘서 47장 1절에서 묘사된 주님의 집 (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이고, 또한 에제키엘서 49장 7절에서 묘사된 강가에 수많은 매우 질이 좋은 나무들을 만들어낸 물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천사가 강조하는 것은 단지 죽은 바다가 살아날 것이라는 기적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기적을 일으킨 그 물이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사실에도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이 물'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회복된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인 동시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거주할 땅을 하느님의 첫 창조와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의 축복을 모두 향유할 수 있는 낙원으로 탈바꿈시킬 물이라는 두 가지 사실이

함께 강조되어야 한다. 

또한 이러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드러내는 '이 물'하느님께서 백성들을 용서하시고, 백성들이 하느님을 떠나게 했던 모든 죄악으로부터 떠났음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하느님과 백성들의 관계를 회복시킬 것을 상징하는 '화해의 물'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또한 이 물은 백성들이 돌아와 하느님께서 주시는 먹기에 좋은 열매와 약재료가 될 만한 푸른 잎과 풍부한 고기(수자원)를 보장하는 축복의 물이요, 생명의 물이다. 

즉 에제키엘은 '이 물'축복과 풍요를 상징한다는 구약 성경의 일반적인 의미만 갖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공존하는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게 하는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이다. 

에제키엘 예언자가 강조한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인 의미를 갖는 '이 물'은 창세기 2장 9~17절에서 묘사된 에덴에서 발원하여 생명 나무를 비롯한 보기에 탐스럽고 먹기에 좋은 온갖 나무를 자라게 한, 첫 창조의 동산에서 흘러나온는 물의 개념과 관련된다. 

또한 에제키엘서에서 제시되는 '이 물'요한 묵시록 22장 1~5절에서 '새 예루살렘'에서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으로 표현된다. 

에제키엘서의 물하느님의 현존과 임재가 회복된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것처럼, 요한 묵시록의 물하느님과 어린 양의 어좌로부터 나와서 흘렀다.  

그리고 에제키엘서의 물이 강가에 무성하고 풍성한 나무를 자라게 한 것처럼, 요한 묵시록의 물강 이쪽 저쪽에서 생명 나무를 자라게 하고 다달이 열두번 열매를 맺고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이게 한다.  또한 이 생명수의 강이 흐르는 새 예루살렘에는 다시 저주가 없고, 하느님만이 영원토록 왕으로 다스리시는 온전한 하느님의 나라가 유지된다. 

요한 묵시록에서 에제키엘서의 '이 물'을 종말론적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물로 해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미 에제키엘서에서 사용된 '이 물' 하느님의 나라를 완성하는 물이라는 신학적 개념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에제키엘서의 '이 물'은 하느님과 관계의 회복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첫 창조사업을 회복하는 물이면서 동시에 재창조 사업을 완성하는,즉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나라를 이루는 물이다. 

에제키엘 예언자는 단지 옛 고향으로 돌아오는 정치적 해방이나 민족적 회복에만 관심을 가지고, 무너진 성전 건물을 다시 지어 옛 솔로몬 성전의 영광을 다시 이루려는 외형적 번영에만 마음을 기울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해서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이 물' 개념을 통해 새로운 메세지를 주는 것이다. 

하느님께서 앞으로 이루시고자 하시는 일은 단지 이스라엘 민족의 회복이나 외형적 발전과 성장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온 우주의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의 영광 회복과 그분을 신뢰하고 따르는 온 세상의 백성들로 하여금 하느님 나라의 풍요와 거움을 맛보고 체험하며 살도록 하는 하느님 나라의 건립에 있음을 알리고 있다. 

'아라바로 내려가서 바다로 간다' 

에제키엘서 47장 1~5절은 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일반 성인(成人)의 키를 훨씬 넘길 정도록 깊고 넓은 강을 이루었다는 내용이었다.  에제키엘서 47장 8절그 물이 동쪽으로 계속 흘러가 아라바를 지나 사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아라바'(arabah; 구약에서 평지, 사막, 나룻터로 번역)는  이스라엘의 땅 중에서 남북 방향으로 가로질러 형성되어 있는 저지대가리키는 표현으로 볼 수 있다. 아라바는 남북으로 가늘고 길게 뻗은 모양을 하며 60% 이상이 지중해 해면보다 더 낮은 극저지대를 형성하였다.

예루살렘의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흘러나온 물은 자연스럽게 고지대인 서쪽의 예루살렘에서 저지대인 동쪽의 요르단 계곡 쪽으로 흘러갔을 것이고, 다시 사해 인근의 아라바 저지대를 지나 사해 바다로 흘러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그 바닷물이 되살아난다' 

에제키엘서 47장 8절의 상반절주님의 집(성소)에서 흘러나온 물이 사해로 흘러 들어갈 것이라는 내용이고, 후반절 바다로 흘러 들어간 물로 인해 그 바다에 어떤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한편 '되살아난다' 해당하는 '웨니르페우'(wenirpheu)원형 '라파'(rapha)'고치다' 혹은 '치료하다'의 의미이다. 특히 '라파'창세기 20장 17절에서 아비멜렉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취했다가 그의 가문의 대가 끊어질 위기에 놓였는데, 아브라함이 그를 위해 기도한 뒤에 아비멜렉 집안의 모든 태가 열려 다시 자녀를 낳을 수 있도록 '고쳐 주었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따라서 에제키엘서 47장 8절은 죽은 바다가 되살아났다는, 즉 무생물이 생물이 되었다는 뜻으로 번역하기 보다는, 생명체가 잉태되거나 번식되지 못하는 바다가 생명이 살 수 있는 바다로 고침을 받았다는 의미로 번역되어야 한다. '라파'(rapha)의 이런 의미를 살려 본문을 의역하면, '그러자 그 물이 고침을 받아 생물이 살게 되었다'가 된다.  

주님의 집(성소)으로부터 나온 물이, 염분이 많아 생물이 도저히 살 수 없었던 죽음의 바다를 고쳐서, 생물이 살 수 있는 생명의 바다로 변화시킨 것이다. 여기서 요한 복음 4장 13~14절의 말씀이 떠오른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복음 (요한5,1-16)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14ㄴ)

병의 치유를 받은 사람이 성전에 들어간 것은 하느님께 기도하며 감사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성전에서 예수님을 만나게 되었다.

요한 복음 5장 14절의 '만나시자'에 해당하는 '휴리스케이'(heuriskei; found)3인칭 현재 능동태인데, 이 동사의 주체인 예수님께서 의도적으로 그 사람을 찾아가 만났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만나신 이유는 주님께서 그에게 자신을 비로소 나타내시고, 그 사람에게 다시 죄를 짓지 말도록 경고하시기 위해서 일 것이다. 이것은 그 사람이 38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병으로 고생하게 된 근본 원인이 바로 죄였음을 알게 한다.

'다시는 ~마라'에 해당하는 '메케티'(meketi; no more)는  '이제는~아니'(no longer), '이제부터는~아니'(not from now on) 라는 뜻인데, 여기서는 명령법과 함께 쓰여 금지를 나타낸다. 

또한 '죄를 짓지'로 번역된 '하마르타네'(hamartane; sin)는  '하마르타노'(hamartano)현재 명령형이며, 희랍어에서 현재형은 동작의 반복이나 계속을 나타낸다. 말하자면, 이제부터는 죄를 짓는 일을 계속하거나 반복하지 말라는 뜻이다. 

원래 '하마르타노'(hamartano)동사의 기본 뜻은 '과녁을 맞히지 못하다'인데,  하느님께서 정하신 기준을 어긴 것을 가리키는데 쓰인다. 여기에 해당하는 히브리어는 '하타'(hata)인데, '하마르타노'(hamartano)와  마찬가지로, 사람이 행위에 있어서 하느님께서 제시하신 목적 혹은 표준을 놓쳐버리는 것을 말한다. 

한편,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38년동안 앓아오던 병을 치유받은 사람에게 하신 것은 과거의 죄는 용서받았으니, 앞으로 죄를 짓지 말라는 뜻도 포함되어 있다. 그가 만일 죄짓는 일을 반복한다면, 더 나쁜 일이 생길 수 있음을 경고받았다. 여기서 '더 나쁜 일'로 번역된 '케이론~티'(cheiron~ti) '더 나쁜 어떤 것', '더 못한 어떤 것'을 가리킨다.  38년동안 그를 지배하던 질병보다 더한 질병이나 어떤 더 나쁜 상태가 될 수 있음에 대한 경고이다.



오늘의 묵상

벳자타 연못에서 예수님께서 병자를 치유해 주십니다. 그 연못에서 물이 출렁이면, 처음으로 그 물에 뛰어든 사람이 은혜를 입는다는 연못입니다. 그러나 그 병자는 앓아누워 있었고, 물이 출렁거릴 때 그를 도와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 모두들 자신의 치유에만 관심이 있었지, 정작 치유가 절실한 병자를 돌볼 겨를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는 절대적인 신앙을 보여 줍니다.
여기서 예수님과 유다인들 사이에 안식일의 개념에 대한 논쟁이 일어납니다. 유다인들은 활동하시는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내는 기적 사건보다도 예수님을 고발하려는 절대적 도구로 율법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율법이 하느님을 향한, 그리고 인간의 선을 향한 도구일 뿐입니다. 따라서 안식일에도 병자를 치유해 주시고, 그 병자에게 그에게 일어난 기적을 드러내시려고 자신의 침대를 가지고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적인 개념은 사람에 대하여 냉정함만을 드러내고 있으며, 이로 인해 그 병자에게는 “사람이 없습니다.”
생명과 치유의 원천인 벳자타 연못의 물도, 구원의 도구인 율법도 이기적으로 경쟁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죽음의 문화를 대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모든 이의, 모든 이를 위한 존재이십니다.    
  


요한 복음. 제 5장 1절 - 47절 ::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송영진 모세 신부


요한복음에 있는,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치시다."를 보면,
벳자타 못가에 장애자들과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던 것으로 되어 있는데(요한 5,3),
예수님께서는 그 가운데 한 사람을 고쳐 주십니다.
다른 사람들은 그냥 놓아두고 왜 그 사람만 고쳐 주셨을까?
그 사람은 그곳에서 가장 오랫동안 누워 있었고(요한 5,5),
도와 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요한 5,7) 가장 딱한 처지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떻든 그 병자는 예수님을 몰랐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아니었고,
그래서 예수님께 아무것도 청하지 않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를 가엾게 여기시고 그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성경의 각주를 보면,
벳자타 못이 출렁거릴 때 가장 먼저 그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지 고쳤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생겼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7)."
라는 병자의 말입니다.
아마도 병자들과 장애자들은 서로 먼저 들어가려고 다투었을 것입니다.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가득 차 있는 모습입니다.
(그런 점에서 '벳자타 못'은 사람들의 병을 고쳐 주는 은총의 장소가 아니라,
사람들의 이기심만 드러내는 속된 곳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다(요한 5,8-9)."
예수님은 한 마디 말씀만으로 그의 병을 고쳐 주십니다.
'곧 건강하게 되어' 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시자마자 즉시 치유 기적이 일어났음을 나타냅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하신 말씀은, 일어나라는 것과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는 것,
그 두 가지입니다.
일어나라는 말씀은 병을 고쳐 주시는 말씀으로,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는 말씀은 새 인생을 향해서 나아가라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이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라고 말하면서 그를 꾸짖습니다(요한 5,10).
(안식일에 뭔가를 들고 다니는 것은 율법을 어기는 일이라는 것이
유대인들의 생각이었습니다.)
우리는 자세한 상황을 알 수 없지만, 복음 말씀의 내용만 놓고 보면,
병을 고친 것을 축하하면서 함께 기뻐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고,
율법을 어겼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만 있습니다.
이런 것이 바로 율법주의의 폐단입니다.


"그 뒤에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성전에서 만나시자 그에게 이르셨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요한 5,14)"
여기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라는 말씀은, 그가 죄 속에 있었음을 암시합니다.
그래서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그의 '몸의 병'만 고쳐 주신 것이 아니라,
그의 죄도 용서하셨음을 나타냅니다.
그의 죄가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전에 지은 죄'는 용서받았고,
이제 그가 할 일은 '앞으로 다시는' 죄를 짓지 않도록 노력하는 일입니다.


'더 나쁜 일'이라는 말은 죄 속에서 살다가 멸망하게 되는 일을 뜻합니다.
그러면 '덜 나쁜 일'은 무엇일까?
병에 걸려서 고생하는 것을 '덜 나쁜 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누구에게나 병을 앓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고 나쁜 일인데,
그래도 심판을 받고 멸망하는 것보다는 덜 나쁜 일입니다.


'좋은 일'은 신앙생활을 제대로 해서 구원을 받고 하늘나라에 들어가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일입니다.
그런데 '좋은 일'은 가장 좋은 일, 덜 좋은 일 등으로 구분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는 일 외에는 전부 다 '나쁜 일'입니다.


"그 사람은 물러가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유다인들에게 알렸다.
그리하여 유다인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그러한 일을 하셨다고 하여,
그분을 박해하기 시작하였다(요한 5,15-16)."
여기서 "자기를 건강하게 만들어 주신 분은 예수님이시라고" 라는 말은,
"자기가 안식일 율법을 어기게 된 것은 예수님 때문이라고" 라는 뜻입니다.
이것은 책임 전가이고, 배은망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더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어쩌면 그는 안식일 율법을 어기는 것을 '더 나쁜 일'로 생각했던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 사람도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었던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떤 눈먼 이를 고쳐 주셨을 때,
바리사이들은 "예수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으니 죄인이고,
죄인이 한 일이니 기적이 아니다." 라고 주장했습니다(요한 9,16).
그러나 눈을 뜨게 된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을 들어 주지 않으신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 그분이 하느님에게서 오지 않으셨으면
아무것도 하실 수 없었을 것입니다(요한 9,31-33)." 라고 반박했습니다.
이것은 '벳자타 못 가의 병자'의 태도와 완전히 반대되는 태도입니다.


'벳자타 못 가의 병자'는 안식일 율법을 어기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가 건강해졌다는 사실 자체도 부정하고 싶었던 것일까?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몰랐기 때문에 그랬을 것이라고 해도,
아무 조건 없이 받은 사랑과 자비를 그렇게 배신할 수 있을까?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의 이름도 모르고 있다가(요한 5,13)
나중에 알게 되자 바로 유대인들에게 가서 밀고했습니다.
'생명의 은인'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이해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는 예수님께 이름을 물어 볼 생각도 안 했던 것 같은데,
이것은 그가 자기 자신만 생각하는 이기심을 버리지 않았음을 나타냅니다.
(이렇게 자기만 생각하는 이기심은 '영혼의 병'입니다.
율법주의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영혼이 병든 상태입니다.)
'몸의 병'은 예수님께서 고쳐 주셨지만,
'영혼의 병'을 고치는 것은 그 자신이 스스로 노력해야 하는 일입니다.
그는 몸만 건강해지고 영혼은 여전히 병든 상태로 남아 있습니다.

------------------------------------------

(매일미사 책 ‘오늘의 묵상’을 보면,
“이 병자는 예수님의 말씀에 온전히 의탁하는 절대적인 신앙을 보여 줍니다.”
라는 말이 있는데,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해석입니다.
그 병자에게는 예수님에 대한 신앙이 전혀 없었습니다.
율법주의적인 태도와 이기심만 보여 주었을 뿐입니다.)
-----------------------------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예수님을 믿게 하는 증언 (요한 5,31-47)16.03.10조회 51[사순 제4주간 수요일]심판 (요한 5,17-30)16.03.08조회 59[사순 제4주간 화요일]벳자타 못가 병자치유 (요한5,1-16)16.03.08조회 46[사순 제3주간 토요일]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루카 18,9-14)16.03.05조회 101[사순 제3주간 금요일]하느님 사랑 (마르 12,28ㄴ-34)16.03.04조회 457[사순 제3주간 목요일] 벙어리 마귀 (루카 11,14-23)16.03.03조회 92[사순 제3주간 수요일] 율법의 완성 (마태 5,17-19)16.03.02조회 50[사순 제3주간 화요일]용서 (마태 18,21-35)16.03.01조회 46[사순 제3주간 월요일] 믿음으로 (루카 4,24ㄴ-30)16.02.29조회 77[사순 제2주간 목요일]부자와 거지 라자로 (루카 16,19-31)16.02.24조회 76[사순 제2주간 수요일] 그래서는 안 된다 (마태 20,17-28)16.02.24조회 106[사순 제1주간 수요일] 요나의 설교 (루카 11,29-32)16.02.17조회 48[(자) 사순 제1주간 화요일] 주님의 기도 (마태 6,7-15)16.02.16조회 410[(자) 사순 제1주간 월요일] 최후의 심판 (마태 25,31-46)16.02.15조회 430[재의 예식 다음 토요일] 나를 따르라 (루카 5,27-32)16.02.13조회 364[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단식 (마태 9,14-15)16.02.12조회 90[(자) 재의 예식 다음 목요일] 제 십자가를 지고 (루카 9,22-25)16.02.11조회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