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 사도는 예루살렘에 가서 야고보 장로의 요청을 따라 제사가 포함된 나실인의 정결예식을 행했습니다. 어떻게 그런 행동이 그에게 가능하였을까? 성경의 흐름상으로 볼 때 그런 행동에 대해 아무런 제재가 없으며 잘못되었다는 평가도 뒤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잘못된 것으로 여기지 않으셨다는 뜻입니다. 왜 그럴까요?
성경은 언약의 책입니다. 구약은 옛 언약, 신약은 새 언약이라는 뜻입니다. 언약이란 모세 시대에 아주 일상적인 용어인데, 상호동맹입니다. 강자와 약자, 강대국과 약소국의 언약은 종주권 언약이라고 불리고 강자와 강자, 강대국과 강대국 또는 약자와 약자, 약소국과 약소국과의 언약은 동등 언약이라 불립니다. 언약은 언약 체결의 역사적 배경이나 근거, 지켜야 할 조항, 지킬 때에 뒤따르는 약속과 지키지 않을 때에 뒤따르는 대가 등을 내용으로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사람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 그 방식이 언약입니다. 언약은 자기 백성을 대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인 것입니다.
그 언약은 시대에 따라 변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타난 언약은 크게 아담 언약, 노아 언약, 아브라함 언약, 모세 언약, 포로 회복 언약,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언약이 그것입니다. 포로 회복 언약은 새 언약으로 불리며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언약은 그 새 언약을 완전하게 하신 것입니다. 일반적으로는 예수님을 통해 완성된 언약만을 새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하나님께서는 언약의 시대를 펼치심에 있어서 어떤 언약을 완전히 종결하고 난 후에 그 이후 언약을 시작하지 않으셨습니다. 이전 언약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 이후 언약을 출발시키시고 얼마의 기간이 지난 후에 이전 언약을 완전히 폐하시는 방식으로 역사하셨습니다. 그래서 언약의 어떤 시기에는 이전 언약과 이후 언약이 공존하는 기간이 생겨나게 됩니다. 이전 언약과 이후 언약이 겹쳐지는 기간입니다. 중첩입니다. 그래서 그 기간을 언약의 중첩기라고 부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와 사도들의 활동 시기는 이 중첩기에 해당됩니다. 모세 언약이 바탕인 된 포로 회복 언약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고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된 새 언약은 시작된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중첩이 아닌 언약의 시기와는 다른 몇 가지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이전 언약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기에 이전 언약이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언약에 속한 사람들은 이후 언약 안으로 들어옴으로 하나님과의 관계가 새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전 언약에서 이후 언약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이전 언약도 유효하고 이후 언약도 유효합니다.
또한 이전 언약을 거치지 않고 이후 언약으로 들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들은 이전 언약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기에 이전 언약이 전혀 유효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이전 언약을 요구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의 시계추를 되돌리려는 잘못된 행동입니다. 아주 심각한 범죄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있으면 바울 사도의 행동에 대해 바르게 평가할 수 있는 토양이 갖춰진 것입니다. 그 당대에 유대인들은 모세 언약을 토대로 한 포로 회복 언약 아래에 있었습니다. 그 언약에서 핵심적인 내용은 율법입니다. 조문으로 된 율법입니다. 그 언약이 완전히 종결되지 않았기에 율법 준수는 유효합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고보 장로가 수만 명의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율법에 열심이라고 말한 이유입니다.
그 당대에 교회는 유대인들로만 구성되지 않았습니다.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 곧 이방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은 옛 언약을 거쳐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은 새 언약의 복음을 듣고서 곧바로 새 언약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입니다. 그들에게는 옛 언약이 요구되지 않습니다. 곧 율법이 요구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에게 율법을 요구하는 것은 범죄 행위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천사라고 하더라도 저주를 받으리라고 선언하였던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으로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는 옛 언약도 유효하고 새 언약도 유효합니다. 이방인의 사도로 살았던 그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이 요구되지 않아야 함을 잘 알았고 그것을 위하여 싸웠습니다. 사도행전 15장에는 예루살렘 공의회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때에 논점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요구하여도 되는가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바울 사도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문제가 되지 않는 사안임을 너무나 잘 알았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 공의회의 결론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율법을 요구하여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만난 야고보 장로는 바울 사도가 유대인 그리스도들에게도 율법을 지키지 않아야 한다고 하는 말이 들린다면서 그 오해를 풀기 위해 정결 예식의 비용을 대라고 요구하였습니다. 중요한 요점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친다는 말이 들렸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유대인들과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율법을 지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이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가르친 적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해를 풀기 위해 야고보 장로의 요청을 따랐던 것입니다. 그는 유대인에게는 유대인과 같이, 이방인에게는 이방인과 같이 지내면서 유대인이든지 이방인이든지 예수가 그리스도이시며 주님이심을 증거하고자 하였다고 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경우는 이방인들을 유대인과 같이 만들려고 하였기에 바울 사도가 책망한 것입니다. 율법이 요구되지 않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식사하다가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이 온다는 이야기를 듣고 식사 자리에서 벗어나려고 한 것은 율법을 따라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대하는 것이었습니다. 율법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을 율법을 따라 대함이 그들을 유대인들로 만들려는 것과 같았던 것입니다.
성경이 바울 사도에 대해 편애하거나 그를 복음에 있어서 완전하기라도 한 사람인 것처럼 적고 있는가?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생각할 이유는 없습니다. 이차 선교 여행을 시작하면서 일차 때에 함께 했던 바나바와 헤어지게 됩니다. 일차 선교 여행 중도에 되돌아갔던 마가에 대한 견해 차이로. 이 사건에서 보면 바울 사도는 일 중심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와 달리 바나바는 사람 중심의 사람이었습니다. 신앙 인격적으로 바나바가 성숙하였고 바울 사도는 미숙하였습니다. 이런 부분이 그의 전 생애에 이 한 번뿐이라고 누가 단정할 수 있겠습니까?
그리고 그러한 미숙함이 있다고 해서 그의 삶에서 나타난 바르고 좋은 면을 약화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으며 그리해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현대 신학에 근거한 바울 사도에 대한 많은 평가들은 이 범주에 들어갑니다. 성경의 가르침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바르게 아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습니다.
박창진 목사 / 부천힘찬교회